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me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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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ha (토론 | 기여)님의 2013년 11월 11일 (월) 12:39 판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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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사본 재등장

  • 파피루스 식물에서 필지파피루스 나오고, 그것이 나중에 페이퍼란 이름이 된다. 습기에 약해 이집트 사막에 묻혀있었거나 화산재에 묻혀있던 유물 말고는 거의 사라졌다. 아르키메데스 원작도 당연히 남아있지 않다.
  • 로마 395 년 테오도시우스 1 세 황제 사망 후 동서로 나뉘어. 로마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제국은 476 게르만 민족에 멸망. 라틴어 공용어. 비잔틴제국인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그리스어 공용어. 9~10세기 일시 흥하던 때 그리스어 사본 정리. 이때 양피지로 아르키메데스 저작 옮겨 쓴 듯. 서서히 줄어 도시국가. 1453 오스만 투르크에 멸망.
  • A 사본  : 9세기 제작. 주요 저작 망라. 서아시아 거쳐 유럽으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의문.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조르주 베라(1430~1499) 소유. 그의 사망후 행방 묘연. 이 사본은 사라진 듯. 다행히 그때 이미 아르키메데스는 유명해서 다른 필사본이 남았다. 거의 복원되었다.
  • B 사본  : 최소한 13세기 바티칸 소장. 벨기에 메르베케의 기욤(1215 ~ 1286) 이 라틴어 번역. 그의 자필 필사본 바티칸 소장. 그가 콘스탄티노플 여행하다가 A, B 사본 손에 넣어 유럽에 전한듯. 그리스어 필사본은 14세기 사라진 듯. 번역 본만 남았다. 부체에 관하여 는 A 사본에 없고, 여기 번역본으로만 남았다.
  • 16세기 중반 그리스어 원문과 주석 붙은 라틴어 번역본들 차례로 출판. 출판 기술의 발달로 저작의 전모가 드러나던 중요한 시기. 넓이, 부피, 무게중심 이론 비약적으로 진보. 17세기 무한소 기하학, 17세기 후반 뉴턴 (1643] ~ 1727)과 라이프니츠(1646 ~ 1716)의 미적분 발명 기반이 됨
  • 라틴어 번역판도 없는 것 중에 아라비아 번역판만 있는 것도 있다. 1899 아라비아 판 Stomachion 저작이 처음 공개. 정사각형을 여러형태의 14개 도형으로 쪼갠 것까지만 알지 저작의 앞부분만 되어 있어서 궁금증. 최근 겹치지 않게 정사각형을 덮는 퍼즐에서 경우의 수 문제였던 듯하다는 해석이 주류, 그리스의 순열, 조합론 주목 받다. 그밖에 수의 계산도 담긴 저작도 전한다. 10에 63승인 거대한 수의 표기법을 제안한 모래알 세는 사람, 그 자신도 못푼 20만 이상인 정수해를 가진 부정방정식 문제 담긴 소의 계산(the Cattel of Problem) .
  • C 사본 출현 : 1906년 느닷없이 그리스어 사본 발견. 예루살렘 남동쪽 사막 가운데 있는 마르 사바(Mar Saba) 수도원에 보관. 19세기 초 예루살렘 거쳐 이스탄불로, 10세기 경 필사한 것을 12세기 문지르고 그위에 기도문 적은 것.본래 있던 것과 구별하기 쉽게 90도 회전해서 적었기 때문에 원본 읽을 수 있어. 이 기도문 하래 수학 내용이 있다는 것은 성서 연구자 티센도르프(1815 ~ 1874) 가 1846알아낸다.
