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410-1

DoMath
211.249.225.103 (토론)님의 2006년 5월 29일 (월) 22:4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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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쓰나 벽창호 같으니 !

몸을 달군다. 살살 달군다.

짐싸고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가 강원도에 갔다 온 닷새. 나는 말이 많았다. 말이 많아 넘칠 지경이었지만, 봄 내린천도 쿨쿨쿨 흘렀으니 지금쯤은 그만 다 쓸어갔을테지. 침묵의 지혜에 매달리면 뭐하나 싶기도 하고 버린다 하여 바람을 빼듯 할 재주도 없으니 차라리 박박 긇어 한꺼번에 내쳐버리자 하고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서울에서 친구들 만나 곱창들에 쏘주를, 안주 없이 양주를 마셔대며 실컷 떠들고 웃어재꼈다. 목이랑 배가 땡길 지경이었으니. 다음 날 술 덜 땐채 강남에 가서 생매운탕으로 해장을 하였으나 해장술은 안했고 흐릿한 홍천에서 묵과 막국수로 저녁을 꿀꺽꿀꺽 먹으면서도 해장술은 안했다. 생각해보면 해장술이라는 해본적이 없다. 해장술이라는 것을 믿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아니 차라리 불신한다고 쓰자.

하지만 그날을 넘기지 못했다. 목요일 밤 미산계속에 들어가 쏘주를 한병만 게눈감추듯 마셨다. 아주 좋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어디쯤 공동체마을이 만들어진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의 공동체마을과는 다를 것 같았다. 무엇에 집착하는 것도 없이 '다른' 건 참 좋아 보인다. 나도 그런 걸 꿈꾸고 있어서 그런지 그런 말을 듣는 건 참 기쁜 일이었다. 그렇게 '분화되면서 모이는' 세상이 21세기 였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기쁘고 말고, 이야기 듣는 것 만으로도 기쁜 일이고 그래서 술에 절어 힘들었을텐데도 몸은 알아서 더 열어 술을 받아주었다.

다음 날도 술이 들어가게 된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1년동안 쌓인 개똥을 치워 새로 자라오는 나무들에 고루 뿌렸다. 똥을 쌌던 하얀 진돗개 '송이'가 새끼를 낳다 피를 많이 흘리고 죽어버린 뒤 빈 집을 성깔있는 '바람이'에게 주기 위해 긁고 쓸고 나르고 옮기고 뿌렸다. 쉬는데 손님이 와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켜고 일을 좀 해보려했지만 도무지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한시간 여 낑낑 거리다 나와 또 몸쓰는 일을 하려는데 비가 신나게 뿌리기 시작했다. 천둥도 왔다. 산이 깊은 곳에서 천둥을 처음 들어본 셈이다. 마침 저녁 먹을 때도 되었고 해서 홍천에서 사 들어간 쇠고기안심을 구워 먹으면서 술을 했다. 처음엔 쏘주를, 떨어지고나서 꼬냑을, 그도 떨어져 음악을 들으러 집을 옮겨 갔다.

가져가 듣고 드리고 싶었던 라흐마니노프 성가곡은 아침에 이미 들었다. 소리가 달랐다. 역시 달랐다. 소리가 다른 기기에서보다 낱낱이 들어오고 낮은 것은 낮게 높은 것은 높게, 거기다 울림의 정도도 실제음과 닮았고 내가 좋아하는 성가를 LP로 들으면서 그리 좋은 재생시스템에서 듣게 되니 마음이 그리 흡족하고 흐뭇할 수 없었다.

술도 되고 해서 챠이꼽스끼의 비창을 듣고 싶은데요... 하고는 설겆이도 안하고 방을 옮겨 음악을 들었다. 카라얀의 연주였는데 내 안에 있는 음악과는 조금 달랐다. 더 또박또박하는 것 같고 덜 감성적이었다. 다른 지휘자들도 그런 경향이 있다. 므라빈스키 지휘 CD를 가져왔더라면 좋았을걸. 그날 오신 분께서 와인을 가져오셔서 와인과 함께 음악을 들으니 흥은 저절로 생겨났다. 장사익의 찔레꽃 판을 몇 곡 들으니 술도 과했지, 흥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마침 그 때 판이 끝났다. 판이 끝나기 직전 나는 국밥집에서를 듣다 "그렇다~ 저~노인은!" 부분에 나도 못이겨 추임새 (어이!)를 넣으며 오른 손을 나비처럼 뻗어 반달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리고는 "가는 길을 아~안다."를 크지 않게 따라 불렀을 것이다. 판이 끝났으니 나가지만 그게 어디 되나. 흥이라는 것 "깨지" 않으면 좀체 사그러들지 않는 것이다. 생길 때는 물처럼 생겨나도 생기고 나면 얼음과 같이 단단해지고마는 법이니까.

