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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18일 (목) 20:02 기준 최신판

기분좋은 기사 하나를 보았다. 통일에 대한 담론은 그것이 어떤 방향과 입장을 가지건 피해가서는 안되는 핵심적인 것이리라. 이 시대 이 땅의 지성인들이라는 존재의식이 있다면 이를 피해갈 수는 없으리라 본다. 그리고 싸움이 아니라 지성인다운 논쟁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처럼 논쟁 자체가 생산적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논쟁은 땅을 후끈 데운다는 점에서 쿠~울한 이 땅의 지성을 자극하여 어쩐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절대 논쟁이 노선투쟁이 되서는 안된다. 서로의 입장을 견고하게 담을 쌓고 그것으로 상대 노선을 이겨보겠다는 생각은 패배와 좌절만 낳을 뿐이다. 교수이자 출판가인 백낙청씨가 새 책을 내고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 중 일부를 싣는다. (오늘자 한겨레 신문에서)

점진적 통일론이 이론적으로 합당하더라도 통일의 방식은 느닷없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래서 점진적으로 남북 (통일보다는) 함께살기를 진행하더라도 도둑처럼 찾아올지도 모르는 과정에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 통일 개념을 바꿔 생각하면 한반도 고유의 통일과정이 바로 발 밑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게 이 책의 주장이다. 가령 통일에 무관심한 사람도 현재 남북의 화해와 교류 지지하느냐 마느냐 하고 여론조사하면 압도적 다수가 지지한다. (...)

- 한반도 고유의 통일이란 게 무엇인가.

=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은 여러 사람이 했다. 이때는 점진적으로 하자는 것이었지 우리 고유라는 대목까진 안 갔는데, 저는 거기까지 발전시켜 본 것이다. 분단체제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레 떠오른 생각이기도 하고 작년부터는 6·15 남측대표 맡아 북쪽과 접촉하면서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됐다.(...베트남식도, 독일식도, 예멘식도 아니다...)

결국 평화적, 점진적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 위에서 시민사회의 폭넓은 참여 과정을 거쳐 통일을 해야 한다. 현재 이런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가고 있다. 한반도 고유의 통일과정이 2000년 6월에 시작됐고 지금 진전되고 있고 난관 잇겠지만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평화체제 구축되고 시민사회 접근 상당 정도 이뤄지면 남북연합제 등 선포하면 그것이 1단계 통일 아니겠느냐.


- 분단체제 이론이 현재에도 적용 가능한가.

= 분단체제론이란 게 양쪽의 정권이 똑같은 놈들이다는 이론이 아니다. 그 체제 안에서 어쨌든 체제를 유지하려는 특혜를 받는 세력이 남에도 북에도 있는데, 그 작동방식은 서로 전혀 다르다. 그런 사람들이 정권에 얼마나 가담해 있느냐는 남과 북이 다르고, 그때 그때 사정에 따라 다르다. 근데 98년 <흔들리는 분단체제> 쓸 때는 97년 외환 위기 맞았다. 북에서는 식량난 맞았다. 체제라는 게 성립하려면 그 안에 사람들 먹고 살게 해야 하는데, 북에서는 그 능력 의문시됐고 남에서도 금융위기 맞아서 체제 관리에 큰 어려움 겪게 됐다. 그래서 분단체제가 흔들린다는 생각 굳혔다.

87년에는 남쪽 정권이 민주화됨으로써 이미 분단체제 동요 시작됐다. 물론 87년 이후 남쪽 정권의 성격이 변화한 것에 비하면 북은 거의 안 변했다. 근데 그것은 남쪽 변화가 워낙 엄청나서 그런 것이고 북도 안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권 성격, 노선에도 많은 변화 있었고 특히 인민과의 관계, 민중의 생활상, 정부의 경제관리 방식, 대외관계, 대남관계 등에 엄청난 변화 있었다. 이것이 북 정권 입장에서는 분단체제 안에서 체제 유지관리하려는 노력이지만 큰 맥락에서 볼 때는 분단체제가 87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97년부터 그 흔들림이 더 눈에 띄었다면 00년 6월 이후에는 허물어지는 단계로 들어섰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고 본다.


-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문제는 어떻게 보나.

= 현 정부가 하고 있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이렇게 해서는 남쪽 경제도 크게 훼손이 되고 미국 의존 높아지고 우리가 능동적으로 남북통합 추진할 동력 떨어진다. (...) 내 생각엔 지역내 에프티에이 먼저 하고 그걸 바탕으로 미국과 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나 하는 생각 있다.


- 변혁적 중도주의의 세 주체로 엔엘(민족해방노선), 피디(민중민주주의), 비디(부르주아민주주의)를 거론했다. 그러면서 환골탈태 요구했다. 환골탈태가 무엇이냐

= 기본적으로는 시야를 세계적 시각에서 봐야 한다. 통일의 과제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하는 과제건, 아니면 남한 내에서 가능한 개혁을 하는 문제건, 시야를 세계적으로 넓혀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가령 엔엘(민족해방노선) 같으면 남쪽 사회만 생각하는 것을 절반나라의 시각이라 비판하면서 온전한 일국적 시각 가져야 한다고 비판하지만, 결국은 남북 합친 것을 다시 하나의 절대적 단위로 보는 경향 강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세계체제라는 것이 있고, 그게 한반도에서 분단을 통해 작동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든 1차적으로 분단을 넘어서자는 차원에서 통일을 접근하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 시야 부족하다.

