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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ath
Parha (토론 | 기여)님의 2008년 12월 3일 (수) 19:5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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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각

..........마광수


정지용의 서문이 붙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처음 간행된 것은 1948년이다. 그러나 해방이 가져다준 감격의 소용돌이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윤동주를 문학적으로 재평가하고,그에게 정당한 위치를 찾아주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윤동주의 생애는 지극히 짧은 것이었다. 그는 1917년 12월30일 북간도 용정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고 애국정신이 강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간도로 이주하여 개척사업과 교육사업에 공헌한 지도적 인사였고, 아버지 또한 학교 교원으로 일했다고 돼있어 지사적 기개가 넘친 집안임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조부와 부친이 똑같이 그곳 교회에서 장로직을 맡은 것으로 보아 윤동주의 성장배경에는 가정적으로 기독교적 분위기가 상당히 강했던 것 같다.

아동잡지 `어린이'의 애독자였던 그의 어릴 적 이름은 해환이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중국인 관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전입했다. 그러나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문을 닫고 일본 사람손에 접수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전입하였다.

그즈음부터 동시를 많이 써서 `카톨릭 소년'지에 `빗자루'(36년) `병아리'"(36년) 등을 `동주'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8년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41년 11월에 졸업한다. 이때 스스로 추려 뽑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자비출판하려 했으나 일본경찰의 단속을 걱정한 스승 이양하의 만류로 단념하고 후일 1942년 초 `평소동주(平沼東柱)'란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동년 4월 일본 동경의 입교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가을에 경도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1943년 여름방학에 귀국하려던 그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고문섞인 취조를 받았다. 결국 그는 1945년 2월16일 28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만다.

그는 한.일합방이후에 태어나서 민족광복을 맞이하기 직전에 죽었다. 그가 시를 썼던 시대(1936년~1943년)는 모든 사람들이 시를 외면했던 때였다.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에서는 공습 경보가 울리고 있었고 거리에는 군가가 흘러넘쳤다.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의 이미지,그리고 `병원'이나 `위로'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소외의식에 넘친 절망적인 몸부림은,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창백하고 무기력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자신을 한탄하는 윤동주의 처절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자연을 소재로 한 상징적 어구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그 당시 문학인들에게 만연했던 현실도피, 자연귀의의 사조와 아주 무관하진 않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저항시인이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로 보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의 시 어느 곳에도 저항의 기백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가 옥사한 것은 어찌 보면 군사독재시절 이한렬군이나 박종철군의 죽음과 견주어질 만한것으로서 시대를 잘못 태어난 양심적 지식인의 억울한 비명횡사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는 깊은 애정과 폭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서도 실제로는 회의와 혐오로 자신을 부정한, 어찌 보면 결벽증에 가까운 휴머니스트였다.그는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보고 낭만적인 폭음 또한 멀리했던, 당시로 보면 `시인답지 않은 시인'이었다. 기독교 가정에 기독교 학교로만 일관한 그의 환경이 그를 청교도적 죄의식으로 이끌어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남에 대한 애정이 곧 자기자신에대한 자괴감(自愧感)과 부정의식으로 변모하는 그의 인생관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 있다. `투르게네프의 언덕' `간' `쉽게씌어진 시' 같은 작품이 그 보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동주를 투쟁적 이미지의 저항시인으로 보지 않고 회의적 휴머니스트로 본다고 해서 그의 시의 가치가 깎여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스스로에 진짜로 `솔직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의 가치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함께 생각될 수는 없다. 시는 시인의 자기통찰과 자기연민,그리고 본능적 욕구의 대리배설로 이루어질 때 한결 진솔한 감동을 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동주의 저항은 끊임없는 자기 내면 또는 본능적 자의식과의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스스로의 시인기질에 따른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자각하고 있었던 그는 시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참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욕구와 비애를 시창작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했으며 철저한 자기분석을 통해서 자아의 변증법적 발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가 목표했던 저항의 대상은 외부로부터의 물리적 압박이나 조국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었다. `자화상' `참회록' `또 다른 고향' 등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내적 투쟁의 기록을 역력히 읽을 수가 있다.

특히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학적이며 자기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보기를 들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앞서 말했듯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되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적 이데올로기(또는 사상)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 보면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무언가를 `부르짖거나' `가르치거나' `과장적으로 흐느끼는' 대신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윤동주의 `발가벗기'는 다분히 실존적 현학의 냄새나 종교적 형이상성의 냄새를 풍기는 발가벗기이다.그래서 좀더 자신의 심층아래로 내려가 본능적 욕구를 발가벗기는 데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그는 `퓨리터니즘'이라는 옷을 태어날 때부터 두텁게 입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당시 지식인들의 정신적 정황이 본능보다는 관념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윤동주의 `발가벗기' 정도만 가지고서도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문학은 이광수류의 계몽적 시혜주의에서 한발자욱도 못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의 또 다른 장점은 그가 어느 계파나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독자적 시세계를 구축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라면 대부분의 시들이 정지용류의 감각적 서정주의나 카프식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시, 둘 중 하나일 때였다. 또 자연을 노래한다고 해도 전원주의적 회고주의가 고작이었고 윤동주처럼 자연을 내적 갈등의 상징으로 응용한 시인은 없었다. 남들이 모더니즘이니 초현실주의니 하고 외국의 유행사조에 민감해 있을 때 그는 다만 일기를 써나가는 형식이나 경향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의 심경을 담담히 고백해 나갔던 것이다.

