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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3일 (화) 13:25 기준 최신판
머리말
이 책은 제가 번역한 ‘내 아이와 함께한 수학일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2편이나, 속편이라고나 할까요?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사건이 1 편에서 벌어지면 2편에서는 더 긴박감을 띠며 가다가 사건을 마무리 하는 게 보통입니다. 아니면 사건을 마무리하고 주인공은 새로운 사건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렇게보니, 이 책이 ‘수학일기’의 속편이라고 하기 어렵겠군요. ‘수학일기’는 5년 동안 지은이가 아이들과 수학으로 만난 기록입니다. 연대기 순으로 만남을 기록했고 동아리 이야기며 수업을 설계한 이야며 어린이 수학 교육ㅇ 데해나 사색을 중간중간 채워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수학일기가 역사 기록이라면 이 책은 역사를 논하는 해설서이자 새시대를 꿈꾸는 소설인 성격이 있습니다. 너무 거창하게 말했나요. 저는 그 책을 번역하면서 줄일 수 있는 한 줄인다고 생각했는데 역주를 235개나 넣은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꼭 달아야할 역주를 못단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어린이 수학이라고 하지만 숫자를 익히는 훈련도 없고 덧셈 곱셈 알고리듬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라 어른들도 ‘이게 무엇이지?’ ‘왜 그렇게 되지?’ 갸우뚱 거리게 만드는 대목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내밉니다. 또 ‘아빠는 무슨 생까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를 것일까? 이 수업은 지난 수업과 어떻게 이어지나?’ 궁금한 부분도 이싸고 ‘왜 아이는 이렇게 생각할까?’ 라는 질문도 듭니다.
수학일기를 읽고 정말로 동아리를 만들어 내 아이와 함께할 부모나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이 수학하기를구현하고 싶은 교사께서 궁금해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번역자인 제가 거기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달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사실 그런 질문에 답하지 않고도 ‘수학일기’ 만으로 어린이와 함께 수학하기를 하는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알고 나면 더 낫겠다 싶었습니다. 배경을 풀어서 알면 아이와 대화는 나누는 데도 더 여유가 생길테고 내 방식으로 응용해서 변화를 줄 수 있고 새로운 수업을 설계할 수도 있을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책은 수학 일기의 해설판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이렇게 수학으로 어린이와 만나며 기록을 남기고 싶었는데 못그랬습니다.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고 읽으면서 마치 제가 그 자리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수학일기 지은이와 완전히 겹칠 수는 없었습니다. 역사 사건의 주인공에 감정이입이 되면서도 그것이 나와 완전히 겹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랄까요. 또는 커피도 아라비카와 로부스타 종으로 크게 나뉘지만, 토양 기후 노동 기술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인 것과 비슷하달까요, 어쨌는 저는 21세기 초입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나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번역을 하는 동안 저는 ‘이렇게 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이렇게 바꿔서 해보면 아이들이 어떻게 답할까?’ 라는 호기심이 발동했고 새로운 구상도 잇따라 나왔습니다. 그래서 수학일기를 더 꼼꼼히 거듭 보았고 어린이를 알기 위해 책을 골라 읽고 수학을 알기 위해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수학 일기를 번역하면서 자는 그 ‘역사 기록’과 ‘사색’에 뿌리를 두고 여러 길이 나올 수 있겠다 싶었고 기왕이면 세상에 모든 동아리마다 저마다의 변주가 일어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수학 일기의 변주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근사하게 수학일기를 주제로한 변주곡이라고 불러볼까요.
또한 이 책은 유아 양육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젖은 언제 떼는 게 좋은지, 이유식은 무엇이 좋은지와 같은 구체적인 답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묻지도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 책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메뉴얼도 아닙니다. 메뉴얼을 갖고 따라하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으면 참 편할 텐데, 만약 어린이에 대해서 메뉴얼을 따라 적용하는 건 아이를 지극히 수동적인 인간으로 다루는 것과 같지 않을까 겁이 납니다. 그것은 어린이를 어른이 쓰면 쓰는대로 내용이 채워지는 빈칠판이라고 여기면서 어린이를 무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것보다는 어린이와 놀이하는 규칙, 수학으로 대화할거리라고 보면 됩니다.
이렇게 써놓고보니 결국 이 책은 수학일기의 해설, 재편집, 보완편이라고 보는게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수학 일기 없이 읽을 수 없는 책이냐면 절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먼저 수학 일기를 보기를 바랍니다. 그 실제 일어났던 기록을 보고 큰 느낌을 갖고 호기심을 일어나면 꼬박꼬박 물음표들로 바꾸어서 단단히 무장하고 이 책과 만나면 더 좋겠습니다.
이것을 구현하기 위해 저는 오래 엎치락뒤치락 해왔습니다. 번역할 때부터 지금까지 몇년동안 머릿 속에서 책을 몇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왔는데요, 마지막으로 제가 선택한 길은 이 길입니다.
먼저, 수학 일기를 바탕으로 어린이가 만날 수학 상황을 7개로 분류했습니다. 유치원에서 하는 교육과정, 다른 유아수학교육책들도 참고했습니다. 수학 이름을 기준으로 분류하면 수, 기하, 논리, 집합, 확률, 알고리듬이고, 거기에 잡동사니라는 이름으로 하나를 더 넣었습니다. 모두 수학 이름을 달고 있어서 낯선 분들이 많을텐데,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우리 삶과 동떨어진 이상한 것들은 아닙니다. 7 개로 분류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일 뿐입니다. 예를들어 수 상황은 기하, 논리, 집합과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빗대어 말하자면 여러 배우들이 주인공과 조연을 바꾸며 하는 연극이라고 볼 수도 있고 여러 악기가 한 곡을 연주하는데 주요 악기와 배경악기가 바뀌는 경우라고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게 7개로 분류하고 우리가 생활하고 생각하는 동안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어린이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까 유추했습니다. 아니 ‘감히 유추했다’고 쓰는 게 맞겠네요.
어린이 세계를 통해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발달심리학자들의 꿈은 하루 만이라도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가 어떻게 세계를 보고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 싶은 것이라고 하죠. 그렇게 오래 어린이 마음을 연구하는 탐구하는 학자들도 그렇고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에 아이를 낳고 기르는 부모들, 그리고 오랜 세월 어린이를 도맡아 보육하고 교육하는 유아 교사들도 섵불리 그런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무식이 용감이라고 저는 감히 그런 시도를 해본 것입니다.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어떤 수학상황을 해결하려는 어린이는 이러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게 아닐까 상상하는 것이 이어서 나오는 활동 과제들을 선별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다고 판단했을 따름입니다. 달리 말하면 수학과 어린이에 대해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하고 전진시키기 위해 무언가 발을 대야 했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하며 상황을 잘 드러낼 활동 과제를 서너개 뽑아 더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기왕 ‘감히 유추한’ 김에 이 부분은 더 만용을 부린 대목입니다. 이런 상황이 가능하겠지 하며 제 상상으로 대화를 만들기도 했거든요. 그러니까 활동 과제에 나오는 대화는 수학일기 같은 진짜 대화가 아니라 영화나 소설 같은 상상의 산물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니 너그럽게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것들은 심리학자들이 한 연구에 나온 대화와 수학 일기에서 뽑되 제 상상을 버무려 새롭게 요리했습니다.
물론 분류 상황을 7개가 아니라 더 늘릴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몇개를 통합해서 더 줄일 수도 있습니다. 수학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어린이 심리를 기준으로 분류 방식을 아예 바꿔볼 수도 있습니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황을 7 개로 뽑고 분류하면서 저는 엄격한 기준으로 저를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7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수학 일기를 해설하고, 더 나아가 수학에 낯선 분들과 수학에 대해, 어린이가 수학을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보았습니다. 거기까지가 1부 입니다.
