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ology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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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세계

"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소통해왔는가 " ... 2006년 10월 27일 제주시에서 열린 제 3회 세계한국학대회(주최: 한국학중앙연구원 ; 장소: 제주)


문명은 자생성과 함께 모방성이란 고유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생성과 발달은 필히 타 문명과의 교류를 수반한다. 이러한 교류는 구성요소를 달리하는 문명 간의 상호 전파와 수용을 통해 실현됨으로 모든 문명에는 이질적 문명요소가 뒤섞이게 마련이다. 이러한 뒤섞임으로 인해 문명과 그 주체는 세계성을 띄게 된다.

세계성이란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 함께함으로서 세계와의 일체감이나 공유성을 함양하는 정신으로서, 항시 외연적 세계성과 내재적 세계성의 2중적 좌표에서 표출된다. 한국의 세계성은 ‘세계속의 한국’(외연적 세계성)과 ‘한국 속의 세계’(내재적 세계성)에서 집약된다. ‘세계 속의 한국’은 세계 속에 들어가 있는 한국, 즉 바깥에서 세계와의 만남이고, ‘한국 속의 세계’는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세계, 즉 안에서 세계와의 만남이다. 이러한 한국의 세계성은 오늘과 내일에 필요한 정신일 뿐만 아니라, 어제부터 있어 온 실체다.

‘한국 속의 세계’는 세계와 문명유대를 이루고,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놓으며, 타 문명을 창의적으로 수용하는 과정, 즉 교류와 소통을 통해 세계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실현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전통문화가 더욱 아름답게 꽃폈다.


Ⅰ. 세계와의 문명유대

세계와의 문명유대란 오랫동안의 만남과 어울림, 즉 교류와 소통을 통해 세계와 공통적인 문명구성요소를 공유하는 문명대(권)를 말한다. 이러한 문명대의 존재 자체가 세계성의 발현이다. 한국은 일찍부터 끈끈한 문명유대로 세계와의 일체성을 유지하면서, 그 유대 속에서 높은 위상을 누려왔다.

태초에 한국은 신화소(神話素)를 공유하는 신화문화대로 세계와의 첫 유대를 이루었다. 한국의 단국신화와 서방 신화의 모태인 길가메쉬신화는 이 유대의 동·서 고리를 장식한 대표적 신화다. 두 신화는 다양한 신화소를 통해 당대 역사상이나 경험을 반영하고, 주인공들이 신력(神力)을 빌어 욕망이나 이상의 실현을 시도하며, 은유나 상징을 동원해 신화소를 삼은 것 등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상이점도 발견되는데, 그 첫째는 신화소의 짜임새다. 단군신화는 첫 머리를 여는 기(起, 환웅의 하강)와 그 뜻을 이어받아 전개하는 승(承, 웅녀와의 혼인으로 단군 탄생), 그리고 뜻을 한번 멋지게 돌리는 전(轉, 고조선의 건국), 마지막으로 전체를 거둬 맺는 결(結 , 단군의 산신화), 이른바 ‘기승전결’이 그토록 정연하나, 길가메쉬신화는 다양한 구조는 있으나 논리적 체계성은 모자란다. 다음으로, 이념적 지향성에서 그 상이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전자는 부지자의(父知子意) 같은 조화와 상생, 합일에, 후자는 부자상극(父子相剋) 같은 대립과 갈등에 각각 지향점이 마취지고 있다. 단군신화는 신화 특유의 보편성을 갖고 있지만, 투철한 동양사상에 바탕하고 겨레의 건국이념에 충실한 신화로서 신화의 한 본보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 4대 문화대의 하나인 거석문화대 가운데서 그 주류인 고인돌(지석, 돌멘)문화대는 한반도 특유의 세계적 문명유대다. 서북 유럽에서 지중해와 인도, 동남아, 한반도를 지나 남태평양까지 이르는 거석문화대, 특히 중국 요닝성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 서부에 이르는 이른바 ‘동북아 돌멘권’에서 한국은 단연 그 핵심국이다. 고인돌 위주의 세계 거석유물은 약 5만 5천 개에 달하는데, 그 중 약 4만 개가 한반도에 군집해 있다. 그래서 고인돌은 한국문화의 상징물로 자리매김 되고, 한국을 ‘고인돌의 나라’라고 하며, 2000년에 화순과 고창, 강화의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황금문화는 가장 값지고 귀중한 고차원의 문화로서 지구상에 황금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한 나라는 몇몇밖에 안된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경까지 약 1천년 동안 금의 산지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시베리아 동서를 관통하는 고대 황금문화대가 형성되어 인류 문명사의 한 페이지를 빛나게 장식하였다. 신라는 이 황금문화대의 동단에서 전성을 구가하였다. 그것은 금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현존하는 세계의 고대 금관유물은 모두 10점인데, 그 중 한국이 7점(가야 1, 신라 6)을 점하고 있다. 게다다 제작술이나 장식문양에서도 단연 압권이다. 이 신라 금관은 경주 일원의 150기 무덤 중 발굴된 30기 무덤에서 나온 것임을 감안할 때, 앞으로 더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래서 한국을 가리켜 ‘금관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작금 수천년 동안 줄곧 세계적 문명유대를 유지하고 있는 변문화대에서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새롭게 밝혀져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 오늘날까지 벼는 5대 주의 110여개 나라에서 재배되어 명실공히 범지구적 문화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역은 재배면적의 90%를 차지하는 아시아 나라들이다.