  • C 사본 연구 : 그리스 수학 연구자 덴마크인 하이베르크 (J.L. Heiberg 1854 ~ 1928) 에게 간 것은 반세기 지나서. 그는 여러 사본 참조하여 문헌학 절차에 따라 원전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본문을 재구성하는 문헌 교정판 작업에 기여한 사람. 그의 손을 거쳐 유클리드 Elements, 아폴로니우스 Conics, 프톨레미의 Almagest (또는 수학집성) , 아르키메데스 저작들 모두 그의 교정판. 하이베르크 연구 위해 대출 신청. 대출 거절. 1906년 이스탄불로. 기도문 글자 아래 이미 그가 알고 있던 '구와 원기둥에 대하여' 도 있었고 '부체에 관하여' 그리스어 판, 일부만 전하던 '스토마키온' 도 있었다. 여기서 최대의 발견은 에라스토테네스에게 보내는 기계학적 정리에 관한 방법 (The method of Mechanical theorems to Eratosthenes) 저작. 도형의 부피 무게 중심 구하기 위해 양팔 저울 달고, 무한히 작은 조각으로 분할 했다가 다시 짜맞추는 대담한 방법이 실려 있었다. 수학자로서 구적법과 기술자로서 기계학이 묘하게 결합. 모두 조사할 수 없어서 사진찍어 돌아왔다. 1908년 다시 이스탄불 방문해 거의 모두 해독. C 사본의 다른 자료들도 교정. 해독 못한 부분은 빈칸.
  • 1998. 10. 29 일 크리스티 경매장. 폐품 정도의 너덜너덜한 오래된 양피지("팰림프세스트-다시 문지른 것")에 쓰인 기도서 책, 이 물건 하나에 64쪽 컬러 안내문. 10세기 제작된 아르키메데스 저술 필사본. 12세기에 긁고 기도서 쓴 것. 예상가격 80만~120만. 낙찰 200만 달러. 아이티 업게 재벌.
  • C 사본 실종 : 1차 대전후 실종. 1971년 C 사본 한 장이 발견. 옥스퍼드 대학 젊은 교수 나이젤 윌슨이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던 것 확인. 윌슨 교수 70년대 파리에 있는 것 확인. 소유자들이 학술 조사 거절. 보존 상태 안좋아. 소유자들이 파리 국립도서관과 대영박물관에 매각 의사 밝혀. 그러다 뉴옥으로 보내져 경매에, 윌슨 교수에게 필요한 자료 작성 부탁 위해 영국으로, 다시 뉴욕으로 가서 경매.
  • C 사본 다시 연구 : 낙찰 받은 IT 재벌, 볼티모어에 있는 Walters Art Museum 에 연구 맡겨. 사본 기탁하고 연구 기금 정기적으로 기부. 20초 발견에 비해 지난 100년 사이 천년동안보다 더 상해. 현대 컴퓨터로 화상처리해 얻은 것보다 하이베르크의 100년전 흑백 사진이 더 선명한 것도 많아. 누군가 중세것이라는 걸 알려 돈을 더 받으려는 뜻에서인지 위조 중세 삽화들도 첨가되었다. 중세 사본 삽화집에 있는 것과 크기 모양 똑같은 걸로 봐서 투사지로 베낀 다음 옮긴듯. 암실에서 자외선 램프 사용 보일 듯 말듯한 흔적 읽어내. 사본의 양피지 한장 한장 떼어내 "여기에 이런 선이 있고, 여기 동그라미 같은 것이 있는데... 아니, 그것은 기도문 원문 쪽이잖아요? 음.. 이 동그리마 두 개가 파이네요. 다음은 ... 음, 왼쪽 아래로 선이 삐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람다로 보이고.... " 이런 식으로 해독. 자외선으로 잘 보이는 것은 사용한 잉크가 자외선을 잘 흡수하고 파장이 긴 빛을 잘 반사한다는 뜻. 기도문의 글은 가시광선에서도 자외선 에서도 비슷. 다시 말해 'C 사본은 붉은 빛 띠는' 잉크로 쓴 것. 로체스터 공대 로저 이스턴 팀이 stroboscope 로 촬영한 사진 S (아르키메데스 텍스트는 밝아서 배경과 구별이 안된다) 과 자외선 사진 U (기도문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짙게 드러난다) 두 장 사진을 찍은 다음 S 의 R(붉은색)값과 U 의 GB(푸른파란) 값을 합성한 영상 만들어. 기도문은 검게 C 사본은 붉게 나타났다. pseudocolor 영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읽기 쉬워져. 2005년부터 X 선 이용해 잉크에 섞인 철의 분포를 조사하여 텍스트 복원하는 작업도 시작.
  • 개수가 같다 : 아직 합성사진 없던 2001년 1월. 하이베르크가 해독 못한 20행 정도 해독했는데 뜻밖에 isai plethei 이라는 말. '개수가 같다' 라는 뜻. 수없이 잘게 쪼개면서 개수 같다. 무한에 대해 농도/크기 같다고 아니고, 개수가 같다고 표현. 철학적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문제 풀이의 해결을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얻은 대담한 표현. 천재성 .


