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414-1
오늘 친구들이 온다고 한다. 서울서 학회가 있는 S가, 광주서 쉬면서 다지고 있는 D가. 조금있다 온다. 어릴 적 친구들이라 집에 오면 다 반가와도 다르다. 그리 보면 삶이란 것은 만남인데 사람과 만나는 일은 크고 크다.
참 스승은 자연. 사람이 사람답게 사노라면 자연이 된다. '사람답게' 라는 말은 여태 모호하다. 사람마다 달라도 한참 다르기 때문이라기 보다 한 사람도 제 안에서 각각이다. 그렇다고 자연이 된 사람의 꼴이 천방지축은 아니다.
'사람답게' 라는 말의 함정에 빠진다. 어디 그게 본래부터 있던 것일까? 사람이 있기 전에 사람답게라는 말이 있을 수 없듯, 사람 나고 사람답게라는 말이 날 조건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함정에 빠지는 건 유희다. 또 한번 빠져볼까?
사람이 무엇입네, 정하기 난처한데 그 이유로 첫번째 꼽아야 할 것이 바로 사람의 기원에 대한 의문들이다. 어디서든 뚝 떨어졌거나 빚어졌다고 믿는 부류 쪽에 서든, 아주 단순한 형태에서 오랜 기간 복잡한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다는 부류에 서건 기원에 대한 의문은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믿음'을 가지고 선 사람은 그래도 사람이란 무엇인가 연구하는데 취할만 한 거리는 있는 셈이다. 비록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 무엇이 나올지, 지가 가진 믿음 자체를 뒤흔들어버릴 그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어쩌면 "난 무엇을 믿네" 하고 그것을 바닥삼아 딛고 올라서면 설 수록 파고들면 들 수록, 끝간데로 가보는 사람은 "어? 난 그 무엇을 믿지 않는 것을 보이고 말았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그렇다고 "난 무엇이 아닌 것을 믿네"로 전향할 것인가?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난 무엇을 믿었는데 그게 아닌데 그렇다고 무엇이 아닌 것을 믿는 것도 아닌" 그런 사유로 치닫게 될 성부르다. 형이상학학이나 언어를 통해 과학을 통해 그 무엇에 이르렀다는 것은 맨 그모양이 되기 쉽상이니까. 그렇다고 과학이나 형이상학, 언어를 부정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위험하다.
두 번째로 사람이 무엇입네 라고 말하기 어려운 게 바로 "지금 존재하는 사람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더라도 뾰족한 답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통시성을 빼놓고 어느정도의 시간의 틀을 임의로 정해서 그때 생존하는 사람들에 대해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사람이 저마다 다르고 널리 퍼져 살아서 그런게 아닐 것이다. 복잡하게 그렇게 하지 말고 다 떠나서 '나'로 한정지어서 생각해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란 모임 전체를 규정하기 어려워 그 안의 개체 하나 그리고 가장 '나'와 가장 가까운 나를 데리고 요모조모 들여다봐도 도대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
밥솥에서 쉬이익- 하면서 밥냄새가 퍼진다.
안다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인지 모른다.
사람답다는 것은 판단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밥냄새를 맡고 보니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과 사고는 연속적이니까, 그것을 관찰가능한 정도로 모두 쪼개어 단속적인 것의 모음으로 한다고 가정하고 각 계기마다 측정을 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내릴 수 있다고 한들 판단의 종합이 종합판단일 수 있을까? 없겠지. 그렇다고 직관적으로, 다시 말해 '나의 직관으로'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까? 단박에 판단을 할 수 있다고 한들 그 판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설문하는 식으로 예, 아니오라는 것을 수천개 만들어 지표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느정도 판단가능한 자료를 만들 것이다. 즉 상황에 대한 인식이 옳을 정도를 높이는 문제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누구는 이리 판단하고 누구는 저리 판단하는데 그게 일치할 경우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그것일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그러니까 무언가 진실자체와 같다고 할 수 없다. 같을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사람의 판단들은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가는데 영향을 끼친다. 끼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