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105-2
역사비평 : 전우용
민족주의는 요즘 동네북이다. 어느새 구시대적 패러다임으로 낙인찍혔다. 대신 탈민족주의·초민족주의가 기세등등하다. 일제 식민지 시대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논리가 ‘실증적 엄밀함’을 무기삼아 다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위기에 처한 것은 민족주의 전체가 아니라 저항적 민족주의다. ‘기억의 정치’와 ‘민족주의 과잉’을 비판하는 목소리의 뒤에는 ‘그들의 기억’에 의한 역사 재구성의 정치기획이 숨어있다. 희극이자 비극인 것은 그 와중에 탈민족주의가 슬그머니 팽창적 민족주의와 손을 잡는다는 점이다. 민족주의 논쟁의 현주소를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 전우용 서울시립대 연구위원 ‘역사비평’서 비판
역사는 기억과 기록의 학문이다. 그래서 ‘역사 주체’의 문제가 핵심적이다. 누구의 기억인가, 누가 그 기억을 오늘에 불러냈는가, 누가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가 등의 갈래를 잡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첫 장이다.
최근 민족주의 논쟁이 이 문제를 교묘히 은폐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한 소장 역사학자가 있다. 전우용(사진)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은 <역사비평> 겨울호 시론에서 탈민족주의와 팽창적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보수 지식인과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보수언론을 동시에 비판했다. 의제설정을 언론이 도맡아 하는 한국에서 민족주의 논쟁의 ‘언론지식정치 메커니즘’을 꿰뚫어본 글이다.
‘보수언론의 팽창적 민족주의가 탈민족주의를 원하고, 탈민족주의자들은 팽창적 민족주의를 눈감아줘‥
그는 먼저 ‘기억의 경계’에 대해 설명한다. “일제에 대한 집단적 체험의 기억은 민족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가상의 기억이 결코 아니”며, 이는 “민족을 경계삼아 이뤄진 학대·차별·수탈에서 형성된 집단적 기억”이다. “민족의 ‘경계 밖’에 있었던 자들은 결코 공유할 수 없었던 기억”이기도 하다.
친일세력, 나아가 군사독재세력 및 수혜자들은 피해자의 집단적 기억을 공유할 수 없다. 심지어 그런 기억은 기록과 수치를 통해서도 증명되지 않는다. 독재시절 고문 사건은 가해자의 주장과 피해자의 진술 외에 문서상의 증거가 없다. 이를 유일한 자료로 받아들일 경우, 이는 ‘가공됐거나 기껏해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에 불과하다. “고문은 했지만 상부의 지시는 없었다”는 식의 가해자의 고백조차도 “책임의 한계를 고문경찰 내부에 국한”시킬 뿐이다. 이런 식의 역사접근은 모든 판단을 유보시키고 오직 ‘어쩔 수 없이 나약했던 개인’만 남긴다.
이는 ‘계량의 함정’으로 이어진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조선인과 국가보안법 피해자는 언제나 특수한 소수다. 평균적인 보통 사람들은 일제 시대에도 신문물에 열광했고, 군사독재시절에도 청바지와 통기타에 열중했다. 이를 새로운 역사적 사실인양 강조하는 학자들은 “민족주의라는 색안경때문에 민족문제가 실제보다 과도하게 인식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 위원은 푸코의 ‘인위적 경계짓기’라는 개념을 통해 평균적 다수의 신화를 뒤엎는다. 감옥은 다수를 가둬서 감옥 밖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금기의 영역 밖에 서있는 한, 개인은 소소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 과거사 규명과 보안법 폐지는 금기의 영역 외부에 ‘정상성’을 설정한 “보통 사람들의 인식지평과 공간을 늘리는 일”이다. 동시에 이는 진정한 탈민족 기획의 토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게 ‘세계의 보편적 표준’에 맞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 위원은 “설득력 없는 자료를 긁어모아 민족정체성 회복을 위한 간도의 원상회복을 주장하면서, 반세기 전의 일은 시대착오적 민족주의의 소산이니 그냥 덮어두자고 하는” 보수언론의 논리를 꼬집으며, “민족주의가 편협하다고 목청 높이던 지식인들이 정작 자신들에게 기꺼이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수구언론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는 기묘한 현실”을 비판했다.
보수언론의 팽창적 민족주의가 탈민족주의를 동원하고, 탈민족주의자들은 팽창적 민족주의를 눈감아주는 가운데, “민족을 경계로 한 열강의 간섭과 차별, 억압을 반대하는 우리 민족주의의 본령인 저항적 민족주의는 위기에 처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민족주의 극복의 길은 따로 있다. “민족주의는 세계사적 시야에서 볼 때 분명 시대착오적이지만, 시대착오적인 것은 지역주의, 가부장제 등도 마찬가지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재생산되는 구조를 청산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한겨레> 2004.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