시라쿠스 상황

  • 로마지배 전까지 시칠리아는 동쪽으로 그리스인, 서쪽으로 카르타고인 지배. 시실리아 동남쪽의 시라쿠사는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733년에 건국된 가장 오래된 식민도시 : 시실리아의 부와 풍요를 넘보던 세 민족-권력 : 그리스, 카르타고(karphageniyan), 로마에 둘러싸임
  • Gelon BC478무렵.의 참주 시절 역사의 전면에. 그와 그의 동생 히에론 참주가 다스리던 시절 이탈리아 남부까지 확장. 시라쿠사 서쪽 Gela 의 참주였던 게론이 페르시아 전쟁기[1]BC485년 경 시라쿠사 병합. 480년 경 시칠리아 섬 북쪽에서 카르카고와 싸워 이김.이때 그리스 지원해주지 않음. 후일 그리스 시라쿠사에 지원 요청에 거절. 오히려 페르시아 제국에 금을 바치고 종속 서약 준비. 그런데 그리스 승리. 생뚱~, 사절은 금을 가지고 귀국. (헤로도투스 '역사' 7.157~163) BC478 게론 세상 뜨고 동생 히에론 지배, 이탈리아 남부로 확장, 비극 작가 아이스킬레스와 시인 핀다로스를 초빙해 자기 업적을 기리게 함.
  • 페르시아 전쟁에 승리 후 다시 전쟁을 대비해 그리스 국가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동맹 (델로스 동맹 BC478), 이는 아테네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역할을 함. 동맹 분담금은 공물처럼 쓰임. 파르테논신전 같은 건축물도 그런 것으로 만들어 진듯. 당시 아테네는 장군을 빼고 모든 직무가 제비뽑기로 결정한 완전 민주 정치(시민권을 가진 남자 어른에 한함), 모든 것은 민회에서 결정, 변론의 능란함이 매우 중요하던 시기. 소피스트 등장. 플라톤은 이들을 적대시. 변론으로 다른 사람을 혹하게 한다고 비판. 하지만 논증 수학의 탄생에 영향 주었을 듯,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가 논증 수학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 한 듯. (파타고라스 학파 기원설 퇴조 중)
  •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아테네 중심주의 반격, 그리스 내전 격인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 ~ 404), 복잡하였지만 결국 아테네 패배. 이 전쟁의 전환점은 아테네가 시칠리아 정복을 목적으로 대규모 원정군 보내고, 2년여 전쟁후 패배한 것.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시라쿠사의 장군은 전 시실리아가 아테네에 맞서 싸워야 함을 독려. 강대한 아테네를 격파한 시케리아인들, 그 중심에 시라쿠스사람들, 자부심 대단했을 것.
  • 시라쿠스 번영. 민주정치 꺼린 플라톤 철인 정치 주장. 시라쿠스 세번 방문. 디오니소스 1세 참주 때. 그 의형제 디온은 영향 많이 받아 아테네로 가서 가르침 받고 디오니소스 2 세대 후견인으로 플라톤 초대. 세번째 디오니소스 2세 에게 역정 사서 구출 부탁할 정도가 됨. 그래서인지 디오니소스 2세는 폭군으로 기술되어 있음.
  • 디오니소스 2세 추방. 혼란 시기. 그리스는 헬레니즘 시대로. BC338.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르 왕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본토에서 아테네 연합군 격파.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권 안으로. 아테네 민주정치 끝. 알렉산드르 대제국. 바빌로니아에서 전사 BC323
  • BC316 시라쿠사의 장군 아가토클레스 정권 잡고 왕으로 칭하고 서쪽으로 카르카고와 전쟁, 아프리카 본토 원정. 동쪽으로 이탈리아 남부 통일 야망. 알렉산드르 영향 받은 듯.
  • BC289 아가토클레스 후계자 지명 못하고 사망. 민주정치 시대로. 국정 불안. BC275 히에론 장군[2]이 정권 잡고 왕이 됨. 정세 안정[3]. 60 여년간 통치. 아르키메데스 생애 전반과 겹침. 초기, 포에니 전쟁시기 에는 카르타고와 동맹 맺고 로마와 대립했으나 곧 강화 맺음. 로마 점점 강성해짐. 이때부터 평화와 번영 시기. (이런 평화 번영 없었으면 아르키메데스도 없었을 것.)
  • 기원전 215 히에론 사망. 카르카고와 로마 사이에 2차 포에니[4] 전쟁. 한니발 알프스 넘어 이탈리아 침입, 히에론 후계자 로마와 대립, 로마 침략,

