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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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효의 아웃 오브 서울 1


제주도를 가려고 영월부터 들렀네

미니홈피, 블로그 등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한 이래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싶다’라는 보조형용사다. 저도 읽고 싶네요, 저도 보고 싶네요, 저도 먹고 싶네요, 저도 가고 싶네요. 다종다양한 ‘싶다’들이 코멘트 난에 포도송이처럼 매달린다. 그러나 수많은 ‘싶다’들의 차후 향방을 살펴보면 ‘실행’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서서히 혹은 곧 사멸해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중에 생존율이 가장 낮은 ‘싶다’는 ‘떠나고/가고 싶다’이다. 비록 그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는 아닐지라도 사멸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싶다’가 ‘실행’으로 진화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가지 정치·경제·문화·사회적 배경이 존재하겠지만 - 실행 단계로 넘어서는 데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선사(禪師)가 남겨준 묘약 몇 방울을 드리겠다. 많이도 필요 없다. 딱 여덟 방울이면 충분하다.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是現今 更無時節) 바로 지금, 다시 시절은 없다.


얼마 전 나는 티브이 브라운관을 통해 말을 타고 몽골 초원을 달려가는 유목민을 목격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과 지평선을 향해 말 타고 여행하는 것은 기막힌 기분일 거야. 나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데니스처럼 소리쳤다. It must be feel amazing! 근데 나는 말이라곤 타본 적이 없다. “여보세요, R입니다. 일하는 동안 말도 탈 수 있나요?” 승마목장은 제주도 중산간 해발 600미터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뙤약볕의 들판에서 하루 20~30킬로미터를 걷거나 달려야 하는 12~13시간의 육체노동, 대한민국 최저임금. 아무렴 말들과 어울려 지낼 수만 있다면! 좋아요, 일주일 뒤 내려갈게요.


서울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가장 단순하고 빠른 길은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리는 항로. 그러나 육지를 떠나기 전에 내륙의 길들이 뿜어내는 로드 페로몬(Road Pheromone)을 한껏 들이마신 뒤 부산항에서 제주도로 건너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렇게 하여 <아웃 오브 서울> (Out of Seoul)은 시작되었다. “이번주 수요일쯤 출발하는 게 어때?” 직장을 관두고 귀농 준비 중인 K도, 나 홀로 음반사를 운영 중인 L형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세 사람의 동행.

서울을 떠나던 날은 구름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뭉개버릴 기세로 정말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은 양복 차림의 스미스(영화 <매트릭스>에서 무한 복제된 스미스는 대도시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거리를 오가는 직장인들을 연상시킨다. 차이점은 영화 속의 스미스는 스스로 복제를 하지만 현실의 스미스는 시스템에 의해 복제된다는 것이다.)는 뭉게구름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바람을 따라 틀(形)을 변화시켜 가며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복사기 앞에 서 있거나, 계단으로 연결된 비상구 한구석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을 것이다. 푸른 하늘에서 일고 있는 뭉게구름 대신 그의 머릿속에선 새로 구입한 자동차 할부금과 아파트 융자금과 결제받을 서류들이 뒤엉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지도 모르겠다.

“R, 여기서 88번 지방도로 빠지자.”

스미스의 세계에서 탈출해 귀농을 준비 중인 K가 보조석에서 소리쳤다. 원주를 지나 신림톨게이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빠져나가자 초록의 샛길이 펼쳐졌다. 88번 지방도는 강원도 영월의 황둔천을 끼고 굽이굽이를 틀며 서쪽으로 이어지다가 주천을 만난다. 술 주(酒) 자에 내 천(川). 오랜 옛날 술이 샘솟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양반이 마시면 청주가 되고, 천민이 마시면 탁주가 되었다지. 그러나 탁주면 또 어떠한가? 이태백은 독작(獨酌)이란 시에서 읊기를, 청주는 성인(聖人)에 비유되고, 탁주는 현인(賢人)과 같다고 했으니. 신분이야 천민이되 현인이면 그뿐.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않았으리라.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땅에 주천이 없어야 하리라.

중국의 이태백이 강원도 영월군 술빛고을, 주천을 읊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영월은 청주든 탁주든 술을 사랑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지방, 김삿갓계곡, 청령포, 고씨동굴, 동강과 서강. 서강의 상류가 주천강이라지. 우리는 지방도도 버리고 주천2교 옆으로 난 비포장 길로 들어섰다. 주천강을 따라가자. 길옆으론 민간 유적발굴단이 하얗고 파란 테두리선을 그으며 철기시대의 유물을 발굴 중이었다. 부디 피와 비명이 묻은 창·칼·방패 따위보다는 술과 웃음이 묻은 잔이나 접시들이 더 많이 발굴되기를! 실핏줄처럼 이어지는 길을 시속 20킬로미터로 슬금슬금 내려가는 사이 보조석에 앉은 K도, 뒷좌석에 앉은 L형도 주천강변의 풍광에 취해 가고 있었다. 어쩜 주천읍에 잠시 들러서 사온 캔맥주에 취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다시 길은 88번 지방도로 이어졌고, 상어주유소를 만났다. 민물고기인 숭어나 은어도 아닌 상어가 이 주유소의 이름이 된 까닭이 대체 뭘까? 혹시 주유소 주인이 스티븐 스필버그 광팬? 상어주유소를 지나며 길의 꼬리는 좌우로 휠 뿐만 아니라 낙차 큰 커브를 그리며 높낮이로 꿈틀거렸다. 그리고 펼쳐지는 평창강변의 절경들. 강은 모래톱을 일궈내며 굽이치고, 깎아지른 절벽은 초록의 옷을 벗어던지며 강과 만나 하얀 발목을 내밀고.

