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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ath
Parha (토론 | 기여)님의 2006년 10월 23일 (월) 10:0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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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색을 가장 좋아하세요?" 하면, 나는 망설이지않고 답했다. "연초록이요, 봄에 막 돋아난 새싹 색깔, 벼가 가지런히 자라난 가을 노랗게 물들기 바로 전의 농토, 파란 하늘을 올려 보면 거기 초록 잎사귀들이 빛을 지나게하고 나는 그런 색깔, 그런 연초록을 좋아해요." 라고. 그리고 말이 지나치게 되어, 이어서 "전 나도 모르게 어려부터 그 색깔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면 바탕색을 연초록 색깔 크레파스로 칠하곤 했거든요. 하지만 내가 이 색을 참 좋아하는구나 느끼던 순간이 있었어요. 신도안에서 군역을 할 때, 장교생활을 해놔서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 했거든요. 퇴근 시간, 초가을 어느날 퇴근버스를 타고 가다 신도안에서 유성으로 빠지는 길에 농토가 있었어요. 농토엔 벼이삭이 노랗게 물들려고 하고 잎새에는 초록이 어울려 바람에 일렁이고, 거기 노을이 살짝 들어가는 그 색깔을 보고 눈물이 났던 적이 있었어요. 그땐 그랬어요. 바로 그때 나도 모르게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을 바로 그것이라 여겼지요. 그리고 모스크바로 유학가서 몇 주가 흘렀을 때였어요. 3월 말에 도착한 모스크바에 때아닌 폭설이 내렸죠. 눈이 수북히 쌓였지만, 모스크바니 그럴만도 하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봄기운이 그 두터운 눈을 녹여 땅으로 땅으로 흐르게 하고 아침 산책을 하던 어느날 돈스꼬이 수도원을 지나가는데 가로수 나무가지에 새싹이 피어난 것을 보았어요. 놀라 그 자리에 서서 새싹을 바라보았죠. 어찌나 아름답던지. 기숙사가 지하철 근처라 사람들이 출근하느라 분주했는데, 그 모습들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경이로왔던 그 날을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거에요. 그날도 그 연초록 색깔이었어요. "

노란 호박알이 박히고 포도넝쿨 모양으로 선이 둘러진 반지를 껴고 있을 때는 몰랐다. 그 반지는 이즈마일롭스끼 공원에서 약속시간에 늦어 바삐 가다가 그 많은 물건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쏙 들어왔다. 그 반지를 사들고 와서 집 서랍에 넣어두고 일년 반이 흘렀다. 헤어지고 한때 나는 아팠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링겔을 맞고 나온 봄날 아침 따듯한 햇살이 나를 씻어내는 것 같았다. 그 날이후 나는 더이상 꿈도 없고 아픔도 없었다. 내게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봄옷을 사고 머리를 다듬고 서랍에서 그 반지를 꺼내 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썩 어울렸다. 그 반지는 내게 어떤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조그만 노란 호박알과 은색의 링이 왼쪽 가운데 손가락에 끼어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면 손가락으로 돌려보거나 닦아보는 습관도 생겼다. 그렇게 이 년이 오고 올 해 여름이 다 지날 무렵 오랜만에 수영장을 갔다가 잊어버렸다. 평소엔 그렇게 안하는데, 그날은 자전거에서 내려 반지부터 꺼내 가방에 넣고 수영장표를 받으러 갔다. 아마 그 동안에 떨어졌을 수도 있다. 수영을 마치고 나오면서야 반지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옷갈아 입는 곳과 내가 지났던 곳을 다섯번은 왔다갔다 하면서 샅샅히 되짚어보았지만 없었다. 서운했다.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수백일을 함께 하였는데 이제 없으니 손이 허전해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엉뚱한 마음이 들었다. 올 때가 되서 내게 왔고 이제 갈 때가 되어서 갔노라고. 내가 사고 내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노란 호박알이 박힌 은반지는 나를 찾아왔다가 때가 되어 연기가 되어 사라졌노라고. 그리 마음이 드니 실제로 그것을 본 것 마냥 내 마음 속에서 像을 만들어내어 이제 나는 그리 기억하고 있다.

반지를 잃어버리고 며칠 뒤 책이 쌓인 방에서 노랗고 투명한 돌이 박힌 목걸이용 작은 십자가가 보였다. 그것을 산 기억이 없다. 굳이 기억을 짜내보면 세르기에프 빠사드 수도원에서 산 것도 같은데 그렇다면 그 방에 그 자리에 있을리가 없다. 더 생각해보면 산 기억이 아예 없다. 그런데 목걸이가 거기 있다. 잠자는 방 책상 높이의 옷장 위에 노란 십자가가 어울릴만한 곳에 두었다. 무슨 일인지 아직 영문을 모르겠지만, 아직 그대로 두고 있다. 집에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목걸리로 바꿀까 하는 마음이 드는데, 벌써 수년 째 내 목에 걸린 은십자가를 빼낼 수 없어 그냥 두고 있다. 연초록 보다는 노란 물이 더 든 투명한 색깔이 내 가슴에 들어온 것이다.

산길을 걷다 구절초 꽃잎, 미산 계곡 바람이 집 옆에 서있는 이름모르는 보라색 꽃을 보면 반투명 보라색 스카프가 생각이 난다. 누군가 그런 걸 두른 걸 본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