인간 주식의 3대 주종인 밀과 옥수수, 쌀 가운데서 밀과 옥수수는 그 기원이 이미 밝혀졌으나, 쌀만은 지금껏 이론이 분분하다. 대체로 7~8천년 전 동남아나 중국 남방에서 기원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그러나 이제 이 통설은 한반도로부터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원래 한반도에서도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좇아 기원전 1세기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일본유입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남북한 학자들의 공동노력에 의해 그 설은 밀려나고 기원전 2천년 신석기 시대 후기까지 기원이 소급되었으나 여전히 통설의 그늘에 가리워 ‘중국유입설’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1998년과 2001년에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오창과학산업단지 구석기유적의 17,000~13,000년(미국 GX방사성연구소는 14,820~13,010년) 전 토탄층에서 59톨의 탄화 볍씨가 발견되었다. 이 전대미문의 소로리볍씨 발견은 즉각 큰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9년의 제4회 유전학국제회의(필리핀)와 2001년의 소로리볍씨 국제학술대회(한국), 2002년의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워싱톤) 등일련의 학술모임에서 그 발견이 추인되었다. ‘인디카’, ‘자파니카’와 더불어 가위 ‘소로리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 볍씨의 발견은 세계 농업사에서 일대 획기적 사변이다. 벼 기원이 구석기 시대까지 올라감으로써 전래의 기원 통설이 깨지고, 한반도 벼가 남북방로를 통해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전래의 유입설이 수정되었다, 이와 더불어 벼가 수천년 동안 한반도와 세계를 이어준 문화유대라는 점도 확인되었다.


Ⅱ. 세계를 향한 열림

‘한국 속의 세계’, 즉 한국의 내재적 세계성은 세계를 향한 열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열림’이 아니었던들, 그 세계성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열림’을 강조하는 것은 무한 개방시대인 21세기를 맞아, 그와 상치되는 ‘은둔국’이나 ‘쇄국’이란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오해와 호도에 이제는 종지부를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가리켜 ‘은둔국’이라고 호도한 것은 언필칭 무지의 소치다. 고종8년(1871)에 내한했다고 하는 도꾜대학 동양사 교수인 미국인 목사 그리피스(Griffs, W.E.)는 1882년에 쓴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3부)에서 한국은 세상을 등지고 어디엔가 숨어사는, 세상을 알지도,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호젓한 은둔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마치 ‘은둔’이 한국의 체질인양 서양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왔다.

이와 더불어 ‘쇄국 조선’은 하나의 관용표현(慣用表現)으로 버젓이 나돌고 있다. 조선시대를 멍들게 한 병폐의 하나로 빗장을 걸어 잠근 ‘쇄국’을 꼽으면서, 바로 이러한 ‘쇄국’으로 인해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급기야 망국을 자초하고야 말았다는 것이 그 논리다. 이런 쇄국논리는 내적으로는 주로 19세기 후반 대원군이 주창한 쇄국정책에, 외적으로는 그 무렵 서구세계에 대두한 은둔국관에 그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것이 일제의 식민사관과 한국인 스스로의 자학적 역사관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굳어져 버렸다. 이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일종의 편단이다.

