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kRoad: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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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2일 (월) 09:07 기준 최신판
씰크로드학 서문
무릇 새 학문의 정립이란 신생아의 출산과 흡사하다. 120여 년 전부터 시작된 씰크로드의 실체에 대한 탐지는 분명 '씰크로드학'이란 신생아의 잉태였다. 인류문명의 개화와 더불어 열리게 된 씰크로드는 문명교류의 통로와 가교로서뿐만 아니라, 문명탄생의 산실이자 문명발달의 원동력으로서까지 적극 기능함으로써 2천여 년간 인류의 역사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그리하여 '벙어리 대화'만을 해오던 동과 서가 문명의 공유성(共有性)과 상호의존성을 그 어느 시게보다도 절감하고, 하나가 된 세계 속에서 떳떳이 만나 나눔을 시작한 20세기의 인류는 씰크로드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씰크로드는 비록 뒤늦은 그 실체가 추인(追認)되었지만, 워낙 중요한 소재라서 그간 학문적 접근이 다각적으로 시도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중앙아시아 탐험과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씰크로드 연변에서 진행된 일련의 고고학적 발굴, 그리고 최근 유네스코의 씰크로드 종합 고찰 등 몇차례의 국제적인 집중탐구를 계기로 씰크로드에 대한 연구 열기는 그 파고(波髙)를 계속 유지해왔다. 그 결과 씰크로드의 개념이 확대된 것을 비롯해 이 통로를 통한 문명교류상(像)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하고 적지 않은 관련 논저들이 발표되었으며, 몇몇 나라에서는 전문 연구기구까지 가동하고 있다.
그러나 지침이 될 만한 이론과 학문적 규범 및 과학적 연구방법이 결여된 탓으로 유사접근(類似接近)에만 머물고 있지, '씰크로드학'이란 이름에 걸맞은 학문적 정립은 여태까지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근래의 연구 상황을 통관하면, 교통사나 지역학에 편중한 나머지 씰크로드를 통한 교류상의 조명이라는 연구초점이 마냥 흐려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학제간 연구협력이나 상호보완도 상당히 부족한 형편이다. 게다가 교류과정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문명현상의 보편성과 개별성, 전파성과 수용성을 둘러싼 논란은 가위 난마상(亂麻相)이라 할 수 있다.
바야흐로 인류는 서로의 어울림과 주고받음으로만 생존의 길을 보장받을 수 있는 미증유의 교류 확산 시대를 맞고 있다. 그간 쌓아올린 연구업적을 토대로 하여 '씰크로드학'이란 새로운 국제적 학문을 정립창출하는 것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 씰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의 역사는 오늘로 이어진 어제의 역사인 동시에 내일로 이어질 미래진행형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울러 인류문명사에 이상이기도 한 보편사(universal history)의 전개는 어느 한쪽의 '중심주의'나 '우월론'의 편단(偏斷)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명교류 통로인 씰크로드를 통한 서로의 불편부당한 어울림과 이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공통가치의 형성과 향유에 의해서만 비로서 실현될 수 있다.
씰크로드학은 씰크로드라는 환지구적(環地球的) 통로를 통해 진행된 문명간의 교류상을 인문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시공간적을 방대하고 복잡다기한 내용을 아우르는 씰크로드학은 어디까지나 씰크로드를 통한 제반 교류상의 골격을 총론적으로 규범화함으로써 고유의 학문제 체계와 범주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서장과 3부, 총8장39절로 구성되었다. 서장은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씰크로드학의 이론적 정립을 위하여 씰크로드학 고유의 개념과 학문계보, 연구대상, 연구방법 및 그 의의 등 기본적인 학문범주를 구명(究明)하였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학계에서 논란이 분분한 문명과 문화의 개념에 대해 나름대로 정의를 시도하고 문명교류론의 대강(大綱)을 제시한 점이다. 제1부 제1장은 환지구적 문명교류 통로인 씰크로드의 전개과정을 총체적으로 다루는바, 여기에는 씰크로드의 개념과 그 확대, 인류역사 발전에서 수행한 씰크로드의 역할, 그리고 씰크로드의 3대 간선(幹線)과 5대 지선(支線)의 개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제2장은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도외시된 씰크로드를 통한 교류의 역사적 배경을 정치경제사적, 민족사적 및 교통사적 배경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그리고 제 2부의 제3장과 4장은 씰크로드를 통해 실제로 이루어진 여러가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교류상을 사항별로 서술하는데, 문학의 교류 같은 비교적 생소한 주제도 다루었다. 제5장은 모든 교류의 주역인 교류인(交流人)들의 내왕을 교류관계 수립과 물질문명 및 정신문명 교류의 담당분야별로 조명하였다. 끝으로 제3부의 제6장과 7장은 이상의 동서 문명교류상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문헌적유물적 전거를 분야별로 제시하였다. 각 절에서는 원칙적으로 해당 주제의 정의와 내용, 특성 의의 등을 차례로 밝혀 개념정리를 선행한 후 구체적으로 교류상을 밝히는 서술체계를 취하였다.
