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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123.137 (토론)님의 2009년 10월 17일 (토) 00:5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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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창] ‘몽유도원도’ 관람기 / 황현산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전시되었던 <몽유도원도>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흐레 동안만 전시된다는 그 그림을 보려고 우리 식구들은 제법 일찍 서둘러 전시장을 찾았지만 먼저 온 관람객들이 벌써 전시장 건물 밖으로 100미터도 넘게 줄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몽유도원도>로 연결되는 줄인 것을 우리는 묻지 않고도 알았다. 기다린 지 10여분이 지났을 때 우리는 광장의 줄보다 더 긴 줄이 건물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30분이 지났을 때부터는 우리 앞에서 줄어드는 줄의 길이보다 우리 뒤쪽으로 벌써 복잡한 곡선을 그리며 늘어나는 줄의 길이에서 더 많은 위안을 얻었다.

여기저기서 안내원들이 기다려야 할 시간을 가늠해 주며, 기다리지 않고도 옆문으로 들어가서 볼 수 있는 다른 전시품들에 관심을 유도하기도 하고, 상설전시장에 전시된 <몽유도원도>의 복제품을 보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몇 시간을 바쳐 그림에 이르러도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2분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서 있는 줄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줄을 지어 기다리는 관람객 가운데는 <몽유도원도>에 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바로 우리 앞에 선 노인은 줄어드는 줄을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길 수도 없을 만큼 지쳐 있었지만 다른 관람객들에게 상설전시장의 위치를 손으로 가리켜 알려 주었고, 우리 뒤편의 중학생 남자아이는 제 어머니에게 “엄마도 공부 좀 하세요”라는 말을 섞어가며 <몽유도원도>의 역사를 줄줄이 풀어내었다. 그들은 모든 사정을 미리 알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안내원의 말은 엄포가 아니었다. <몽유도원도>에 가까이 갔을 때는 두 시간이 조금 넘은 뒤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섯 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가져온 <수월관음도> 앞을 아쉽게 지나, 통로를 따라 작은 모퉁이를 돌자 거기 유리관 속에 <몽유도원도>와 그 찬문이 길게 펼쳐져 있었지만, 황홀한 빛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서인 듯 조명은 오히려 어두웠으며, 누가 떠밀지 않아도 떠밀리는 것처럼 자리는 불편했다. 그림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살펴볼 여유는 말할 것도 없고, 그 긴 제서와 찬문의 처음 몇 글자라도 뜯어 읽어보려고 애쓸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몽유도원도>를 보았다기보다 그 앞을 조금 천천히 지나갔다고 말해야 한다.

다른 관람객들 처지도 물론 우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진품 앞에서라고 해서 저 복제품 앞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본 사람은 필경 없었다. 그러나 줄을 서서 기다리던 두 시간 내지 여섯 시간과 그림 앞에서 보낸 2분을 견주며 후회하는 사람도 없었다. 통로를 빠져나와 다른 전시품 앞으로 걸어가는 관람객들의 말을 엿들어보면 낡은 그림 한 점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던 그 긴 시간을 스스로 대견하게들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몽유도원도>의 관람은 일종의 순례 행렬이 되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 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 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광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기사 원문 / 황현산/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대담

-지금 우리 시민단체의 모습을 보면, 2004년 대선에서 미국의 시민단체들이 대거 ‘조지 부시 반대운동’에 나섰던 것과 흡사한 거 같습니다. 그때 미국에선 부시 집권 이후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했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거든요.

“많은 시민단체들은 초정파적인 활동을 해왔습니다. 공공선을 지향하지,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늘 기계적인 중립이라든지 탈정파에 머무르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몰락하거나 후퇴하는 걸 용납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최근 들어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민주적 또는 인권 시스템을 이명박 정부가 허물어뜨리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에, 적잖은 단체들이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게 능사냐, 정부에 반대하거나 새로운 정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시민운동 아니냐’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민운동이 시민운동 자체를 위한 운동은 아니라고 봅니다.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희생, 헌신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중립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와, 그걸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악화되는 정부를 고쳐내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서 고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건 시민운동의 의미 있는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까?