아르키메데스

  • BC287 추정 ~ BC212 (거의 분명). 아버지는 수학-천문학 했던 사람[5]으로 추정. 알렉산드리아에 유학했던 듯[6]. (그곳 학자들에게 저술을 많이 보냄)
  • 기원전 2 세기의 역사가 폴리비우스(기원전 203~120)의 역사서 "역사 VIII. 7. 8 " 에 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라는 노인이 대활약한 것을 기술.
  • 유레카: 히에론 왕. 올릭픽 우승자에게 수여하던 월계관 같은 형태의 상징물, 금관 제작. 완료후 은이 섞였다는 고발. 순금인지 검사. 아르키메데스에게 명령.
    • Marcus Vitruvius Pollio , 기원전 1세기 저술가가 전함 : 금관 무게 재고 물이 가득 담긴 그릇에 잠기게. 꺼내고 물 부으면서 얼마나 물이 들어가는지(= 금관 때문에 얼마나 물이 빠져나갔는지= 금관 부피) 측정. 금관의 부피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크고 은보다 작기 때문에 가능. (실제로 해보면 물의 표면 장력 때문에 정확한 측정 거의 어려워. 단지 부피 측정으로 발가벗고 뛰어 나갔을까)
    • '무게와 측정에 관한 노래(carmen de ponderibus et mensuris)' 라는 시에서 전함 : 금관과 순금을 양팔저울에 올려 균형 맞춘 상태에서 물에 담갔다. 은이 섞인 쪽이 위로 올라간다. 왜냐하면 그의 "부체에 관하여 (On floating Bodies)" 에서 밝혔듯, 부력의 원리 ( 물체 A 가 물에 잠기면 같은 '부피'의 액체 무게 만큼 가벼워진다) 에 따라 비중이 작은 은이 섞이면 같은 무게를 지키려면 부피가 커질 것이고 그래서 물에 잠길 때는 더 가벼워진다. (시의 출처 불분명)
  • 지구를 움직이겠소 : "내가 서 있을 곳을 주면 지구를 움직이겠오" . 그의 지렛대 원리에 따라(받침점서 거리가 1, 2 인 곳에 질량이 1, 2 인 물체의 무게 중심이 놓여있을 때, 거리1*질량1 = 거리2*질량2 가 성립하면 균형 이룬다.) 후기 저작 "방법"에서 지렛대 원리로 입체의 부피와 무게 중심 구함.
  • 히에론 왕의 거대한 배 건조. 몇명이서 진수 시킨 전설 : 전하는 말들은 과장인듯. 어쨌든 적당한 도구써서 실행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 로마와의 전쟁 : 플루타르크(기원후 46?~120?) 영웅전에서 시라쿠사와 로마 대결 묘사, 그 중 아르키메데스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들 있다. 햇빛을 모아 멀리 떨어진 로마군의 배를 태우고, 보병들에게는 비오듯 돌을 날리고, 기중기로 군함을 매달 뱅긍뱅들 돌린 다음 부숴버리린다. 로마군은 시라쿠사 성벽 위에 나무 기둥만 봐도 도망갈 정도였다고 한다. 기록은 한참 뒤의 거라 과장되었을 가능성. 어쨌든 이 전투로 아르키메데스는 이름을 알린다.
  • 구와 원기둥의 부피 관계 (2:3) 를 자랑스럽게 여겨 묘비에 그 그림이 그렸다고 하고, tusculannae disputationes, 5.23.64 튜스쿨룸 별장 대담집에 재무관으로 시실리아에 부임한 키케로가 땅속에 버려진 이 무덤을 다시 발견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따르면 아르키메데스가 수학에 몰입한 것은 '호머의 오딧세이에 싸이렌에 취한 사람' 같았다고 한다. " 씻지도 않고 음식도 잊고 옷도 제멋대로... 억지로 목욕탕에 데리고 가거나 몸에 향유를 발라야했다. 아궁이 재 위에 도형을 그리거나 기름 바른 몸 위에도 그림을 그려 .. 무아의 경지에서... "

