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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 농촌공동체 15년 뒤 지켜보라”

‘변산공동체 15년 실험’ 농부철학자 윤구병씨


15년 전 50을 넘긴 나이에 대학교수 자리를 훌쩍 내던지고 농촌공동체 건설을 꿈꾸며 전북 부안군 변산 땅으로 들어갔던 윤구병(67). 오로지 서구 근대 산업사회를 선망해온 우리 사회 주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회의하며 대안을 찾아나섰던 그의 혁명적 ‘변산공동체학교 15년 실험’은 성공했을까?

“대학선생 노릇 그만둔 건 그게 행복하지 않아서였다. 어떤 삶이 행복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농사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행복을 기준 삼는다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뛰놀던 시절을 빼곤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만족한다.” 지난 3일, 남다른 삶의 여정과 사색을 세 권의 책 <흙을 밟으며 살다>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꿈이 있는 공동체학교>에 담아 펴낸 그가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당신 자신의 삶에 대한 소감은 그렇다 치고, 공동체 실험 전체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오윤의 판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부리부리한 눈매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다부진 체격의 그는 “(애초의 구상에서) 크게 어긋난 건 없다”고 말했다.


1995년에 세운 변산공동체는 지금 20여가구 50여명이 느슨한 지역공동체 틀을 유지하면서 논 2만3000㎡(7000평)와 밭 2만6000㎡(8000평) 정도를 일구고 있다. 화학비료와 살충·제초제 등의 농약, 비닐을 사용하지 않고 항생제로 키운 가축 배설물로 만든 퇴비도 쓰지 않는 완전 유기농법으로 자급하고 남은 건 외부에 팔기도 한다.

땅들은 여러 사람 명의로 돼 있지만 공증까지 한 내부 규약에 따라 경작권만 인정될 뿐 누구도 소유할 순 없다. 일도 공동으로 하는데, 독립해서 인근에 사는 사람들과 달리 밥을 함께 먹고 경제문제도 공동 해결하는 20명의 ‘식구’들은 돈도 함께 모으고 각자 필요한 만큼 쓴 뒤 기록하고 회의 때 얘기하면 된다. “공식 명칭을 변산공동체학교라고 한 이유는 아이들만 배우는 또 하나의 대안학교가 아니라 농사일 모르는 어른들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가는 게 곧 배움이다.”

하지만 성패를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공동체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 가운데 맏이가 지금 중학교 1년생이다. 이 아이들은 도시나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여러 얘기도 듣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중등과정부터는 무전여행이나 역사적 장소를 돌아보게 하는 등 바깥세상 체험을 하게 한 뒤 각자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공동체 초기부터 그렇게 하기로 의논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들이 자라 다시 가정을 이루고 2세를 키우는 과정이 적어도 30년은 걸린다. 그래야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된 온전한 삶,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그 자식들이 고루 섞여 재생산되는 온전한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늙은이들만 남은 지금의 우리 농촌은 과거뿐이다. 그렇게 보면 적어도 한 세대는 지나봐야 실험의 성패를 얘기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럼에도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다. “15년쯤 더 지나 변산공동체가 제대로 서면, 아, 저런 삶도 괜찮겠구나, 아이들을 저렇게 키워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되고 실제로 이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돌림병 퍼지듯 늘어날 것이다.” 그가 보기에 지금 사람들은 100에 98은 성장·발전에 목매는 현 체제를 긍정하고 거기에 순응하고 있지만, “과연 행복하냐 하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석유·원자력 등 가공 과정에서 80%가 누출돼 대기와 물, 땅을 오염시키고 엄청난 쓰레기를 양산하는 물질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는 도시문명 자체가 지속 불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서울에 오면 당장 똥오줌 문제부터 해결이 안 된다. 모든 게 상생관계인 생체(생명) 에너지에 의존하는 변산과는 달리 물을 엄청 써서 버려야 하고 그것은 낭비와 오염을 낳는다.” 사흘만 에너지가 끊겨도 모두 도시를 탈출해 농촌에서 약탈적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도시인들은 “모두 가슴에 총칼을 품고 있다”고도 했다.

윤구병의 신랄한 비판에는 성역이 없다. “어떤 때는 하는 짓이 지렁이 똥만도 못한 것들이 잔머리를 굴려 땅을 살립네, 공기를 청정하게 보호합네, 강바닥을 긁어내고 강둑을 높여서 물길을 바로잡네… 허풍을 떠는 데 그치지 않고, 온 생명체를 한꺼번에 도륙하는 아수라장을 만들면서도 그것을 허물로 여기기는커녕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이 그것을 유린하고 파괴한 백인문명보다 훨씬 고등한 것이라고 보는 그에게 지금 세상의 역류는 한층 더 심화되고 있다. 인간 세상과 온 생명체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사상과 살인기계로 무장한 이른바 선진국의 과똑똑이들과 거기에 빌붙은 후진국 매판세력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이들을 유치원 때부터 강시나 좀비, 미라처럼 교실에 앉혀 놓고”, “남의 몫 가로채는 법, 남에게 기대 사는 법, 몸 놀리고 손발 놀려 살 길을 여는 게 아니라 잔머리 굴려 불쏘시개감도 못 되는 돈만 산더미처럼 쌓아올리는 게 유일한 꿈이라고 여겨 주식시장 같은 도박판 기웃거리면서 마지막에는 패가망신하는 노름꾼이 되는 법들만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아야 나라가 산다’는 게 그의 신조다.