나는 문학은 문학일 뿐 그것이 문학이상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엄청난 힘'이란 문학이 혁명가나 사제의 역할까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학은 문학 나름대로의 `힘'을 어찌됐든 가지고 있다. 그 힘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요,정신중에서도 이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이나 감각 또는 본능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처럼 단기간에 효력을 나타낼 수는 없다. 문학의 효력은 서서히 나타나 인간의 의식 자체를 변모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이란 이성과 감성,본능과 도덕이 합쳐서 이룩되는, 보다 통체적인 직각(直覺)의 양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윤동주는 옥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절대로 `총각귀신'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하게도 `투사'보다는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을 한 시대의 상징적 희생물로 만드는 일이 많다. 윤동주는 바로 그러한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일제말 암흑기,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


자크 랑시에르 대담

지난주 한국을 찾은 자크 랑시에르(68) 파리8대학 명예교수는 정치와 평등, 민주주의에 관한 독창적 사유로 주목받는 프랑스 철학계의 거목이다. 그는 1일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철학)와의 대담에서 “진정한 정치는 사회에서 주변화되고 배제됐던 사람들이 새로운 통치 주체로 참여하는 과정”이라며 “경제위기로 삶의 불안이 심화하는 지금이야말로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삶의 불안정화에 맞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이야말로 한계에 직면한 조직 노동운동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대담은 주한 프랑스문화원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진태원(이하 진)=지구상의 모든 정부가 민주정부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는 어느 순간 진부한 것이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사람들은 대의제와 인권을 민주주의의 핵심요소로 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인민이 가진 권력 자체다. 그것은 (국회의원처럼) 인민의 대표를 자임하는 자들이나, 사회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은 집단들이 행사하는 권력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대의제를 통해 인민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기성의 시스템을 넘어서려는 힘이며, 배제되고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가 돼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상치 못했던 시간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주체들이 공적인 문제들을 결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진=최근 한국에도 출간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란 책에서 당신은 ‘치안’과 ‘정치’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 차이는 어떤 것인가.

랑시에르=사실 그 개념들은 정치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사람들은 보통 정치를 ‘국가가 사회를 경영·관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이것을 정치가 아닌 치안이라고 본다. 치안은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고정된 자리와 정체성을 배분하는 작업이다. 이런 치안의 논리를 문제삼고, 여기에 새로운 집단성을 개입시키는 활동이 정치다. 말하자면 정치는 부·지식·가문 같은 자산의 크기에 따라 사회를 분할하는 치안 논리에 맞서, 어느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 능력을 가지고 통치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활동이다.


진=당신의 사상에서는 데모스(demos), 인민(people)이란 개념이 중요하다. 지난여름 한국에서는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며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신이 얘기하는 인민인가.

랑시에르=내가 말하는 인민이란 주민의 총합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고 투쟁하는 사람들이다. 흔히 생각하듯 정치적인 것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란 정치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조차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집단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건강처럼 비정치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제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한국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인민이었다.

진=수입 철회 조처가 없었음에도, 대통령이 나서 사과한 뒤 촛불시위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시위가 가라앉자 정부는 주동자를 구속했고 사과 자체를 부정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촛불시위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랑시에르=운동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려면 처음 내걸었던 요구가 충족됐는지, 또 사회적 세력관계가 운동을 통해 변화했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2006년 프랑스에서는 정부의 최초고용계약제(CPE)에 반대하는 시위가 장기간 지속됐다. 정부가 결국 정책안을 철회했지만, 과연 이 시위가 성공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문제는 정부가 양보한 뒤 거리의 정치공간은 닫혔고, 운동은 무장해제됐다는 점이다. 요구안의 즉각적 성취를 넘어, 사회의 독점적 합의체제에 얼마나 균열을 일으켰는지가 중요하다.

진=세계적 경제위기는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어선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당신의 민주주의론이 비정규직 노동을 포함한 사회문제를 새롭게 사고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랑시에르=비정규직 노동은 한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 없이 노동자의 신분은 전반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역할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직 노동운동처럼 동질적 계급 이해에 기반한 운동은 쇠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네그리같은 학자는 ‘비물질노동’이란 개념을 통해 정규 노동시장에 편입되지 않은 서비스·비정규직 노동자 집단의 존재에 주목하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확장이란 차원에서도 지금의 시스템에서 일정한 권력 지분을 갖고 있는 전통 노동운동보다, 주변화되고 배제된 이 노동자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

진=이 과정에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랑시에르=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탈정체화’를 정치의 출발로 규정한다면,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사실상 없다. 지식인들은 주어진 자리를 분배하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인/비지식인, 전문가/비전문가, 전공자/비전공자의 구분과 차별을 깨뜨리는 것이다.


대담자 진태원 고려대 교수/ 정리 이세영 기자

생명평화의 길을 묻다-정양모 신부 즉문즉설(1)

지 난 11월27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수도회 강당에서 생명평화결사가 마련한 ‘생명평화의 길을 묻다’란 주제의 다섯번째 즉문즉설에 정양모(72) 신부가 나섰다. 프랑스 리옹가톨릭대를 졸업하고, 독일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71년부터 광주 가톨릭대, 서강대, 성공회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온 정 신부는 한국 가톨릭계의 대표적인 진보신학자다.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다석 유영모(1890~1981)를 기리는 다석학회 회장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를 비판한 저서 <한국 가톨릭교회 이대로 좋은가>(1998)로 주교회의로부터 주교회의 발행 간행물에 글을 실을 수 없도록 하는 제재를 받고 있다. 이날 100여명의 청중들은 민감한 신학적 사안에 대해 거침없이 질문을 던졌다. 사회를 본 생명평화결사 공동체 황대권 위원장의 첫 질문은 ‘왜 예수는 재림하지 않는가’였다. 정 신부의 답변도 거침이 없었다.