씰크로드학이 포괄하는 시대는 기원전 1천년기로부터 기원후 17세기(고대와 중세)까지의 시기이다. 지금까지의 통설로는 씰크로드라고 하면 대체로 13세기까지 중국과 로마를 각기 동서단(東西端)으로 하여 전개된 3대 교류통로(씰크로드 3대간선)로 한정했는데, 이 책에서는 씰크로드를 한반도까지 연장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개념을 15세기 이래 구대륙과 신대륙(남북아메리카) 간에 전개된 환지구적 교통통로로까지 확대하였다. 이를테면 씰크로드의 새로운 개념확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말미에 씰크로드학 연구의 한 보조부분으로서 씰크로드사 연표, 참고문헌, 찾아보기 등을 최대한 상세하게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이 책은 씰크로드의 부단한 확대에 따른 '전통적인 씰크로드학'의 학문적 정립을 시도한 책이다. 이에 비해 근현대 동서문명의 교통통로는 그 형태와 내용을 발전적으로 달리하는 '신씰크로드'이다. 따라서 이에 상응하는 씰크로드학은 '신씰크로드학'이라고 명명해야 마땅할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서구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전래의 전통적 씰크로드(초원로오아시스로해로) 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기계동력의 의한 교통수단의 발명과 더불어 동서 문명교류사에도 새로운 면모가 나타났다. 철도와 비행기, 기선이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도입에 의해 지구는 육해공의 입체적인 교통망으로 뒤덮이게 되었고, 문명 교류의 내용과 방법 그리고 문화접변(接變)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18~19세기까지 약 300년간 근현대 동서교류의 통로를 '신씰크로드'라 이름하고, '씰크로드학'의 후속으로 '신씰크로드학'을 정립해야할 소이연(所以然)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사계(斯界)의 꾸준한 보양(保養) 속에 '씰크로드학'이란 태아는 간단없는 발육의 연동(蠕動)을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준삭(準朔)을 맞아 산고를 무릅쓰고 앳된 고고(呱呱)의 첫소리를 감히 울리게 되었다.
이 책은 인문학 분야에서 새로운 학문의 정립을 시도한 연구개설서로서, 비록 우문졸작(愚問拙作)이지만 감히 개창적(開創的) 의의를 부여코자 한다. 개창서니만큼 미흡함을 면할 수 없겠지만, 이후의 보완으로 완성을 기하고자 한다.
비록 어설프기는 하지만 학문초야(學問草野)를 일구었다는 데서 일말의 위안과 보람을 찾는다. 이렇게 미흡과 보람이 함께한 졸저의 갈피마다에는 '추천사'로 이 책의 첫머리를 열어주신 은사 김원모(金源模) 교수님의 아낌없는 지도와 편달, 사학도의 메마른 가슴에 씰크 같은 문학적 영감과 낭만을 보듬어준 황석영, 서해성 두 분 작가님의 정겨운 격려, 이 책에 실린 귀한 도판들을 제공정리해준 제자 배준원 군과 '시공테크'사 박진호 주임의 정열적인 성원, 100여 권의 참고서적을 마련해준 가속(家屬)들의 헌신적인 옥바라지, 그리고 동연제위(同硯諸位)의 따듯한 배려, 이 모든 은고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끝으로 졸저를 중히 여기시고 혜려를 베풀어 기꺼이 출판을 맡아 수고하신 창작과비평사의 백낙청 선생님과 최원식 주간님, 고세현 사장님, 김이구 기획실장님, 그리고 원고의 입력부터 교정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챙겨준 편집실무진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바이다.
이제 우리는 학문,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 남의 뒤따름만이 아니라, 무언가 남에 앞섬도 있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에 부응코자.
2001년 단풍가절 무쇠막 자택에서
정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