거기서 2부가 시작됩니다. 2부는 1부에서 말한 가벼운 이론을 바탕으로 실제로 여행을 떠납니다. 실제로 할 수 있는 수업을 설계해본 것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수학 일기를 반복하고 계승하고 보완합니다. 여기도 상상하며 대화를 엮은 부분도 있지만 책의 분량을 생각해서 건조하게 수업을 나열하다시피 했습니다. 아이와 활동하는 어른과 어린이에 따라 그리고 동아리냐 1:1 이냐 교실수업이냐에 따라 워낙 많은 가능성이 있어서 차라리 활동틀만 제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읽기로만 치자면 더 건조하고 따분할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수학이라서 재미없는데 1부에 있던 논리성과 이야기가 빠졌기 때문인데 저는 여러분이 아이와 만나 활동하고 대화하면서 그 빈부분을 채워주시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업 설계는 1년 25회 정도로 1회에 40분쯤으로 잡았습니다. 시작하는 연령은 태어나서 4년 6개월 정도 자란 아이라고 가정했습니다. 1부에서한 이론 설명을 바탕으로 같은 활동을 변주할 수 있는 제안도 있으니 아이가 자꾸 졸라서 1년에 50회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해서 3년을 잡았습니다. 여기서 숫자 매긴 방식에 주목해주십시오. 왜 그런 숫자 매기기를 했는지 본문 0 장에서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린이와 수학을 왜 할까요?” 책을 쓰기 위해 처음 던진 질문이고 머리말 처음에 던져야할 질문을 머리말이 끝나는 지금에야 합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 많고 적음) 우선 수학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은 아닙니다. 수학일기를 읽고 이 책을 읽어서 앞으로 아이가 수학을 잘하게 만든다? 논리력을 발달시킨다? 그건 이 책의 목표가 아닙니다. 덤으로 그런 효과는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대화가 일상 언어 대화와 조금 다른 건 이성과 논리가 단순 명료하게 드러나는 대화라는 점이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아이의 지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요. 우리는 모두 한때 어린이였으니 우리 어린 시절을 이해하고 결국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어린이와 수학을 할까요? 지금까지 말한 것을 보면 호기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네요. 정말 그렇긴 합니다. 어린이는 세계를 어떻게 볼까요? 한번 들어 보고 육아 일기에 가끔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것도 덤으로 얻는 것일 뿐이네요. 어린이와 수학을 하는 이유는 세계를 이해할 체계있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데 있습니다. 재미있는 놀이 바로 그것이 어린이 수학이니까요.
1부 : 어린이가 만나는 수학 상황
1장 : 수와 셈 상황
- '있다'와 '얼마만큼 있다'
수학, 수학... 수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뭐니? 라고 물으면 십중팔구 '수'라는 말이자동으로 떠오른다. 수학이 뭐라고 생각하니? 라고 중학생들에게 물으면 십중팔구 수학은 수를 탐구하는 거라고 답한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과학이 뭐냐고 물으면 과를 탐구하는 거라고는 안할텐데 수학에 대해서는 그렇게 답한다. 수학은 영어로 mathematics 인데 이말은 그리스 말 ...에 뿌리를 두고 있고, 말뿌리는 '탐구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말뿌리를 붙들고 억지로 해석해자면 mathematics 는 탐구하는 것을 탐구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리스 말에 뿌리를 둔 영어나 유럽사람들에게 물어도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은 수일 것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하나, 둘, 셋을 세고 덧셈을 하면서 시작했으니까.
(지마가 '아~ 아빠 또 수학하려고 하는구나!)
자, 수는 무엇일까? 하고 물어보면? 보통은 하나, 둘, 셋, ... 또는 1, 2, 3 ..이라고 답하기 시작한다. 매일보는 것이니까 그렇다. 게다가 우리가 아장아장 아가였던 시절부터 들어온 말이다. "자, 엄마 따라해봐. 하나, 둘, 셋.... 옳지 잘한다! " 하나둘셋하면서 손가륵을 꼽기도 하고 노래을 붙이기도 한다. 아이가 말을 알아들을 때 즈음에는 "몇살이니?" 라고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받는다. 한해 두해 커가면서 셀 수는 있는 수는 열을 넘어가고, 스물을 넘어가기 시작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수는 세도 세도 끝나지 않고 배우면 배울수록 점점 더 나온다. 그러다가, 그때가 언제부터인지 어디서 그런 생각이 생기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세어봤자 수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무한이라는 감각을 만든 것이다.
인류는 언제부터 그랬을까? 원시인은 안그랬을 것이다. 고대에는? 그때는 배웠다는 사람들 몇명만 비밀스레 수를 알고 다룰 줄 알았다. 그 상황은 근대에 국민 교육이 널리 퍼지기 전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 수가 수십억이 되고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 빠르게 이동하게 오늘날은 수의 시대라고 부를 만큼 지독하게 많이 보고 신다. 수를 안다는 것ㅇ느 그냥 안다는 것과 하늘과 땅차이로 다르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356일 12시간뒤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삶에 대한 태도는 확 달라질 것이다. 언젠가 백두산에 화산이 터진다고 아는 것과 100일 뒤 12시간 뒤에 터진다고 아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이처럼 막연하게 많다 적다, 빠르다 느리다, 길고 짧다 라고 아는 것과 얼마나 그런지 아는 것은 크게 다르다(얼마나 크게 다를까?) 이처럼 수를 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 안개처럼 희뿌연 것을 너머 세상을 정밀하고 분명하게 보게 한다. 그래서 아주 옛날에는 얼마나 큰 수까지를 아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지혜를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오늘날 처럼 복잡한 세계일수록 수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오늘날 어른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고 그래서 이제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에게 벌써 '하나, 둘, 셋, ... ' 하며 수 세기를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한다. 처음에는 본능이 시키는대로 그냥 따라하고 조금 지나면 외우고 말하는 좋아서 따라하고 나중에는 안다는 것에 스스로 재미를 붙이며 따라한다. 처음에는 서넛까지 가볍게 따라하고 조금 지나서는 일곱, 여덟까지 , 차근차근 아는 이름이 많아진다. 이때 도구가 나타나 생각을 돕는다. 도구 중 가장 쓸만한 도구는 손가락이다. 열 개까지는 감당할 수 있고 눈 앞에 놓고 보기 쉽고 손가락을 구부려 구분하기도 좋고 기억하기도 좋고 항상 나랑 함께 있으니 언제든 꺼내 쓸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손가락 도구에 의존한 어린이는 열을 넘길 때 한번 고비가 맞게 된다. 자꾸 헷갈린다. 발가락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작고 구부릴 수도 없고 눈에서 너무 멀리 있고 안타깝게도 대부분 양말이나 신발 안에 숨어 있어 손가락에 비하면 형편없는 도구다. 그러다보니 좋다고 하는 도구들이 나타난다. 고대에는 조약돌, 나무판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수막대 수그림들이 있는게 수를 세고 기억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도구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별반 다르지 않다. 도구는 힝상 곁에 있고 보기 좋고 구별하기 좋고 큰수까지 표현할 수 있으면 좋은 도구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주판은 이미 충분히 좋은 도구였다.