숱한 역사적 사실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야말로 ‘닫힘’이 아닌, ‘열림’에서 내재적 세계성을 다져가면서 발달해 왔다는 것을 명증하고 있다.

일본의 고미술사가인 요시미즈 쯔네오(由水常雄)는 신라의 로마 관련 유물을 30년 동안이나 연구한 끝에 상당한 논리적 및 유물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이란 평가를 내리고, 『로마문화 왕국, 신라』(2002)라는 전문 연구서까지 내놓았다. 그는 동아시아에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신라에 로마문화가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이렇게 주장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평가가 신라문화에 관한 지금까지의 통설에 ‘하나의 바람구멍을 뚫는’ 파격적인 논지가 될 것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는 신라가 문을 열고 로마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발생한 두 문화 간의 상관성을 하나하나 예시하면서, 그런 유물로 수목형금제관식(樹木型金製冠飾) 같은 공유성 유물, 각종 유리제품과 ‘미소짓는 상감옥’ 목걸이, 계림로단검(鷄林路短劍) 같이 고스란히 수용된 유물, 각종 장신구와 각배(角杯)처럼 변용해 창의적으로 수용한 유물 등을 열거하고 있다.

우리가 ‘은둔론’을 무지의 소치라고 단언하는 것은 그 옛날부터 한반도가 이웃과는 물론, 먼 곳과도 내왕과 교류를 해왔던 사실을 무시하고 한 헛말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서양 사람들보다 700~800년 앞선 9세기 중엽부터 아랍-무슬림들은 신라를 세상에 두 곳밖에 없는 ‘이상향’의 하나로 선망하면서 신라에 내왕하고 정착하며 신라와 교역을 진행하였다. 한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만방에 알린 사람은 다름 아닌 아랍-무슬림들이다.

중세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el-Idrisi)는 한국명(Coréa)이 적힌 최초의 유럽 지도라고 알려진 메르카토르(Mercator) 세계지도보다 무려 441년 전인 1154년에 제작한 세계지도에 신라 이름을 바르게 앉히고 있다. 그만큼 아랍-무슬림들은 일찍부터 한국을 알고 있었으며, 한국과 교류하고 있었다. 아랍-무슬림들은 신라로부터 비단, 검, 도기, 담비가죽 등 11종 물품을 가져갔으며, 신라는 그들로부터 각종 유리기구와 향료, 고급 모직물, 말의 사료인 목숙(苜蓿, 거여목) 등을 들여왔다. 7세기 후반의 사마르칸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사절도와 발해의 고성 노브고르데예프카성 터에서 발견된 8세기의 소그드 은화는 한민족의 정통국가인 고구려나 발해가 멀리 중앙아시와 교섭하고 교류하였음을 실증해준다. 그밖에 경주 괘릉의 무인석상이나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의 심목고비(深目高鼻)한 형상은 서역인들이 신라 땅에 와 상당한 위치에서 활동했음을 시사한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무턱대고 진부한 개념으로 치부하면서 마치 ‘배타성’이 그 속성인양 오도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점검하는 것 은 자못 절박하고 중요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1985년의 공식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의 275개 성씨 중 귀화성이 무려 130여개나 된다고 한다. 시대별 귀화성 수를 보면, 신라 때가 40, 고려 때가 60, 조선 때가 30개로서 고려 시대가 가장 많다. 그 중 중국계가 90%로 제일 많으며, 그밖에 여진계, 위구르계, 회회계, 일본계, 베트남계 등 다양하다. 이렇게 혈통적으로는 다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단일민족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일성을 민족의 저력으로 삼으며 자긍하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사실 생태학적으로 따져보면, 30여 인종의 혼혈로 이루어진 한민족은 ‘한 핏줄’일 수가 없다. 그래서 아마 100여년 전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화가이자 여행가인 새비지 랜더(A.H. savage-Landor)는 저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orea : Land of Morning Calm, 1895)에서 자신의 벽안에 비친 그대로 조선을 다민족의 혼혈사회라고 하면서, 두상과 체형이 서로 다른 38장의 인물 모사도를 그렸다. 혈통적으로는 분명 다민족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 핏줄’이니 ‘단일민족’이니 하고 주장하는 것은 대대로 포용성과 융합성이 남달리 강한 한국인들이 나름의 강렬한 용광로 속에 귀화인들을 용해시켜 적어도 생활문화나 의식구조 면에서는 단일민족 구성에 전혀 하자가 없는 튼실한 동질성과 단일성을 확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의 귀화정책에서 오롯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는 튼튼한 국력과 높은 문화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귀화인에 대해 ‘내자불거(來者不拒, 오는 자 거절하지 않는다)의 포용과 우대의 선정을 베풀었다. 귀화인을 호적에 편입하고 성을 하사하며, 관직을 제수하며, 주택과 전답, 미곡, 의복, 기물, 가축 등을 시여하는 주도면밀한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초 100년 기간에 약 17만 명이 귀화해 고려사회의 인적 구성은 물론, 사회발전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 중에는 베트남 이 왕조(1009·1226)의 왕손으로 옹진반도에 피난해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가 된 이용상(李龍祥)과 25대 충렬왕 때 몽골비 제국공주의 종관으로 내려한 덕수(德水) 장씨의 시조인 덕성부원군 장순룡(張舜龍) 같은 인물들이 있다.

