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915
민영진 교수와 부인 김명현씨 부부
올해는 신약과 구약을 함께 담은 한글 성경이 우리나라에서 <셩경젼서>라는 이름으로 출간 된지 100년이 되는 해다. 한글의 보급과 문맹퇴치 등 문화적으로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던 ‘한글성경 100돌’을 맞아 대표적인 성서학자이자 목사인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민영진(71) 교수를 만났다.
민교수는 지난 1988년 감신대 교수 17년을 뒤로하고 대한성서공회로 옮겨 성서번역실장과 번역담담 부총무 등으로 1993년 출간된 <표준새번역 성경>을 번역하고, 5년간 대한성서공회 총무를 지냈다. 그는 지난 2007년말 은퇴한 뒤 몽골과 베트남, 라오스에 있는 소수민족의 성경 번역을 돕는 세계성서공회 컨설턴트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이번달부터 대전침례신학교 특임교수로 구약을 강의하고 있다.
민 교수는 연세대 등 신학대들과 어린이와 청소년 성경공부 때 널리 애용되는 <표준새번역 성경>에 여성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 번역을 한 데 앞장 선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예수의 말을 반말이 아닌 존댓말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우리 주님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분인데 우리 성경의 예수님은 아주 권위적으로 아무에게나 반말하는 분으로 보여진다”는 게 그의 견해다. 하지만 목회자로 구성된 감수위원들을 비롯한 목회자들의 반발로 그의 뜻은 <표준새번역>에도 반영되지 못했다. 만약 그의 번역이 관철되었다면 목사들의 권위주의를 해소하고, 좀 더 유연한 교회 문화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라고 많은 이들은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그의 이런 번역론은 교리나 신념이라기보다는 삶으로 체화된 인격의 반영인 듯 싶다. 그의 지인들은 그에게서 여유와 인격과 겸손을 먼저 떠올린다. 그는 무슨 모임에도 부인 김명현(67)씨와 동행하며, 늘 부인을 먼저 배려한다. 그런 배려가 가족들에게만 ‘특별’한 게 아니다. 그는 대한성서공회에서 일할 때 다른 간부들이 모두 함께 일하기를 꺼려하는 여직원을 골라 자신의 방에 배치해 늘 존대하며 일했던 인물이다. 자기 비서에게도 반말한 적이 없을 만큼 차별심을 넘어선 그 인격의 최대 수혜자가 부인과 가족임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다 만난 민교수 부부는 어느 모임에서나 인기 최고다. 둘은 어떤 우울증도 날려버리는 마술사같은 유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유머는 유머집에서 빌린 것들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여서 더욱 생생하다.
시인이기도 한 민 교수와 부인의 사랑은 시로부터 시작됐다. 대학원 동료였을 당시 민 교수가 시를 좋아하느냐고 물었고, 김씨가 “좋아한다”고 하자, “좋아하는 시를 들려달라”고 했다. 김씨가 외운 것은 윤동주의 <서시>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민 교수는 싯구절을 따서 “당신에게 주어진 길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김씨는 “지겟군 하나 잡아 결혼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민 교수는 “제게 주어진 길은 지겟군이 되는거로군요”라고 응대했다. 이날부터 둘의 찰떡궁합이 맞아들어서기 시작해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 뒤 민 교수가 출장을 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는 날 부인은 거실 탁자에 멋진 꽃을 꼿아두었다. 하지만 민교수는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부인이 꺾꽃이꽃쪽을 보며 “뭐 달라진 것 없느냐?"고 묻자, 민 교수는 부인을 가리키며 “이 꽃 하나만 보기도 바쁜데 다른 꽃이 눈에 들어오느냐”고 말했단다. 또 초대받는 집을 찾아갈 때 길눈이 어두운 민 교수에게 “예전에 와봤으면서 그렇게 못알아보느냐”고 부인이 핀잔을 주면 민 교수는 “어쩌면 당신과 이렇게 똑같냐. 매일 봐도 처음 본 것 처럼 새로우니!”라고 답해 부인을 환하게 바꿔놓고 만단다. 그가 쓴 시를 듣다보면 원앙 한쌍을 보는 듯 하다.