수 상황은 수세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어린이가 수세기를 겨우 터득할 즈음 어른은 둘과 셋을 더하라, 같은 이상한 것을 가르치려든다. 덧셈이라고 하면서. 이게 얼마나 쉬운 건지 아냐는 듯이 잘해봤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다. 하나, 둘, 셋, ... 처럼 수 하나하나를 외우는 것만 해도 쉽지 않다. 먼저 둘이 무언가? 둘은 사과 둘일 수도 있고, 엄마와 아빠일수도 있고, 까만 돌 두개 일수고 있고 이틀일수도 있다.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은 둘이 하나 보다는 많고, '또' 하나 보다는 하나가 많으며 '동시에' 셋 보다는 적고, 그것도 하나 적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순서'를 정해서 하나 둘 셋 넷으로 가야한다. 따라서 어린이는 하나, 둘, 셋, ... 을 하나하나 외우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하나둘셋넷... 을 덩어리로 다시 외우고 있어야 하고, 둘은 하나와 셋사이에 있다는 것을 바로 알고 '느껴야' 한다. 이게 쉬운 일 같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진, 드바이, 싼, 크파트, 삐찌, 섹트, 란파 라고 해서 여덟 개를 순서대로 외우고 무엇이 무엇 사이에 있는지 해보라. 어른은 이미 수라는 개념이 있으므로 이 문제는 기억 문제일 수 있지만 쉽지 않을텐데, 어린이는 아직 수개념 조차 없고 말도 능숙하지 않다. 그렇다면 둘 더하기 셋은 어떤가? 둘은 사과 두 개와 귤 셋을 더하기 일 수도 있고, 이틀과 나뭇잎 세장일수도 있다. 둘 더하기 셋이라는 진정한 수학 상황에서 백보 물러서서 사과 둘 더하기 사과 셋을 더하면 몇개인가라는 매우 특수하고 단순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린이는 둘에서 하나, 하나, 하나를 틀리지 않고 정확히 세 번 짚어야 하고 그때마다 셋, 넷, 다섯과 이름을 대응해야한다.
수는 크기와 순서라는 성질을 모두 갖는데 이것을 고루 알고 이름을 외우고 있어야 하고, 따로따로 이면서 한덩어리로 인식해야하고, 사과든 검은 돌이든 더할 무언가를 떠올려야 하고.. 휴! 그런데 어른은 뭐 이정도 가지고 그러냐는 듯이 쳐다본다. 왜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재미까지 없으면 정말 죽을 맛이다.
다행히 자연은 이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하고 있다. 말을 배우고 생각하고 수를 배울 때 어린이의 두뇌는 일생에서 가장 명석한 시기다. 게다가 어린이는 왠만큼 어려운 정도를 재미있는 놀이로 생각해서 그 놀이에서 이기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이런 어린이다움이 그렇게 복잡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정말 경이롭기만 하다. 그래서 어른이 서두르지 않고 지레 짜증내지 않고 무섭게 눈을 부라리지 않고 실망하는 눈빛을 보이지만 않는다면 어린이는 언젠가 어떻게든 해낸다. 아이에 따라 조금 빠를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른이 그걸 중요하게 여기면 그때부터는 중요해진다.) 이 기간에 어린이가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게 되고, 그것이 재미있는 놀이 형태로 나오거나, 그게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고 쓸만한 도구가 곁에 있다면 이 복잡한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익혀버린다. 느린 시기가 있더라도 어느 순간이 되면 아주 옛날로 치면 엄청나게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했던 덧셈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해낸다. 뺄셈은 덧셈에 비해 매우 어려운 과정이지만 (둘 더하기 셋이 다섯이 된다는 것과, 셋에서 얼마를 더해서 다섯이 되느냐는 매우 어려운 심리 과정을 거치게 된다.) 덧셈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뺄셈을 익히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덧셈을 하는 과정이 손가락 꼽기나 사과 둘에 사과 셋을 더하기를 넘어서서 진짜 덧셈으로 받아들이려면 '거꾸로 생각하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지금까지 수세기와 덧셈으로 수 상황을 이야기 했지만, 여러분께 죄송스럽게도, 이것은 진정한 수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란 하나둘... 이고 그것을 차례로 외구고 덧셈까지 했으면 되었지 뭐가 더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게 수 상황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까지 상황은 모두 숫자 상황이었다. 숫자란 수를 나타내는 기호를 말한다. 수란 숫자로 나타나는 기호 너머, 숫자로 드러난 기호 이전에 있는 그 무엇이다. 추상 개념이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이 매우 미묘한 지점이다. 어린이는 2 와 3, 또는 둘과 셋이라는 기호를 가지고 논다. 2를 둘에 대응시키는 걸 알고 손가락 두개와 대응시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모두 눈에 보이는 기호고 어찌보면 그섯은 수를 드러내는 도구들이다. 그것으로 수를 다룰 수 있다. 여기서 숫자로 거기 있는 수를. 아이들이 수 개념이 없이 숫자를 가지고 노는 것은 팽이치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팽이를 돌리고 계속 돌리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한다고 몸으로 익히듯이 숫자를 더하려면 이렇게 이렇게 조작한다는 것을 머리로 익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수를 안다는 것은 그것과 다르다. 아주 조금 다르다. 그러나 만년 설산에 있는 크레바스가 아주 조금 벌어진 것 같지만, 잘못 디디면 끝없이 깊은 곳으로 추락하듯 수와 숫자 사이에도 크레바스가 있다.
바로 이 크레바스를 주목하고 그 성질을 치밀하게 탐구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대심리학자 쟝 피아제이다. 그는 이 어린이가 수와 숫자를 익히는 데에 크레바스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그것이 어디에 기원하며 어떤 개념들과 연결되어 있고 어떤 영향이 있는지 밝혔다. 1941년 출간한 '어린이의 수개념 발달' 이라는 두툼한 책이 바로 그 놀라운 풍경을 펼쳐보인 책이다. 이 소박한 제목을 가진 책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현대의 고전 중의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심리학에 한정지을 필요없이 사람을 이해하는 분야에서 수퍼 고전이라고 부를만하다. '수학일기'에도 이 책에 대한 언급이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수학일기' 에서 굳이 피아제나 이 책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여러 활동이 피아제가 한 실험을 다시 하면서 변주한 것들이다. 이 크레바스를 드러내는 가장 쉬운 예는 성냥 다섯개와 단추 다섯개를 나란히 놓고 어느 쪽이 많냐고 물어보면 같다고 하다가 단추를 조금 더 벌려서 넓게 해놓으면 단추가 많다고 하는 사실이다. 어린이가 다섯까지 아주 쉽게 셀 수 있어도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이가 수를 이해하는데 다만 '많다' '같다'라는 언어에 대한 정의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어지는 수많은 실험과 대화로 밝혀냈다. 문제는 수 였던 것이다. 숫자 도움을 받아서 수를 알긴 하지만, 숫자를 세고 어떤 수를 더할 줄 안다고 해서 수를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이유를 밝히는 이론을 세운다. 수 개념은 추상 개념이고 커가면서 차츰차츰 발달해간다. 어떤 아이는 조금 빨리 어떤 아이는 조금 즈게. 그러나 누구든 스스로 발달해내고 반드시 몇 단계를 거쳐서 간다는 이론이다. 이 책은 어린이 더 나아가 인간의 인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일깨웠다.
2장 : 분류와 포함 상황
- 다르면서도 같다
분류가 잘못된 상황을 만나면 나는 가끔 어리둥절해진다. 도서관에서 분류에 따라 책을 보고 있는데 엉뚱한 책이 꽂혀 있는 경우가 그 중 하나다. 제목만 보고 잘못 분류되거나 시리즈인데 엉뚱한 곳에 따로 떨어져 나와 있는 책을 보면 그 책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책을 찾는 사람에게 불편한 것이야 검색 기능이 좋아졌으니 그렇다쳐도 마땅히 비슷한 것들과 함께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책은 외로워 보인다. 수학 공부하면서 더 그렇게 된 것 같다.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번씩 분류하고 분류되며 산다. 남녀 구분이 있고 기혼과 미혼 구분이 있고 소득별 구분이 있고 나이로도 분류한다. 최근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젊고 미혼이고 여성인 집단이 결정했다고 보는 분석도 있었다. 국가는 지역 단위로 나뉘고 사람을 만나서 어디 출신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전공이 무언지 묻는 건 예사다. 봄이 오면 겨울옷은 겨울옷 장롱에 모아 둔다. 조직은 부서로 분류되고 일은 세부과업에 따라 분류되어 사람과 대응한다. 정치가 A 씨는 B 정당에서 C 계보라고 분류한다. 역사는 시대와 장소와 사건으로 분류된다. 생물은 동물계와 식물계로 분류된다. 음식점도 분류되고 메뉴판도 분류되어 있다. 여기나 저기나 온통 분류투성이다.