괴골마을에 들어선 것은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반도 지형 선암마을 이정표가 있기에 따라가다가 만난 이상야릇한 지명. 괴골마을. 대체 뭐가 괴상하기에 마을 이름이 괴골이란 말인가? 핸들을 돌렸다. 확인해 보자! 내리막길의 끝은 괴골마을 중심부를 지나 강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마주친 괴이한 동굴. 강의 맞은편 움푹 들어간 두 개의 동굴은 마치 거인의 눈동자처럼 보였는데, 그래서 땅에서 솟아오르던 거인이 머리만 내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건 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잖아! K도, L형도, 나도 현실 속에 등장한 에스에프(SF) 애니메이션 같은 풍경 앞에서 멈칫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두고 나는 / 시계 하나를 꿈꾸어 왔다,/두 개 또는 세 개의 바늘을 가진 시계를./스스로 타고 있는 생담배와 같은 시계, 문방구 집 마누라의/ 바람기와 같은 시계, 모음조화와 같은 시계, 차가운 달과 같은 시계/ 언젠가는 나를 죽일 시계를


오래전에 읽은 하일지의 <내 꿈속의 시계>를 떠올리는 사이 강물은 흘러갔고, 햇살은 빗금의 각도를 기울이며 강물 위로 꽂히고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마을 어귀의 평상에 앉은 노인들을 만났다. 이 마을 이름이 왜 괴골이죠? 괴상할 괴(怪)자를 쓰는 것인가요?

“아뇨, 느티나무 괴(槐)랍니다.”

글 노동효 / 사진 김은주


영월 여행쪽지

◎ 숙박 : 인터넷이 발달한 국내에서 강원도 영월 인근의 숙박업소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독특한 잠자리를 찾는 사람이라면 태백과 고한 사이에 있는 싸리재(해발1268미터, 국도가 지나는 가장 높은 고개. 두문동재라고도 한다)를 올라가 보길 바란다. 터널이 생기고 나선 오가는 차량이 드문 고갯마루엔 돌담불이 있는 언덕마당이 있다. 차 안에서 자든, 비박을 하든, 텐트를 치고 자든 전국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음식: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로 쇠고기를 입에 대기가 불안해하는 분이라면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섶다리마을 다하누촌을 한번 찾아가 보시길. 이름 그대로 100% 한우를 사용한다고 해서 지어진 다하누촌에서 마음 편히 저렴한 가격에 한우를 맛볼 수 있다.

◎ 둘러볼 만한 곳: 한반도 지형 선암마을은 사진가들이 자주 찾는 장소. 목재로 바닥을 단장한 지점에 도착해서 한반도 지형 같지도 않은데! 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포토포인트는 걸어오던 길에서 반대편으로 20미터를 내려가야 있다.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였던 곳으로 슬픈 역사를 걷어내고 바라보면 풍광 좋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섬 아닌 섬이다. 삼면은 물이고, 한 면은 절벽으로 가로막힌 지형. 그 속엔 울창한 거송들이 꿈틀대며 하늘로 하늘로 머리를 세운다. 김삿갓계곡은 이문열 소설 <시인>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방랑시인 김병연의 묘가 있는 곳으로 방랑·술·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한번쯤 찾아가 보아야 할 장소이다. 청주든 탁주든 한 병 준비하고서. 가까이에 4억년 전부터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고씨동굴이 있다.


강원도 통리재에서 사라진 길을 추억하다

‘여기에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

우리가 그날 잠든 장소에는 분명 그렇게 씌어 있었다. 만약 그런 서각(書刻)이 새겨져 있지 않았더라면 빈집(?)을 무단 침입하여 하룻밤을 지낼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31번 국도를 따라 수라리재를 넘어 강원도 영월군 중동을 지나친 것은 해가 다 질 무렵이었다. 이제 샛길로 들어서 잠자리로 삼을 장소를 찾아야 할 시간. 옥동천 상류에 난 다리 하나를 건너자 산비탈 아래 민가가 몇 채 나타났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외길을 따라 꽁무니를 보이며 도망가는 수탉들과 음매음매 울어대는 소들과 짖어대는 개들뿐. 그나마 불청객으로 인한 한동안의 소란도 막다른 골목 끝, 폐교 운동장으로 들어서버리자 잠잠해졌다. 계세요? 학교건물과 학교에 딸린 가옥의 모든 문과 창문은 잠겨 있었다. 그렇다 해서 주인 없는 곳은 아닌 듯 운동장에는 하얀 조약돌이 깔려 있고, 화단에는 꽃이 피고, 곳곳에 세간들이 놓여 있었다. 그때만 해도 주인 없는 그곳에서 잠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지 다른 장소를 찾아봐야 하나? 아, 그때 우리들의 고단함을 한방에 날려주던 문장 -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


우리는 주인의 배려대로 평화롭게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평화롭게 저녁밥을 짓고, 평화롭게 참치김치찌개를 끓인 후, 정말 평화롭게! 술판을 벌였다. 형광등 불빛 대신 세 개의 양초만이 어둠을 밝히는, 거룩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 고요한 밤이었다. 반주 몇 잔을 돌린 후 우리는 강원도 산골에서 평화롭게 잠들었다. 나도 그랬고 아마 L형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K만은 평화롭게 잠들 수 없었다, 한다. 잠든 사이 주인이 침낭을 들추고 “남의 마당에 자리 펴고 누워서 뭐 하는 짓들이야” 하고 노발대발할 것 같았다나. 법학을 전공한 K는 무단침입죄의 형량이 어쩌고저쩌고, 벌금이 어쩌고저쩌고 떠벌렸다. 그는 잠결에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

