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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2일 (일) 12:59 기준 최신판

  • 아르키메데스의 미분개념 에서 보았듯이, <회오리에 대하여 > 에서 원의 둘레와 같은 길이를 갖는 삼각형의 한변의 길이를 유도한 것은 Barrow-Newton의 미분 삼각형 과 개념적으로 다를 게 없다. 실제로 Barrow 는 아르키메데스를 공부하다가 이 개념을 생각해냈고 아르키메데스와 다른 증명을 포함해서 1675년 발표했다. 그 당시에는 무한소에 대한 고전적인 analysis 를 하기 위해서 아르키메데스를 공부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 < (물에) 떠다니는 물체들 > 에서 물 위의 떠다니는 물체의 평형을 다루는 아르키메데스의 연구는 19C 후반에 들어서야 러시아(다븨도프), 프랑스(듀펭) 수학자들이 발견한 정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근현대의 학자들이 metacenter 의 조건을 수식으로 얻어 내서 평형의 조건을 찾은 반면, 아르키메데스는 그런 몸체들이 균형에서 기울 때의 물리학적 움직임을 연구해서 얻었다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이것은 이 연구 분야에서 그가 순수한 물리학적 입장을 고수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더 일반적인 수학적 법칙을 얻는데 까지 나가지 못하고 보다는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문제만 해결하는데 그친다. 이런 측면은 수학적 형식 보다는 물리학적-역학적 방법을 적용한 아르키메데스의 성격을 드러내주고 있다.
  • < 프사미트(모래알 세는 사람) > 에서도 이런 물리학자적 태도는 드러난다.여기서 그가 찾아낸 태양의 지름을 나타내는 관찰자의 각의 값은 32도 55분 5초와 32도 27분 사이라고 지정했다. 이 값은 17세기가 될때 까지 유효했다. 상한값에서는 코페르니쿠스(1473 – 1543)가 얻는 값보다 낫다.
  • < 프사미트(모래알 세는 사람) > 는 그리스의 기수법에 대한 반성이 드러나 있다. 정확한 천문 예측을 위해서는 큰 수를 나타내야 하는데 그리스 기수법으로는 매우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빌로니아의 기수법 체계로 종속되어가게 했다. 2세기 초 '기초들(Elements) 14 권'을 썼다고 전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히프시클(Gipsikl')이 쓴 'Anaphorik' 에는 행성의 운동 속도가 등차수열 방식으로 나타내는 대목이 나오는 데 이것은 바빌로니아의 Kigink 방법을 따라 계산한 것으로 훗날 갈릴레이의 등가속도 개념을 떠 올리게 한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천문학자 히빠르쿠스(Gipparkh)는 바빌론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1년, 1월의 주기를 계산한다. 천문학에서 바빌로니아 방식이 점점 더 확대 되어 로마로 이어진다. 전쟁 기록에 달의 월식 계산한 사실이 나오고, 기원전 1 세기 경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ō -106 ~ -43) 의 저술을 보면 친구이자 천문/수학자였던 니기디우스 피굴은 이미 바빌로니아 계산법에 익숙했던 것으로 나오고,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65 ~ -8 ;Horace, 호라찌, 고라찌이) 의 '송시(ode)' 1,2 권에서도 그 흔적은 드러난다. 프톨레미우스에 오면 이제 바빌로니아의 60진법 분수는 천문학의 기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1, 12세기 비잔틴 수도사들에게도 남아 있었고, 그 이후 서 유럽으로 넘어가, minutie physicales(60진법 분수; 보통의 분수는 minutie vulgares)라 부르며 학문 용어로 계속 쓰였다. 18세기까지 주요 수단으로 쓰였고, 오늘날에는 시계 단위로 남았다.