위로 ‘일병’부터 ‘팔병’까지 형이 여덟이었던 9형제의 막내 구병. 한국전쟁을 전후한 혼란 속에 “똑똑했다는 형들” 중 여섯이나 잃은 그의 아버지는 나머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일자무식 농투산이로 만들 작정으로 서울에서 전남 함평으로 낙향했다. 1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두 번이나 가출했던 ‘불량학생’ 구병은 그럼에도 서울대 철학과를 대학원까지 마치고 충북대 교수가 됐으나 15년 만에 그만두고 그 역시 시골로 갔다. 이번에는 잔명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미래를 지속 가능한 미래로 바꿀 문명사적 대전환을 모색하기 위해.

그 실험은 진행형이다. 15년 뒤 윤구병의 기대대로 또다른 변산공동체들이 들불처럼 번져갈지 궁금해진다.


“오늘 죽어도 아쉬울 게 없는 나이”가 됐다는 윤구병은 지난해 처음으로 보리출판사 대표라는 공식 직함을 얻었다. 보리는 1981년부터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던 그가 1988년에 설립한 어린이·청소년 대상 생태·교육 전문 출판공동체다. 95년 그가 변산에 가면서 후배들이 맡아오다 지난해부터 다시 그가 경영 전면에 나섰다. 변산공동체와 민족의학연구원, 서울 서교동의 유기농식당 ‘문턱없는 밥집’ 등을 꾸려가는 데 큰 몫을 해온 보리 사업을 북돋기 위해 그는 요즘 월·화·수요일엔 서울에서 생활한다.

세 권의 책에 실린 글들도 원래 보리에서 책으로 내려고 70년대부터 써 모아 두었던 원고지 6000여장 분량의 글들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76년에 창간됐다가 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당한, 한국 잡지사에 신기원을 열었다는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도 지낸 그의 글은 매섭다. ‘공존’이라는 주제로 엮은 <흙을 밟으며 살다>, ‘생태’ 주제의 <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 ‘교육’ 주제의 <꿈이 있는 공동체학교>가 각각 담고 있는 지은이의 첨예한 문제의식을 엿본다.

“한마디로 도농관계는 착취-피착취의 관계다. 그런데 이 착취는 도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의 뼛골을 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을 징검다리 삼아 자연을 일방으로 착취한다. 자연을 일방으로 착취하는 길을 여는 것, 이것이 도시에 둥지를 튼 식민주의자들의 오랜 관행이고 꿈이었다. 시골 사람들을 억누르고 그 사람들의 일품을 뺏는 것은 동시에 자연을 훼손하고 오염시키는 길이다. 왜냐하면 시골 사람들에게는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1차관계이고, 이 관계는 목숨이 걸린 관계이기 때문이다. 도시 사람들에게 빼앗기는 만큼 자연에서 돌려받아야 하는데, 그러자니 어찌 땅도 물도 공기도 온전하게 살릴 길을 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길은 거대도시화한 자본주의적 삶의 원리(따지고 보면 죽음의 원리다)에 맞서서, 더 구체적으로는 앞으로 몇 해 안 가서 자본가의 손아귀에 들어갈 어업과 농업과 임업에 맞서서 어촌과 산촌과 농촌에 하루바삐 협동적인 생산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 공동체를 튼튼히 지켜나갈 새로운 공동체적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다.”

“하루에 열 시간이 넘게 딱딱한 걸상에 궁둥이를 붙이고는, 살아가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대학입시용 교과서만 달달 외우게 밤낮으로 몰아대고 있으니, 이게 무슨 학교선생이 할 짓이고, 부모가 할 짓인가. 짐승들도 비록 남의 새끼일망정 이렇게 모진 학대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랑의 이름으로, 교육의 이름으로, 위에서는 대통령, 수상이라는 연놈들부터 아래로는 어중이떠중이 놈년들까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아이들을 집단으로 학대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단학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유대인 학살보다 더 참혹한 게 지금 온 세계의 교육현실이다. 이 미치광이 놀음에 가장 앞서고 있는 땅이 ‘대한민국’이다. 내가 보기에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는 연놈들 가운데 ‘사디스트’가 아닌 놈년들이 거의 없다.”

취직해서 궁기 면한 것을 “이웃과 더불어 벗어난 것이 아니고 요행히 나만 살짝 빠져나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자책한 그가 교수직 내던지고 변산으로 간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