아무튼 이른 아침 우리는 수탉과 뻐꾸기 소리에 이은 뭇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격언을 새들도 서당개 삼 년의 개들처럼 어디서 배운 것일까? ‘수학능력 평가시험’ 대신 ‘비행능력 평가시험’이라도 있어서 아침부터 자율학습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짹짹 짹짹. 침낭을 걷고, 아침 식사를 하고, 폐교를 둘러보았다. 녹슨 미끄럼틀과 철봉, 독서하는 소년소녀상, 이승복 어린이상. 아니, 아직도 반공소년 이승복이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고 있었다니? 하긴 이미 죽었어야 할 국가보안법이 산 사람을 죽이려고 눈 부릅뜨는 세상이 돌아왔으니. 그러나 닫힌 교정에서 이승복 어린이가 무언의 외침을 지르는 것은 눈감아주자, 근데 열린 법정에서 유언의 외침을 질러대는 저들은 21세기를 20세기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안구이식수술을 받은 것일까? 생명공학의 발전 때문인지 갑작스레 이승복 어린이 복제인간들이 늘어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우리는 김기덕 감독의 <빈집> 주인공처럼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400년 수령의 엄나무가 아래를 지나가는 낡은 자동차 한 대를 굽어보고 있었다.

강원도 산간 마을은 몇 년 사이에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차도가 왕복 2차로에서 4차로, 6차로로 넓혀졌고, 먹먹하게 만들던 탄광촌의 풍경도 지워져 가고 있었다. 초록빛으로 구부러지는 길들과 투명한 공기, 새로 지은 건물들. 도로 가의 이정표를 낯선 이국의 활자나 알파벳으로 바꾸면 유럽의 전원마을을 지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영국의 토트네스(자연주의 대안마을)를 떠올렸다. 토트네스로 간 사람들이 경험한 도시는 <아웃 오브 서울>을 실행한 한국인들의 얘기와 닮아 있었다. 미국 월가에서 연봉 100만달러를 받다가 사직하고 토트네스로 온 윌리엄 라나(43)는 “뉴욕에 있을 때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에 한 시간도 가족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었고, 피곤했으며, 늘 짜증을 내며 살았다. 연봉이 높아질수록 여유는 더 없어졌다”고 했다.


미샤(23)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런던에 살 때는 항상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갔죠. 휴식이 없고, 잠을 자려고 할 때조차도 베개를 베고 누워도 집 밖, 길거리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가게는 24시간 열려 있죠. 런던의 그러한 것들이 저에게 큰 불안을 가져다주었어요.” 공해, 소음, 속도, 그리고 치열한 경쟁. 그럼에도 매년 휴가철이면 사람들은 런던, 뉴욕, 파리, 도쿄, 이국의 대도시로 여행을 떠나고, 대도시에 경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방인에겐 낯설겠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또다른 ‘서울’이 그곳에 있을 뿐인데. 칠랑이 계곡의 길들이 입 끝을 S자로 그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구문소로 향하던 길에서 이름 없는 샛길로 빠졌다. 연화산 아랫자락을 넘어가는 그 길은 낙둔지에서 서울과 강릉을 잇는 철도와 만났다가 헤어지고, 우리는 짐을 잔뜩 실은 대형트럭의 뒤를 따라 해발 720미터에 이르는 통리재 정상에 이르렀다. 여기서 기찻길을 바라보면 첩첩 산들이 기찻길보다 아래에 있어 화차들은 마치 하늘역을 향해 떠날 것 같다. 한때 엄청난 양의 석탄을 실은 화차들로 수없이 지나다니던 이 길. 나는 문득 석탄 소비량이 줄면서 땅속 깊이 묻힌 채 사라진 길들을 떠올렸다. 갱도. 길은 끊임없이 태어나고, 한 시절 영화를 누리다가 소멸하기도 한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죽은 갱도는 마치 땅 밑으로 뻗은 어둠의 가지가 아닐까. 어쩌면 그 가지 끝마다 고향 떠난 광부들의 꿈이 검은 꽃잎처럼 맺혀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노변에 세워둔 차에 다시 오르며 427번 지방도로 핸들을 꺾었다.

혜성사 이정표를 따라 소로에 들어서면 길의 끝에서 넓지 않은 공터를 만나게 된다. 말하자면 주차장이다. 여기서부터는 좁은 산길을 내려가야 한다. 예전엔 늦은 밤에 도착해서 손전등 불빛을 징검다리 삼아 얼마나 힘겹게 길을 내려갔었는지 모른다. 늦은 밤에 들이닥친 불청객을 당연하게도 내쫓았던 스님께서 여전히 툇마루에 앉아 계셨고, 혜성사 좁은 마당을 지나 미인폭포로 내려갔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던 탓인지 미인폭포의 수량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50미터에 달하는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통리협곡과 어우러져 경이로웠다. 나는 편안하게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너른 바위 하나를 택해 눕기로 했다. 햇살이 협곡의 이마를 지나 폭포 아래 못에 닿을 때까지만 누웠다 길을 떠나자. 오늘의 뜬구름은 1억5천만년 전에 형성된 협곡 사이에 모습을 나타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그건 마치 억겁의 시간 속에서 하루살이처럼 사라지는 우리들의 생인 듯했다.


하루라는 오늘 /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 뜨는 해도 다 보고 /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 나는 살아 있지만 /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 천 년을 산다고 해도 / 성자는 /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조오현의 <아득한 성자>


어느새 차가운 바위와 맞대고 있던 뒤통수가 차갑다. 몸을 일으켜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후우. 햇살이 폭포 아래 못과 ‘쨍’하고 닿았다. 아이 차가워! 햇살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피터 비욘 앤 존(Peter Bjorn & John)의 . 먼저 자리를 뜬 K와 L형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어이, R! 그만 가자. 비탈길을 올라서며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는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 다시 길 위로 나섰다. 427번 지방도는 이제 신리재를 넘어 가곡천을 따라 이어지고 길은 서늘하게 아름답다. 우리는 신리 큰다리목에서 417번 지방도를 따라 가곡면 방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거제도까지 내려가려면 남쪽으로 가야 하고, 산을 흠뻑 맞았으니 어서 바다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한몫했다. 동활계곡과 가곡천을 지나는 길에는 여러 개의 플래카드들이 붙어 있었다. ‘가곡 인구 늘어나네 덩실덩실 춤추세’, ‘아픔을 모두 딛고 새 희망을 만들어 보세’. 공부해라, 대학 가라, 재테크해라, 그런 명령형 문장들로 포화상태인 도시를 벗어나 춤추세, 보세, 하세, 하나같이 청유형 종결어미로 끝나는 문장들을 연달아 읽고 있으려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하가 따로 없고, 빈부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같이 어깨동무하는 청유형.