아르키메데스 연구사

  • 아르키메데스와 아폴로니우스가 있을 때가 그리스 수학은 정점이었다. 그 이후 상황은 급변해서 그리스에서는 계산법이 유행하고 천문학의 시대로 넘어간다. 이미 < 프사미트(모래알 세는 사람) > 에서 볼 수 있듯, 아르키메데스 후기에도 이런 경향이 엿보인다. 그러면서 수학자로서의 아르키메데스는 잊혀져간다. 키케로가 시칠리아에서 일할 때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찾았으나 버려진 채 있는 원기둥 모양으로 겨우 찾았을 정도 였다. 키케로는 아르키메데스를 기술자이자 "수의 관계를 발견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 142권의 방대한 '로마사'를 남긴 리비우스(Titus Livius; -59~+17)도 '천문학자이자 기술자'로 썼다.
  • 다행히 그의 저작은 남아 전해진 듯 하다. +1C 의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그의 저작을 읽었고, 3C 말에는 파푸스가 아르키메데스를 연구하여 기록을 남겼다.
  • 그러나 6C 기에 상황은 많이 달라진 듯 하다. 6C 중반 소피아 성당을 건축한 이시도르(Isidore of Miletus[1])의 제자이자,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연구가인 유토키우스( Eutocius of Ascalon) 때는 < 평면 도형들의 평형, 또는 중력중심 >, <구와 원기둥 > 와, <원의 측정 > 극히 일부만 알고 있었다.
  • 9C 로 접어들면서, 마케도니아 왕국이 부흥할 때, 콘스탄티노플의 대학에서 6C 때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이때 알려진 것들이 15C 게오르기 왈레가 가지고 있었다던 필사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없어졌다) 그리고 1907년 발견된 콘스탄티노플 팔림프세스트가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아르키메데스 저작의 근간이 된다.
  • 아랍 문명에서 사정은 조금 나았다. 하란의 사비트 이븐 꾸르(836~901)는 <구와 원기둥 > 와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번역했다. 그는 아랍학자로서 드물게 평형의 역학적 문제를 연구했던 사람으로 그의 편역인 <소정리들을 담은 책 > , <원에 내접하는 7각형 작도 > 도 남아있다. 앞의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었고 중세 라틴어 번역본(Liber assumptorum)으로 1659년 나왔다. 뒤의 것은 가장 나중 발견되었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의 반다면체에 대한 연구가 들어있는 < 구에 외접하는 14면체 > 도 남겼다.
  • 1000년 경 카이로의 위대한 천문학자 알-하이탐은 '광학'이라는 저서를 썼다. 이 책은 케플러 이전 서유럽의 천문 필독서였다. 그 저작을 보면, 그가 아르키메데스의 적분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와 다른 방법들로 포물회전체의 조각의 부피를 알아냈다.[2] 그는 또한 포물회전체의 안쪽, 다시 말해 물레 가락 모양의 몸체의 부피가 실린더의 8/15라는 것도 알아냈고, 꾸르와 다른 방식으로, 정7각형을 원추 단면을 이용해 작도하는 방법를 보였다.
  • 서유럽으로 아르키메데스가 알려진 것은 1204년 십자군 원정의 콘스탄티노플 대학살 때다. 이때 필사본이 유럽으로 건너가고 이것을 나중에 게오르기 왈레가 소유한 것으로 보인다.
  • 첫 라틴어 번역은 1269년. 토마스 아퀴나스(Фома Аквинский)의 친구이자 프란체스코 수도사인 메르베케 출신 Vil'gelm 이 한 것으로 보인다[3]. 이것은 사라졌다가 1884년 바티칸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그리스 숫자 표기법까지 그대로 번역했는데, 내용은 이해를 못하고 번역한 것처러 보인다. 이 번역은 1907년 콘스탄티노플 팔림프세스트가 발견되기 전에 중요한 원천이었다. 그때까지는 < (물에) 떠다니는 물체들 > 는 이 번역본을 통해 알고 있었고 팔림프세스트가 발견 되고서야 그리스어 판본으로 2/3 이상을 알게 된 것이다.
  • 위의 번역본의 일부가 1503년 처음으로 베니스에서 출판된다. 그러나 주목 받지 못하였다. 타르탈리아가 충분히 파악해서 1543년, 1565년 '그리스어 번역본' 인 듯, 출판했다.