“변화라고 볼 수 있겠죠. 이런 세상에서 그런 고민을 안 하는 단체라면, 우리 사회를 고민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지난 6월 국정원의 시민단체 탄압 사실을 공개한 뒤 국가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습니다. 소송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그때 미국에 있었는데, 기자들 전화를 받고 알았습니다. 국정원이 저를 사찰하고 시민단체의 일에 개입하는 게 너무나 부당해 그러지 말라고 주장한 건데, 그걸 고칠 생각은 안 하고 문제제기한 사람을, 그것도 국정원장 개인 이름이 아닌 국가 이름으로 고발한다는 건 누구도 납득시키기 어려울 겁니다. 아무튼 국가로부터 소송당하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특히 옛날 안기부, 중앙정보부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압박감이라든가 그런 게 있죠. 한편으로는 희망제작소 회원이 수백명 늘었고, 길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쫓아와서 악수하고, 식당 가서 돈 내려고 하면 안 받으려는 분들도 계시는 등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조용히 내 일을 하고 싶은데 조용히 살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일 때는 박 변호사와 관계도 좋았고, 아름다운재단이나 아름다운가게 사업을 많이 도와주셨죠? 그때와 지금의 모습을 보면, 이 대통령이 달라졌다 또는 내가 그를 잘못 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서울시에 ‘에코 카운슬’(eco council)이란 게 만들어져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고 여러 정책을 제안받았습니다. 서울 숲이라든가 말이죠. 이런 걸 제안하면 상당히 받아들였고, 좋은 정책이라면 기꺼이 받아주는 실용성을 그분한테서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실용정책을 많이 펴서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발전을 하면, 정권을 잃은 야당도 정책 준비를 열심히 하는 등 선순환이 일어나면서 한국 사회가 발전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되고, 특히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사실 시민사회가 촛불시위에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게 아닌데, 시민사회를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그 주변에 있는 분들이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시민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모조리 억압하고, 정부 협력을 끊고, 궁지에 몰아넣겠다고 하는 정책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대단한 실수고 잘못입니다. 3년 뒤엔 분명히 후회할 겁니다.”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는 건 어떻게 보십니까?

“국민 여론은 한 달 뒤를 내다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지지율은 국민들의 기대에서 비롯된 거지 실제로 (이 대통령이) 잘했기 때문에 높아진 게 아닙니다. 중도 서민 정책이라고 하는 것들을 선언만 했지 실제로 이뤄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미소금융 재단’은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할 일입니다. 민간의 열정과 창의성, 상상력을 정부가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인기 올리려고 스스로 다 하고, 선언하고, 뺏어오는 형식이거든요. 그런 정책이 성공할 리 없고, 그런 상황에서 국민 지지가 계속될 수 없습니다. 당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달 후, 1년 후, 3년 후를 봐야 합니다.”


-그에 비하면 야당은 무기력하다는 느낌입니다. 2007년 대선 패배 이후에도 달라진 건 별로 없는 거 같습니다.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을 밝히는 등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국민을 감동시키고 지지를 얻어내는 일은, 반대를 넘어서 긍정적인 정책을 양산하고 국민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보일 때 가능합니다. 국회 가서 여러 차례 말했는데도 별로 변화의 조짐이 없습니다. 선거에 임박해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보다, 그 이전에 국민에게 호감 주는 정책을 만들어내고, 공직 후보자들을 훈련시키고, 우리 사회의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게 필요합니다.”


-민주당도 대안이 부족하다는 건 스스로 알 텐데요, 어떻게 어떤 대안을 내놔야 하느냐에서 뚜렷한 방안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합니다. 이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어떤 게 있겠습니까?

“지금의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은 굉장히 축소된 상태입니다. 그럴 때는 연대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 연대엔 정치세력 간 연대도 포함될 수 있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시민사회나 다양한 단체, 기관끼리의 네트워크나 연합도 필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민주당이) 소극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조금 더 큰 틀에서 보면 협력할 수 있는 사람들, 세력들이 많지 않습니까?”


-민주당이 더 개방적으로 폭을 넓혀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지금 민주당은 지난 정부 시절의 민주당 또는 열린우리당만큼도 다른 세력을 포용하고 있지 못합니다. 우후죽순 다양한 정치세력이 생겨나는데, 그 모든 세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광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변호사를 서울시장 후보로 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정치권과 시민사회 진영에 적지 않습니다. 후보 추천 얘기가 하나로 모아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저는 도망가겠습니다.(웃음) 사실 그런 얘기들이 곳곳에 있습니다만, 저는 확실히 출마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좋은 지방정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작은 노릇이라도 할 겁니다. 다만 제가 후보자로 나가는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아직은’ 생각이 없다는 겁니까?

“지금으로선 단언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 화가 나는 일을 볼 때, 내가 정치에 뛰어들어 고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정치 문제라기보다는, 당황스럽고 분노스럽습니다. 저는 나름의 젊음을 희생하면서 해 왔는데 말이죠, 이런 압박을 받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저는 늘 수난과 고난 속에서 훨씬 더 압박받는 많은 사람들과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상을 준다고 할 때 제일 괴로웠습니다. 내가 현실에서 제대로 못하고 있구나 싶어서요. 정말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당대가 아니라 후세에 평가받지 않습니까. 당대에 상 받는 사람이 되면 세상을 위해 충분히 일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지 않을까 싶어 오히려 핍박을 받는 게 더 좋습니다. 마음을 굉장히 가다듬었고, 과거에 그랬듯이 억압받는 사람,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다행스럽고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핍박받고 힘없는 사람들이 정치에 나서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힘들 거 같은데요?

“지금도 기꺼이 그런 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 참여도 ‘그런 일’의 하나 아닌가요?

“물론 정치가 꼭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정치는 영광이나 권력의 자리가 아니라, 더 큰 희생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민사회라는 영역에서 해 왔던 일을 계속하는 게 제 역할이고, 그런 걸 바라는 국민도 상당히 있지 않을까, 그런 고민이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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