분류는 본능이다. 잘 분류하면 좋다. 어떤 기준을 대든 분류하면 이 엄청나게 복잡한 세계를 쪼개서 볼 수 있다. 기준이 적당할수록 분류된 집단은 명쾌하게 성격을 드러낸다. 한 집단으로 분류된 것들끼리는 비슷한 성질이 있으니 눈에 안보이는 그 속성을 주목해서 볼 수 있다. 눈에 안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무기다. 분류가 잘 되면 이해하기도 쉽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어떻께 분류할까? 라는 문제를 가장 오래 생각했다. 같은 내용이라도 분류를 잘하면 독자들이 읽기 편하고 어린이 수학이라의 근본을 잘 드러낼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책은 목차로 분류가 드러난다. 그래서 이렇게하면 어떨까? 하면서 기준을 만들어 쪼개 본다. 그럴 듯 한데 무언가 어색하다. 저렇게 하면 될까? 하면서 그 기준으로 잘라 본다. 그것도 쓸만한데 그러면 어떤 주제는 어디에 넣어야할지 막막하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런 지지부진한 엎치락뒤치락 과정을 일단락 짓고 나서 분류를 하고 나면 휴! 저절로 안도하는 숨이 터져나오고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 대부분은 분류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분류란 무리짓기이다. 무리지어 나누려면 나누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어떤 속성을 정해서 그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쪽에 묶고 다른 것들은 저쪽에 모은다. 그렇게 크게 쪼개 놓은 것들을 정밀한 기준을 대어 다시 쪼갠다. 정보는 분류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분류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검색기라는 것이 등장하여 분류 방식에서 혁명을 가져왔고 분류에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수학하기에서 분류는 매우 중요하다. 아니 수학처럼 죽기살기로 분류에 매달리는 학문도 드물다. 수학은 수니 도형이니 함수 같은 안보이는 추상 대상을 다루다보니 그럴만도 하다.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을 떠올릴 위험을 낮추려고 정의를 엄격하게 한다. 내 책장에는 ‘정의란 무엇인가’ 라고 번역할만한 수학책도 꽂혀 있을 정도다. 여기서 정의는 옳으냐 그르냐를 말할 때 정의가 아니다. 뜻을 정함이라는 뜻을 가진 정의, 영어로 말하면 definition 이다. 경계를 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수학다운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하려고 드는 책이다.
아직 다 못읽었으니 그 이상 말하지 말고 수학에서 분류하는 사례를 보는 걸로 넘어가자. 수는 자연수와 자연수 아닌 것으로 분류된다. 직관이 이해하기 가장 나은 자연수만 보더라도 짝수와 홀수로 쪼개지기도 하고 소수prime number와 소수 아닌 것으로 나뉘기도 한다. 도형은 볼록 폐곡선과 아닌 것으로 나뉘고 볼록 폐곡선은 각으로 이루어진 것과 아닌 것으로 다시 나뉜다. 각으로 이루어진 도형은 다시 각의 개수로 3각형, 4각형, … 들로 나뉠 수 있다. 거기서 4각형만 해도 정사각형과 아닌 것, 또는 직각사각형인 것과 아닌 것, ...으로 또 잘게 나뉜다. 그런가하면 각으로 이루어진 도형은 자와 컴퍼스로 작도 가능한 것이냐 아니냐로 나뉘기도 한다. 수를 짝수와 홀수로 나누기처럼 간단한 분류하기도 있지만 소수와 소수아닌 것처럼 분류하기 아주 어려운 분류도 있다. 도형을 각의 개수로 분류하기는 쉽지만 작도 가능과 아닌 것으로 분류하기는 200년 전까지 초고난도 문제였다.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도 몇 개로 분류해서 볼 수도 있는데 이 중에는 분류 자체를 주제로 다루는 분야도 있다. 집합론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전체집합, 부분집합, 교집합, 합집합, 포함한다 같은 용어들이 자주 나오니 척 봐도 분류를 다루는 분야일 것 같다. 이 분야가 수학이라는 전체집합에서 탄생한지는 대략 150년 전쯤인데 그 때만해도 이 분야가 수학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아닌지 분류하는데만 해도 말들이 많아 애를 먹었으나 지금은 수학이라는 전체 안에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쓰는 용어도 이 분야에서 빌려오려고 한다. 이 책을 읽는 어른이 오해를 줄이고 간명하게 이해하였으면 하는 바램으로 썼을 뿐이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그 말을 가르치려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린이는 분류를 잘 못한다. 특징을 하나 정해서 이것과 저것으로 무리를 지어 나누는게 뭐가 어렵다고 그럴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세상 경험과 지식이 적은 어린이가 뭘 몰라서 그런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는데 사실 분류가 어려운 데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사과, 토마토, 둥근 송편, 귤, 해, 장미, 바늘이 도는 둥근 시계가 있다고 하자.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해 보겠니? 라고 어린이에게 물으면 어린이는 쉽게 분류할 수 있다. 경험으로 아니까(어떤 아이는 해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과일과 과일 아닌 것으로 분류하라면 그때는 과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이 영향을 준다. 여기까지는 언어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아이 스스로 두 무리로 나눠 보라면 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든 나누었다면 빨간 알사탕이나 빨갛게 색칠한 딸기 모양 나무 조각을 놓고 어디에 넣을까, 묻는다면? 침대, 쇼파, 의자를 놓고 두 분류로 나눠보라면? 파란 나무 조각 18개와 그것을 포함한 여러 나무 조각들 20개를 놓고 파란 나무 조각이 많은지 나무 조각이 많은지 묻는다면? (전체를 부분으로 나눠서 볼 줄 아는 아이도 전체가 부분 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인생을 더 살아야한다.)
수평으로 분류하기이든 전체와 부분으로 분류하기이든 분류하기 위해서는 감각으로 드러난 사물 너머에 있는 속성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추상 개념은 누구나 똑같이 보는 게 아니다. 속성이 하나인 것도 아니다. 사과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속성도 있고 빨갛다는 속성도 있고 과일이라는 속성도 있고 공모양이라는 속성도 있다. 그래도 그 정도는 괜찮은 편이다. 더 어려운 것이 도사리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다르면서도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물들은 저마다 겉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그 안에서 그 많은 속성 중 어떤 것을 정해서 같다고 보아야한다. 그럴려면 마음에 안경을 하나 만들어야 한다. 그나마 속성이 하나일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속성이 복합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분류해야할 사물의 개수가 늘어나면 기억하고 판단할 층이 점점 두터워진다. 또한 전체 A 가 부분 a, b, c, d 로 제대로 분류한다는 것은 부분 a, b, c, d 를 합했을 때 전체로서의 A 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전체를 부분으로 쪼개서 보는 순간 눈앞에서 전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분류했던 안경이자 칼인 속성도 눈에 안보인다. 부분은 부분 자체이면서 이미 안보이지만 변하지 않은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까지. 어느 정도 자라면 어린이는 이런 겹겹이 포개진 괴상망측한 층을 뚫고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 사물을 분류해낸다. 어린이가 충분히 어렸을 때 분류 못하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느 정도 자라나 스스로 무언가를 분류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지나온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물이나 사건, 시간까지도 나름대로 분류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울 따름이다.