지금껏 세계를 향한 열림에서 가장 큰 오해를 불러 온 이른바 조선의 배타적 '쇄국론의 직접적 근거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다. 사상 드물게 519년이란 장수를 누린 조선조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자율적인 힘에 의해 바야흐로 근대화라는 정상적 궤도를 따라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후반에 이르러 신흥 서구세력과 후발 일본의 도전에 직면해 이런 궤도가 가로막히게 되자 근대화 개혁을 지향한 대원군은 부득불 임기응변의 방편으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쇄국정책을 택하게 된다. 섭정으로 시작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10년(1863~1873)이란 단명으로 끝났다. 조선 전 기간의 열림을 감안하면, 쇄국은 자구(自救)를 위한 일시적 몸부림에 불과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중국이나 여진 등 이웃과 정상적인 국가관계를 유지해 왔다. 명나라와는 전통적 사대교린정책을 계승해 내왕과 교류가 끊기지 않았다. 초기에는 해마다 7회씩이나 견사하다가 점차 줄기는 했지만, 그 회수가 병자호란(1636) 때까지 242년간 총 186회(거의 1년에 1회)에 달했으며, 명나라도 상응하게 견사하였다. 공무역이나 사무역, 밀무역 등 경제문화 교류도 여전하였다. 여진과는 변경지대에 교역장을 개설하고 수도 개성에는 북평관(北平館)을 세워 사신을 맞아 교역을 하였으며, 지어 여진인들을 왕궁 시위로까지 기용하였다.

부단한 소요를 일삼는 일본에 대해서도 대국적 차원에서 문호를 열어놓았다. 세종 연간 해마다 200여 척의 일본 배와 약 5,500명의 일본인이 오갔으며, 쯔시마(對馬) 영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내이포(乃而浦, 熊川 ), 부산포(富山浦, 東萊), 염포(鹽浦, 蔚山)의 3포를 16세기 중반 중종 때까지 개항하고 일본인들의 거주를 허용하였다. 이에 자극 받아 류뀨(琉球)의 중산왕(中山王)은 국서를 보내 신하로 자칭까지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207년간 총 13회의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일본인들의 내왕무역을 허용하는 을유조약도 체결하였다. 그밖에 멀리 동남아시아와의 내왕과 교류도 이어져, 거기로부터 약재와 향료, 염료를 수입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 군대에 소속된 타이나 인도 군사들이 성주(星州) 지방에서 조선군과 함께 항일전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열린 땅에서 사는 조선 사람들은 선량하고 외인에 대해 너그러웠다. 1816년 9월 조선을 탐사하기 위해 온 최초의 서구인인 영국의 배질 홀(Basil Hall) 선장은 10일간 서해안의 백령도와 장항만, 고군산열도, 신안해협, 제주도를 두루 탐사하는 과정에서 만난 주민들은 낯선 이방인인데도 다정하게 대해주며 함께 술을 마시고 즐겁게 보냈다고 『조선서해탐사기』(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1818) 에서 회고하고 있다. 그는 이듬해 초 귀국길에 대서양의 작은 섬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a)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후배인 유배 중의 나폴레옹을 만난다. 홀은 조선의 풍물을 소개하고 나서 “이 나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어서 이제까지의 유서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선량한 민족”이라고 설명한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도 있다더냐 ? 내가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가보리라”고 화답한다. 전란 속에서 한생을 보낸 나폴레옹에게 마지막 진혼곡을 들려준 나라가 바로 너그럽고 평화로운 조선이었다.

