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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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알아듣는 꽃’의 아들 넋 위한 살풀이

소복 차림의 그녀가 춤을 춘다. 살풀이 장단의 파동 속으로 야윈 두 소매를 내밀고 고개를 외로 내려깔았다. 작은 공간 ‘숨밭’이 생긴다. 춤꾼은 그 ‘숨밭’을 잘 운용해야 한다. 문득 숨밭 속으로 낯익은 얼굴이 들어온다. 아들이다. 고개를 털어내고 다시 빈 공간 속으로 외씨 버선발을 들이밀었다. 한발 두발 내딛는 발걸음에 주마등 같은 지난 세월이 자꾸 밟힌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로 물러나오자 껑충한 초로의 신사가 주춤주춤 다가와 꽃다발을 내민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들이 아닌가. 집을 떠나올 때에도 며느리에게 “계원들과 온천 간다”고 둘러댔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깜짝 놀랐당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저녁을 먹는디 아무 말도 못했어, 아들도 아무 말도 않고….”

할머니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했던지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이란 2005년 10월 제8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중에 열린 ‘전무후무’ 공연 때의 일이다. 소싯적에 전라북도 김제 만경 너머까지 파다했던 ‘민살풀이춤’의 예기 장금도(80)씨는 그날 아들에게 비밀스런 외출을 들켰다. 열일곱살에 일제의 ‘정신대’로 보내는 처녀 공출을 피하려고 열살 연상의 홀아비에게 후처로 가서 낳은 아들, 젊은 시절 기생의 아들이란 말이 싫다고 다퉜던 아들, 월남전에서 품고온 고엽제 탓에 다리를 절던 그 아들이었다. 3년 전 그날 50년 만에 화해했던 아들이 올 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담 세상에서는 지가 어른 할라고 먼저 갔는 갑소.”

그 팔순 노모가 먼저 간 아들의 넋을 달래는 살풀이춤판을 꾸민다. 오는 16일 오후 5시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 올리는 ‘해어화(解語花) 장금도’가 그 무대. 가객 장사익(59)씨가 반해 뒤풀이에서 소줏병에 수저 꼽고 ‘봄날은 간다’를 열창했던 바로 그 춤이다. 해어화란 ‘말을 알아듣는 꽃’, 곧 기생을 이르는 말이다. 보기 드문 판을 전통예술 연출가 진옥섭(44·<노름마치>의 저자)씨가 짰다.


“장금도라는 이름으로 춤추는 건 요번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여.” 할머니가 스스로 다짐을 하듯 못을 박았다. “요즘은 몸도 젊은 시절 안 같아. 가만히 있다가 느닷없이 한번씩 추고 나면 온몸이 다 아프고 해서 이 짓도 못하겠소.”


장금도씨는 곡창 군산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어머니와 6남매는 해소병으로 고생하던 큰오빠에게 의지해야 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키가 크고 늘씬했던 그를 집 근처 살던 예기 김영주(가야금병창의 명인)가 눈여겨보았다. 그는 “금도라는 이상한 이름은 기생으로 팔라고 지었느냐”고 울면서 버티다 39년 군산의 소화권번에 입적했다. 누군가는 식구들을 위해서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불과 열한살의 화창한 봄날이었다.

소화권번 시절 김영주가 수양어머니가 되어 기생수업비 등 일체를 댔다. 물론 훗날 그가 예기가 되어 곱으로 갚아야 했다. 권번에서 네해 동안 이기권, 김준섭 등 소리 선생들한테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익혔다. 권번에는 소리 배우려고 갔는데 문득 춤추는 것이 보기 좋았다. 하루는 소리를 배우다 오후 복습시간에 창문 너머로 다른 예기들이 춤 배우는 것을 흉내 내다 선생에게 들켰다. 춤은 학채(교습비)를 따로 내고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창문으로 춤추는 거 몰래 보면 야단 맞어. 선생이 ‘쟈가 아무래도 춤을 배우고 싶은 모양이다. 아가 너를 어쩔거나’ 하시더니 추어보라고 해. 그래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승무>를 추었더니 선생이 ‘되었다 너도 춤을 배워라’ 하더라고.”

열세살부터 최창윤에게 ‘승무’, 김백용에게 ‘검무’ ‘화무’ ‘포구락’, 도금선에게 ‘살풀이’를 배웠다. 열대여섯살부터는 큰 요릿집과 잔칫집으로 ‘밤 마실’을 나갔다. 권번의 원칙은 4년을 마치고 시험을 쳐 허가증을 받아야 하지만 그가 워낙 소리목이 좋고 춤솜씨가 뛰어나 눈감아주었다.