저술

십여편, 수백쪽 남아있다. 투석기 기중기 들을 비롯한 기술에 관련된 것에 대해 직접 쓴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가끔 일부러 틀리게 증명한 것을 보내기도. 다른 사람들이 자기 기술이라고 떠벌린 것을 경고한 듯.

고대 그리스는 그 이전 유클리드 때도 그 이후 아폴로니우스(기원전 262?~200?) 때도 작도와 자취 문제가 주류. 넓이 부피 결정 문제는 비주류 문제. 왜 인정못받는 그런 연구를 홀로 고독하게 했을까? (아마도 시라쿠사적 정신의 투영인 듯)

주로 두 분류.

  • 도형의 넓이 부피 연구
    • 포물선의 조각, 구, 원뿔곡선 회전체들의 넓이 부피, 대개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머릿말. 시라쿠스에는 이해할만한 독자 없어서.. 여기에 현재 저술의 요약 뿐만 아니라, 앞으로 계획까지 실어서 연구 과정과 집필 순서 연구에 큰 도움. '코논(Conon)' 이라는 수학자를 높이 평가했는데("코논이 살아있었더라면 나선에 대한 증명은 훨씬 오래 전에 끝났을 것" - 당시에는 수학자가 매우 적어서 뛰어한 사람 한 명이 일찍 죽어버려도 영향 컸을 것.), 그가 죽자 코논의 친구인 도시테우스 Dositheus 에게 보냈다는 것도 명기. (최소한 다섯권)
  • 포물선의 구적 Quadrature of the parabola, 구와 원기둥에 대하여 On the sphere and cylinder, 나선에 관하여 On spirals, 원뿔상체와 구상체에 대하여 On Conoids and spheroids
앞서 보낸 것에는 들어 있지 않은 남은 정리와 그 뒤에 발견한 정리의 증명을 보냅니다. 
몇번이고 탐구하고 있던 것인데 그것을 발견하는데 무언기 모를 곤란한 점이 있어 곤혹스러웠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것과 함께 못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더 애쓴 결과 곤혹스럽게 했던 것을 찾아냈습니다. 
이미 한 다른 정리란 회전포물체에 대한 것이고 뒤에 발견한 것은 쌍곡체와 타원체에 관한 것입니다. 
  • 지레의 원리와 부력의 원리 연구
    • 평면의 균형에 대하여 (On the equilibrium of planes) : 지레 원리를 가정하고, 이것으로 삼각형의 무게 중심이 중선 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 (이후 포물선 조각, 반구, 원뿔 곡선의 회전체의 무게 중심 찾아냄.)
    • 부체에 관하여 : 부체의 원리. 물보다 가벼운(비중이 작은) 회전포물체를 축에 수직인 평면으로 자른다음 비스듬히 기울여 물에 띄우면 수면과 평행한 위치로 돌아오는지에 관한 문제 있음. 무게 중심 위치 결정과 부력의 원리 결합. 배 설계 기술과 관련 있는 듯.