일부에서는 일시적 요동에 불과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일본의 장기적이고도 지독한 쇄국정책과 동일시하거나 그 연장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심한 착가이다. 일본은 근대화 전야인 에또(강호) 시대 264년(1603~1867) 가운데서 무려 241년간(1612~1853)이나 도꾸가와막부(德川幕府)가 쇄국정책을 강행했는데, 그 핵심은 기독교 금지와 막부의 무역독점이다.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처음에는 무역을 위해 기독교를 묵인하다가 신자가 70만에 달하자 1612년에 에또, 교오또 등 직할도시에서의 기독교활동 금지령을 내려 교화를 폐쇄하고 선교사나 신자들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학살하였다. 동시에 독점조합을 만들고 도항허가증을 발급하며 무역항을 축소하는 등 국내외인들의 무역활동도 통제하였다. 심지어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하고 스페인과는 국교를 단절하는 극단적 조처까지 취하였다. 쇄국대상에는 네덜란드나 포르투갈말고도 중국이나 조선, 류뀨까지도 포함시켰다.

장장 2세기 반 동안이나 지속된 쇄국정책의 결과 일본은 서양의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데서 조선보다 한발 늦었다. 조선은 1402년에 당시로서는 가장 뛰어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완성했는데, 일본은 390년 뒤(1792)에야 재중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그린 지도를 본떠 <곤여지도(坤與地圖)>란 세계지도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세종 때 원나라와 명나라, 회회의 역법을 참고해 조선식 역법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했는데, 일본은 약 250년 뒤(1684)에야 회회법에 준해 <죠꼬레끼(貞亨曆)>를 만들어 근 200년이나 사용하였다.


Ⅲ. 창의적인 수용

일 국의 내재적 세계성은 타 문명을 창의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창의적 수용이란 남의 것을 무턱대고 통째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정에 맞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소화시킴으로써 전통문명을 가일층 발전 풍부화하는 것을 말한다. 타 문명을 창의적으로 수용할 때만이, 문명 전반이 살찌고, 그 속에서 참된 세계성이 구현되며, 나아가 인류의 보편문명 건설에도 이바지하게 된다. 한국의 문화유산에서 이러한 사례들을 숱해 찾아보게 된다.

국보 24호인 경주 석굴암은 건축구조나 내용물에서 창의적 수용성이 두드러진 유물의 하나다. 불교에서의 석굴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인도에서 사당격인 차이티야(chaitya)굴과 승방격인 비하라(vihara)굴의 두 형식으로 출발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4세기에 중국에, 7~8세기에 신라에 전래되었다. 신라의 대표적 불교 석굴인 석굴암은 인도나 중국의 석굴형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실정에 맞게 창의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조영법에서 인도나 중앙아시아, 중국은 지질이 무른 석회석이나 대리석이라서 굴을 뚫고 그 속에서 내용물을 조각하는 자연석굴 형식을 취하나, 화강석이 대부분인 신라에서의 석굴은 산을 파 굴을 만들고 조각된 내용물들을 안치한 뒤 흙을 덮는 인공석굴 형식으로 지어졌다.

건축구조에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신라인들 특유의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반영해 지상세계인 전실은 네모꼴로, 하늘세계인 주실은 둥근 모양의 돔 형식으로 꾸몄다. 불교의 주제와 신라인들의 종교관, 간다라미술과 신라인들의 미의식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킨 석굴암의 내용물은 정각상의 본존불을 비롯한 불상의 총집합체로서 ‘동양의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 받아 196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신라의 대표적 향가인 ‘처용설화’는 시각에 따라 그 내용이 달리 해석되기도 하지만, 제1차적 사료원인 『삼국사기』의 기록과 9세기 말 신라와 서역 간의 교류관계를 감안하면, 왕의 어전에 나타나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양이 놀랍고 의관이 괴상한(形容可駭衣巾詭異)’ 4사람은 서역에서 온 이방인들임에 틀림없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처용(處容)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급간(級干)이란 직급을 주어 정사를 돕게 하고, 미녀를 아내로 맞게 해 설화의 주인공으로 윤색함으로써 신라의 대표적 향가로 승화시킨 것은 신라의 차원 높은 수용성을 말해준다.