여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주어진 목숨 다 살고 가는 날
내가 보는 앞에서
내 품에 안기어서
이 세상 떠나고 싶어 하지만
내가 먼저 가게 되면
나는 당신이 따라주는
포도주 한 잔 마시고
당신이 차려주는 밥 평소처럼 먹고
곁에 있는 이들과 작별인사 나누고
불러주는 찬송 듣다가
기운 쏘옥 빠진 쇠약해진 몸
주님께 안기고 싶은데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간다면
나는 당신에게 해줄 것이 없네
당신은 포도주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내가 차리는 밥상 근사하지도 못할 거고
당신 돈 좋아하지만
그땐 그것도 소용없잖아
그냥 당신 옆에 있기만 하면 되나
당신을 안고 “여보 사랑해”
이 말만 되풀이하면 되나
<우리 가는 날>
이렇게 여유와 사랑이 넘치는 민 교수이기에 사람들은 세상 고생 한 번 모르고 자랐을거란 예단하곤하지만 그도 이 땅에 살았던 이들과 다름 없이 고난의 시절을 보냈다. 10살이던 6·25 때 부산으로 피난 가서는 미 군부대 취사장에서 수채구멍으로 흘러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배를 채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가 번역과 통역에 눈을 뜬 것도 피난민 시절이었다.
미군의 음식 찌꺼기를 주워먹기 위해 군수품 기차에 올라타 미군부대 가까이 오면 뛰어내리곤 했는데, 어느 날은 뛰어내릴 기회를 놓쳐 군부대 안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절도범으로 오인돼 미군으로부터 취조를 받으면서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어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대전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은 한남대의 전신인 대전대 부지 구입 책임자였기에 좌익들에 의해 ‘미제의 앞잡이’로 표적이 되어 그는 아버지와 함께 대전과 대덕 인근 심산에 숨어서 산열매로 허기진 배를 떼우며 살기도 했다. 그렇게 숨어있던 시절 그는 트럭으로 죄수들을 시루떡처럼 3층으로 포개 끊임없이 실어나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잠시 뒤면 ‘드르륵 드르륵’ 총을 갈기는 소리를 들었다. 이승만 정권이 대전형무소의 죄수들 7천여명을 한꺼번에 학살해 서방언론에 의해 ‘한곳에서 벌어진 지구상 최대의 학살’로 꼽혔던 보도연맹사건이었다. 그는 자신도 6·25때 좌익들에 의해 쫓기는 몸이었지만, 보도연맹과 같은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 현장을 몇차례 방문했고, 보도연맹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서 옥천의 목회자들에게 건네주며 그렇게 숨져간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에서 뭔가를 했으면 좋겠다고 권하기도 했다.
그런 관용의 마음은 가정에서도 어김 없이 이어졌다. 민 교수는 경식(42·연세대 교양학부 교수)·한식(40·서울 대치동 연합감리교회 목사) 두 아들을 유치원 때부터 설거지를 시키며 어머니를 도와 ‘페미니스트 2세’로 키웠다. 민교수 부부는 유치원 때 임파선암을 앓아 병원에서도 살기 어렵다고 할만큼 아픔을 겪은 후 살아난 둘째 아들의 병 때문에 자식들이 건강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 “공부하라”는 말 한 번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1등하면 스트레스 받으니 1등은 양보하라”고 한 ‘이상한’ 부모였다.
아들이 어느날 방과후 부모 몰래 오락실에 갔다가 가방까지 잃어버린 채 잔득 긴장해 돌아온 것을 보고선 “살아온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안아줬다는 부부다. 부임 김씨의 유머와 마음씀도 민 교수에 지지않는다. 둘째 아들이 대학생 때 민주화시위에 나간다고 하자, “공부하느라 바쁜 너보다 시간 많은 내가 나가는 게 낫다. ‘민주엄마’ 나갈께”라고 하고, 도로에서 시위하느라 밤늦게 돌아온 아들에게 밥상을 잘 차려주마 “장한 내아들”이라고 한 엄마였다. 부모들로부터 ‘시위에 나가면 등록금도 안주겠다’고 으름장을 듣던 동료들은 급기야 ‘이상한 엄마’를 구경하겠다며 집에 까지 찾아왔고, 그 때 함께 온 여학생중 한명이 둘째 며느리가 되었다.
연세대와 이화여대, 감신대 등에서 강사를 하고 감리교 여선교회 교육부장을 지내기도 한 김씨의 유머는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 공부를 하던 한 청년이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대해 “다른 건 다 믿어도 도저히 이건 못믿겠다”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김씨는 “남편인 요셉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그러니?”했단다. 그러면 그토록 질긴 불신의 빗장이 웃음 속에서 허물어져버리는 신비의 세계가 열린다.
‘성경 번역’에서도 미완으로 그친 ‘치유의 역사’는 성서학자 부분의 유머를 통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