-지금은 가톨릭 절기로 대림절(성탄절 전 4주간)이다.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주간’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주님이 오지 않은 지 2천년이 흘렀다. 어떻게 된 일인가?


=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기독인들에겐 2천년 전에 이미 왔다. 그분은 부활해 승천했고,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는다. 대림신앙은 성서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다. 신약성경 27편 전서가 가장 많이 쓰인 시기는 서기 50년쯤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뜬 지 20년 만에 쓰인 것에 재림신앙이 분명히 들어 있다. 우선 ‘마태복음 10장’ 제자들을 둘씩 이스라엘 각지로 파견하면서 이스라엘을 두 바퀴 돌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온세계를 누비고 있는 지금까지도 온다는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를 않는다. 파리 가톨릭대 알프레드 노하지는 그래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나님의 나라는 안오고 생각지도 않은 교회가 태어났다’고 해서 교황 비오 10세한테 사제직, 교수직, 신자직까지 박탈당했다. 마가복음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하느님 나라가 힘차게 도래할 때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고, 마르코 복음 13장에선 이 세대가 사라지기 전에 이 모든 종말 사건이 도래하리라고 했다. 예수시대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으나 종말도 예수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종말이 임박했다는 임박신앙은 사도들이 처음으로 한 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주지를 시켰다. 한 세대 안에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리라고 했다. 이를 근거로 이장림 목사가 160개 교회 선동해서 한국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설친 적이 있다.


제 자들이 공연히 들떠 재림하리라고 보았으리라는 것은 그렇다 치고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은 어찌해야 하느냐. 당시엔 예수님도 정보가 없었지만 사도들도 정보가 없었다. 재림신앙을 서술할 적에 정보가 없으니 당시 신약성서가 쓰여 지기 2백년 전부터 백년 후까지 이스라엘에서 풍미된 묵시문학, 즉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다루는 문학이 성서 속에 들어왔다. 성서 속엔 그리스도 신앙의 정수가 있는가 하면 당시 문학사조가 들어 있다. 이런 것을 구분 못하면 다미선교회처럼 160개 교회에서 한밤중에 모두 흰옷 입고 하늘을 쳐다보며 자정까지 예수가 한국땅에 재림한다고 카운트다운을 하게 된다. 10초전, 9초전, 8초전, 7초전…. 그런데 자정이 됐는데도 온다는 예수님은 안 오고 형광등만 번쩍이고 있었다. 다미선교회 이장림목사가 휴거가 온다고 신도의 돈 34억원을 갈취한 혐의로 징역살이를 했다. 요즘 다시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종말 임박설에 현혹돼 예수님이 곧 재림한다고 믿는 개신교인들이 20만명이나 된다고 들었다.

가톨릭의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이고, 희망을 되새기는 계절이다. 이승의 삶이 다할 적에도 절망이 아니다. 새로운 차원의 희망이 전개된다. 이게 종교인들의 염원이다.


-개신교신자다. 현재는 성령의 시대로, 예수님의 세계가 이미 (성령으로) 임했다고 보는 게 많은 기독교 교인들의 시각이라고 들었다. 이미 천국이 여기 임해 있다는 것이다. 성령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 나는 육체를 지니고 나날이 살아가고 있다. 내 목숨이 다하면 신령한 영체로 변해 창조주와 주님을 뵈러가고, 먼저 간 조상님들과 선배님들을 뵈러간다고 본다. 매년 연말이 되면 창조주 하느님과 예수님께 인사드리고 나서. 이승에서 깊게 인연을 맺은 사람이 30명 정도다. 내가 죽으면 나의 영체를 추수해 가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는가. 그게 나의 재림이 되겠지. 내가 간다든가 온다고 하는 것은 우리세상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죽으면 시공간을 넘어서는 것일 게다. 요한일서 사장 팔절엔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이시라고 한다. 비정한 세상에서 사랑에 젖을려고 애를 써야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것 아니냐.

성령 은 성서에 수도 없이 나온다. 기독교에선 삼위일체 교리가 있다. 성부도 하느님, 예수도 하느님, 성령도 하느님이라고 하니 삼신교 아니냐고 한다. 구약의 유일신교를 물려받아서 삼신교가 아니고 유일신교다. 그러나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이고,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는 게 삼위일체다. 위(位)로선 셋이지만 체(體)로선 하나라는 것이다. 고도의 추상적인 그리스철학 개념이다. 여러분도 상식선에서 경험선상으로 똑부러지게 설명할 분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교리 만든 이들은 그리스 주교들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교리니 믿으라고 하니 믿겠다면 모르겠지만 위와 체가 납득이 되어야 할 게 아닌가. 따라서 한마디로 빈말이다.


