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412-1
안재구 선생님이 쓴 '왜놈 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돌베게)이라는 책을 재미나게 읽고 있다. 반쯤 읽어가는데 서둘러 읽을 책이 아니라 쪼개서 하루하루 재미를 톡톡히 더하고 있다. 일제 말기 밀양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다. 말들, 풍습들, 지금도 마땅히 우리랑 함께 하였으면 좋았을 바로 그 山河와 사람들이 많이 변했다. 밀양 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 뭐 내가 밀양 박씨라서, 그런 뭐.. 회귀성 때문은 아니고... :)
부산으로 내려오고 일 년 쯤 정신나간 놈처럼 살다가, 숨을 돌리고 내가 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들에 빠졌다가. 내가 무언가 잊고 있다. 그래서 학교 설립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다, 기왕이면 우리 전통 가옥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양반집의 여유와 농가의 '열림'을 모두 지향하는 그런 식이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럴 즈음 이런저런 자료를 모으고, 마침 우리나라 '서원'들에 관심이 많아졌다. 서원에 관한 책을 두권쯤 읽고 서원 여행을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지. 그런데 그게 뭐 쉽게 되나. 그럴리 없지. 차도 없지 그때만 해도 주중에 일있지 주말엔 서울에 자주 올라갔으니까. 소위 '유림 문화' 또는 '양반 문화'에 대해 관심이 더 가는데가 마침 우리 건축에 대한 책도 내 곁에 오게 되었는데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끌림이 햇빛만난 안개처럼 그리 허망하게 사라져버리지는 않았다.
가고 싶어도 미루던 부석사를 가게 된 것도 사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액서원이라는 '소수서원'을 갈 겸해서 떠난 것이었으니까. 그런 인연이 이후로 부석사를 다섯번이나 더 가게 되고, 앞으로도 언제든 고향가듯 갈 수 있다는 마음이 들게 했던 것이다.
또 밀양은 부산과 대구사이에 있어서 수십번 '지나친' 곳이다. 한번 내려 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 내려본 적은 없다.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올라갈 때 왼쪽 창가에 자리를 잡으면 낙동강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풍경과 나란히 가게 된다. 날씨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데 어떨 때는 그 기상들에서 씩씩한 청년을 보는 듯 하고 어떨 때는 신선처럼 맑고 평화로움을 만나고 어떨 때는 비통을 함께 겪게 된다. 그 풍경이 다 끝나갈 즈음 아파트들이 나오고 잘 보다보면 기와집들도 보이고 그러는데 거기가 바로 밀양이다. 고속철도가 생기면서 밀양에서 정차하는 기차는 하루에 몇대 안된다. 서울서 내려올 때도 왼쪽에 앉을 경우 안재구 선생님이 한 대목을 빌어 따로 써준 '남천강'이 나온다. 강원도 산자락과 물자락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남도의 유순함을 넘어서는 당당함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밀양은 내 마음에 더 가까이 있었다.
그러던 중 이런 자그마한 일들이 있었다.
- 당시 우리 기관장이던 분 친구가 밀양 출신인데 지금은 서울에 사시지만 문중에서 중요한 분이어서 옛날 큰 기와집을 지금도 보존하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보존하는데 돈이 많이 들고 국고에서 보조를 받긴 하지만 재력이 충분해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자료를 뒤져보니 밀양에는 그런 '문중'들이 제법 있어 지금도 그때 유림의 전통을 이어나가보다 하였다.
- 신영복 선생님(조금 자세히) 고향도 밀양이었다. 지난 12월, 더불어 숲학교에서 '서도와 나'라는 주제로 강의 하실때에야 알게 되었지만,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벗들이 강가로 나가 큰 나무를 들고 모래사장에 글씨를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어린 신영복도 그것을 따라할 만큼 귀여움을 받고 총명. 지금 미루어 보건대 안재구 선생님이 뛰어놀던 남천강가 어디메서 몇 년 뒤 (안재구 1933년생, 신영복 1941년생) 글씨를 쓰고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것 같다.
- 내 집이 생기면서 누이가 쓰든 오디오를 가져다 놓으니 '한국의 아리랑' 시리즈를 듣게 된다. 아리랑이 다 좋지만, 남쪽에서는 유명한 진도아리아과 밀양아리랑이 역시 그만이더라.
이어서.... 휴.. 팔아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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