“그 당시 무기들은, 기둥서방 없는 기생들은 인정하지 않았어. 예기들은 국민학교(권번)를 4년 졸업하고 머리를 올려야 무대에 나갈 수 있는디 2년 만에 몰래 바깥으로 나갔제. 가짜로 쪽머리를 올렸어.”

곡창답게 군산에선 큰 놀음들이 자주 열렸고 요정은 호황이었다. 예기 장금도의 명패는 요릿집에 자주 내걸렸고, 집에는 인력거가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보릿고개에도 하룻밤 놀아주면 친정 열한 식구가 한달을 먹고살았다. 그는 움직이는 간판이었다. 인력거를 타고 가면 “장금도가 지나간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제가 국민총동원령을 내리고 44년 가을부터 ‘정신대’로 보내는 처녀 공출로 온 나라가 혈안이었다. 그의 춤을 아끼던 유지들이 눈감아 주었던 덕분에 1년을 버티다 45년 열여덟 봄에 부여로 시집을 갔다. 열살 연상이었던 남편에게는 사별한 전처와의 사이에 여섯 남매가 있었다.

“그때 내가 마음 고생이 심했응께. 밤이면 집에 보내달라고 울었소. 남편이 해방만 되면 보내준다고 달랬어.”

그는 해방이 되어 군산 집에 다니러 와서 그 길로 눌러앉았다. 이미 입덧을 하고 있었지만 빈궁한 친정 형편에 편히 쉴 수 없었다. 심지어 임신을 하고도 아홉달까지 춤을 추었고 해산하고 한두달 후에 곧바로 춤추어야 했다.

아이를 낳고도 그의 인기는 여전해서 늘 인력거 두 대가 보내졌다. 앞에는 자신이, 뒤에는 유모가 아기를 안고 탔다. 요릿집에 가서도 이 방에서 춤을 추고 뒤뜰에 가서 아기 젖을 물리면 다른 방에서 그를 불렀다. 방마다 그를 찾았기에 마루에서 ‘뽀이’들이 서로 당겨 소매가 찢어지기도 했다. 열아홉에는 선배들이 불러 서울로 원정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53년 무렵 큰 환갑잔치가 났다. 서울에서 명창 임방울(1904~1961년)이 불려와서 사흘 동안 ‘쑥대머리’와 ‘추억’을 불렀고, 장금도는 ‘승무’와 ‘살풀이’를 췄다.

“그때 팁으로 백미 한 가마인가 주는디 나는 안 가지고 악사들 줘버렸어. 나는 돈을 많이 받았응께. 우리 식구 많은디 한달 동안 실컷 먹고 그랬어.”

55년 무렵 열살배기 아들이 울고 들어왔다. 친구 중 하나가 “니 엄마가 우리집서 춤췄다” 놀려댄 것이다. 이듬해 56년 스물아홉에 춤을 작파하고 모르쇠로 살았다. 과거를 지우려고 며느리를 맞을 때는 장롱 깊이 간직했던 사진첩까지 꺼내 불태워버렸다. 자신의 춤을 알아볼까 노인정 근처는 얼씬도 않았다. 길을 갈 때도 바닥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 83년 숨은 예인들을 찾아다니던 사진작가 정범태씨에게 들켜 국립극장에서 열린 ‘명무전’ 공연에 나가면서 그의 춤이 일반에 알려졌다.

그의 민살풀이는 살풀이 장단에 명주 수건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춘다. 그 손끝에는 일생 동안 춤을 품고 살아온 예기의 한과 눈물이 담겨있다.

언젠가 그의 손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할머니는 누구세요.” “니 할머니다.” “대체 할머니는 누구세요.”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재야의 인간문화재’에게 제자를 두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바꿔놓고 생각하면 알거여!”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16일 춤판에는 그의 민살풀이와 함께 진유림의 ‘승무’, 유순자의 ‘부포춤’, 임이조의 ‘한량무’, 이명자의 ‘태평무’, 김운선의 ‘도살풀이’, 김운태의 ‘채상소고무’ 등 춤의 노름마치들의 잔치로 꾸며진다. 장고의 김청만, 아쟁의 박종선, 거문고의 김무길, 대금의 원장현, 피리의 한세현 정석진, 해금의 원나경 등의 악이 명무를 받든다. (02)3216-1185.

정상영 기자/ 기사 원문

묻는다

문맹률이 높으면 국가는 통제력이 높아질까? 낮아질까?

저차원에서는 높아지지만 고차원의 통제는 불가능할 것이다. 언어와 이미지를 계속 생산하고 피통제자들이 거기에 취할 때 비로소 원만하고 유연한, 그래서 눈치채기 힘든 통제가 가능하다. 피지배자들의 무지에 근거한 통치력은 매우 허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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