남한에서 가장 큰 동굴지대

◎ 구문소 | 1억5천~3억년 전 물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지형. 황지에서 시작된 낙동강 물길이 동점동에 이르러 산을 뚫고 지나가면서 높이 20~30m, 너비 30m 정도 되는 커다란 석회동굴을 만들어 놓았다. 이 석회동굴을 자개문이라 하고, 그 아래 물이 고여 있는 곳을 구문소라 한다. 조선시대 민중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정감록>이란 도참서에서 이르기를 “낙동강의 최상류로 올라가면 길이 막혀 갈 수 없는 곳에 커다란 석문이 나온다. 그 석문은 자시에 열리고 축시에 닫히는데 자시에 열릴 때 얼른 그 속으로 들어가면 사시사철 꽃이 피고 흉년이 없으며 병화가 없고 삼재가 들지 않는 오복동이란 이상향이 나온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석문이 낙동강이 산을 뚫고 지나간 구문소의 석굴이라 여겨 ‘자시에 열리는’ 자개문(子開門)이라 불렀다고 한다.

◎ 대이리 동굴지대 | 환선굴·관음굴·제암풍혈·양터목세굴·큰재세굴 등이 흩어져 있는데 모두 합쳐서 대이리 동굴지대라 한다. 그중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있는 환선굴은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구조를 지닌 동굴로 알려져 있다. 동굴 입구에서 100m쯤 안으로 들어가면 세 갈래 굴이 나오는데 서쪽으로 난 굴이 가장 길다. 동굴 안에는 종유석을 비롯하여 형형색색의 석회암 동굴 특유의 기암이 있고, 백사장이 있어 장관을 이룬다. 희귀 동식물이 살고 있어 생물 고고학상 소중한 자료가 되는 곳으로 인근 대이리 민속마을에서 너와집과 굴피집·통방아 등도 볼 수 있다.

◎ 동활계곡 | 산세가 빼어나고 물이 맑아 산천어 등 천연기념물을 비롯한 담수어종이 많이 산다. 특히 가을철 단풍으로 유명한데, 기암괴석과 수려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동활2교~4교 사이의 경관이 빼어나다. 상류에는 너와집 등의 민속유물이 남아 있는 신리민속마을이 있고 하류 부근에는 마을의 수호목인 황금소나무가 있다. 인근에 가곡자연휴양림이 있어 자연환경 그대로 유지되도록 조성된 휴양림에서 하룻밤 묵어 가도 좋다.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 맑은 물이 휴양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지닌 이곳은 가곡폭포와 연화폭포 등 작은 폭포들과 엄나무·느릅나무·돌메나무·단풍나무 등의 활엽수가 우거져 가을 여행지로 적격이다.


운문사에서 발견한 비밀의 화원

나 고향에 있을 때는 그리울 줄 몰랐다 / 외롭고 지쳐 잠들던 서울의 밤 / 눈 뜨는 아침엔 언제나 / 천정에서 푸른 바다가 출렁거렸다 / 많이 지쳤구나, 왔다 가렴 / 그럴 때면 완행 밤기차를 타고 내려가 당신의 품에 안기곤 했다 / 도시에서 바싹 마른 솜 같았던 나 / 바다의 젖꼭지를 물고 내 영혼이 흠뻑 / 젖을 때까지 빨곤 했더랬다 / 어머니. - 부산 앞바다


스무 살 무렵부터 집 떠나 살았던 나는 어느 날 <그랑 블루>의 한 장면처럼 바다가 천장에서 출렁거리는 환각을 본 적이 있다. 뤼크 베송이 만든 그 영화를 보기 전이었고, 그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이었다. 이렇다 하게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객지생활에 몹시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바다를 보기 위해 무작정 월미도로 갔다. 그러나 동해와 남해만 다녔던 나에게 인천 앞바다는 왠지 모르게 바다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바다라면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모래사장도 없었고, 해송도 없었다. 육지 끝에서 내려다본 바닷물 위엔 기름덩어리가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실망한 채 돌아와야 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또다시 천장에서 바다가 출렁거리는 환각을 보았다. 아무래도 바다를 보고 와야겠구나. 결국 나는 경부선 완행 밤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바다! 순간 방전된 전지가 충전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바닷가나 항구도시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고향 떠나 객지생활을 하다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으리라. 사방이 막혀 있는 도시를 벗어나 바다와 ‘접속’하는 순간 마른 솜이 물을 먹듯 바다의 에너지를 흠뻑 빨아들이는, 그 에너지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번져가는 느낌을.

태백에서 가곡천을 따라 내려오던 우리는 드디어 바다와 ‘접속’했다. 찌리릿. 길은 ‘동해안 일주 코스’로 널리 알려진 7번 국도. 월천교 무렵에서 신(新)7번 국도와 구(舊)07번 국도로 나뉘는데, 빨리 가자면 신7번 국도를, 바다 풍경과 자주 만나려면 구7번 국도를 따라가면 된다. 아무렴 제 시간에 닿아야 할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닌 우리는 구7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쨍! 정오를 갓 지난 햇살이 수직으로 꽂히는 바다는 취옥빛으로 반짝거렸다. 오래간만에 보는 선명한 명도와 채도의 바다 풍경. 이왕 7번 국도를 지나는데 바닷가 구경도 한번 해보자. 경상북도로 도 경계를 넘어갈 무렵 K가 상기된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러자꾸나.