피디(민중민주주의)의 경우도. 남한 노동자 계급을 말하는 데서 나타나듯이 남한 사회를 기본단위로 잡고 그 안에서 계급대립 위주로 생각하는데, 계급이라는 것이 경제와 관계 있는 개념이다. 경제는 세계 단위로 돌아가는데 계급만 일국 단위로 설정하는 건 문제가 있다. 전세계의 단위에서 일하는 민중이 어떻게 잘사는 체제를 만드느냐는 시각에 기반해, 남한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접근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피디 입장에서도 그런 식으로 시각 교정하면, 중산층 개혁주의자들과의 협력이나 통일운동이나 사업하는 사람들과의 협력이 자연스레 가능해질 것이다.

실은 세계적 시각이 온건개혁세력에게 더 많다. 그러나 세계화의 대세에 대해 기본적으로 문제제기한다든가, 제대로 맞서서 적응하기 위해서도 남북간의 통합을 잘 아뤄야 한다는 인식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거기도 제대로 된 세계적 시각 갖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 시각의 전환 바탕으로 한다면 자연히 추구하는 의제에 대해서도 조정 이뤄질 것이고, 새로운 연합이 가능할 것이고, 그 정도면 환골탈태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 이번 비판 관련해 논란을 위해 최장집 교수와 사전 교감은?

= 전혀 교감 없다. 나는 원래 지식인 담론은 계급장 떼고 하는 게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자로서의 자격증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한마디 한 것이다.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서는 사회과학계에 너무 토론이 없는 것 같다. (...) 다만 이를 진보진영으로 한정해서 노선투쟁이라는 식으로 접근 안했으면 좋겠다.


- 앞으로 다른 학자들에 대한 실명비평 계획도 있나.

= 필요하면 얼마든지 한다. 문학평론은 원래 실명비평이 뚜렷하다. 문학평론에선 어느 정도 전통으로 서 있다. 나 개인으로 말하면 올 초에 창비 40주년 맞아서 실명비평하자고 한 이야기는 후배들더러 그렇게 하라고 한 이야기다. 나는 옛날부터 남녀노소 구분않고 논쟁 많이 했다. 앞으로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사회과학자 최장집 교수님은 답게 인문학자의 계급장 떼고 이야기 하자는 말에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에 교수 강준만씨께서 답의 성격은 아니지만 언론학자 답게 '평'을 하는 수준에서 살짝 참여했다. 5.18. 한국일보에 실린 글.


백낙청(68)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장집(63) 고려대 교수를 실명 비판했다. 반갑고도 고마운 일이다. 혈기가 넘칠 때엔 실명 비판을 하다가도 나이가 들수록 실명 비판에서 멀어지는 학계 풍토에 비추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두 분의 나이를 표기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두 분 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진보적 지식인이다. 단순화해 말하자면, 최 교수는 진보적 관점에서 참여정부를 비판했고, 백 교수는 최 교수가 “분단체제와 그 상위체제인 세계체제에 물어야 할 책임마저 집권 세력에 돌리고 있다”며 이는 “‘민주화세력의 집권으로 망가진 대한민국’이라는 보수세력의 결론과도 맞닿는다”고 비판했다.

백 교수는 최 교수에 대해 “원론 차원에서는 좋은 말을 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학자로서) 무책임한 것이다”고도 했다.

최 교수의 모든 주장을 참여정부가 다 수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 교수의 주장대로 분단체제와 세계체제가 강요하는 구조적 한계 때문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간 최 교수의 참여정부 비판은 분단체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게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참여정부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건드려 왔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2년 전 최 교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다뤄져야 할 실제 문제(real issue)는 절대다수의 노동인구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 매우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라고 했다. 지금 참여정부가 선거 이슈로 들고나온 양극화 문제를 이미 2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2년 전 경제낙관론을 역설하면서 민생 문제와는 관련 없는 ‘정치’에만 집착했다.

참여정부가 최 교수의 고언을 경청했더라면 지금처럼 낮은 지지율에 시달리진 않았을 것이다. 참여정부의 낮은 지지율이 분단체제 때문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 교수의 참여정부 비판이야말로 ‘보약’과 같은 게 아니었을까?

백 교수의 비판에서 가장 아쉬운 건 “‘민주화세력의 집권으로 망가진 대한민국’이라는 보수세력의 결론과도 맞닿는다”는 대목이다. 이 논법은 여야를 막론하고 과잉 정치화된 네티즌들의 단골 메뉴인데, 이런 사고방식이 한국정치를 전투적 갈등 구도에 묶어둔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게 좋겠다. 그런 식으로 ‘적과 아군’의 이분법으로 몰아가면 사실상 ‘내부 비판’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원론 차원에서는 좋은 말을 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학자로서) 무책임한 것이다”라는 말씀도 지나친 것 같다. 최 교수는 실천 가능한 대안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역설해왔다. 예컨대, 그는 이론적 수준, 가치와 신념의 차원, 운동의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비자유주의 모델’을 대안적 정책으로 집행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전면적으로 검토하려는 노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최 교수 스스로 내놓은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반론도 가능하겠지만, 그건 역할 분담 차원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 백 교수가 분단체제라는 거대담론을 다루듯, 최 교수도 큰 흐름을 짚어주는 게 그의 소임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 지식인이 ‘거시’에서 ‘미시’에 이르기까지 다 다루지 않는다고 ‘무책임’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지식인은 다 정책기획가 노릇을 해야 한단 말일까?

백 교수가 분단 체제를 바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약간의 논란을 일으켜보고자 하는 생각’으로 그리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는 하지만, 참여정부의 현실도 바로 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백 교수의 문제의식엔 십분 공감하지만, 아무래도 논란을 위한 ‘표적’을 잘못 잡은 것 같아 그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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