이제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얘기해 보자만, 하느님은 영원무궁하신 분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법신불이다. 그 하느님을 깊이 깊이 체험하고 맑게 맑게 드러낸 분이 예수님이다, 불교식이라면 응신불, 보신불이다. 그래서 예수도 하느님이다. 두 번째 하느님이다. 325년 니케아 호숫가에 모인 지중해 주교 300명이 석달 동안 토의한 뒤 투표로 그렇게 결정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신앙에 중지가 모아졌다. 성부는 원래부터 하나님이고. 성령이 또 뭐냐. 이래 가지고 갑론을박 중구난방. 백가쟁명했다. 당시엔 로마황제가 교회 수장이었다. 황제가 주재하고 황제가 결말지었다. 황제들은 이념 통일을 굉장히 좋아한다. 궁전 맞은편 성당에 지중해 주교들 다 집결시켜 거기서 투표로 성령도 하느님으로 했다. 382년 이레네대성당에서 성령도 하느님이라는 교리가 결정됐다.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 경전은 요한복음이다. 삼위일체를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전체 다른 곳엔 예수도 하느님, 성령도 하느님이라는 그런 언질이 없다. 구약이고 신약이고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는 성령에 대한 언표는 비교적 간단하다. 성령은 거룩한 기운이고, 거룩한 작용이고, 부활한 예수님의 기운이기도 하다. 단전호흡이나 기공하신 분들은 우주는 기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선한 기가 있고, 악한 기가 있는 거다. 선한 기는 축적하고 악한 기는 피해야 한다고 본다. 성령은 동양식으로는 선한 기운이다. 정기나 양기다.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예수가 보낸 거룩한 기운이다.

이런 거룩한 기운을 삼위일체 교리에선 인격화한 것이다. 그런 현상을 유대교에선 율법을 인격화하고, 지혜와 말씀을 인격화했다.


-불교의 <육조단경>엔 나라는 생각이 죄의 근원이라고 했다. 기독교의 원죄와 같은 뜻 아닌가. ‘오직 예수’라면 편협한 것 아닌가?

= 원죄교리란 아담이 따먹지 말아야 할 선악과를 따먹는 바람에 아담이 벌을 받고, 온 인류가 죄에 연루되고, 죄의 결과로 죽음을 맞보게 됐다는 것이다. 진화론 입장에 따르다 보면 절반은 사람, 절반은 원숭이로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로 나타난다. 그러니 원죄교리란 한마디로 전설을 넘어서 신화의 세계다. 우리 큰 할아버지가 과일 하나 따먹었다고 영영세세 죄를 뒤집어쓰는 게 납득이 가는가. 불과 100년 전엔 상당히 납득이 됐다. 옛날엔 조상 하나가 공을 세우면 사돈네 팔촌까지 잘 됐다. 그리고 단종을 다시 세우려다가 세조에게 발각된 성삼문으로 인해 창녕 성씨는 씨족이 멸족되다시피했다. 그 때는 조상 하나가 걸려들면 일족이 벌을 받았다. 그러나 요즘은 개성의 시대다. 달라졌다. 아버지가 잘못했으면 아버지가 벌 받고, 자식은 괜찮다. 옛날에는 아담 이후 첫번째 조상이 잘못했으니 온 인류가 화를 당하고, 두 번째 조상 예수가 잘해서 온 인류가 구원받는다. 그것이 옛날엔 이해되는 때였다. 그러나 개성의 시대가 되면서 점점 이해가 안 되게 됐다.


우리는 무균상태에서 무균세상에 태어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는 역사에 축적된 죄악이 창궐한 것이다. 아주 혼탁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로마서 5장에서 바올이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아담의 죄 때문에 온 인류가 불행한 것을 새아담이 수복시켜 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엔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바오로는 환한 빛에 휩싸인 예수님을 뵈었다. 그래서 예수의 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예수 이전의 세계와 예수 밖의 세계를 새까맣게 그렸다. 카라바지오가 개발한 새로운 회화 기법이 명암대비법이다.

그 이전엔 배경에도 상당히 신경을 써서 그렸다. 그러나 명암대비법에선 배경을 새까맣게 칠해버린다. 예전에 배경과 함께 인물을 보던 사람들이 새까만 배경 가운데 환환 빛에 싸여 나타난 두상을 볼 때에 그림에서 뭔가 튕겨져 나오는 것처럼 느낀다. 바오로는 그렇게 예수 이전과 밖은 비구원으로 대비시켰다.

‘오직 예수’라는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선 너무 존경스러워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옆을 잠깐만 돌아보면 공자님도, 부처님도, 마호멧도, 짜라투스트라도 있다. 하느님의 신비나, 불교의 공이나 진여는 겉잡을 수 없는 세계 아니겠는가. 저 높은 정상에 있다고 하면 정상에 이르는 길은 많은 것이다. 부처님 코스, 공자님 코스, 무하마드 코스가 있다. 나는 예수 코스를 따르고 있다. 다른 코스를 모르다보니 예수 코스만이 너무너무 좋다. 각자 자기 코스밖에 안보이니까 오직 예수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선 그렇게 이야기하기가 아주 좋다. 그러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불자들도 만나고, 유생들도 만나야 하니 생각이 넓어져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참 삶, 하느님이고 진여이고, 공이다. 참삶에 이르는 길은 예수다. 그게 예수 코스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늘 고민해 왔다. 한 사람이 똑바로 사는 데 있어서 예수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역할을 했다고 보는데, 예수를 신격화시켜 가랑이 찢어지게 따라가도 따라갈 수 없게 한 것 아닌가.

=어느 분이 세례 받고 소감을 물으니, 오늘부터 빌 데가 있어서 좋다고 했다. 예수 제대로 믿으면 40살을 못 넘길 것인데 이렇게 70이 넘도록 말짱하게 살아가고 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것이다.

