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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30일 (일) 09:36 기준 최신판
정수일선생님의 묵직한 책 실크로드학을 미루고 미루다 폈다. 뒤에 수십쪽 연대기를 빼도 650여쪽이 훌쩍 넘어가고 책크기와 활자크기까지 생각하면 양으로도 여느 책 서너권에 해당할 듯 하여 감히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촐랑대곤 할 때 생기가 돌곤 하기 때문이다. 시냇물처럼.
2005년, 소통이 나를 찾아왔다. 여러 길로 여러 얼굴과 몸짓으로 찾아왔고 그 해가 다 갈 때 나는 이제 어쩔 수 없소, 내리시오. 하듯 인정했다. 소통 을 거치지 않고 나의 인식론은 기초부터 흔들리고 말 것이라고. 누구나 자기가 세계를 바라보고 실천하는 기초로 삼을만한 단어나 생각이나 사상같은게 있기 마련이겠지. 말로 무엇을 하건 그 자신이 내리는 판단의 돌맹이들을 잘 엮어보면 나올 수 있는 그런게 있기 마련이겠지.
내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딪고 내가 서 있을까?
투박하고 거친 말을 굳이 여기 다시 실어보면 자유, 사랑, 평화 같은 것이고 이 말들은 여전히 내가 이 세상의 물살을 건너려고 디딘 위태로운 돌덩이들이야. 거기 생명이 보태지고, 그 다음 생명의 한 적극적인 양상이라 할 수 있는 살아있음에 이르고, 살아있음 자체일 수도 있고 살아있음의 구현방식이며 동시에 전제조건이랄 수도 있는 소통에 이르게 되었지. 이는 단지 나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몸뚱아리들, 젖무덤들, 아이들, 들녘, 도자기, 저음해금소리, 구음소리, 민족, 약한 세계... 까지 미칠지도 몰라. 이 말에 깔려죽고 싶지 않았다. 이 말이 내가 다루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휘두르는 무기가 되지 않았으면 싶었다.
정수일 선생님의 "씰크로드"학, 문명교류학을 통해 우리 인류가 걸어온 교류와 소통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보면서 내 밑바닦에서 울리는 말 소통의 몸뚱이를 만지고 싶었다. 할 수있다면 나는 입맞출 것이다.
써놓고 보니 너무 거창한 것 같군. 그냥 인문학적 소양을 기를 겸, 좋아하는 선생님 책 읽고 사인받고 싶어서 그런다고 썼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 그것보다, 이 비싼 책을 사두고 안읽으면 본전 생각 간절해 나중에 배아파올 것도 같고, 누가와서 빈 책으로 있는 나의 게으름과 허영을 볼까 두려웠다고 썼더라면 내가 더 나다울 것을.... 뭐 어때, 그게 그거지.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기가 이리 힘든 것일까? 내가 쓰고 싶은 건 나를 쓰지 않는다. 그것이 쓰고 싶은 것을 내가 쓰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냥 가는대로 가라고 두고 길을 가면 좋으련만, 여기서 목을 잡고 저기서 발을 잡고, 이리 엎어지고 저기서 누워버리고 버르작거리느라 먼지만 날린다. 이런 고통을 직면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아량을 어디서 배웠던가? 이런 배둘뚝이 아량을? 영정을 그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