  • 1450년 경 야곱 (크레멘스키)이 두번째 라틴어 번역했고, 1468년 레기몬타누스(Regiomontanus)라는 별명을 가진 중요한 수학/천문학자인 Johannes Müller (쾨니흐스베르그 출신 1436~ 1476)이 이것을 옮겨 적어서 출판하기 위해 뉴렌베르크로 가져가지만 성사 못하고 죽었다.
  • 1544년 그리스어로 출판된다. 왈레의 필사본으로 부터. 이때부터 유럽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를 자주 읽었다.
  • 1558년 베니스서 라틴어 번역본이 나오고 이 번역본의 2판이 볼론에서 1565년 나온다. 이때, < (물에) 떠다니는 물체들 > 이 보태졌다. 번역 내용을 보면 이때는 이미 번역가들이 아르키메데스를 충분히 이해했다.
  • 1548년 메시니나의 마브로리코가 재번역을 했다. 그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고, 다른 성질까지 응용해서 탐구했다. < 평면 도형들의 평형, 또는 중력중심 > 부분에서 3차 도형의 중력 중심의 성질까지 연구한 것이다. 최초의 아르키메데스 응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1685년 되어야 출판되었다.
  • 1565년 코만디노가 "중력 중심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여기에는 마브로리코와 다른 방법으로 다양한 입체 도형 전체 또는 부분의 중력 중심을 찾고 있다. 이것은 자가 연구의 결과로 아르키메데스를 잇는 최초의 출판물로 본다.
  • 16C 말 ~ 17C. 중력 중심 연구가 활발해진다. 코만디노 류의 연구서들이 속속 나온다.
    • 갈릴레이도 '증명과 대담'의 부록으로 '피라미드의 중력 중심' 을 썼다. 아직까지 발견된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에는 피라미드의 중력 중심에 대한 결과는 없다.
    • 특히 주목을 받아야 할 사람은 루카 발레리오(Luka Valerio)다. 그는 '몸체의 중력중심에 대한 정리들'을 1604년 저술했는데 여기서 다룬 입체 도형은 4면체, 8면체, 3각 피라미드의 잘린 단면들을 다루고 있다. 그것도 대수학적 방법들을 쓰기 시작 하고 있다. 게다가 구의 부피도 오늘날 학교에서 배우는 정의 방식 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는 다음 시기로 넘어가기 직전의 연구자였다. 또 구의 잘린 부분, 피라디의 잘린 부분의 부피 밝히고, 여러 회전체, hyperbolic conoid 들의 중력 중심들까지 밝히고 있다. 1907년 < 에라스토테네스에게 보낸 기계학적 정리(에포드) > 가 발견되기 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낸 것으로 보인다.
    • '쟝 샤를 델 파일'은 1632년 작은 책을 냈는데 거기에는 최초로 원판의 여러 조각들의 중력중심을 다루고 있다.
  • 17C , 아르키메데스의 적분 방식과 유체 정력학(hydrostatics) 결과들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별로 높이 치지 않은 대신, 아리키메데스를 "신성한 아르키메데스"라고 칭송했다. 이때 갈릴레이는 무한소 연구를 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편지들과 대담과 증명의 서문을 봐도 알 수 있다. 그 이후 그의 제자들인 토리첼리카발리에리가 이어간다. 토리첼리는 포물선 호의 길이를 밝히고, 카발리에리는 1635년 '나누어지지 않는 것의 기하학' 을 발표한다.
    • 스테빈과 유겐스도 있다. 특히 유겐스는 < (물에) 떠다니는 물체들 > 연구를 이어갔다. (발표 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남아 있다.) 그리고 원의 둘레도 연구했다.
    • 케플러도 무한소에 대한 연구를 심화했다.
  • 비록 < 에라스토테네스에게 보낸 기계학적 정리(에포드) > 는 1907년에야 발견되지만, 이미 유겐스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곡선 도형의 사각형화(quadrature)' 방법은 충분히 밝혀냈다.
  • 그러나 아르키메데스의 '내접과 외접 다각형으로 양쪽에서 수렴하는 것의 수학적 엄격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오일러가 부분적으로 이해했고 적분법의 기초를 다지는 시기였던 19세기 들어와서야 제대로 이해했다.


