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n 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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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대묘
  • 윤이상 선생이 평생을 함께 하면서 아낀 사진과 그림이 있다. 하나는 침대 머리맡에 붙여둔 고향 통영의 빛 바랜 사진이다. 또 다른 하나는 늘 서재에 걸어두고 보던 강서고분 사신도 벽화다. 부인 이수자씨는 남편이 지난 1963년 북에 간 첫번째 이유가 강서고분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그걸 늘 쳐다보고 있었어요. 작품 쓸 때도 쳐다보고 하면서요.” 통영에서의 어린시절 ‘고향의 음’이 그의 음악적 원천이라면, 6세기 고구려 강서고분의 사신도는 윤이상 음악의 본질로 가는 하나의 길잡이다.
  • 80년 광주항쟁이 터졌다. 부인 이수자씨에 따르면 그때 그는 텔레비전 뉴스를 뚫어지듯 보며 매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깊은 비탄 속에서 탄생한 곡이 소프라노와 실내 앙상블을 위한 <밤이여 나뉘어라>와 <광주여 영원히!>다.


  • ‘새벽 바다를 삐걱이며 멀어지는 목선, 그리고 저녁에 돌아오는 어부들의 노랫소리, 물결 위로 스치는 바람, 밤바다 위의 별들’에서 그는 어릴 적 ‘신비한 우주의 소리’을 들었다고 한다. 고향은 그에게 단순히 육신이 태어난 곳일 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과 음악세계의 탯줄이었던 것이다.

윤이상은 자신이 들었던‘고향의 음’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남도 사람들의 들노래나 뱃노래, 무녀의 노래, 절 집에서 들려오던 범종소리나 목탁소리, 혹은 정적에 빠져드는 순간의 어떤 묵음, 물소리, 자갈 소리 같은 것들이 모두 자신의‘음’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고백한다.

  • 그 뒤로 윤이상 선생은 1년에 한두차례씩, 한달 정도 평양에 머물면서 윤이상관현악단 단원들에게 호되게 음악교육을 시켰다. 이수자 선생은 “처음에는 음악가들에게 밤낮으로 야단을 쳤다”고 전했다. 윤이상 선생한테 지도를 받은 윤이상관현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 김철룡(39)씨도 “서양 사람처럼 악보대로 연주하기보다는 민족의 맛을 내게 연주하라고 늘 강조하시며 많은 훈련을 시키셨다” - 인용 : 한겨레 신문, 2006. 3. 23.
  • 부인 이수자 여사 인터뷰: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씨는 평양에서 남쪽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일까, 4시간에 걸쳐 긴긴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수자씨와의 만남은 윤이상 선생이 생전에 제자들을 키우고 작곡을 하던 윤이상음악연구소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서거한 지 10년이 훨씬 지나 그의 체취를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이수자씨의 기억 속에서 윤이상의 삶과 음악은 온전히 살아있었다. 내년이면 팔순을 맞는 이씨는 즐거웠던 추억들을 회상하며 웃음을 짓기도 했고, 아픈 기억들로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딸 윤정씨는 “어머님이 그날 밤 잠을 못 이루셨다”고 전했다. 대담 기록은 모두 원고지 180쪽 분량이다. 아쉽지만 추리고 추렸지만 3분의 1 정도만 담을 수 있었다. - 인용 : 한겨레 신문, 2006. 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