평일의 해변에는 모래사장만이 길게 뻗어 있을 뿐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해상구조대가 사용하는 철골 망루만이 수평선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빨갛게 녹슨 3층 망루 위 의자 하나. 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면 어떨까? 텅 빈 해변엔 말릴 사람도, 지키는 사람도 없으니 무작정 녹슨 사다리를 밟고 올라갔다. 사다리 끝에는 잠수함 해치처럼 쇠문이 달려 있었다. 텅. 열어젖히고 올라가니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변에 자리 잡은 고층 콘도의 베란다에서 바다를 내려다본 적도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바다를 내려다본 건 처음이다.

-바다 한가운데 다이빙대 같은 데서 두 여자가 바다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생각나는데, 그 영화 제목이 뭐였지?


-파란 대문.

마침 나도 철골 망루에 앉아 김기덕 감독의 <파란 대문>을 떠올렸는데 K도 같은 장면을 떠올렸던 모양이었다. 영어 제목 , 영어 카피 . 그의 영화가 언제나 그렇듯 ‘새장 여인숙’에도 한 명의 창녀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동서(?)가 되고, ‘같은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사는 여대생이 몸 아픈 ‘동갑내기’ 창녀를 대신하여 손님을 받는 등 우리들의 일상을 뒤흔드는 장면들이 많았지만, 10년이 지나도 뚜렷이 남아 있는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바다 밑에서 부감으로 다이빙대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여자를 보여주는데, 화면 가득 금붕어가 헤엄치던 장면. 바다에서 금붕어가 어떻게 살 수 있냐고 ‘현실적’으로 따지면 할 말이 없지만, 바다에 놓아준 금붕어를 헤엄치게 하는 게 김기덕의 영화다. 어이쿠! 해풍이 모자를 벗기려는 찰나 재빨리 움켜쥐었다. 높이 올라온 만큼 바람도 거세구나. 모자가 날릴까 봐 잔뜩 눌러쓰고 녹슨 사다리를 내려왔다. 이제 또 길을 떠나야지.



7번 국도가 바다에서 멀어지면 바다와 맞붙은 지방도로 들고 나며 후정, 죽변, 봉평, 양정, 울진, 오산, 덕산, 망양을 지나 평해에서 월송정에 이르렀다. 관동팔경 중 최남단 명승지인 월송정은 그중 사람들이 가장 덜 찾는 곳. 그런 탓일까, 남한에 있는 여섯 명승지 중 한가로운 정취를 느끼기엔 가장 좋다. 울창하고 너른 소나무숲 아래를 거닐며 산책을 하기도 좋고, 도톰하게 깔린 솔잎 위에 앉아 책 읽기도 좋고, 나무 그늘 아래 누워 한숨 자기도 좋다. 다만 안타까운 게 있다면 해안선을 따라 철조망이 바다와 송림을 갈라놓고, 2006년 인근에 방파제가 생기면서 너비 100미터에 이르던 모래사장이 송림 앞까지 침식되었고, 평평하던 모래사장이 높이 2미터에 달하는 모래절벽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월송정에서 소나무 뿌리를 베고 잠들었다가 꿈속에서 신선을 만나 술 얻어 마시고 놀았다던 정철. 그가 다시 이곳에 온다면 어떤 꿈을 꾸겠는가? 신선주는 고사하고 냉수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하겠지. M. 나이트 시아말란 감독의 <해프닝>처럼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에 화가 난 소나무숲이 산소 대신 자살가스를 내뿜을까 갑자기 두려워진다. 그래, 우리는 개발이란 이름으로 날마다 자살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우리 오늘은 어디서 잘까?

-아무래도 거제도까지 내려가긴 힘들겠지?

-운문사에서 자는 건 어떠냐? 하룻밤 신세 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인데 우리를 재워 줄까요?

-일단 J스님께 전화를 걸어볼게.

L형이 여쭈니 J스님께선 흔쾌히 대답하셨다. 오너라. 그렇게 해서 우리는 포항에서부터 남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주를 지나 청도군으로 들어선 뒤 운문호를 끼고 달려 운문사 진입로에 들어서자 홍송이 좌우로 울창하다. 아, 이래서 운문사는 걸어서 들어가라고 하는 거구나. J스님과 만나기로 한 운문사 종무소에 도착한 것은 공양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우선 손님을 맞이하는 지객 스님의 안내를 받아 공양간에서 저녁 밥상을 받았는데, 사찰에서 그렇게 맛난 식사를 하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정갈하고 풍성한 반찬이 식탁 위에 가득한데 모든 나물과 채소를 스님들께서 울력으로 키우신 것이라 한다. 국수와 밥은 물론이고 찬그릇까지 깨끗이 비울 무렵 J스님께서 나타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한 지가 서른 해가 지났다지만 스님께서는 마치 소녀 같으시다.

-내일 일찍 큰스님을 모시고 러시아에 가야 하기 때문에 내일은 시간이 없어. 해 지기 전에 구경시켜 줘야 하는데, 일어나자.

최근 시낭송집 <구름 나그네>를 내기도 하신 스님은 청아한 목소리로 절 마당을 지나가는 동안 능소화, 붓꽃, 꽈리꽃, 청매, 영산홍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안녕! 우리는 꽃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스님의 뒤를 따라 극락교를 건너갔는데, 그 곳은 과연 극락이었다. 마음 심(心)자 형상으로 만들어진 연못이며, 자귀나무, 후박나무, 찔레꽃, 할미꽃, 황매, 조팝나무, 매화나무, 해당화, 부처꽃, 창포, 돌단풍, 쑥부쟁이, 호두나무, 치자나무, 노간주나무, 갯기름나물, 노란별꽃, 계수나무, 연달래, 진달래, 도라지, 단풍나무, 목련 …… 갖은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는 정원에서 포행을 하다 보면 고라니와 산토끼도 만난다고 했다.