정리정돈도 분류 문제이다. 어린이가 왜 정리정돈을 못하고 제멋대로 놓느냐고 해봐야 소용 없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며 어른은 어린이를 도울 수 밖에 없다. 어른들이 분류를 잘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어린이는 배우고 세상을 더 알게 되면서 분류하는 힘도 자라난다. 무엇보다 여러 분류 상황을 만나 좌충우돌하고 극복하면서 어린이는 스스로 분류하는 힘을 길러간다. 그 전에 분류 상황에 대해 더 알아 보자.
이를 통해서 어린이가 분류하는 힘이 얼마나 자라고 있는지, 그리고 어린이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분류 상황을 만나 어린이가 그 과제를 극복하면서 재미를 느끼고 그것을 보는 우리도 아이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3장 : 기하 상황
하루에도 열두번씩 우리는 기하를 한다. 수학 문제를 풀지 않지만 위와 아래 높고 낮음 넓고 좁음, … 그런 공간에 대한 말을 쓰고, 놓고 쌓고 세우고 줄이고 늘이고 찢고 이어붙이기, … 와 같이 공간을 재조직하는 행위를 한다. 세모와 네모, 둥근 것은 고개들어 어디를 보든 우리를 둘러 싸고 있다. 복잡한 사물도 그런 단순한 도형으로 바꿔서 보면 숨겨진 골격이 드러나곤 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라거나, ‘맛이 깊다, 이해가 깊다’라거나 ‘폭넓게 알고 있다’ 라거나 ‘둥글둥글 살자’라며 추상 수준에서 공간 용어를 쓴다.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도형이므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도형을 느끽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도형의 성질을 탐구하는 수학이 기하학이다. 기하(幾何)라는 말은 우리에게 낯선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2,3천년 전에 발달했던 Geometry는 땅(geo)과 측정(metry)이 결합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땅의 모양이나 넓이를 탐구하는데서 시작했다. 땅의 모양과 넓이를 알아야 땅을 배분하고 세금을 매기고 건물을 지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더 깊은 차원에서는 그것들이 별로 다른 문제가 아니고 별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이고 결국 공간과 도형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탐구하면서 기하학이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한자어권으로 수입되면서 발음이 비슷하여 기하라는 말을 얻게 된 것이다. Goemetry가 기하가 된 것은 발음만 비슷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도형의 성질을 탐구하는 문”제가 주로 길이나 넓이를 재는 문제로 되어 “얼마인가?” 라는 형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남아서 학교 수학에서도 대부분 길이, 넓이, 부피가 얼마인가를 묻는 질문이 기하학을 뒤덮고 있다.
얼마인가를 묻는 과목이 되다보니 기하학은 수와 계산 문제로 귀결되는 게 예사다. 뒤집어 말하면 수와 셈을 모르면 공간의 성질을 탐구할 수 없게 되버렸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을 통탄한 수학자들도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1백년 전 쯤 독일 대수학자 힐베르트이다. 그는 “수학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인기 없는 과목인 이유는 수학이 숫자를 다루고 계산을 계속하는 것이라는 미신에서 비롯되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간의 성질을 탐구하기 위해 꼭 계산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하학에는 자와 컴퍼스만 들고 정3각형을 작도하는 방법 찾기 같은 구성 문제도 있고 그렇게 구성한 것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진짜 정3각형’인가 증명하는 연역 추론 문제도 있고 부피를 가진 지구의 땅을 어떻게 하면 더 정확히 편평한 종이에 표시할 수 있을까 같은 디자인 문제도 있다.
이렇게 보니 공간 세계를 이해하고 우리의 이성을 훈련하고 공간을 머리 속에서 구성하는 데 기하학이 도움이 되긴 될 것 같다. 그러나 어린이와 수학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있는 우리에게는 곧바로 이런 질문이 하나 따라 나온다. “기하학은 어린이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은 아닌가?” 유아는 계산은 커녕 아직 수 개념도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으니 ‘얼마나’를 따지기 어렵고 연역 추론은 아직 말도 안되니 증명은 얼토당토 않고 자기가 느끼는 대로 보니 있는 그대로 구성하라는 것도 오로지 억지일 뿐이니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공간으로 이해하기와 공간을 구성하기는 비일비재한데 어린이는 기하 상황을 놀이로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선택해야한다. 선택 1. 뭐 그럴 수도 있지, 어린이가 무슨 기하는 기하야. 나중에 커서 학교 공부할 때 하면 돼. 지금은 포기하고 나중으로 미루자. 선택 2. 그래도 기하학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학문이고 공간에 대한 탐구잖아. 뇌가 형성되어가는 중요한 시기야. 운동 신경도 언어도 이만할 때 잘 해놓는 게 평생을 좌우해. 공간 지각력을 키우려면 지금부터 기하공부를 해야해.
우리는 지금 두 갈래 길에 섰다. 어떤 길로 가야할까? 결론부터 말씀드려서 나는 제 3의 길을 제안한다. 첫째,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학문이고 우리 일상에서 그렇게 다양한 형태로 만나는 학문이라면 그것은 매우 인간답고 자연스러운 행위일 게 틀림없다. 이 복잡한 세계 대신 단순한 도형을 조작하는 건 어린이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무언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니 지레 포기할 이유는 없고 억지로 끼워 넣기도 아니다. 그렇다면 공간 지각력 키우자는 깃발을 향해 요이, 땅~! 뛰어가야 할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사실 밖에 나가 놀고 집에 돌아오기 까지는 방향, 길이에 대한 공간 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도형으로 놀아본 적이 한번도 없는 아이도 자기도 모르게 위아래, 왼쪽 오른쪽을 알고 길고 짧은 높고 낮음 깊고 얕음을 가늠하며 집을 잘 찾아 온다. 작도라는 말도 들어본 적 없는 할머니도 새해가 되면 떡국떡을 절묘하게 등분한다. 기하 상황은 어디서나 만나지만 공간 지각력을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거기에 맞는 기하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은 억지스럽다.
그것보다는 이렇게 범위를 잡아보면 어떨까? 사물과 공간에 대한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어린이가 받아들일만한 수준에서 도형을 조작하고 어떤 조건을 주고 거기에 맞도록 도형을 구성하면서 세계를 머릿속에 모사하면서 상상하고 도형을 조작하면서 거기서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아!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그렇게 도형으로 놀면서 어린이가 공간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해한다. 바로 그것. 어린이를 이해하고 대화하며 다른 생각을 듣고 말하고 자극하기가 이 책의 목표 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목표를 구현하려면 어떻게 접근하는 게 좋을까? 어디서 실마리를 찾는 게 좋을까? 나는 그 실마리가 ‘기하학의 유아기’를 탐구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게 무슨 말인지, 지금부터 함께 보기로 하자.
4장 : 논리 상황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죽을까? 물으나마나 나는 숨쉴 것이다. 다시 정확히 말하면 어른들은 말할 것이다. 당연하지요, 앞에 있는 두문장이 참이라면 그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라도 답할 것이다.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런 논법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흔히들 3단 논법(syllogism)이라고 부르는 추론 방법이다. 그러나 어린이에게 묻는다면?