내 가 보기에 석가코스는 난코스다. 석가코스는 자력으로 성불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가 공부한다는데 저 공부에 끝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거기에 입문하지 않은 것을 큰 복락으로 여긴다. 큰스님들이 자력성불을 외쳐도, 절대다수 불자들은 의타신앙을 가져서 입시철이 되면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 앞에서 추운 겨울에도 이부자리 가지고 가서 백일기도 한다. 큰스님들이 아무리 해봐야 의존적인 인간의 속성이 어디 가느냐. 의타적인 신앙이 인류보편적인 신앙행태 아닌가.

700~800년전 일본의 신란은 정토진종을 만들었다. 아미타불을 열심히 찾으라는 것이었다. 불교의 도도한 흐름과는 정반대인 것 같은데, 이것도 일본에서는 불교로 받아들인다. 기독교에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교의 폭은 넓다. 정반대의 교설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전세계 교단에서 이런 데가 어디 있겠느냐.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고, 성서 해석을 둘러싸고 교단과 부딪혔을 때 심정은?

= 프랑스에서 학부를 마치고 독일 가서 공부하고, 나중에 이스라엘 가서 성서 살펴보다 보니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내가 배운 것은 역사비평과 해석학이다. 역사비평은 과거를 따지는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기록이 됐는가. 그 후 2천년 간 해석의 역사가 있지 않은가. 해석학은 현재성이다. 자기들 구미에 맞게 쓴 경전을 오늘날 이땅에서 살아가는 동방인이 어떻게 새길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내가 언제까지 무사할 것인가, 결국 당하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이 그랬다. 정치인들도 편협하지만 가장 편협한 사람들은 종교인이다. 나는 가톨릭 내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서 사는 편인데, 이제 교회 어른들과 신앙이 여리신 분들. 전통 신앙을 고수하시는 분들이 저 때문에 고생한다. 서로서로 고생이다.

여기저기서 쫓겨나고, 어느 누가 교황청에 고발해서 지금도 처벌을 받은 상태다. 그러나 가톨릭에선 처벌이라는 게 이상하다. 교황청에서 서울에 와 있는 교황대사에게 지시하고, 다시 주교회의 의장에게 지시해 11년 전인 1997년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처벌 통보는 안해준다. 언론에는 대외비다. 나는 처벌받았다는 얘기를 하는데, 주교들은 알려질까봐 쉬쉬한다. 가톨릭에서 사상의 자유를 통제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가보다. 그래서 처벌이라는 게 우스운 꼴이다. 주교관 산하 기관이 천주교중앙협의회 거기에서 내는 단행본이나 잡지에선 처벌된 세사람 글은 무기한 싣지 못하도록 했다. 11년째다 거기에서 나오는 유인물엔 전혀 실리지 않는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처벌 받은 상태로 죽는 것이다. 나는 시신을 의과대사에 맡길 것이니 육신이야 상관없다.

전 통신앙인들이 볼 때는 내가 귀국한 1970부터 38년간 한국 천주교에서 많이 참아주는 편이다. 그래서 잘 하면 쫓겨나지 않고 천주교 안에서 종생할 수 있겠구나고 생각한다. 쫓겨나기 전에 내 스스로는 안나간다. 쫓으면 나갈 것이다. (교리에 대한 진보적 주장에 대해) 불교는 관용적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갈기갈기 찢는다. 그래서 끊임 없이 세포분열을 한다. 수틀리면 하나 세운다. 어느 누구도 수습을 못한다. 그게 개신교의 실태다. 개신교 기장(기독교장로회)은 이해심이 많은 편이다. 그와 함께 타종교나 교파에 대해 이해심이 많다는 감리교에서조차 제 친구 변선환 (감신대) 학장을 내쫓고 홍정수 교수도 내쫓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개방적인 계파 둘 중 하나라는 감리교가 그렇다. 가장 최고의 학자 둘을 삼중(목사직·교수직·신자직) 박탈했다. 내가 개신교에서 있었으면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보다 먼저 잘렸으면 잘렸지 뒤에 잘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개신교가 아닌 가톨릭에 있어서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에 대해 하루에 세 번씩 주님께 감사하고 있다.


-얼마나 다석 유영모에게 감동받았기에 다석학회까지 만들어 이끄나.

= 다석은 1982년 돌아가셨는데, 내게 누구도 그런 분이 계시다는 것을 얘기해준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분을 생전에 뵙지 못했다. 그런데 유달영 선생님이 여의도 63빌딩 옆 라이프빌딩 13층 성천문화재단에서 동서고전 강좌를 개설해 한국에서 가장 출중한 강사들에게 강의를 시켰다. 그 때 12명 중 11명의 강사를 구했는데 성서를 강의할 사람을 못구했다. 유달영 선생님은 신부는 너무 고루할 것 같아 양심적인 목사를 모시고 싶은데, 아무리 양심적인 목사라도 ‘예수 안 믿으면 무간지옥이다’라고 할 것이니 그런 사람들을 강사로 모시기 어려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유달영 선생님과 친분이 있는 구상 시인이 나를 소개했다. ‘정양모 신부는 성당 안다니면 지옥 간다는 몰상식한 얘기를 안할 것’이라며 소개했다고 한다. 류달영 선생은 학기가 끝날 때 수강생들에게 강사 평하게 해 매학기 인기가 없는 강사는 하나둘씩 퇴출시켰는데 나는 유일하게 11년간 안 쫓겨나고 강의를 했다.