내용이 매우 복잡한 것으로 보아 뛰어난 집중력을 가졌다는 것과 부합한다.

탐구 방법

  • '이중 귀류
    • '그것이 아니라고 해보자' 한다음 그 경우 모두 모순이 나오는 경우. 예 이끌어내고 이끌어내서 결론을 A = C 라고 함.
    • 에우독수스(Eudoxus[7] 이후 'Elements를 비롯해 많이 쓰던 방법이지만, 개량 발전시켜, 16 C 근대 수학이 탄생할 때 지대한 공헌
    • '방법' 머릿말에 이중귀류는 에우독수스가 발명한 증명이라고 나와있음. 여기에 원뿔과 원기둥 부피가 1:3 이라는 것을 데모크리토스[8](BC460? ~BC370?)가 증명없이 먼저 기술했던 것으로 밝힘.
  • 발견적 방법
    • '방법'에서 공개된, 젊어서부터 남몰래 쓰고 있었다던. 이 방법으로 '발견' 하고 마지막에 이중 귀류를 적용함. 엄밀성은 떨어지지만 대담하고 매력적 논의. 1906년 발견되었으니 근대 수학에는 영향 못주었습니다. 미리 발견되었더라면 미적분법 발견이 앞당져졌을 수도.
    • 무한개 조각으로 분해, 대담하고 기발한 양팔저울 기법
    • 이미 2천년 전, 양적관계로 관심 옮긴 것을 뜻함.