잘 되었다. 노래를 해버리자. 내 속에서 그런 말들이 마구 튀어 나와 옷을 껴입고 내린천 굽이 심한 곳으로 내려갔다. 자, 얼씨고. 노래를 했다. 밤이어도 물을 쉬지 않고 흐르니 물이랑 물이랑, 물이랑 바위랑, 물이랑 모래바닥이랑 부딪는 소리가 컸다. 게다가 반달인 달빛이 그 흐름에 둥실 떠올라 퍼져 흥을 사그러들게 하기는 커녕 증폭되고 마는 것이었다. 노래에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내 곁에 말을 건 분이 있을 때에야 그 꿈에서 깨어 났다. 그리고 두시간여를 방에 들어와 또 이야기를 했다. 술도 없이 이야기를 했지만 내 안에 담긴 흥이라면 흥이 여태 수그러들줄 몰라 말이 많았다. 말이 너무 많았다. 그 분은 졸리운 모양인데도 나는 말을 계속하다 그러다 미안한 마음이 그 '흥' 이라는 놈을 똑부러지게 노려볼 때에야 "어이구. 이젠 들어가 자야죠" 했다. 자고 일어나 처음 든 생각이 "아, 어젠 말이 너무 많았어." 내가 했던 말을 되새겨보니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나가 눈이 벌건 채로 마당을 쓸었다. 마당이 그리 넓지 않다고 여겼는데 쓸다보니 이게 제법 넓어 쓸어도 쓸어도 거기서 거기였다. 좁은 마당에 살거나 마당없이 사는 사람들이 흙마당을 맛을 어찌알겠는가. 그 마당을 쓸어댔던 사람 '마당쇠'에 대해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면서 취기를 쓰악 쓰악 쓸어내렸다. 땀이 몇방울 밸 지경이었다. 아침을 맛있게 먹고 이번엔 잊지 않고 설겆이를 한 다음, 이곳저곳 오늘 들어올 사람들이 편하게 느끼도록 청소를 하는데 "와서 음악들어~" 하시는 소리에 예이~ 하고 분에 넘친 마당쇠는 뛰어 올랐다. 라흐마니노프 첼로 소나타 였다. 성가곡에서조차 '정열 -우울-서정'을 교차하는 작곡가니 첼로와 피아노로 음악을 엮었을 때 어쩌겠는가? 말할 필요 없는 것이다. 멋졌다. 와우 ~ 술도 깨가는 것 같고...

그때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고 음악들 듣고 나서는 돌아다니다 라면을 끓여주시길래 함께 먹었다. 사람들이 오고 인사를 하고 더불어 숲 학교 뒤를 돌고 내려와 강의를 듣고 밤 열한시가 되어 뒷풀이가 시작되었다. 막걸리를 마셔야 했는데 난 고집피우느라 없는 소주를 꺼내다 주시도록 부탁을 드려 마셨다. 물론 내가 그리 부탁할 사람은 못되고 소주가 낫겠다던 내말을 받아 노조위원장 출신 아저씨가 그리 부탁을 한 것이다. 이야기와 이야기가 오가고 술잔이 오가니 술을 조금만 마시겠다던 결심이 어느새 술잔에 녹아버리고 말았다. 저런.