  • 뉴튼, 라니프니츠의 일반적이고 강력한 미분-적분법이 나오면서 아르키메데스는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읽히지 않게 된다. 이때부터 수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 별로 안보고 고대 언어 연구자들이 전승함.
  • 바젤판 -> 그리스어판(리발투스 Rivaltus 또는 리보(Rivo); 류드비히 13세의 교사) -> 라틴어 번역 + (파리) -> 토렐리 (옥스포드, 1792) -> 덴마크 하이베르크(1880~1881) 3권으로. -> 하이베르크 2판 + 새로 발견된 < 에라스토테네스에게 보낸 기계학적 정리(에포드) > 포함 (1910 ~ 1913)-> 러시아 판 (새로운 발견 추가)


왜 고대 그리스에서는 무한소 분석을 발전시키지 않았을까?

어떤 이들은 고대의 특성으로 고요, 움직임 없음. 으로, 근현대를 '움직임, 변화(motion??)'로 규명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고대에 대한 오해. 당시 그리스의 학문적 경향을 보면,

  • 이오니아 학파는 작도를 중시하면서 측량, 계량화 (metric) 등한시 한 경향
  • 피타고라스 학파는 도형의 형태. 이때 도형은 unit 들이 (연속적continuum 으로) 퍼져있는 것.
  • 그때 기하학적 값이라는 개념은 '갯수' '수량'의 개념이었고 따라서 '변화'는 등한시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수와 다른 수를 비교하거나, 어떤 도형과 다른 도형을 비교해서 무엇이 더 크다 작다고 했을 뿐. 마치 무엇이 무엇보다 더 빨갛다, 더 무겁다,... 처럼. 그래서 이것은 질적인 개념이었지 양적인 개념일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수학이 다룰 일이 아니었다.
  • 14세기 들어와서야 질적 변화를 그림으로 나타내기 시작. 영국인 Suisset 의 저술 Calculator 가 최초인 듯.
  • 조금 뒤 프랑스의 Nikolai Oroem. "De latitudinibus formarum, De intensione et remissione formarum(질적인 것의 증가와 감소에 대해 )" 등장한다. 여기서 등속도 운동이 직사각형(길이latitudo는 변화하지 않는 uniformis )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서 변화없는 (uniformis) 라는 용어가 들어가 나중에 등속도 운동을 말할 때, motus uniformis (ravnomernoe dvizheinie) 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된다. 반면 같은 정도로 변화 ravnomerno-peremennoe izmenenie 는 uniforiter-difformis로 불리고 삼각형 사다리꼴로 나타냈다. 바로 여기서 variable value 개념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17세기 후반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렘의 이 저작은 수학적 발견은 심각한 것이 없지만, 질적 변화를 기하 도형으로 나타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을 담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슈이셋과 오렘이 그런 발견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Notes

  1. 그는 '기초들(Elements)' 15 권을 썼다는 말도 전한다. Through this act, these most important of writings have been preserved and passed on to future generations. Furthermore, he was also an able mathematician, to him we owe the T-square and string construction of a parabola and possibly also the apocryphal Book XV of Euclid's Elements.(Wikipedia 에서 인용)
  2. 이때 아랍 학자들에게는 < 원뿔 곡선체와 회전타원체 > 알려지지 않았다.
  3. 윌리엄 뫼르베케(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