이후 발전

  • 아랍거쳐 12세기 아라비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 거쳐 유럽으로. "12세기 르네상스"라 부름. 14세기전 학문과 문화 융성기. Elements 도 이때 여러 판본. 1296년 경 활동한 캄파누스 종합 정리 편집 새로 낸 것이 널리 읽힘. 사본의 수가 세자리수인 것을 봐서 무지하게 많이 본 듯. 아르키메데스 저작은 비록 기욤이 번역했음에도 널리 읽히지는 않은 듯.
  • 15세기 중반 고전 부흥운동 일으킨 황제 니콜라스 5세 (1447 ~ 1455 재위) 때 크레모나의 야콥이 의뢰 받아 번역. 수학자 아니어서 미흡하지만 최초의 번역인 셈.
  • 수십년뒤 수학자 천문학자 게리오몬타누스 (1436 ~ 1476) 야곱의 번역판 수정 교정. 완성 전 사망. 그리스어 라틴어 대역, 신기술인 인쇄기로 출판 목적이었다. 여전히 미흡한 부분들 있었지만, 겨우 1544 최초 출판. 이때는 이미 아르키메데스가 상당히 알려졌지만 이 책은 집대성의 성격으로 수학사에 획기적이었다. 관심 고조.
  • 16세기 문헌학자 Commnandino Federigo 와 수학자 Maurolico Feanceco 의 작업들이 미흡한 부분 메워가다. 코만디노는 '원뿔상체와 구상체에 관하여'같은 말기 저작들모아 1558 에 번역본 출판. 1565 년 메르베케 기욤의 번역 이용해 '부체에 관하여' 출판. 여기서 회전포물체의 무게중심이 최전축의 3등문점이라는 사실을 쓰고 있는데, 이건 아르키메데스 '균형에 관하여'에 있는 듯 하나 사라졌고, '방법'에 양팔저울법으로 나와있으나 그때는 발견안되어서, 코만디노가 직접 증명' 입체의 무게중심론'에 담아 출판. 이 정리의 최초 완결된 증명은 마루로리코. 번역은 완료된 시점으로 봄. 이제는 전파 발전 시기로.
  • 17세기 전반 도형의 구적, 접선, 무게중심 결정하는 성과들 많아짐. 무한소 기하학 태동. 주요인물은 발레리오 (1552 ~ 1618) 와 카발리에리 (1598 ~ 1647).
  • 발레리오 '입체의 무게중심론' 1604 저술. 회전포물체 뿐만 아니라 회전타원체, 회전쌍곡체 무게중심 결정. '방법'에 있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니 스스로 알아낸 것. 오늘날은 적분을 이용해 쉽게 해낼 수 있는 것이지만, 귀류법을 쓴 복잡한 보조정리에 기대어 증명. 대신 보조정리만 받아들이면 무게중심 구하는데 단면 사이의 비례 관계만 주목하면 되도록. 따라서 기하적 성질을 뛰어 넘어 양적 세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발레리오의 혁신. 복잡하기는 하지만 보조정리에서, 회전축이 있는 도형이라면 '임의의 도형에 대해' 적용할 수 있었다. 아르키메데스만 해도 같은 것을 세 개의 '개별적인' 도형에 세 번 적용했는데, 발레리오는 스스로 일반화 시켰다. 스스로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자신있게 "이것이야 말로 왕도이다."라고 쓰다. (점점 '개별 도형' 에서 '일반화된 도형' 을 거쳐 '일반화된 양적 관계'로 발전)
  • 카발리에리  : 아.나 발.이나 탐구에서 내접, 외접 도형 만들지 않고 점들에서 비례관계만 얻어내는 것으로 결론내는 방식. 그래서 아.는 유한개 량을 조사한다음 무한까지 대담하게 확장했고, 발.은 매우 복잡한 보조정리. 카.는 단면의 비례 관계에 주목. 발. 의 방법 일반화. '카발리에리의 원리' 라 알려진 기본 명제를 '불가분량에 의한 연속체의 기하학(Geometria indivisibilibus continuourm 1635) 저술. 적분으로 가고 있는 디딤돌. 양적관계에 주목. 그러나 기하학적 논의로 했고 문장이 복잡. 지금은 한줄 적분으로 쓸 것을 매우 길고 복잡하게 서술. 그의 연구 결과는 점점 복잡. 양적 관계를 기하적으로 설명하다 보니 그런 것. 새술은 새부대에 담았어야. 도형에서 algebra, function 의 언어 필요했던 것. 그리스 전통을 너무나 잘 알아서 기하에 얽매여 있었던 것. 아.가 당시 학문의 변방에서, 작도와 자취가 아닌 넓이와 부피를 탐구했듯, 이것도 조금 떨어져서 보았어야 했다.
  • 월리스 (1616 ~ 1703) 이 '무한산술' (1656) 쓰면서 산술적 접근 시작. 수에서 출발 수로 풀어내고 기하적으로 해석할 뿐.
계속해가면 결론은 1/3 ! 결론. 이것으로 포물선 구적 구함.
  • 아르키메데스가 '무한'까지 뻗어나갔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 '원뿔 상체~' 에서 보았듯이 무한 급수로 나간다는 것. 양적 관계에 주목하도록 물꼬를 트다.
    • 이중 귀류를 이용한 구적의 기법. 이것인 근대 구적법의 출발점이고 엄밀성의 근거였던 거. 이 엄밀성을 평가하고 결적 극복해가면서 더 많은 도형의 구적 구하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 미적분과의 비교 : 근세의 발견
    • 접선의 결정과 구적이 서로 역이라는 것 : 이것은 아.발.카도 몰랐던 내용
    • 개별 도형이 아니라 일반화시키고 알고리듬적으로 풀어감 : 이를 위해서는 양적관계로 이행했어야. 이 지점에서 아.발.카 의 공헌 지대

