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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ath
59.150.147.122 (토론)님의 2008년 12월 7일 (일) 18: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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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낮은곳 살핀 독거노인, 자살

“저는 강동구 암사1동 5층 옥탑방에 살고 있는 가족이 없는 독신자입니다.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분부 회원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 한 많은 세상을 떠나려 합니다. 저의 시신 가운데 모든 부분은 장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증하여 주십시오. 2008년 12월3일 김○○”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 지난 4일 우편물 한 통이 도착했다. 우편물에는 붉은 막도장이 찍힌 김씨(68)의 유서와 장기기증등록증, 주민등록증이 담겨 있었다. 유서에는 ‘월세 보증금 300만원으로 주검을 처리해 달라’는 부탁도 함께 쓰여 있었다.

장기기증본부 관계자들은 김씨의 유서를 받자마자 경찰과 함께 김씨의 집으로 찾아갔지만 이미 목을 매 숨진 뒤였다. 경찰은 김씨가 ‘유서 편지’를 보낸 뒤 곧장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암사1동 주민자치센터 등의 말로는, 김씨는 서울 강동구 한 옥탑방에서 홀로 살아온 기초생활수급자다. 어릴 적 북한에 가족을 두고 내려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지금껏 혈혈단신으로 살아왔다. 젊은 시절 한때 건설업체 최고경영자까지 지냈지만 사업확장 과정에서 보증을 잘못 서 전 재산을 잃었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건설사무 보조일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왔다.

이런 속에서도 김씨는 어려운 이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던 2005년에는 장기기증본부에 장기기증을 등록했다. 정부에서 나오는 수급비 43만원 가운데 다달이 5천원을 떼어 후원금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현정 암사1동 사회복지사는 “얼마 전 수협에서 할아버지한테 쌀·라면 등을 후원하겠다고 했는데,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한테 주라’며 극구 사양하셨다”며 “이따금 집에 찾아가면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셨는데 …”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김씨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장기 기증은 이뤄지지 못했다. 주검이 너무 늦게 발견돼 각막 기증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김씨의 장례는 장기기증본부 직원 한 명이 상주를 맡아 치르기로 했다. 빈소는 고대안암병원에 마련됐으며, 그의 주검은 6일 발인을 마친 뒤 고려대 해부학 교실에 기증된다.


해양학자로 변신한 민속학자 주강현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 어느 정도 관심을 갖는 분야가 민속이지만 민속학자 중에 스타는 드물다. 거의 유일한 민속학의 간판이라면 주강현(52)씨를 꼽지 않을 수 없다. 1990년대 그가 쓴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과 함께 우리 땅 우리 문화에 대한 재발견 바람을 일으키며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이후 민속학 관련 책을 줄줄이 쏟아내며 주씨는 국내 대표적인 민속학자로 활동해왔다.

이 주강현씨가 올해 새로운 기록을 하나 세웠다. 교수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국립대학 석좌교수가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제주대 석좌교수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석좌교수로 임용된 분야가 정확히 민속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다 전문가’로 석좌교수가 된 것이다.

주 교수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바다 전도사’로 변신했다. 그 스스로 20여년 자신을 수식했던 민속학자라는 타이틀을 거부한다. 이제는 ‘바다학자’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한다. 2012년 열리는 여수엑스포 전략기획위원으로 바다올림픽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잡지 <해양과 문화>의 편집과 해양수산부 통폐합 반대 등 바다와 관련한 분야와 이슈에는 그의 이름이 어김없이 들어가 있다.

이런 변신은 그가 오래전부터 바다를 자기의 새로운 연구 주제로 삼고 투자해온 덕분이다. 전국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80~90년대를 보낸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바다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관해기> <돌살> <등대> <독도견문록> <적도의 침묵> 등이 이어졌다. 그동안 3면이 바다, 바다가 살길이란 인식은 높았지만 실제 바다를 인문학의 대상으로, 콘텐츠의 연원으로 바라본 학자는 없었다. 민속에서 출발해 바다를 연구의 ‘블루 오션’으로 삼은 주 교수는 요즘 물 만난 고기처럼 바다라는 주제를 누비고 있다. 만나자마자 그는 바다 이야기를 정신없이 풀어놓았다.

-여수엑스포 준비에 한창이라고 들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요?

“유치 때부터 해양문화 전문가로 활동해왔고, 지금은 마스터플랜을 짜는 데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엑스포란 것이 원래 제국주의의 산물 아니겠습니까? 1993년 대전엑스포는 군사정권 시절 증산주의 권위주의 개념의 소산이었습니다. 이번 여수엑스포는 문명적으로 생태적으로 가려고 합니다. 주제도 그래서 태평양의 해양문명을 보여주는 해양문명관의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주제도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입니다.”

-화끈하게 보여주는 것을 선호하는 우리 풍토에선 쉽지 않아 보입니다.

“생태주의적인 사고를 좌파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전혀 좌파 개념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유연한 젊은 공무원들이 호응을 해준 덕분에 해양문명관이 들어서게 됐습니다.”

-해양엑스포는 반가웠겠지만 해양수산부가 건설부에 통폐합된 것은 안타까웠겠습니다.

“바다는 통합행정으로 가야 합니다. 수산은 농림부가, 바다는 국토해양부가 맡는 것은 코미디입니다. 운하 파려고 그렇게 만든 것 아니겠습니까? 3면이 바다인데 운하가 무슨 짓입니까.”

-이제는 민속학자라기보다는 해양민속학자라고 해야겠네요.

“저는 이제 민속학자 아닙니다. 해양학자입니다.”