내 강의엔 유달영 선생도 빠지지 않고 늘 참석했다. 강의 쉬는 시간에 유달영 선생님 서재에 가서 쉬곤 했는데, 서재에 다석 유영모 책이 있었다. 그 책을 보니 전기가 통했다. 다석은 15살부터 종로5가의 연동교회 7년 나간 뒤 평생 교회엔 발을 끊었다.


그가 왜 교회에 발을 끊었는가. 첫째 목사들이 성경 풀이하는 게 맘에 안들었다. 톨스토이가 요약복음서라고 새로 만든 것을 읽어보고 성경이면 다 성경이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불경도 꽤 많이 읽었다. 그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저녁 8시에 잘 때까지 새벽에 성경 불경 도덕경 많이 안 읽고 몇 줄 읽고, 아침 점심 굶고 저녁만 먹고, 풀 뽑고, 전지하고, 성경과 경전 구절들을 하루 종일 골똘히 생각하고 보통 하루에 한시 하나씩 썼다. 생각이 많이 용솟음칠 때는 몇 개도 썼지만 대개 하루에 시 한 수를 썼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석에 대해 영양분이 많은 암탉 같다고 했다. 하루에 알 하나씩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에겐 참고서도, (살아있는) 스승도 없었다. 오직 혼자서 골똘히 생각했다. 잘못 생각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스승이나 목사나 신부의 영향을 안 받고, 이게 무슨 뜻일까. 제 생각, 제 소리, 제 얘기를 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수 없는 독창적인 이야기를 내놓았다.

다석은 하느님, 예수님, 진리에 대해 서양물을 먹지 않았다. 나만 해도 파리에서 독일에서 예루살렘에서 공부할 때 내 선생들은 전부 서양물이 든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나는 굉장히 서양물을 많이 먹은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 안병무 선생님과 20년간 친교 나누었는데, 가끔 서양사람들에 대해 반감이 심했다. 서양학자의 주장이라면 일단 반대하고 보았다. 왜 그렇게 반동적인 입장을 취하느냐고 했더니 서양 신학 조류가 얼마나 맹렬히 흐르는지 내가 안 떠밀리려고 전력을 다해도 떠밀려간다면서 그렇게 해야 내 주체성이 조금씩 생긴다고 했다. 그런데 내 학설은 평생 서양사람들 주장으로 꽉 차있다. 그런데 서양물 눈꼽만큼도 안 먹고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을 천주교에선 아무리 눈을 닦고 봐도 없다. 4천명 신부중 신학적 얘기 나눌 분이 거의 없다. 개신교에서 변선환, 안병무와 얘기를 했는데 천주교에선 서공석 신부 정도다.

내식으로 동양식으로 이해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던 차 이를 골똘히 생각하신 분이 있어서 내가 딱 꼬꾸라졌다.(계속)

-마산교구 이제민 신부가 여성의 사제 서품 의사를 피력했다가 교회로부터 경고를 받아았는데, 여성의 사제 서품에 대해 어떤 의견인가.

=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시다.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담벽을 허물었다고 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 사이엔 세가지 차별이 있을수 없다고.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에서 인종 차별은 상당히 극복했다. 다인종 마을에서 보면 주일미사에 오는 분들 골고루 다 있다. 인종 차별이 상당히 극복이 됐다. 230년 전에 한국에 가톨릭이 들어올 때 가장 놀라운 것은 양반과 상놈이 동석하더라는 것이었다. 신분차별 없애는 것도 상당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끈질지게 지속되는 게 남녀차별이다.

원천적으로는 예수님도 바오로도 없애야 한다고 했지만, 가톨릭에서 없어지느냐. 주교직, 사제직은 고사하고, 부제직분조차 여자들에게는 허락하지 않는다. 너무 허락하지 않으니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스스로 주교로, 사제로 자처한 여성 신부 주교들이 여러명 있다. 10년전 어느 여학생이 ‘언제쯤 여자들의 사제 서품을 허용할까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2천년 교회사의 역사를 봐서는 네 시대에도 딸 사대에도 손녀시대에도 가망성이 거의 없다고 했다. 300년쯤 뒤에 깨달음이 온 교황님이 올까. 나를 앉히면 5분내에 해결되겠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일 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돌아가시기 10년전 쯤 천주교에 사제 서품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를 쓴 7페이지 공안을 돌렸다. 이유는 두가지였다. 예수는 제자 열두명을 발탁했는데 여기에 여자가 없고, 2천년 역사에서 사제는 커녕 부제품을 받은 여자도 없다는 것이었다. 내 대에 바꿀 생각 없고, 앞으로도 바꿀 생각이 없으니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여교우들은 얌전하다. 캐나다나 미국, 벨기에 네덜란드에선, 그런 지역에 교황님이 가면 시도 때도 없이 이런 문제를 거론한다. 그러나 나는 10세대 안에는 꿈쩍도 안하리라고 본다. 천주교는 덩치가 커 11억명이나 된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도 나오지 않는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묄세’라고 했다. 덩치가 크고 뿌리가 깊으면 그만큼 흔들리지 않는다. 성공회는 7천여만명으로 가톨릭의 20분의1 정도다. 그래서 성공회는 로마보다는 새로운 사조에 적응해 미국에서 여성사제가 먼저 배출되고, 영국에서 서품받은 여성사제가 10년 동안 천명이 넘어섰다. 그래서 여자로서 꼭 사제가 되고 싶다면 빨리 성공회로 개종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가톨릭에선 전혀 가망이 없다. 역사에서 저항하거나 투쟁하지 않고 인권을 쟁취한 역사가 없다. 여자들의 권익을 쟁취하려면 여자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 안 고치면 헌금 안 낸다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것 아닌가.