어린이는 좀 다를 것이다. 첫째, 어린이는 죽는다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어린이 혹시나 아무 생각없이, 사람은 모두 죽어, 아빠는 사람이야, 그러면 아빠는 죽을까? 라는 질문을 하면 답을 생각하기는 커녕 눈물을 줄줄 흘릴지 모른다. 어린이 눈으로는 그런 질문은 너무 처참한 질문이다. 내용을 처참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어린이는 ‘아빠는 안죽어!’ 라고 씩씩거리면 답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은 모두 숨을 쉰다. 소크라테스 아저씨는 사람이야. 그러면 소크라테스 아저씨는 숨을 쉴까, 라고 묻는다면? 또는 모든 새는 난다, 닭은 새야. 그러면 닭은 날까, 라고 묻는다면?
3단 논법은 모더스 포넌스(modus ponens)라는 추론 형태와 논리구조가 비슷하다. 비가 오면 빨간 장화를 신는다. 비가 온다. 이 두 문장이 참이면 ‘빨간 장화를 신는다’ 라는 추론을 하는 것이 모더스 포넌스이다. 내용은 버리고 골격만 뽑아보면 P 이면 Q 이다는 참이다. 그리고 P 는 참이다. 이 두 문장에서 P는 참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것을 말한다. 알고 있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유추할 때 매우 자주 쓰이는 논리 구조다. 이를 조금 바꾼 것도 있다. P 이면 Q 이다는 참이다. 그리고 Q는 거짓이다, 라는 두 사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P 가 거짓이다, 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논법이다. 이런 것은 모더스 톨런스(modus tollens)라고 하는 것으로 과학에서 전제인 P 를 무너뜨리는 전략으로 쓰는 논법이다. 이 주사를 맞기만 하면 절대로 감기에 안걸립니다, 광고를 볼 때, 감기 걸린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가 주사를 맞지 않았다고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과장 광고라고 혼을 내야한다. 백조는 하얗다를 진실로 믿고 있었는데 검은 백조가 나타나면 우리는 백조를 정의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이것은 실화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검은 백조가 나타났고 백조의 정의에서는 하얗다는 정의를 빼야했다)
- 칼 포퍼는 이것을 매우 중요한 과학하기 방법으로 보았다. 오류를 없애가기. 혹세무민을 줄여가기
이런 딱딱한 생각을 누가 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뼈대만 뽑아놓고 봐서 그렇지 실제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논법을 아주 자주 쓰고 있다. 그리고 수학에서는 유별나게 이런 문장이 많이 나오고 동시에 중요하다. 예를들어 리만 가설이 참이라면 골드바흐 가설은 참이다라는 문장을 누군가가 증명했다고 하자. 여기서 리만 가설이니 골드바흐 가설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좋다. 아니 모르면 더 좋다. 그렇더라도 모더스 포넌스를 받아들이는 어른이라면 리만 가설이 참이라는 것만 밝히면 골드바흐 가설이 참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논리구조에는 삼단논법, 모더스 포넌스, 모더스 톨런스만 있는 게 아니다. 더 복잡한 것도 있고 더 쉬운 것도 있다. 더 쉬워 보이는 논법으로 아이에게 한번 물어보자. 오늘 아저씨가 놀러오는데, 그 아저씨는 아빠보다 더 커. 엄마 보다 아빠가 크잖아. 그러면 그 아저씨가 엄마보다 클까, 라고 묻는다면? 어린이는 ‘당연하죠. 엄마 보다 아빠가 크고, 아빠 보다 아저씨가 더 크니까 당연히 엄마보다 그 아저씨가 크죠. 저를 뭘로 보고 그런 쉬운 질문을 하세요’ 라고 답할 것이라고 기대할지 모르지만 아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도 예시한 답은 너무 어른스럽지 않은가. 어린이에게 그와 같은 구조로 된 질문을 여러 형태로 변형하여 질문한 ‘수학일기’를 봐도 그 정도 추론을 하기까지 어린이는 충분히 자라야 한다. 일기를 쓴 아빠가 ‘내 아들 천재 아닐까’ 라고 놀랐던 지마마저도 어렸을 때는 그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한다. ‘수학 일기’에 등장한 아이들만 우연히 그랬을까? 아니다. 대심리학자 삐아제가 어린이의 수, 논리 개념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보기 위해 수많은 실험과 대화를 한 결과도 마찬가지다. 그런 추론을 받아들이려면 어린이는 충분히 자라야 한다. 그러면 스스로 논리 구조를 터득해간다.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현실과 다르게 ‘동생은 엄마보다 커, 그리고 엄마는 아빠보다 커, 그러면 동생이 아빠보다 클까?’라는 질문에도 올바르게 답한다. 내용을 떠나 논리 구조 자체를 터득한 증거다. 그때가 되면 참새는 새다. 새는 동물이다, 라는 사실로부터 참새는 동물이다라는 사실을 유추해서 알아낸다. 또, 아저씨는 해운대에 살아, 해운대는 부산에 있어, 라는 사실만 알아도 아저씨가 부산에 산다는 것도 안다. 이런 논리 구조를 이행성(transitiveness)라고 부른다. 알고 있는 사실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우쳐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논리구조이다.
- 길이가 다른 선분이 여러개 있을 때 가장 긴 것을 알아낼 때도 이행성은 중요한 역할한다. (유아와 기하, 33-34 참조)
수학의 언어는 매우 간결하다. 안 그러면 오해가 끼어들 틈을 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학 문장은 뼈대만 드러낸듯 건조하게 드러내기 십상이다. 멋스러움은 뒤로 미루고 논리를 분명하게 드려내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더라도 참거짓을 분명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학 공부가 논리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 뼈대에 살을 붙이고 옷을 입히고 치장을 해서 그렇지 사실은 우리 일상에서 하는 대화를 곰곰이 뜯어보면 언제 어디서든 이러 논리가 숨어 있다. 정치 토론장에서 법정에서 그리고 친구들 대화에서도 그렇고 논리 비틀기를 즐기는 개그맨도 흔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논리 구조에는 이행성이나 모더스 포넌스, 3단 논법 말고도 여럿 있다. 수학의 한분야인 수리논리에서는 지난 1백년 동안 그것을 꼼꼼히 연구하여 지금은 자동 증명 기계까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지난 50여년 동안 어떤 논리구조를 어린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하아온 연구를 보면 역시 어린이가 논리 구조를 유추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사실 두 개로 눈에 안보이는 사실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성의 힘을 상당히 키워야 할 뿐 아니라, 눈에 안보이는 사실 두 개로 전혀 낯선 새로운 사실을 유추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어린이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너머 세계를 파악해가기 위해서는 이런 논리 구조를 마음에 갖추고 유추를 반드시 터득해가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언제까지고 눈에 보는 사실만 믿게 될테니 지식이 얼마나 한정될 것인가.
이것을 훈련하면 더 일찍 터득할까? 그것은 답하기 민감한 문제다. 나는 그럴리 없다고 여기는 쪽이다. 문제 상황이니 지식 유형에 따라 더 일찍 터득할 수 있겠지만, 크게 봐서 논리 구조 자체는 때가 되어야 한다는 쪽이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왜 어린이에게 논리 훈련을 해야하느냐고 묻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논리 구조와 연관된 대화나 놀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어린이에게 성급하게 논리 훈련을 시키려는 의도는 아니다. 어린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린이와 올바로 대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어린이 생각에 갈등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덤으로 좋은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잘 기게 될 때, 일어서고, 잘 일어설 때 걷게 되고 걷는 것을 즐기다가 마침내 뛰며 기뻐하듯 처음에는 어색하게 받아들였던 논리 구조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머리 속에서 갖고 놀면서 새로운 논리 구조를 터득해 가는 것을 매우 즐겁게 여길 것이라고 믿는다.