이러한 수용성은 백제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세계 향로사의 백미라고 일컫는 백제금동대향로는 주제나 공예기법에서 재래의 것을 창의적으로 수용해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걸작품이다. 1,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이 백제 향로는 맨 위의 봉황과 산악도가 촘촘히 부조된 뚜껑, 연꽃이 장식된 몸체, 몸체를 물고 있는 용받침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상의 봉황은 고대 동이족이 숭배하던 지상과 천상을 잇는 신조(神鳥)로서, 이러한 신조사상은 북방유목민족의 문화에 연유된다. 뚜껑에 장식된 5악사가 연주하는 완함(서역), 피리(쿠차), 배소(북방유목민), 항아리식 북(동남아), 거문고의 5악기 중 거문고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외래 악기다. 이렇듯 향로의 5악은 동서남북의 음악으로 화음을 이루고 있다. 몸체에 3단으로 장시된 연꽃은 연화화생(蓮花化生)의 뜻을 담고 있는 불교적 이념의 상징이며, 몸체를 받드는 용은 신선사상을 반영하는 영물이다.

봉황이 악사와 함께 있는 모습이나 수렵도 같은 것은 중국이나 서역 향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다. 그리고 전부를 두드러지게 하는 입체적 환조(丸彫)나 부분만 두드러지게 하는 반입체적 부조(浮彫), 투명한 도안을 나타내는 공간적 투조(透彫) 같은 조각의 모든 기법을 완벽하게 소화한 공예미술의 결정체다. 요컨대,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인들의 숭고한 정신세계와 진취성, 독창적인 금속공예술을 입증해줄 뿐만 아니라, 창의적인 수용의 향훈을 듬뿍 풍기고 있다.

고려문화의 ‘금자탑’이며 불교경전의 ‘총서’라고 하는 고려 8만 대장경도 구경은 선행한 불교 경전들을 창의적으로 수용한 결과물이다. 이 대장경이 편찬은 『초조대장경』(1011~1087, 77년간, 6,000권)에서『속장경』(1073~1099, 26년간, 4,740 권)을 거쳐 『재조대장경』(일명 『팔만대장경』, 1236~1251, 16연간, 약 81,340권, 5,200만 자)을 완성할 때까지 무려 240년간(1011~1251)이나 걸린 세계 인쇄사상 전무후무한 대역사다. 편찬자들은 고려가 도달한 높은 불교문화수준에 바탕해 송나라나 거란 등 이웃 나라들에서 나온 장경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참고해서 동양 20여 종 장경 중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대장경의 편찬에 성공했던 것이다.