아르키메데스에 대한 말, 말, 말

  • 플루타르크 : 모든 기하학에서 그처럼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 또 그처럼 간단하고 명료한 설명을 찾아 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의 재능에 기인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리도 쉽고 자연스러운 결과들은 어느 모로 보나 그의 엄청난 노력과 수고의 댓가라고 말한다.[9]
  • 목욕탕에서 뛰어 나가면 "유레카! 유레카!" 다는 말 : 근거 Vitruvius 에서

Note

  1. 평소 사이 안좋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연합해서 페르시아와 맞서 승리한 그리스의 역사적 전쟁.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 등, 하지만 시라쿠스에게는 별로, 이들에게는 카르카고와의 전쟁이 더 중요한 의미
  2. 피르후스 황제 (또는 삐르 황제 마케도니아와 에피르(Epirus) 연맹의 통치자, 281 년 이탈리아와 시실리아를 기반으로 그리스 동맹을 부흥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로마와 카르타고와 전쟁 일으킴. 전쟁은 소득없이 끝나고 히에론 장군이 권력을 얻는 계기가 됨. 히에론 장군은 아르키메데스와 친척 관계일 가능성 있음.
  3. 정권 초반 불안. 이탈리아 용병 세력인 mamertints의 침입, 이후 이 전쟁에 로마, 카르타고 뒤썩이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BC264-BC241) 처음엔 카르타고 편에 서서 싸우다가 점점 빠져나감. 전쟁 끝나고 시라쿠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실리아가 로마 지배. 이때 이미 히에론은 중립적이 되고 시라쿠스만 남음. 이때 부터 시라쿠스 평화적 시기. 동시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무기 개발. 여기에 아르키메데스 참여. (고대 대포 포함)
  4. punicheskaya vaina (러), 기원후 12세기 말, 역사가 tsetsi 의 '천千 의 역사의 힐리아드(Khiliad)'에서 아르키메데스가 영면 때 약 75세로 언급, 따라서 탄생을 287경으로 추정)
  5. Fadii 라는 이름
  6. 시라쿠스 평화 시기에 알렉산드리아로 간듯. 이 시기에 그의 수학 지식에 막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 Konon을 만나고, 에라스토테네스도 만난 듯. 창조적 발명. 예, 아르키메데스 스크류(나선) for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한 목적. 기원전 240년 경이면 아르키메데스 40대 중반. 처음엔 주로 공학. 죽을 때 까지 20여년 학문 전념. 지금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수학 성과는 '포물선 넓이 근차치 구하기(quadrature of a parabola)' BC235 년작으로 추정. BC218 까지만 연구했음. 이 때부터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2차 포에니 전쟁, 시라쿠스 개입. BC212 년, 로마 시라쿠스 점령, 아르키메데스 사망.
  7. 플라톤 아카데미서 BC367 에 방문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친 듯. 당시 플라톤은 시칠리아 두번째 방문중.
  8. 소크라테스 시대 사람. 플라톤에 미움받아 철저히 매장. 그리스 수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저작은 에우데모스가 기원전 320년 경 쓴 '기하학사', 이 책 원본은 사라짐. 수백년 뒤 프로클로스(410 ~ 485) 의 저작에 일부 전함 . 유클리드 직전까지 기하학 발달사 요약 서술. 탈레스와 피타고라스로 해서 플라톤 아카데미서 발달했다는고 밝힘. 그는 플라톤 아카데미 출신으로 데모크리토스는 아예 언급 안함.그리스 논증 수학은 6세기 이전 탈레스 이후 발달했다고 썼지만 오늘날은 기원전 5세기 중반쯤이었을 것이라고 봄
  9. 플루타르크, Lives of the Noble Grecians and Romans 초기 수학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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