5장 : 확률 상황
확률 상황
“오늘과 내일은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바람이 강하게 불겠읍니다. 내일은 저기압 영향을 받은 후 점차 벗어나겠습니다. 흐리고 비가 오다가 오후에 대부분 그치겠습니다. 오전에 비올 확률은 90%이며 “ 오후에 비올 확률은 30% 입니다.” 이번 주말 날씨 예보이다. 일요일에 나들이 하려던 사람은 이 예측을 보고 집에 누러 앉을 가능성이 크다. 기온이 얼마나 떨어질지 비가 올 확률은 얼마나 될지 예측하여 옷가게는 진열 상품을 바꿔 지나간느 사람들의 구미를 댕긴다. 김밥집 사장님은 비올 확률에 따라 단체 주문이 취소될 것을 대비하고 김밥 만들 재료를 어느 정도 맞춘다.
날씨가 하늘의 뜻이라 여기던 시대에서 이제는 날씨를 이용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이 예측에서 열쇳말은 확률이라는 낱말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의 정도라는 뜻을 가진 확률이 수학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400녀도 안되었으니 아직 젊은 축에 드는데 오늘날은 일상 생활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이 되었다. 일기 예측, 경제 분석, 선거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근래에는 야구 를 포함한 스포츠 중계에서 만난다. 복권을 살 때도 게임을 할 때도 버스를 기다릴 때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확률이라는 말이 맴돌고 있다. 바야흐로 확률의 시대라고 부를만 하다.
이렇게 된 건 세상이 충분히 복잡하고 인간은 충분히 무지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자료를 정확히 갖고 있고 어떤 일이 일어날 법칙을 수량단위까지 정확히 알고 있고 정보량이 얼마든 상관없이 눈깜짝할 사이에 처리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는 확률 같은 말이 아무 필요가 없다. 그는 어떤 일이 궁금하면 세상 모든 사건이 그려진 지도를 활짝 펼쳐놓고 볼 것이다. 그 일이 어디서 왔는지 그 일이 어디로 갈지 그에게는 모든 게 빤하다. 그는 우연이니 불확실성이니 하는 말을 모른다. 그에게 미래는 과거다.
이런 초월 존재를 일컬어 라플라스의 도깨비(Laplace’s Demon)라고도 한다. 확률론을 수학의 세계에 뿌리내리는데 일등공신인 프랑스 수학자 라플라스 이름을 땄다. 프랑스의 뉴튼이라는 칭송과 함께 간신배라는 모욕까지 함께 달고 다니는 라플라스가 2백 년 전 ‘철학하는 사람들을 위해’ 확률에 대한 책을 썼는데 거기 등장하는 가상의 존재이다. 거기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 대부분은 확률 문제일 따름이다. 엄밀하게 본다면 인간 지식 전체 체계가 확률과 연결되어 있다. 확률을 잘 알면 크게 유익하고 무시하면 크게 불리하다. 부디 권력자들이 관심을 갖길 바란다.” 그는 확률 이론을 터득해가면 인간은 세상에 감추어진 것들을 보다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로부터 2백 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 인간 앞에 있는 시간-공간의 두루마리는 둘둘 말려 있지만 “내일 비올 확률 90%”라는 말 속에는 그 두루마리가 찔끔 열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90% 의 뜻은 무언가? 가능한 모든 경우가 100개일 때, 비가 올 경우가 90개인 정도를 말한다. 3할 타자란 모두 100번 나올 때 안타를 30번 쯤은 치는 선수라는 말이다. 따라서 확률 현상을 이해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경우가 몇개나 되는지 개수를 정확히 셀 줄 알아야 한다. 가능한 모든 경우를 고려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는 똑똑하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모든 경우가 일어날 개수까지 안다면 그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서 생각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탐정은 발생한 사건에서 가능한 모든 경우를 상상하고 기업가는 기업이 닥친 수익과 위험의 가능한 경우를 모두 고려하고 정치가는 어떤 선택이 미칠 결과를 두루 검토한다.
경우의 개수를 찾는 문제가 비록 계산으로 귀결한다는 점에서 수학 문제이긴 해도 철학자의 지혜도 역사가의 정확성도, 물리학자의 능숙함도, 정치가의 신중함도 경우의 개수를 파악하지 못하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 말은 확률론을 탄생시킨 주역 중 한명인 야콥 베르눌리가 300여년 전에 쓴 <<추측기술>> 에서 했는데 그때보다 오늘날에 더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지금은 경제, 정치, 사회 현상이나 자연 현상을 알고자 할 때 확률 이론이 없으면 마치 아무 것도 안될 것 처럼 널리 퍼져있다.
확률론이 이렇게 중요하다보니 학교 수학에서도 확률 현상을 다룬다. 그러나 확률 현상을 몸에 익히기 보다는 주로 단순 계산 문제로 취급한다. 게다가 확률이라는 독특한 개념은 놔두고라도 가능한 경우를 따지는 계산만 해도 상당한 계산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고등 학교에 가서나 문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어른이라 주사위나 동전을 던져 보거나 주머니에서 공을 꺼내며 게임을 하면서 ‘확률 현상을 몸으로 느끼기’를 하지는 않는다. 확률 현상을 몸으로 느끼기 좋은 것이 게임이다. 게임을 하면서 어떤 일이 다른 일보다 가능성이 더 높다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래서 다음 선택에 그것을 고려해 넣고 그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몸으로 느끼는 것은 계산이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도 할 수 있다. <<수학일기>>에서 저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아직 덧셈도 잘 못하는 아이들에게 확률을 보여주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이 묘기를 되짚어 보며 우리도 확률이라는 광맥에서 재미있는 활동과 대화 주제를 캐보기로 하자.
거의 모든 게임에는 확률 현상이 숨어 있다. 그리고 게임은 인간 행위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다. 게임이론을 전공한 수학자들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게임은 인간 행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주고 있고 그 밑바닥에는 확률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가능한 모든 경우 중에서 특정한 일이 일어날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6장 : 알고리듬 상황
아가는 자면서 크고 어린이는 놀면서 큰다고들 한다. 아이는 놀이를 좋아하기도 하고 놀이는 아이가 삶을 이해하기 꼭 필요한지도 모른다. 세상은 너무 복잡해서 그것을 단순하게 만든 놀이를 통해 질서를 경험하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배우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놀이는 자연을 벗삼아 마구 뛰어노는 놀이도 있지만(물놀이) 보통은 규칙을 갖기 마련이다. 숨바꼭질, 술래잡기도 규칙이 있다. 나 자신을 벗어나면 세상에는 물리 법칙이 있어서 내 마음대로 안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더 나아가 타인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물리 법칙 말고도 사람들끼리 지켜야할 규칙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어린이가 어쩔 수 없이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감당할만한 규칙이면 규칙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더 나아가 규칙을 즐기고 규칙이 없으면 규칙을 만들어 논다.
규칙은 행위를 제약하는 요인이면서 동시에 행위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놀이 하나하나에서는 그 내용 하나하나를 터득하겠지만, 놀이와 놀이가 쌓여가면서 어떤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는다는 일반 법칙을 깨달아 갈 것 이다.
놀이 중에는 여럿이 모여 몸이 즐거운 놀이도 있고 머리가 즐거운 놀이도 있다. 어린이는 말을 배울 때는 말을 가지고 놀고 (예 2-5세) 손이 발달할 때는 도구를 갖고 놀고 머리가 클 때는 머리를 굴리는 놀이도 좋아하게 된다. 어린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실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누구나 놀이를 좋아한다. 머리를 굴리는 놀이도 판돈이 걸린 도박에서 가위바위보에 이르기까지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야하는 놀이도 있고 바둑이나 장기처럼 상대방의 이성을 꿰뚫어야 하는 놀이도 있다. 그처럼 함께 경쟁하면서 오는 즐거움이 없어도 하노이 탑쌓기, 스도쿠 처럼 혼자 머리를 써서 하는 놀이도 인기이다. 현대에는 컴퓨터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머리 쓰는 게임이 부쩍 늘었다.