말년에 운문사 아래서 여관을 하고 싶다던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운문사의 아름다움 다섯 가지’를 들었는데 - 첫째는 바라보는 이의 눈도 마음도 어질게 하는 학인 스님들이고, 둘째는 장엄한 아침 예불이고, 셋째는 운문사 입구의 솔밭이고, 넷째는 운문사의 평온한 자리매김이고, 다섯째는 운문사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셨다는 일연 스님.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한 가지를 감춘 듯하다. 물론 일반인 출입금지의 극락교 너머 죽림헌과 목우정을 언급하긴 했지만, 어쩌면 10년 전에는 그곳이 지금처럼 꾸며져 있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극락교 너머 ‘비밀의 화원’은 다섯 가지에 하나 더 덧붙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운문사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곳인지라 남정네들 누울 자리는 따로 없을 줄 알았는데 J스님께서 손님방을 마련해 주셨다. 개울가에 자리한 호젓한 방 한 칸. ‘운문사의 아름다움 다섯 가지’ 중 아직 보지 못한 아침 예불을 보려면 일찍 일어나야겠지. 일찌감치 자리 펴고 누웠는데 물 흐르는 소리에 좋다, 좋다 속으로 연방 추임새를 넣다가 눈을 뜨니, 어느새 구름문(雲門)을 젖히고 나온 달빛이 문살 사이로 들어와 있었더라.




옛 7번국도 타고 동해로 고고씽

◎ 죽변 용추곶 | 죽변은 대나무가 많다고 붙은 땅이름이다. 장기반도 끝, 호미곶을 제외하면 동해안에서 바다로 가장 많이 뻗어 나간 곳이 죽변 용추곶이다. 호미곶을 호랑이 꼬리라 하여 호미곶이라 하듯, 용추곶은 용의 꼬리라 하여 용추곶이라 한다. 파도와 대숲으로 둘러싸인 용추곶에는 1910년에 만든 죽변 등대가 서 있다. 등탑 높이 16m, 흰색의 팔각형 콘크리트 구조로 불빛은 20초에 한 번 반짝이며 약 37km까지 불빛이 전달된다고 한다. 등대 앞바다에는 암초가 깔려 있는데 암초의 중간 부분에 용소라고 하는 곳이 있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던 곳이라 전해 내려온다. 등대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2004년 <폭풍 속으로>라는 드라마를 찍기도 했다.

◎ 영덕 해맞이 공원 | 해송이 울창하던 창포리 일대가 97년 대형 산불로 페허가 되어 방치되다, 해안선과 무인 등대를 활용한 인공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산불 피해목으로 전망테크와 덩굴시렁 및 침목 계단 산책로를 조성했고, 야생화 2만3천여 포기와 900여 그루의 나무를 새로 심었다. 1천500여 나무계단이 전망테크와 덩굴시렁과 덩굴시렁, 해안도로와 바다까지를 거미줄처럼 엮여 산책로를 이루고 있다. 두 개의 전망테크는 선명한 해돋이를 찍을 수 있다는 매력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으며, 영덕 풍력발전단지가 가까이 있다. 사전 지식 없이 이곳을 지나가게 되는 사람은 높이 80m, 직경 82m의 거대한 날개가 회전하는 구조물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인공 구조물과 바다, 그리고 구부러지는 도로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 강-축 해안도로 | 7번 국도가 확장공사를 하면서 내륙으로 들어서는 구간이 점점 늘어났다. 그래서 남한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도라는 명성만 믿고 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정작 아름다운 풍광을 놓치기 싶다. 영덕 구간이 특히 심한데 빡빡한 일정이 아니라면 되도록 ‘옛 7번 국도’를 따라가야 제대로 된 동해안 일주를 할 수 있고 대진 해수욕장부터부터는 20번 지방도로 들어서야 해안선을 따라 동해와 나란히 달리는 해안도로의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축산항과 강구항을 지난다고 해서 강-축 해안도로라고 한다.


거제도 가는 길에 찾아낸 재미있는 마을 이름들

산사의 종이 33번 울리며 한 세상이 열리고, 법당에서 절을 올리는데 <양철북>이란 작품이 볼록 솟아올랐다. 197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1999년 귄터 그라스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던 <양철북>을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떠올린 작품은 성은 ‘양’이요, 이름은 ‘철북’이란 소년이 등장하는 자전적 성향의 성장소설이다. 소년은 자라서 ‘이륭’이란 이름의 시인이 되고, 필화사건으로 수배를 받던 무렵엔 ‘이산하’로 불리었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지만, 본명은 ‘이상백’이다. 갑작스레 운문사에서 그의 <양철북>이 떠오른 까닭은 - 한 소년이 한 스님과의 동행 길에서 보게 된 운문사 새벽예불에 대한 묘사가 내가 보고 있던 모습, 내가 듣던 소리, 내가 느끼던 감정과 절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내가 대법당 문틈으로 들여다보던 소년, 양철북이 된 것처럼.

수백 명이 동시에 하는 합송이 장중하게 흘러나왔다. 수십 개의 법당 문창호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 문틈으로 안쪽을 겨우 들여다보았다. 숨이 멎을 듯 경건하고 엄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법당을 가득 메운 젊고 앳된 비구니 스님들의 뽀얀 얼굴에 붉은 불빛이 일렁이고 사슴같이 맑은 눈동자들은 불빛에 반사되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나는 새벽예불이 이처럼 웅장하고 장엄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문틈에 눈을 붙인 채 나는 마치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침내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나를 통째로 삼켜버리는 듯했다.