조선이 서구의 근대화 문명인 서학(西學)을 수용하는 데서 나타낸 창의성과 독창성은 더더욱 돋보인 다. 서학은 내용 면에서 크게 이적(理的) 측면인 사상과 종교, 기적(器的) 측면인 과학과 기술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동양 3국은 서학 수용을 자체의 근대화와 동점하는 서세(西勢)에 대한 대응 방편으로 삼는 데서는 궤를 같이하고 있지만, 수용태도나 미친 영향 면에서는 서로가 다르다. 조선은 전통적 제도와 사상은 지키면서 근대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일본은 일본의 정신 위에 서구의 유용한 것을 가져다 사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중국은 중국학문을 바탕으로 하여 서구학문을 수용한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표방하였다.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문제는 수용태도이다. 조선의 서학은 일본이나 중국처럼 외래의 서구인들이나 국가권력의 개입 등 타율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 자신의 자율적 노력에 의해 받아들였던 것이다. 17세기 초부터 북경에 파견된 사신들은 재중 서양 선교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처음으로 서양세계와 접하면서 서구의 과학기술에 매료되어 한역 서양자료들을 구해가지고 귀국한다. 1603년 이광정(李光庭)이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한역 세계지도를 가져온 것이 그 단초다. 사신들은 선교사들이 거주하는 사천주당(四天主堂)이나 기술제공기관인 흠천감(欽天監)과 산학관(算學館)을 방문하면서 서학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 이렇게 약 150년 동안의 북경 사행을 통해 화포, 천리경, 자명종, 천문관측의기, 역산법 등 과학기술 문물과 한역된 세계지도와 지리학서 같은 서학서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지작업 끝에 마침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학자들이 선도한 조선의 서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학에 대한 대응책은 시각과 입장에 따라 상이했다. 크게는 전면 배격과 전면 수용, 부분 수용의 세 가지다. 서학의 개조격인 이익(李瀷, 1681~1763)은 서학의 과학기술에 관해서는 다각적 검토를 가해 그 선진성을 이해하고 중화주의적 지리관 탈피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학의 종교윤리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유교의 상제(喪祭)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지옥설 같은 것은 부조리를 잉태하고 있다면서 배격하였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을 비롯한 배격파는 서학을 연구는 하되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학을 보위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면서 서학 수용을 거부하였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남인파는 전면 수용을 설파하였다. 정약용은 서교(西敎), 즉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가 정조의 명을 받고 스스로 멀리하겠다는 ‘자벽서(自辟書)‘까지 썼지만, 바깥은 유교고 속은 예수교라는 ’외유내야(外儒內耶)‘의 평을 받을 정도로 서교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용후행을 위해서 실리적인 기예인 과학기술을 터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원성 축조시(1796) 거중기를 발명해 돈 4만 냥을 절약하였다. 북학하는 2중 잣대로 부분(선별) 수용을 주장하였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과학자라고 하는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서학 속의 천주학은 배격하나 수학이나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은 탐복하면서 수용을 권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진실로 국민을 위해 유익한 것이라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이라도 취해야 한다‘고 실용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의 서학자들 대부분은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서 서학에 대한 심층적 연구와 논쟁을 통해 그 이해를 심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서구 과학기슬의 선진성을 인식하고 그 도입과 활용에 나섰다. 지어 전통적 유교사상과 배치되는 서구의 종교에 대해서도 진지한 탐구를 거쳐 일부이기는 하지만 신앙적 수용에까지 이르렀다. 세상에서 서양종교가 자율적으로 수용된 나라는 조선뿐이라는 사실은 뛰어난 문명 수용성과 자정능력을 말해준다,

조선의 이러한 수용성와 자정능력은 서양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창의적으로 수용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조선인들은 서양의 근대적 천문지리 지식을 동양의 전통 우주론으로 재해석하거나 서로를 조화시키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3번이나 중국에 사행한 이수광(李睟光)은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하는 『지봉유설(芝峰類說)』(10책 20권, 1614)에서 땅은 네모난 것이 아니라 둥글다는 지원설을 주장하고, 성리학자이자 과학자인 최한기(崔漢綺)는 저서『지구전요(地球典要)』(7책 13권, 1857)에서 기철학(氣哲學)에 근거한 독창적인 조선식 우주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재중 선교사들의 저서들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을 접하고는 수긍은 하나 그 원리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다르게 한다. 그는 『신기통(神氣通)』(1836)과 『성기운화(星氣運化)』(1867) 같은 철학저서에서 천체운동과 우주현상에 대한 자신의 기철학을 피력하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천체는 둘레에 공기층인 기륜(氣輪)이 있어 항시 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만유인력법칙은 우주의 운동현상을 적시하고는 있지만 그 원인은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중력의 작용은 천체를 둘러싸고 있는 기륜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서 생기는 현상이며, 지구에 아침 저녁이 생기는 것은 지구와 달의 기륜이 서로 접촉하고 작용하는 증거라고 설명한다. 흙, 물, 불, 공기로 우주의 변화를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부정하면서, 우주에 있는 근원적인 기가 변해 흙, 물, 불, 공기가 된 것이므로 이 4원소를 근본물질로 볼 수 없다고 논박한다.