여럿이 하든 혼자 하든 머리를 굴려야 하는 게임에서는 보통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되고, 그러니까 이렇게 하고’ 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규칙에 따라 예측하여 머리 속에 설계도를 그려가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몇단계 생각하는 것도 힘겹지만 차츰 간단한 경우는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하고 심사숙고할 상황에 생각을 집중한다. 이처럼 규칙에 따라 차근차근 절차를 만들어 어껀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알고리듬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정말로 알고리듬이 무엇이냐 상황에 맞는 가장 좋은 알고리듬은 무엇이냐, 알고리듬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느냐 같은 문제는 수학이나 알고리듬학에서 더 심각하게 여기는 질문이지만 그런 건 지금 우리에게는 모르는 게 약이다.
시작상태에서 규칙에 따라 한 단계 한 단계 절차를 거쳐 종료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알고리듬이라고 보면 머리를 굴리는 놀이는 대부분 알고리듬으로 나타난다. 겉으로는 그게 아닌 것 처럼 보여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래밍할 수 있고 마치 사람이랑 하는 것처럼 컴퓨터랑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프로그래밍해서 작동하는 컴퓨터이지만 컴퓨터는 딴생각을 안하고 알고리듬에 따라 집중해서 주어진 일만하다보니 지금은 왠만해서는 사람이 컴퓨터를 이기기 힘들어졌다. 님(Nim) 게임이 최초로 인간을 이겼고 복잡한 전략이 필요한 체스에서도 인간 체스왕이 컴퓨터에서 수치를 당했다.
사람은 직관이나 예감이니 믿음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지만 알고리듬 방식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일을 알고리듬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해 매우 숙련된 수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창의적인 곳에 생각을 집중하고 그 일은 거기에 따라 착착 해내면 되니 좋다. 현대 컴퓨터는 덧셈과 뺄셈은 물론이고 곱셈과 나눗셈, 더 나아가 미분과 적분까지도 처리해낸다. 그 말은 한때는 매우 창의적인 일이었던 계산들이 차츰차츰 알고리듬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게 지나쳐서 수학을 계산 알고리듬 배우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수학은 정해진 공식을 외우고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물론 우울한 오해다.
그게 더 확장되면 어린이도 수학을 할 때 알고리듬을 배우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기묘한 놀이나 기가막힌 비법을 생각해내서 곱셈 나눗셈 알고리듬을 가르치는 것이 어린이 수학이라고 생각하는 데 까지 나아간다. 물론 어린이는 워낙 영특하니 재미가 있으면 처리해낼 것이라고 믿는다. 알고리듬 방식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왠만한 미적분도 못해낼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학습은 오래 못간다고도 믿는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알고리듬 사고 방식은 지루해질 수 밖에 없다. 자칫 수학을 지루한 것, 싫은 것으로 할 위험도 크다.
자, 그렇다면 사람의 사고 방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알고리듬 방식을 제대로 경험하고 놀이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그 전에 답해야할 것은 어린이가 알고리듬 사고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다. 사실 알고리듬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른에게도 쉽지 않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나 공학을 하는 사람들은 매일 알고리듬을 적용해서 문제를 해결하지만 ‘규칙에 따라 차근차근해서 목표 상황까지 간다’ 는 알고리듬 사고는 생각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먼저 시작 상태와 규칙과 절차 그리고 종료 상태를 또박또박 분류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 일을 잘게 잘게 일의 단위로 쪼개서 생각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그 일을 ‘순서에 따라’ 배열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목표하는 상태에 이르기 위해 쪼개놓은 일을 직렬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고 병렬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확률에서 말했던 가능한 모든 경우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다된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 일이 마치 이미 일어난 일인 듯 머리 속에 설계도로 그려내야 한다. 어린이들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것 위주로 생각하는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고 단위 일로 쪼개고 그것을 순서대로 배치하고 머리 속으로 그 일의 결과를 그려내야 하다니.
이렇게 놓고보니 거의 불가능한 것을 시키려는 것 아니냐고 따질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일기’에서 우리는 실마리를 보았다. 아니 거기에는 실마리만 있는 게 아니라 매우 완성도 높은 형태로 대안이 제시되어 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일년 쯤 지나자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참여했던 어린이들은 재미있게 놀았다! 여기서는 그것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알고리듬 사고를 주인공으로 삼아 활동할 수 있는 놀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7장 : 뒤죽박죽
지금까지 6개 주제별로 수학 상황을 분류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서문에서 밝혔듯 이 분류가 어린이 수학을 포괄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어떤 개념도 홀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 한 개념 안에 여러 개념이 뒤섞이고 얽혀있다. 우리가 어떤 유형에 있는 놀이를 할 때, 어린이도 그렇게 복합해서 받아들일 것이고 마땅히 우리도 유형에 얽매이지 말고 질문하고 적극 들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어린이 지능은 더 고급스럽게 짜여갈 것이다. 수학 상황을 유형으로 나누어 어린이에게 유형별로 수학을 가르치기, 이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다만 수학 활동을 어린과 어린이가 함께 경험하려면 수업 설계를 해야하고 수업을 설계하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어떤 것은 전경으로 삼고 어떤 것은 배경으로 삼다보니 유형을 나눈 것일 뿐이다. 준비를 잘 할수록 혼돈의 늪에 빠질 위험을 줄이고 그래야 어린이는 질문을 똑똑히 보게 되고 그럴 때 비로소 탄탄한 질문을 딪고 생각을 펼쳐 나가리라 기대하면서 <<수학 일기>>와 다른 자료들을 바탕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유형 6개 아래에 세부 항목과 예제를 나눈 것도 그런 취지일 뿐, 어린이와 여러분이 만나는 상황에 따라 현실은 상상을 마구 뛰어넘을 것이다. 이제 여기 일곱째 유형을 제안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따로 주제어가 없이 ‘뒤죽박죽’이다. 여섯개 분류에 넣기 마땅하지 않은 것들이 많고 어떤 것은 일부러 이리로 뺐다. 그렇다고 여기나온 예제들이 수학의 세계에서 천덕꾸러기들은 아니다. 반대로 어떤 것들은 초고난도 문제인 것도 있고, 최근에야 발견된 것들도 있다. 이것들을 뒤죽박죽으로 모아놓았다고 해서 목표마저 상실한 것은 아니다. 역시 고급 수학을 가리치기, 이것은 절대로 목표가 아니다. 이상한 목표이지만 ‘이런 것도 있구나’ 하며 가볍게 즐기기가 목표다. 정한 활동 시간을 마치면서 긴장을 풀기 위해 쓰거나 정한 활동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날 때 가끔 툭툭 던지는 것으로 삼아도 괜찮겠다. 소풍을 가면 먹고 놀고 나서 여기저기 걷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소풍을 풍성하게 하듯, 둘러보기라고 봐도 좋다. 또는 뒤죽박죽인 장난감 상자에서 아무거나 꺼내보기라도 봐도 좋다. (그래도 책읽기는 미리 정한 기간 동안 꾸준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다.) 어린이와 함께 읽고 보고 듣고 오리고 붙이면 된다. 그러다가, 와, 이쁘다! 어? 이런 게 나올 줄이야, 라든가, ‘잘 모르겠지만 뭔가 있는 것 같아...’ 라고 느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다. 그 정도를 기대했지만, 응, 그런 것도 있구나, 끄덕끄덕 … 해도 좋다.
우리가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다양한 현상을 보고 만지고 경험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를 이해하곤한다. 수학의 세계에서도 다를 바 없다. 수학 언어에 익숙한 분들이 이 목록을 더 풍성하게 채워주기를 부탁한다.
2부 : 어린이와 함께하는 수학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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