-이산하의 <양철북> 중



‘절집의 새벽예불이 보여주는 장엄함은 가톨릭의 그레고리안 찬트(무반주로 불리는 남성 성가)와 비견된다’며 운문사 새벽예불에서 ‘전통음악의 원형질’을 끌어냈던 유홍준의 찬사대로 200명이 넘는 비구니 스님들이 다 함께 암송하는 불경은 ‘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에 도달하며, 장중하게 막을 내렸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다 함께 가자,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새벽예불에 참석한 뒤, 아침 공양까지 대접 받은 우리는 <반야심경>의 마지막 후렴구처럼 다시 길을 떠났다. 가자, 가자, 거제도로 가자, 거제도로 다 함께 가자. 여행길이여 영원하라!

햇살 쏟아지는 국도를 따라 밀양 방면으로 향했다. 지도를 들여다보던 K가 거제도까지의 코스를 밀양-마산-창원-통영으로 잡았다. 운문호를 따라 꽃길이 이어지고, 동창천을 따라가는 20번, 58번 지방도도 아름다웠고, 때론 마을 표지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구촌리’. 하하하 사촌도, 팔촌도 아닌 구촌이라. 저긴 구촌들끼리만 사는 마을인가? 하하하 정말, 그런가본데 이 마을 이름은 ‘사촌리’잖아! 그럼 여긴 사촌들끼리만 사는 마을인가 보네! 머잖아 ‘삼촌리’도 나오지 않을까?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비밀스런 햇빛’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밀양.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타지 사람들도 밀양의 위치를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밀양에서 마주친 것은 다른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10대 시절 ‘밀양 아랑제’에 종종 놀러왔던 나는 낯익은 ‘영남루’ 대신 ‘긴늪유원지’나 한번 들를 생각이었다. 근데 지도를 잘못 본 탓인지, 길을 지나쳤다 싶더니 요상한 터널 하나가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터널 안은 달랑 한 차선, 맞은편 ‘입구’로 차가 먼저 들어서면 영락없이 이쪽 ‘출구’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난감한 길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곽경택 감독의 <똥개>였다. 일찍이 밀양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던 영화. 초록색 추리닝 바람에 경상도 사투리, 망가진 정우성이 싸움질을 하던 장소가 바로 이 용평터널 안이었던 것이다. 한 대, 두 대 맞은편에서 연이어 차가 들어서고 결국 차량 다섯 대를 보내고 나서야 터널로 들어설 수 있었다. 흠, 야릇하군. 오가는 방향에 따라 이쪽이 ‘입구’가 되기도 하고, 저쪽이 ‘입구’가 되기도 하는 터널. 그래, 사람은 누구나 제 있는 자리에서 생각하는 법이지. 햇빛 아래 노란 꽃도 다른 불빛 아래에서는 파란 꽃이 되기도 하고, 붉은 꽃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밀양을 지나 창원으로 향하는 동안 줄곧 듣던 음악도 지겨워져서 엠피3 플레이어 대신 라디오를 틀었다. 최재형 작사, 이수인 작곡이라는 가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나절 청산은 졸고 구름은 둥둥 영 넘어 간다. 은어새끼 송사리 떼 파들거리는…’ 묵직한 바리톤 목소리에 눌려 뒤따르는 가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청산은 졸고’ 부분이 맘에 들어 ‘청산은 졸고’에 도돌이표를 내 맘대로 붙이고 계속 불러댔다. 청산은 졸고, 청산은 졸고, 아닌 게 아니라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게 졸음이 슬며시 오는 날씨였다. 젠장, K랑 L형은 대체 운전면허 언제쯤 딸 거야?

창원, 마산을 관통해 통영으로 가는 길은 딱히 떠들어 댈 게 없다. 편의점, 은행, 관공서, 통신사 대리점, 24시간 김밥집, 서울이나 부산이나 마산이나 창원이나 도심의 길들은 별반 다를 바도 없으니. 그저 마산을 빠져나가던 길에 본 ‘동전마을’ 정도가 이색적이었다고나 할까? 이 마을에선 지폐 내면 안 받고 무조건 동전만 받는 거야. 주유소도, 은행도, 심지어 주일헌금도? 하하하. 그런 싱거운 농담이 행복한 비명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4번 국도에서 77번 국도로 접어들고 나서였다. 보조석에 앉은 인공지능 내비게이션 K의 안내대로 암하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했는데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이정표가 허공에 달랑거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길은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동해안일주 7번 국도보다 11배 정도 더 아름다웠다. 아무튼 77번이니까. 가령 7번 국도가 정통파 투수라면 77번 국도는 커브, 슬라이드, 너클볼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변화구 위주의 투수였다. 한마디로 핸들을 요리조리 돌려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진장 바빴냐면? 전혀! 시간은 옆에서 출렁거리는 바닷물만큼이나 철철 넘쳤고, 초저속 커브를 그리며 거제도 모래사장 황금빛 미트에 꽂히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7번 선발 투수에 비해 77번 중간계투가 던질 수 있는 이닝 수가 너무 짧다는 게 아쉬웠다.


구거제대교를 건너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 거제도로 건너갔다. 1018번 마무리 투수 등장. 우리는 거제도 푸른 테두리를 따라 여행했다. 아열대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투수전이 벌어지고 있는 야구장의 외야수처럼 한가롭게 서 있고,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아도 이국적인 풍광들이 바다와 섬과 산줄기를 따라 방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스무 살까지 부산에서 살면서 거제도엘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것이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웠다. 우리는 ‘함박마을’로 들어섰다가 ‘쪽박마을’을 만나 길을 헤매다 나오기도 하고, 상상해 보면 실로 난감해지는 지명의 마을을 만나기도 했다. ‘외간마을’. 그럼 이 마을 사는 남자들은 다 외간 남자들이네. 이 마을 사는 여자들은 다 외간 여자군! 결국 여긴 외간 남자와 외간 여자가 사는 마을이야? 하. 하. 하. 우리가 터뜨린 웃음이 해 저무는 풍경 속으로 퐁 퐁 퐁 빠지고 있었다.