천주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저도 많은 복락을 누렸다. 이미 조상 4대 전에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천주교 때문에 속도 많이 상하고, 번뇌와 고민도 겪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인간 조건이다. 제가 고발하고 고발 당하고, 앞으로도 고발 당할지도 모른다. 개신교로 가면 불교로 가면 시원할 것 같은가. 인간 조건이 있어서 거기는 거기대로 문제가 있을 것이다. 개성의 시대, 민주화 시대로 가고 있는데, 교회는 너무 고루하다. 로마 교황청에 보면 수십명 추기경이 교황님 모시고 어쩌다 기적적으로 50대가 있을 뿐, 70 대 80대에서 90대까지다. 일본인으로 교황청 포교성 장관하신 분은 워낙 연로해 정신 자체가 흐려지고, 업히다시피 해 출근 서류를 읽어볼 수도 없고, 도장을 찍을 힘도 없어서 비서가 손을 얹어 찍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 그토록 연로한 추기경들에게 은퇴하고 편히 쉬라니 90이 넘은 바티칸의 추기경들이 전부 ‘이 목숨 다할때까지 봉사하겠습니다’라며 은퇴를 사양했다. 그러다보니 교황도 교황 선거권도 없는 80살 이상이 당선된다.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기동력 떨어지고. 무사안일주의에 떨어지고, 세상에 민감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천주교는 좀처럼 변하지않을 것이란 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왜 사제가 됐는가.

=4 대째 천주교 집안이어서 그 분위기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누가 권고한 것도 아닌데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학교 진학할 때 서울 용산 원효로 4가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내가 만약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오대산으로 출가했을지 모른다. 신학적으로는 성소와 섭리이고, 불교식으로는 인연이다.

-도마복음에 관한 신부님에 대한 생각.

= 기독교 복음서 4개. 도마복음은 1947년 이집트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집트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농작물이 자랄 수 있는 곳인 나일강변이다. 강물이 닿는 곳까지만 살고, 나머지는 칼로 자르듯이 사막이다. 나일강 중부지대에 나그함마디란 마을이 있다. 평생 밭을 갈던 지역이다. 청동기시대엔 밭을 깊게 갈지 못했다. 좋은 쟁기가 들어와 1947년 더 깊게 밭을 갈다보니 양피지 문서가 가득 든 항아리를 발견하게 됐다.

1,2,3세기 기독교 최대의 적은 영지주의였다. 서기 100년부터 600년 사이 500년간 교부들이 영지주의를 논박하는 논문들이 있었다.영지주의는 밀교다, 자기들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는 비밀결사다. 영지주의 문서 중에 국제적 관심을 끄는 게 도마복음서다. 거기엔 예수님의 일화는 없고, 전부 예수님의 말씀이다. 배경 설명은 일체 없다.

예수님의 말씀의 기록은 서기 50년~60년 사이 시리아에서 쓰여졌고, 그것을 마태오와 누가가 베꼈다. 도마복음은 서기 200년경에 쓰여졌을것이다. 영지주의 입장에서 예수님 말씀을 변질시켰을 것이라는 게 통설이다.

-최근 다석의 제자 박영호 선생의 <잃어버린 예수>라는 책에서 ‘부활이란 육체가 부활한 게 아니고 깨달음’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책에 보면 깨달음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면 세상사람들의 삶의 의미는 뭔가.

= 부활, 죽음 이후에 대해선 유구무언이다.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를 이해하는 데 역사적 예수의 실상을 열심히 천착하면 상당히 접근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도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비교해서 유사하게 밝혀낼 수 있다. 공간을 넘어서 편재한 세계, 한계를 넘어서서 무한한 세계가 가물가물하게 보일 수 있다. 부활을 빼놓으면 기독교는 쓰러진다.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박영호 선생은 다석학회 고문이다. 다석의 제자로 또 한 분이 김흥호 목사다. 연세가 90이 돼서 이제는 정신도 희미하다. 박영호 선생님은 나보다 두달 위인데 아직도 정정하다. 모임이 한달에 한번 있는데 꼭 참석해 직제자가 아닌 사람들을 가르쳐준다. 그가 다석 낱말 사전을 편찬 중이다. 앞으로도 3,4년 정도 걸릴 것이다. 지금까지 다석의 직제자가 대여섯명 살아있다. 다석의 사상은 고매하지만 난삽하다. 우리말 철자법도 잘 모른다. 스물여덟자 가지고 표현 못한다고 새 글자를 자꾸 만들었다. 이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읽기도 어렵다. 신조어를 남발했다. 한자도 한학자도 모르는 자기만의 한자를 써서 직제자가 아니면 근접하기 어렵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박영호 선생 혼자 독야청청하다.

그래서 사전 편찬하는 일을 도맡았다. 사전 편찬하고 나면, 사람들이 다석 글을 해독하려고 머리를 빠갤 것이다. 사전 못 마치면 끝이다. 박영호 편찬 다석 낱말 사전이 될 것이다.

  제 자들도 각양각색. 함석헌씨가 수제자고 애제자였는데, 서울 종로2가 세운상가 꼭대기에서 요한 1,2,3서 강의하는 함석헌을 찾아간 다석이 막대기로 때리는 시늉을 하며, ‘이놈이 내 수석 제자였지만, 이제 결별한다’고 했다. 다석이 격분한 이유는 첫째는 선생님의 고매한 것을 배우러온 반반한 여자를 건드려 정욕을 못 다스렸고, 둘째는 성당 예배당 갈 것 없이 혼자 믿어라고 했는데, 함석헌이 미국 가서 퀘이커 교도가 되어 수입해왔기 때문이었다.