“우리나라 3면이 바다인데 바다에 관심을 안 갖는 것이 이상하죠. 민속학에서도 바다는 당연히 중요합니다. 레비스트로스 등 유명한 인류학자들은 바다와 섬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인류학자들을 대신해서 우리나라와 전세계 바다를 돌아다니고 있는 겁니다.”

-무슨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까?

“바다는 에너지입니다. 수심 5천미터에 떠 있는 태평양의 과학기지에서 해저면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장엄했습니다. 그때 바다 위에서 고독을 뛰어넘는 어떤 감정을 느꼈습니다. 바다로 전파된 문명의 역사에 대한 갈증이 솟구쳤습니다. 지중해를 둘러싼 문명의 역사와 자본주의의 전개를 써내려간 프랑스의 페르낭 브로델처럼 되자, 한국의 브로델이 되자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적도의 침묵>에서 ‘태평양은 태평하지 않다’고 쓰셨던데요.

“서양 학자들은 제국주의 관점에서 원주민들이 미개하냐 아니냐를 먼저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시혜를 베푼 것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서양 항구도시에 있는 해양박물관에 가 보면 대항해시대 인종학살에 대해서는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습니다. 원주민 시각에서 보면 대항해시대는 수탈의 역사입니다. 그런데도 원주민 중심으로 기술된 태평양의 해양문명사는 없습니다. 직접 배 타고 남태평양 섬에 가서 원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태평양은 태평하지 않다고 쓴 겁니다.”

-연구비 지원이라도 받는지요?

“돈 받으면 제대로 된 글을 쓰기 힘들어요. 소설가한테 1억원 주고 ‘좋은 소설 써봐라’ 그러면 좋은 소설이 나올까요? 그리고 한국 학자가 폴리네시아인 관점으로 문명사 쓴다고 하면 어느 재단에서 돈을 주겠습니까. 책 써서 번 돈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거죠. 일찍 대학교수가 돼서 민속학 논문만 썼다면 이런 도전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골프나 치고 있었겠죠.”

주 교수는 교수직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교수가 못 된 것이 “남의 밥그릇을 넘보지 않는다는 학계의 불문율을 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국문학에 멈춰 있던 민속학에 역사학의 개념을 도입했고 더 나아가 인류학과 해양학의 범주까지 넘나들다 보니 학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책도 많이 쓰고 활동도 활발한데 교수 임용이 안 된 이유가 뭐였습니까?

“지적 풍토가 거지 같은 나라죠. 학계는 자기 밥그릇 깨는 걸 싫어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복합 학문을 했습니다. 국문학과 사학과를 넘나들었죠. 그래서 제 활동에 대해 디스카운트를 많이 당했습니다. 건조하고 딱딱한 것은 학문이고 현장에서 발로 뛰어 만든 저술은 학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과 싸우느라고 게릴라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강사가 노예 같은 처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가 바다학자로서 ‘찜’한 주제가 바로 독도다. 최근 펴낸 <독도견문록>은 그의 학문 범주가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500쪽이 넘는 두툼한 독도견문록은 독도와 울릉도의 역사와 민속뿐 아니라 지질, 식생, 토양, 기후 등을 망라하고 있다. 14차례나 독도와 울릉도를 직접 찾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민속학자가 아닌 지리학 생태학에 밝은 해양학자로서의 변신을 느낄 수 있다.

-<독도견문록>을 보면 독도를 여러 각도에서 접근한 것 같습니다.

“바다를 연구하는 것은 환경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군사문제, 식생, 지리학, 생물학, 신화학까지 연결됩니다. 거의 대책이 없을 정도로 포괄적이에요. 정말 화두가 큽니다. 그런 생각과 자료를 정리한 것이 <독도견문록>입니다. 독도는 보통 섬이 아닙니다. 신성하고 강인한 섬이죠. 460만년 전에 형성된 독도는 수심 2천미터부터 솟아 있는 조그만 화산섬이 아니라 거대한 대륙입니다. 독도를 조그만 섬이라고 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일본에 견주면 우리나라는 바다를 등한시했죠?

“일본은 1914년 남양군도청을 만들고 남양군도(미크로네시아)를 신탁통치했습니다. 일본의 해양 야욕은 무서울 정도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바다를 거의 안 챙겼습니다. 고려시대까지 중국과 왕성한 무역을 했는데 명나라 주원장이 집권하면서 중국 남쪽의 수군을 가장 무서워했죠. 그래서 아예 바다에 널빤지 하나 못 뜨게 했습니다. 조선은 그걸 그대로 따라했죠.”

-바다는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한민족은 바다로 나가면 승리했지만 바다를 포기하면서 식민지가 됐습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다산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해도경영론을 썼어요. 유배지에서 바다를 본 그는 ‘버려진 섬들을 관리하면 보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다의 가치를 본 것이죠. 우리나라는 분단돼 있어 대륙과 떨어진 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바다를 깊게 생각해야 하는데 운하나 파려고 하고 있고…. 일본의 한반도 침탈은 바다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가 있는 야마구치현 하기 해변을 걸으면서 이들의 100년이 넘는 야욕을 곱씹어 봤습니다. 일본과의 해양 영토 전쟁은 끝난 게 아닙니다.”

-앞으로는 어떤 연구를 하실겁니까?

“세계의 대표적인 항구도시 스물네 곳을 돌아볼 계획입니다. 항구는 인문학적 지평을 확장해줍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죠. 하멜 표류기는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멜이 처음 떠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돼 조선을 탈출해 돌아간 네덜란드에서 끝납니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이죠. 해양학은 지금까지 서양인이 한 것입니다. 우리 식대로 접근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바다를 잊어버린 우리 민족에게 바다를 돌려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