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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이 여기저기 쓴 문학론이라고 할만한 산문들이 모인 책 제목이 구도자다. 아름다운 가게에 들렀다 사고 야금야금 읽고 있는데 첫대목에 이런 부분이 있어 함께 읽을만하다.
- 저의 근원은 전후입니다. 그때 전후의 폐허 사회는 아무런 고전적 자기 구역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대의 사회를 이루어온 전습의 질서와 단위,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유서 깊은 문화의 구성이 보존되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혀 난데없이 그 폐허에 내던져진 원시적인 자아밖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존재 의식은 반드시 실존이라는 개별체나 단독자의 관념이었습니다. 어떤 것도 관련될 수 밖에 없었으며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으며 어떤 것도 가정할 수 없는 고독 자체가 우리들의 의식 일반론으로 압도했던 것입니다.
- 이런 전후의 폐허에서, 그 의제 프랑스에서 저는 기이한 짐승처럼 회색의 장삼 자락을 휘저으면서 김관식이 파산하는 뒤를 따라서, 미국 민간인들이 보낸 낡은 구호물자 옷을 헐렁하게 걸치 동인(同人)의 풍경 가운데서 일종의 외설인 것처럼 이 고통스러운 한국 문단에 등장했던 것입니다.
- 저는 매우 서투른 한 사람의 의존적 서정 시인에 지나지 않는, 16세기의 일본 침략 이후 다시 한 번 폐허가 된 이 막연하고 막연한 땅의 산하를 방랑하는 한 집 없는 표박자 였습니다.
- 저는 여느 사람들이 처음에는 근대의 자아에 천착했다가 차츰 회귀열을 앓으면서 전통의 자아로 돌아가는 의식 전화의 절차와는 반대로 동양 사상 또는 과거에 대한 허구로부터 근대의 자아가 경험하는 민족 이데아의 고뇌로 저 자신의 문학을 이행시켜왔습니다. 이미 전후에 문학을 사회 이념이나 어떤 역사적인 의식의 매듭에 놓으려돈 일군의 동인들은 그 자신의 보수주의에 안정되고 한편 자연 숭배자는 그들대로 아무런 변신의 당위 없이 안정되었을 때 저는 그들이 남겨둔 폐기된 자리에 가서 오늘의 제 문학적 입장을 강화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역의 과정을 돌아볼 때마다 저는 제가 마치 이 세상을 물구나무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가 어떤 기괴한 이단자가 아닌가라는 감회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정당성의 명예에 집착하여 저의 문학의 필연성이 받아들인 변화와 발달을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