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 Wife

DoMath
Parha (토론 | 기여)님의 2006년 11월 3일 (금) 15:3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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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자 약력

◆부인 이수자

부산사범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같은 학교 음악교사였던 윤이상 선생을 만남. 집안 반대를 뚫고 폐결핵 3기였던 윤 선생과 결혼. 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윤 선생에 이어 납치돼 옥고를 치룸. 윤 선생 서거 이후 <내 남편 윤이상>이라는 책을 씀. 슬하에 딸 정과 아들 우경. -(이승재) 윤이상 선생님이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굉장히 늦은 감이 있지만 지난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이하 진실위) 의 동백림 사건 발표는 명예회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시작의 의미는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감이 남달랐을 텐요.

=(이수자) 저한테도 (조사관들이) 당사자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해서 만났는데 갑작스럽게 만나는 바람에 제가 답변하기 곤란했습니다. 진실위에서 발표하고 난 뒤 윤이상평화재단에서 준 발표 자료를 읽어봤습니다. 읽어보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어쨌든 일이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대단히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이뤄져야만 인권이 서는 정부가 출발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96년부터 97년까지 2년동안 <내 남편 윤이상>을 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책에 가족사, 사랑까지 많은 내용을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부인으로서 선생님은 한마디로 어떤 분이셨습니까.

=성격부터 말씀드리면 우리 선생님은 과묵합니다. 그리고 명랑한 축에 들지 못합니다. 또 예술가로서 표면은 조용한데 마음은 굉장한 정열을 갖고 있어서 (상처입은 용의 저자이자 독일의 저명한 작가) 루이제 린저의 말을 빌면 ‘화산구’입니다. 또 정의감이 대단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56년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 간 선생님은 참 열심히 했답니다. 음악대학 교수끼리 서로 모이면 당신이 가르치는 한국사람 윤이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며 화제가 됐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7년 동안 작곡과에서 졸업생을 못냈는데, 선생님은 2년만에 졸업했습니다.

-부인의 근황 궁금한데 현재 머무는 곳에 대해 말씀 해주시죠.

=제가 살고 있는 집은 평양 중심지에서 25~30분 정도 떨어진 산 속에 있습니다. 90년 범민족음악회를 열었을 때 선생님께서 거동을 못할 정도로 아팠습니다. 그 때 김 주석께서 해외에서 오래도록 예술성을 높이 선양하고 오늘날까지 살아왔는데 조국에 집 한칸 없어서야 되겠냐며 집을 지어 주기 위해서 땅도 보고 건축가도 보냈답니다. 거기가 원산 인근의 시중호 입니다. 길 하나를 두고, 왼쪽이 바다이고 오른쪽은 호수인 아름다운 자연환경이었습니다. (김 주석이) 왜 거기다 집을 지으라고 하셨냐 하면 다음에 통일이 되면 평양보다 남쪽과 가까우니까 거기다 집을 하나 지으면 좋지 않겠냐고, 김 주석께서 그것까지 생각해서 지었습니다. 의사 선생이 급하게 병원으로 가려면 어렵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땅까지 봤는데 결국 평양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자고 했습니다. 우리 선생이 바다를 좋아하고 물을 좋아해서 대동강 강변에 있는 한 곳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강바람이 세고 천식이 심한 선생님께 건강상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 있는 집을 고르게 됐지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산속에 있는 참 훌륭한 집입니다. 평양주변에 많은 초대소가 있지만 지금 있는 집만큼 좋은 초대소는 없다고 할 만큼 참 좋은 집입니다. 그렇게 (김 주석이) 그 집을 선물로 줘서 내부를 제 마음대로 꾸며서 살게 됐는데, 우리 선생님은 아프니까 자주 오지 못하고 1년에 한번 정도 왔습니다. 실컷 있어봤자 1개월, 아니면 1개월도 못있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95년에 돌아가셨으니까 94년 가을까지 있었습니다. 김 주석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초청을 했는데 장례식에 못왔습니다. 그 때문에 오해도 받곤 했지만 워낙 몸이 좋지 않아서, 호흡을 잘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김 주석이 사망한) 해를 넘기기 전에 (북한에) 왔다가 다시 일본에 갔는데 결국 폐렴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6주동안 있었는데 일본의 지휘자가 자기 집에 몇달 있으라고 해서 있을까도 생각해봤습니다. 일본의 기후가 온화하니까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도저히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이 “나는 도저히 불명예스런 땅에서 죽을 수가 없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독일로 돌아가야겠다”고 해서 독일로 오자마자 그 길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집을 반납했는데 간부들이 수령님께서 선물로 내린 집인데 그렇게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서 독일의 그 어두운 땅에서 혼자 있기도 적적하고 장군님께서 초대도 하고 해서 오기 시작한 것이 이렇게 오래 됐습니다.