우주관에 대한 이러한 재해석과 더불어 조선인들은 고질적인 중화주의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넓은 세계로 눈을 돌리는 거시적 세계관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지리서나 세계지도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한국어과 교수인 레드야드(G. Ledyard)가 펴낸 『지도학의 역사』(History of Cartography 2)는 표지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를 선정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지도는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 지리관에서 탈피해 조선의 ‘심리적 크기’를 강조하면서 중국의 서쪽에 유럽과 아랍 및 아프리카를 그려 넣고, 100여개의 유럽 지명과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을 기재하고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천문, 지리, 경서, 문자, 언어, 복식, 지어 곤충 같은 인문지리나 자연과학의 세세한 부문까지 설명할 뿐만 아니라, 안남(安南, 베트남), 섬라(暹邏, 타이), 자바, 말라카, 불랑기(佛郞機, 포르투갈), 영결리(永結利, 영국) 등 여러 나라들에 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총 3,435항목에 거론되는 인물만도 무려 2,265명이나 된다. 최한기는 자신의 독창적인 우주론과 세계관을 집약한 『지구전요』에서 우주구조와 지구상의 인문지리 현상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의 5대주 6대양에 관한 총론을 펴고, 각론으로 매 주에 속한 각 지방과 국가의 강역, 풍토, 물산, 정치, 예절, 병제 .... 등에 관해 일일이 상술하고 있다.

근대화를 향한 잉태 속에서 이수광과 최한기가 주춧돌을 놓은 새로운 세계관의 배턴을 넘겨받은 유길준(兪吉濬)은 최초의 국한문혼용체인 여행견문기『서유견문(西遊見聞)』(1책 20편, 1895)을 10년의 노고 끝에 펴냈다. 내용의 대부분은 세계지리와 서양문물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 행간에는 개화사상이 관류하고 있다. 그래서 개화사상의 ‘교본’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에게 서양의 것을 너무 긍정하는 편향이 없지는 않지만, 그는 개화를 하는 데서 외국문화를 자국의 실정에 맞춰 수용하고 소화하면서 자국의 우수한 문화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넓은 세계로 향한 이들의 우주관이나 세계관을 살펴보면, 모두가 새로운 것을 통째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그리고 실정에 맞게 유익한 것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다들 서양의 선진문물에 매료되어 적극 받아들이고 있지만, 동양적인 전통사상을 잣대로 새롭게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이렇게 한민족의 역사에서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함께 하는 세계정신은 한국의 첫 세계인인 신라의 혜초에서 발원된 뒤 고려시대의 온축기를 거쳐 조선시대에 와서 ‘세계화 서적’을 줄줄이 펴낸 이수광과 최한기, 유길준으로 맥이 이어졌으며, 오늘은 또 수많은 새내기 세계인에 의해 더 알차게 영글어가고 있다. 이 세계정신이야말로 미래를 향한 비상을 가능케 하는 정신적 자양분이다.


한국은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놓고 타 문명을 창의적으로 수용하고 독창성을 발휘해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워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와의 공시적 지평에서 따져보면, 근대화의 문턱에서 좌절되었다든가 하는 모자랐던 일들이 통절한 경험 교훈으로 남는다. 공자가 말하듯이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 봐야 하기”(告諸往而知來者)에, 또 역사는 과거사실이지만 미래를 보는 창이기에 이렇게 과거에 대한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한국 속의 세계’는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오늘은 그 길을 따라 한류(韓流)가 일렁거리고 있다. ‘한국 속의 세계’가 한국의 내재적 세계성이라면 ‘세계 속의 한국’을 상징하는 한류는 그 외연적 세계성이다. 이 두 세계성은 상호 보완관계에 있으며, 서로가 조화될 때, 한국은 그 완숙함을 더해 갈 것이다. 백제문화의 일본 전파를 한류의 원류로 본다면, 한류의 역사는 1,500여년을 헤아린다. 이제 부침(浮沈)을 거둬내고, ‘세계 속의 한국’이란 위상에 걸맞게 큰 흐름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문화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한국학은 이러한 내재적 및 외연적 세계성에 의해 당위적으로 일어나는 문화접변(acculturation)이나 교류에 응분의 학문적 관심을 기울여 그 정립에 천착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한국학이 될 것이다. 그 과제는 이 자리를 함께 한 국내외 학자 여러분이 수행해야 할 몫이다.


모처럼 이러한 주제를 놓고 열리는 이번 세계한국학대회가 큰 성과를 거두기를 다시 한번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