다석의 직제자들은 다석을 구세주처럼 모시기도 한다. 이해 안되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다석 제자들과 식사하는데. 한 분이 우리 선생님은 인류의 4대 성인과 견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듣던 한분이 핏대를 내며 ‘4대 성인과 비겨! 거, 무슨소리. 우리 선생님은 4대 성인보다 한수위야!’라고 소리쳤다. 직제자들 중에선 다석을 종교 창시자로 신봉하기도 한다. 다석은 그렇게 사람을 끄는 흡인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석의 원문이 어렵고 그 분의 글을 쓴 제자들의 글을 봐도 어디가 다석의 말이고 어디가 본인의 해석인지 경계가 없다. 박영호 선생이 다석에 대해 20권 낸 것 가지고, 박사 학위 받은 분들이 많은데 그들은 강의록 원문 정리한 텍스트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애로라고 한다.

박 영호 선생은 부활을 깨달아서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 것으로 본 것 같다. 여러분 대부분이 성경에 심취한 분이다. 그러면 영혼 불멸 신앙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 불멸은 구약·신약 신앙이 아니고, 그리스 철학이다.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철학이다. 그 신앙에 따르면 육신은 썩고 영혼은 영혼 무궁한 세계로 가는 것이다. 인간 속엔 불멸적 요소가 하나 있다. 그게 영혼이다. 소크라테스는 영혼 불멸 신앙이었다. 영혼이 육신 감옥 속에서 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탈옥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날 독배를 마시는 모습을 봐라. 저녁에 해가 떨어질 때 죽기로 돼 있었는데도 아침나절부터 여자들이 통곡하니, ‘철학을 모르는 여자들 사이에서 죽을 수 없군!’하며 내보내라고 했다. 저녁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점심 먹고 나서 독배를 대령하라고 했다. 독배를 마시고 침대에 누우면서 제자들이 엉엉 우니 ‘영혼불멸 신앙이 제자들에게 안먹혀 들어갔구나’라며 통탄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특질은 유한성이다. 하느님은 무한하고. 영원하다. 그런데 어쩌자고 인간에게서 불멸성이 있다고 주장하게 됐는가. 서기 200년 전부터 순교자들이 ‘저렇게 썩어문들어지겠는가. 하느님께서 살리실 것이다’라는 사상이 있었다.

그러나 쓸만큼 쓰면 폐품 처리되는 게 세상 만사 아니냐. 강철로 냉장고 만들어도 수십년 쓰면 그렇게 된다. 내몸도 70여년 써왔다. 결국에 가면 내 몸도 폐품 처리되는 것이다. 이것을 되살려야 될 건덕지가 어디 있느냐.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영감 시절 있는데 부활하면 어느 시절로 되살리는가. 장애인들은 다시 장애인으로 재생되는 것인가. 인간 세포는 4년마다 99%가 아니고 100%가 바뀐다고 한다. 어느 세포를 거두어서 조립할 것인가. 사업도 너무 복잡한 사업이다.

영 원 불멸 ,육신 부활 다 마음에 안 든다. 예수님은 육체를 지니고 계시던 분이다. 육체를 다해 하느님이 거두어가실 때 이승을 살면서 사람됨, 인간성을 거둬간 것이다. 그래서 신령한 영체로 재생이 되는 것이다. 내경우도 육체로 살다가 영체로 변하는 것이다. 애벌레가 나비처럼 변해 하느님 동산을 나는 것이다. ‘내가 잘못 살아서 이 꼴로 어떻게 하느님께 다가가는가’라는 게 심판이고 연옥이다.

해석학적 성찰을 하면 그렇게 된다. 최근엔 미국에서 임종환자들만 돌봐온 스위스 여의사 퀴블러스의 책이 널리 읽히고 있다. 미국의 환자들 가운데도 의학적으로는 죽었다고 판정 내렸는데 몇시간 후에 소생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숨이 넘어갈 때부터는 새까맣더냐’, ‘어떻더’냐’고 물었다. 그러면 예외없이 저승 체험이 있다. 보통은 친구 가운데 가까운 사람,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놀랍게도 수호천사가 마중 나오더라. 정교회 신도들과 가톨릭 신자들에겐 성모 마리아가 나오기도 한다. 퀼블러 노스가 임종환자들 병상일지를 보면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례 5천건을 분석해봤는데, 개신교 신자들에겐 성모님이 마중 나온 사례가 한 건이 없었다. 개신교 신자들은 괜히 성모 마리아를 욕하는데, 아마도 성모님이 정나미가 떨어진 것은 아닐까.

-4대 성인에 대한 우상화는 문제 아닌가.

= 하느님도 비밀스럽고 신비라고 하잖은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신성이 정해졌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얼마나 높았으면 그랬겠는가. 불교 경우에도 석가모니도 인간이지만 부처로, 화신불로 추대하는 것은 존경심과 사랑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중국 곡부에 가보면 공자님의 묘비는 초라하지만 대성(대성인), 지성(지극히 거룩한 분), 문화를 선양한 임금님이라고 칭송해 놓았다. 하느님, 진여, 공의 세계를 알려준 어른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동서를 막론하고 다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