-평양에 계시면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일은 뭔지, 어떤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저는 산속에서 참 평화스럽게 지내고 있습니다. 새를 기르고, 개와 함께 산보도 하고, 독서도 하고, 음악도 듣고, 한번씩 써야 될 것 있으면 쓰고, 남쪽에서 오는 영화도 보고 그럽니다. 저는 거의 40년동안 남쪽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남쪽이 현대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독일에 있으면 소식을 접하기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딸이 남쪽에 드나들면서 시사 잡지도 갖다 주고 많이 갖다 줍니다. 저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어라고 쫓아다닙니다. (남쪽) 영화를 보면서 사조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으며, 풍습이 어떻게 변해가며, 말이 어떻게 변해가며, 옷은 어떻게 입으며, 도시는 어떻게 많은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꼭 눈으로 보는 것처럼 느끼면서 보냅니다.

-윤이상 선생님과 함께 한 평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63년 첫 방문 뒤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치르고 두 번째로 북에 간 것은 79년이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 자동차로 가는데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슬프게 떠나왔습니까. 그런데 북도 내 고향이란 말입니다. 지나오면서 느꼈던 그 훈풍, 그 공기, 그 햇빛, 그 분위기는 오랫동안 독일에서 잊고 살았던 환경이었습니다. (눈물이 나서 말을 잇지 못함...) 해외에서 좋아서 사는 것과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은 다릅니다. 좋아서 사는 것은 오늘이라도 내일이라도 가고 싶으면 비행기 타고 떠날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북에 올 수도 없고, 남에 갈 수도 없고, 외국에서 외롭게 슬프게 어둡게 살고 있었는데 평양에 도착해 초대소로 가는 길을, 참 잊을 수 없었습니다. 개 한 마리 지나가도 내 동족같이 보이고, 소한마리 지나가도 내 동족같이 보이고, 다 고맙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그때 조국이 뭔지를 느꼈습니다. 정말로 조국이 무엇인지. 조상이 살아서 뼈를 묻고, 거기서 사람이 또 태어나서 살고, 그게 조국이란 걸 알았어요.(눈물) 그 자기 조국에 대한 고마움을, 비록 북이지만 그걸 느꼈습니다.

또 한가지는 김 주석께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만났는데, 물론 남쪽에서 보수적인 사람은 좋지 않게 말하고 그랬죠. 김 주석을 만나봤는데 풍기는 인품, 분위기, 다정한 정을 여러모로 느꼈습니다. 왜 해외에서 온 사람들이 김 주석을 보면 좋아하는지 감명을 깊이 받았습니다. 또 선생님은 낚시를 좋아했는데, 그걸 생각하면 꿈에도 잊지 못한답니다. 낚시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답니다. 낚시질을 하면서 지낸 날들은 정말 독일에서 느껴보지 못한 것입니다. 내 조국에만 있을 수 있는 것, 마음이 편히 접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정말로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비로서 자기 고향을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처음 북에 오신 게 1963년이잖아요.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상처입은 용> 을 보면 최상한이란 친구를 만나고 사신도를 보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어떻게 오게 된 것입니까.

=최상한씨는 죽마고우입니다. 일본에서도 같이 음악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인민군이 철수할 때 따라간 겁니다. 최상한씨 가족이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이 유럽에 유학간다고 하니까 최상한씨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지난 번에 일본에서 편지를 받았는데 분명히 남편의 편지였습니다. 편지를 보고 답장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습니다. 해외에서 소식이 닿을 수 있으면 꼭 좀 남편의 소식을 알아주십시오”하고 신신 부탁을 했습니다. 물론 우리 선생님도 친구의 소식은 알고 싶었죠.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서 “당신의 친구 최상한의 편지가 와 있으니까 가져가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가지러 갔답니다. 그때 베를린은 담도 없었고, 서로 통해 있었습니다. 교통도 왔다갔다 하고 지하철도 왔다 갔다 했습니다. 북한 대사관에 찾아갔더니 편지를 주더랍니다. 그 뒤로 동베를린하고 가까워졌죠. 그러면서 동백림 사건과 연관됐지만요.