사람들이 하나둘 방으로 들어갈 때 즈음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소리가 맑다. 어쩐 일이지? 내가 벌써 취했나? 아니면 산골에서 듣는 소리여서 그런가? 맑다. 참 맑고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슬슬 흥이 돋우려했다. 하지만 잘 참았다. 처음부터 냉정하게 내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술잔은 늘어가도 취하지는 않았다. 모두들 들어가 자고 단 둘만 남았을때까지는 그랬다. 변호사인 분과 교육이야기가 나오고 공교육대안교육,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하는 일반 학교를 제대로 살려야 하고, 거기서 떨어져 나와 만드는 대안학교를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대해 문제가 많은 사례를 들어 조금은 경계를 하고 있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니, 그건 나로서는 '민감한' 내용이었다.

이야기란 사실, 소재와 상관없이 어떤 '틀'의 충돌이기 쉽다. 그날도 번번이 그랬다. "전략과 정책"의 문제를 제기하고 "자금과 인력 자원"에 대해 "구체적"인 것을 이야기해야하고, 아이들에게 "실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두고 나는 왜 달리 생각하지 않는가? 란 식으로 논쟁을 했던 것 같다. 술이 들어가고 둘 사이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게다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더 옮은 것'을 가지고 논쟁하는 건 사실 쓰잘데기 없는 노릇이 되고 말때가 많다.

역시 새벽 다섯시가 되어서야 설겆이 까지 다 끝나고 우리는 자러 갔다. 이불이 없어 나는 맨땅에 방석을 덮고 자야했다. 새벽이 되면 사람들이 덮어주곤하니까 이번에도 그럴거야 하고는 그냥 누웠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었고 그래도 추위가 느껴지자 방으로 들어갔다. 하루도 안되어 부쩍 친해진 사람들이 깨어 일어나 말을 주고 받고 웃음소리가 오갔다. 자고 싶은데 몸이 잘 말을 안들었다. 잠도 안오고 일어나지지도 않았다. 비조불통에 가서 그 흐르는 물웅덩이 차가운 물에 맨몸을 쏙 담드고 놀아야하는데 그럴 엄두는 아예 일지 않았다. 술이 과했군.

일어나 산책을 하고 밥을 먹고 청소할 수록 취기는 더했다. 그대로 어디 편한 자리에 누워자고 싶었는데도 홍천까지 오는 길에서도 잘 수 없었다.

홍천에서 만나 다시 왔던 길을 되집어 내면으로 들어갔다. 더불어 숲 학교에 음식을 대는 오대산 내고향 식당에서 두부전골을 찐하게 먹고 났더니 드디어 몸이 화들짝 깨어난다. 내면 안으로 더 들어가 원동을 지나 삼봉약수에서 약수를 세잔 마시고 나이 마치 술을 마시지 않은 듯한 착각이들었다. 거기 방갈로에서 며칠 묶었다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착착 접어 넣고 옹달샘을 향해 부르릉 시동을 걸었다. 옹달샘을 찾아 겨우겨우 골짜기를 걸어 올라갔는데 거기엔 얼음눈이 높이 쌓여있었을 뿐이었다. 빨간 조롱박하나 파란 조롱박 하나가 나무가지에 걸렸고 누군가 파다만 흔적 남아 거기가 톡 쏘는 샘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보기도 하고 구석기인처럼 돌로 쪼아도 보았지만 팔뚝 하나 들어가도록 소식없어 관뒀다. 때 되면 녹고 때 되면 나오겠지, 위로하면서 옆으로 폭포되어 흐르는 계곡을 보고 이 눈얼음판을 왔다갔다하며 보았다. 허허~

봄이면 천지가 산나물이요 가을이면 밤이 천지요... 빽빽하게 들어차 강건한 나무들과 쏟아지는 물만해도 고맙기만 한데 그런 말을 듣다보니 "아, 자연은 우리를 그리 사랑하여 베푸는데, 왜 우린 독을 쏟아넣고 칼로 후비는가" 탄식을 했다.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인데, 나를 낳아주고 나에게 한없이 베풀다 받아줄 어머니인데 언제부터인가 도시가 비대해지면서 그 고리가 끊기고 사람들은 그 큰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도시로 떠난 자식이 제 하나 잘해보겠다고 어미인줄 모르고 부려먹어 말없이 베풀기만 하는 어미는 이제 골병들어가는 꼴이다. 그렇다고 탄식이 길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엔 강원도의 산은 위대했다. 그 박동과 왕성한 기운에 퍼득퍼득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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