61년에 제가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로 왔는데 독일에 와서 보니 형편이 어려워 도저히 아이들을 곧 부를 형편이 못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매일 울다시피 했습니다. 집 서재에는 강서고분 사신도 벽화가 항상 걸려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걸 늘 쳐다보고 있었어요. 작품 쓸 때도 쳐다보고 하면서요. 따라서 북에 간 첫째 계기는 강서고분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에게는 자기 예술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 유럽에 가서도 강서고분을 굉장히 보고 싶어 했던 것이지요. . 첫 번째 북한을 찾은 건 사신도를 보기 위한 것이었고, 두번째 목적은 최상한씨 만나는 것, 세번째는 북이 전쟁 후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전쟁은 우리 민족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세계 냉전의 산물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싶어 북에 오게 된 것입니다.

-북에 오기 전에 선생님이 강서고분 사신도와 음악적 세계에 대해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지요.

=그 얘기는 안했습니다. 사신도를 보면서 감을 얻는구나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사실 저는 현대음악이 무엇인지를 몰랐고요. 처음 독일에 와서 남부의 한 도시인 슈바르츠발트에서 열린 세미나에 갔습니다. 거기서 제가 왔다고 하니까 친구인 프로이덴베르크 교수가 집에 초대를 했는데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당신 남편의 음악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들리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현대음악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고 그때 인상으로 말하자면, 우습지만 ‘우주 전쟁’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웃음) 속도도 빠르고 꼭 날아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우주 전쟁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예술도 시대에 따라 변천합니다. 사실 현대 미술을 보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현대 미술을 안 보지는 않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들이 과학의 발전은 따라 가려고 하면서 예술은 왜 뒤로 쳐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술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제적으로 유명한 연주가들은 고전을 연주하고 다니면 막대한 돈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현대음악을 합니다. 왜냐하면 고전음악보다 현대음악이 좋으니까 그렇습니다. 모른다고 놔둘 것이 아니라 자꾸 따라가야 합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나이가 80살이라면서 아무것도 안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노력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음악가들이 현대음악을 모른다고 해서 벗어던지고 밤낮 고전만 해서는 발전 못하죠. 우리 선생님은 그런 시대 흐름을 한국도 따라가야 하고, 뒤떨어지지 않는 나라가 돼야 한다고 신경도 많이 쓰고,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만약에 선생님이 정치적인 갈등 없이 남쪽으로 돌아갔다면 참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못들어가도 문광부에서 음악제를 할 때, 남쪽이 해외에서 음악가를 데려온다든지, 오케스트라를 초청한다든지 할 때 많은 예술가들을 참석시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북에는 한 것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김 주석께서 한번은 만나자고 해서 만나 뵈었더니, (김 주석이 윤이상 선생에게) 해외에서 많은 명성을 날리고 했으니 앞으로 10년, 선생님을 다시 쳐다보더니 아니 20년 동안(웃음)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끌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참 기뻤죠. 자기가 예술을 하는데, 남이나 북이나 예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늘 정치가로서만 화제를 삼고, 정치인처럼 여기고 있으니 그게 그렇게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김 주석이 우리나라를 위해 음악연구소를 내서 도와달라고 했을 때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술가로서 대우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김 주석은 선생님에게 우리나라의 예술을 해외에 알리는 재간둥이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들은 오래 살아야 한다며 참 아꼈습니다. 북에 올 때는 꼭 식사에 초대해서 만났습니다. 예술적 재능을 인정했고, 초대소에 있을 때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전화를 해서 건강이 어떠냐고 걱정해주었습니다. 김 주석은 선생님을 정치가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글을 보면 민족의 고유한 유산과 역사를 조국이라고 표현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에서 보면 선생님이 북쪽을 편애하거나 북쪽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요.

=우리 선생님은 운명적입니다. 정의감이 대단합니다. 동백림 사건 뒤 김대중씨 납치 사건을 계기로 다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그것으로 한국 군사 정부에 더 밉보였고, 갈등이 심해져 결국은 한국에 못 들어갔죠. 그리고 전두환씨가 집권했을 때는 청와대 사람을 많이 보냈습니다. 제발 한국에 와서 예술적인 면을 도와주시면 우리가 국력을 들여 후원하겠습니다라며 여러 사람이 왔습니다. 참 답답한 일인데 그냥 좋다고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정권이 광주학살을 하고 집권했는데, 또 수많은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한국에 들어가 만세를 부르는 속에 있으면, 광주에서 붙들린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윤이상, 저거 미친 사람 아니냐”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내가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신들이 정말 나를 필요로 한다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했으니 어떻게 남쪽에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북에서는 하나도 우리 욕하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남쪽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도저히 허락이 안되고, 그러니까 결국은 북에 드나들게 되면서 (남쪽에서) 친북 인사라고 하게 됐죠. 그렇지만 제가 솔직히 말합니다. 선생님 고향은 남쪽입니다. 그리고 주석께서 그렇게 인덕으로 살펴주시고, 모든 편리를 봐주시고, 그리고 선생님에 대한 사랑이 컸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저한테 그랬습니다. 수령님께서 꼭 형님처럼 느껴진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간부들이 놀래서 그렇게 말씀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절대 불가침의 신적인 존재였으니까요. 선생님은 민족적 양심에 입각해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윤이상연구소가 있기 때문에 했고, 남쪽에는 도저히 갈 수 없으니까 못간 것입니다.

-92년 일본의 야노 토오루가 쓴 <20세기 음악의 구조>라는 책을 봤는 데, 거기에 선생님에 대해 쓴 글이 나옵니다. 사신도를 보고 쓴 작품인 <이마주(영상)>야말로 윤이상의 본질로 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작품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68년 감옥에서 사신도의 영감을 바탕으로 이마주를 작곡하셨다고 했는데 그 일본 사람은 서양음악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창작이라고 평했더군요.

=서양 기법을 동양의 정신세계와 결부시켜 현대음악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난관에 부딪힌 게, 동양의 소리와 서양의 소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하는 이야기는 서양음악은 멜로디와 대위법이 서로 천을 짜듯이 구조가 돼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양음악은 선이 흐른답니다. 서양의 선은 펜을 갖고 죽 긋는 것과 같고, 동양의 음은 붓글씨 쓰는 것처럼 그렇게 다르답니다. 다시 말해 선 자체가 한줄로 그어질 때 많은 변화를 가져온답니다. 붓에다 먹을 칠해 꾹 눌러가지고 확 당길 때 선이 약해지기도 하고, 두꺼워지기도 하고, 연해지기도 하고 그 선의 변화가 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동양의 음은 흐른답니다. 마치 시내의 물이 돌에도 부딪히고 하면서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요. 그것을 서양의 멜로디와 대위법으로는 표현이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동양의 음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비브라토도 넣고 해서 여러 변화를 준답니다. 그러면 음 하나가 길게 가면서 변화를 주면서 끝없이 흘러갑니다. 그것이 한 줄로 갈 때는 ‘주요음’이고, 다발이 돼서 오케스트라로 갈 때는 ‘주요 음향’이라고 한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발전시켜서 자기의 독특한 음악의 길을 열었답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의 음악평론을 보면 윤의 음악은 서양음악에 가깝고, 현대음악에 빈틈없이 가까운데, 다르다는 거에요. 선생님이 동양의 음을 자기 기법으로 발전시켜 음악사에 오래 남는 창작의 길을 연 것이죠. 즉 음악기법을 창조해서 동양의 음을 서양의 표현법과 결부시켜서 현대음악으로 내놓은 것이죠. 우리 남도창은 얼마나 다양하고 좋습니까. 정말 기가 막힌 음악입니다. 결국 선생님은 그런 특색을 악보를 쓸 때 모두 기입합니다. 기입해서 서양 악기를 쓰면서 동양의 독특한 음을 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소리가 나도록 합니다.

-동백림 사건으로 감옥에 계셨던 68년 이후 더 활발하게 곡을 쓰셨는데. 동양적 의미를 서양적 기법으로 표현한 가장 탁월한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윤이상음악연구소 앙상블이 독일에 연주하러 갔습니다. 현대음악 시디(CD)를 만들어내는 음반회사에 갔는데 녹음 기술자가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동양에서 온 윤이상관현악단 연주자들의 음은 서양 연주자들의 음과 다르다는 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가지는 음과 동양 사람들이 가지는 음이 감각적으로 다른 모양입니다. 우리 음악가들은 선생님 작품을 연주할 때는 그것이 자연스럽답니다.

-68년에 감옥에 계실 때 작곡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은 노자와 장자 이야기를 끌어들여 시대적인 암시도 표현하셨고, 첫 오페라인 <류통의 꿈>도 도교를 희화한 것으로 다른 시대의 인물인데 끌어들인 것이죠. 그래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자연적인 것, 도교적인 것, 운명적인 것이 작품에 반영돼 있는데 선생님이 특별히 도교에 대한 생각이나 관심이 남달랐던 것인가요.

=도교는 음양이 주가 아닙니까. 또 도교에서는 삼세의 인연, 전생·이생·후생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죠. 그 시대에는 그러한 사고에 입각해서 모두가 생각했으니까 역사물로서 동양의 독특한 정신 세계와 사고방식을 나타낼 수 있고, 동양의 모티브가 맞았기에 그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생각하면 참 신기합니다. 그 추운 겨울에 손이 얼어서 호호 하면서, 책상도 없이 심장 나쁜 사람이 엎드려서 한음 한음 써 갔답니다. 그런데도 연주를 하면 그런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희극적이고요.

- 특별히 종교를 갖고 계셨던가요.

=어릴 때는 풍금치기 위해 교회 다닌다고 했답니다.(웃음)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치고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도교와 불교는 은연중에 의식에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동양철학입니다.. 결국은 도교와 불교는 동양의 종교철학이고 종교이기 때문에 의식을 하지 않아도 다 갖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진실위에서 동백림 사건에 대한 발표를 했는데 이렇게 물꼬가 트였을 때 선생님은 못 오셨지만 부인께서라도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남쪽에 오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 선생님은 간첩 두목에 해당됐는 데 막상 한일이 없으니까 더 맞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죄도 없는데 머리를 깨서 죽을려고 했겠습니까. 그 지독한 고문을 견뎌낼 수 없어서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문에 한번 간첩으로 나오면 각인됩니다. 지난번에 과거사 진상 조사를 한다고 해서 진실위에서 오신 분을 만났는데 윤이상 선생은 간첩죄로 처벌받지 않았는데, 명예회복이 필요하겠습니까라고 말해서 제가 어리둥절했습니다. 유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름을 더 잘 알고, 유명하기 때문에 간첩 두목으로 내세우고, 유명하기 때문에 죄명을 둘러 씌웠는데, 애초에 간첩죄가 아니었으니 간첩이 아니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이해가 안됩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벌써 한국에 돌아갔을 것 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역사에 남을 명성을 쌓았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간첩이라는 인식을 심어놓고 과거사 진상규명을 해보니 그렇지 않았다고 해서 해결될 일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정부에서 그 분의 명예와 업적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회복해 줘야 합니다. 선생님을 간첩으로 몰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진실위에서 발표한 것은 윤이상 선생 개인이 아니라 동백림 사건이라는 기본 원칙을 발표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난해에는 선생님 서거 10주년을 계기로 평화재단이 만들어졌고, 이제 물꼬를 터서 적극적으로 해야 될 것이고, 내년에는 탄생 90돌을 맞습니다. 어떤 계획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는데 부인께서 남쪽에 오는 것 자체가 상징성과 명예회복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는데 이 자리를 빌어 남쪽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요

=남편의 명예만 회복되면 고향에 갑니다. 결국 윤이상평화재단과 윤이상음악연구소 간의 교류인데, 명예회복이 정식으로 안되면 교류도 안됩니다. 북의 태도는 확실합니다.

-내년 탄생 90주기를 계기로 남북이 함께 했으면 하는 것이 있는지요.

=남북관계에서는 선생님 명예회복이 선결돼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90주기 행사를 남북이 같이하는 건 기대할 수 없습니다.그게 이뤄지면 저는 고향에 내려갈 수 있고, 남쪽 음악회도 초대되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굉장히 많이 기다립니다.

-선생님이 조국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려고 했고,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안타깝게 생각하신 것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은 자기가 결국 예술가니까 국내 작곡계, 예술계가 좀더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는 후배 양성이 되지 못한 것을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훌륭한 국악, 예를 들어 남도창을 그것만 갖고 보전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현대화시켜 국제사회에 내놓지 못하는 것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정치적인 일 때문에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그러면 국외에서는 왜 못했느냐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국외에서는 워낙 작품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에, 즉 1~2년 뒤의 작품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훌륭한 민족적인 음악을 현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그걸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통영에서 국제음악제를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현대음악제를 한다고 해서 우리 선생님의 소원이 그걸 통해서 이뤄질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국내의 후배들, 젊은 작곡가들이 국제사회에 나갈 수 있는 실력을 양성해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구태의연하게 항상 고전만 하고, 가곡도 참 변화가 없습디다. 한편으로는 요즘 젊은 사람들의 곡을 들으면 많이 변했고, 일제 색채가 없어진 걸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존의 클래식 작곡가들의 작품은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통영음악제가 지금은 현대음악제가 아닌데, 처음에는 현대음악으로 출발했습니다. 국내에서 현대 음악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활력소가 되고, 작곡한 것을 연주할 수 있고, 거기서 세미나도 할 수 있고, 강연도 할 수 있는 음악제가 되기를 기대했는데, 방향이 달라져서 상당히 실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선생님은 후배 양성, 국제 무대에 나올 수 있는 후배들의 실력을 기르는 것 등 나라의 예술계에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못 준 것을 섭섭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기회가 오기를 저는 원합니다. 그건 또 우리 선생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지난 40여년 동안 동백림 사건으로 끌려와서 남쪽을 보고 간 게 전부인데 남쪽에 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저는 동백림 사건 후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형제가 10명이었는데, 모든 인연을 끊고 살았습니다. 편지라도 주고받으면 상호간에 가슴이 아프고 해서 저는 잊고 살고, 형제들도 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보고 싶은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두 사람이 남쪽에 살아 있습니다. 언니 한분하고 막내 동생하고. 언니한테 동생 노릇 못해서 그게 좀 안타까운데 만약에 명예 회복돼서 고향에 돌아가면 언니에게 동생 값을 좀 많이 하고 싶습니다.(울먹임) 그리고 슬플 때 제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는 윤이상 평화재단 분들이 제 형제이고, 가족입니다.

-윤이상 선생의 영화를 만들려면 드라마적인 구성이 중요한데, 선생님의 삶을 보면 크게 세가지 서사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음악가로서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문화와 예술을 결합한 선구자적인 모습이 있고, 또 하나는 남과 북이라는 분단의 정치적 희생양으로서 통일운동가라는 한축이 있고, 세 번째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요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를 다 엮는 가장 핵심적인 중앙에 동백림 사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음악이라는 것은 삶의 궤적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는데, 세가지 요소 가운데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부인께서는 어떤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동백림을 중심에 놓는 건 대단히 좋은 구상이라고 봅니다. 동백림 사건 때까지는 선생님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그렇게 깊이 있는 단계는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백림 사건을 겪고 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작곡가는 비단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계 속의 한 인간입니다. 그는 결코 그 세계를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 속에는 인간적인 고통과 억압, 고난과 부당함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 모든 것이 내 생각 속에 들어옵니다. 고통과 부당함이 있는 곳에 나는 음악을 통해 더불어 얘기하고자 합니다.” 물론 동백림 사건을 겪지 않았어도 민주화운동은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정의감이 있고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목숨을 걸고 밖에 나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동백림 사건이 인생의 밑바닥까지 처참하게 맛보게 했습니다. 또 군사독재 때 얼마나 죄없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일입니다. 누가 그럽디다. 선생님은 예술가인데 작곡 안하시고 왜 정치에 가담합니까. 그런데 자기는 예술가이지만 세계 속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시시각각 고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자기는 피가 마를 정도로 불행과 민족의 운명을 느낍니다. 거기에 대한 감정을, 예술가인데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결국 예술에 반영됩니다. 독일로 돌아와서 10년 동안의 작품은 엄청 시끄럽습니다. 그리고 슬픕니다. 그것은 속에 있는 울분을 작품으로 내놓는 겁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첼로협주곡이 있는데,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천상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의 예술에 대해 그렇게 심각합니다. 그것이 오랫동안 계속됐습니다. 그 고난을 자기 스스로 예술로서 승화시켰습니다. 승화시키는 데 한 10년 걸렸습니다. 10년 뒤의 작품은 따뜻하고 조용하고 평화가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떠한 길에 서도 자기가 민족문제와 무관하지 않았겠지만 동백림 사건을 통한 분노와 고통이 작곡가로 형성하게 했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승화시켜서 천상의 세계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