잠은 구조라 해변에 텐트를 치고 자기로 했다. S사를 다닌다는 네 청년이 바닷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었다. 우리는 텐트를 친다, 물을 끓인다, 랜턴을 찾는다, 한동안 부산을 떤 뒤 저녁식사에 곁들여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건배! 첫날은 강원도의 폐교에서, 둘째 날은 금남의 사찰에서, 이젠 텅텅 빈 해변이로구나. 소주 한 병이 한계 투구 수에 달한 투수처럼 물러날 즈음 고기 냄새를 폴폴 풍기던 청년들이 코펠을 챙긴다, 버너를 챙긴다, 부산을 떤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해변은 불 꺼진 야구장처럼 조용해졌고, 밤공기는 서늘했으며, 그래서 죽어서 자빠져 있는 한 그루 야자나무로 불을 지폈다. 섬유질로 된 야자수는 부러지는 게 아니라 한겹 두겹 잘 벗겨졌고, 그래서 잘 탔다. 도시를 떠나 일렁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인 게 얼마 만인가? 밤하늘에 뜬 달이 더 이상 부러워서 못 봐주겠다는 듯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잠이 깼다. 해 뜬 지 꽤 시간이 지난 듯했는데 해변은, 조용했다. 토독 토독 토독. 빗소리가 들렸다. K도 이미 잠이 깬 듯했지만 가만히 빗소리를 감상하고 있는 듯했다. 천국이 따로 없구나. 세상에서 가장 얇은 집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나 감미로워서 나는 다시 눈꺼풀을 닫고 귀를 기울였다. 토독 토독 토독. 텐트는 참 작았고, 그래서 고막과 텐트 사이가 너무나 가까웠고, 그래서 빗방울이 고막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텐트가 고막 같고, 텐트가 우리 영혼인 것만 같았다. 빗방울이 때론 굵어지기도 하고, 때론 가늘어지기도 하면서 속삭였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렴. 말 그대로 나는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물과 공기와 중력과 바람과 햇살과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었고, 모든 것과 연관된 빗방울이 토닥 토닥 토닥 우리들의 고단한 영혼을 두드려주었다. 고단한 노동 속에서 근육이 결리고 뭉치듯, 고단한 도시생활 속에서 영혼 역시 결리고 뭉치는 거란다. 그래서 이제 일어나야 한다는 것도,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작고 얇은 집에서 우리는 영혼의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그때 빗방울이 다시 속삭였다. 이제 왼쪽으로 돌아누우렴. 나는 나의 영혼을 왼쪽으로 돌아눕혔다. 토닥 토닥 토닥.


1018번 고갯길에서 찰칵

⊙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 시청로 302. 포로수용소였다고 하니 거제도 변두리에 있을 것 같지만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한국전쟁 당시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1년부터 고현·수월 지구를 중심으로 설치됐고, 최대 17만3천명의 포로를 수용했다. 지금은 건물 일부만 곳곳에 남았는데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 막사, 사진, 의복, 기록물 등을 한곳에 모아 유적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1983년 12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99호로 지정된 이곳은 반공주의적 색채가 너무 짙은 것이 흠이지만, 최인훈의 <광장>, 장용학의 <요한시집> 등을 읽고 방문하면 일종의 문학기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 최초, 세계 최대의 디오라마관(모형을 이용한 3차원 전시기법)을 통해 당시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필자가 찾았을 때는 마침 비까지 내려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 촬영세트가 무척 실감이 났다.

⊙ 거제도 1018번 비포장 도로: 거제도의 풍광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은 1018번 지방도, 동쪽은 14번 국도를 따라 여행해야 한다. 그래야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진정한 맛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남부면 저구리에서 여차몽돌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1018번 고갯길은 아직 자갈이 깔린 비포장 도로인데, 거제도 일대 국립공원의 풍광을 조망하기엔 가장 좋은 장소가 이 고갯마루에 있다. 비포장 도로라고는 하나 일반 승용차도 조심해서 오르내리면 무리 없이 지날 수 있다. 망산 전망대에 이르면 민들, 쥐섬, 석문도, 소병대도, 등대섬, 대병대도, 큰섬, 작은섬, 가왕도, 매물도 등 거제도 남쪽 바다의 섬과 암초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말하자면 거제도 최고의 포토 포인트 중 하나다.

⊙ 고성군 동해면 공룡 발자국 화석지: 77번 국도를 타고 동해면을 지나가다가 장좌리 인근에서 속도를 줄이면 ‘공룡발자국 화석지 150m’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족보행을 하는 큰 용각류 네 마리가 지나간 보행렬과 이를 가로지르는 이족보행을 하는 조각류 한 마리 발자국이 있다. 사라진 공룡의 발자국 구경도 구경이지만, 이곳은 화석지 답사를 제쳐두더라도 주변 풍광이 아주 독특하다. 밀물에 밀려온 스티로폼과 그물 등으로 다소 지저분할 때도 있지만 바다를 향해 층층으로 길게 늘어선 바위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계단 형상을 하고 있다. 독특한 풍광은 인도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의 가트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필자가 찾았을 때는 화장터 대신 고라니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제주도 초원에서 말을 몰며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꿈꾸다

부산연안여객터미널에서 코지 아일랜드(Cozy Island)호에 올라탔다. 아늑하다는 뜻의 ‘코지’는 우리말로 ‘곶’의 제주도 방언이기도 하다. 나는 제주도에서 카우보이가 될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처럼 말 타고 소 떼를 몰지는 않겠지만, 여하튼 <한라 마운틴>의 말과 사슴을 기르는 목장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카우보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물론 목장에 눌러앉아 한세상 다 보낼 생각은 없다. 그저 ‘개인적으로 더 의미 있는 활동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을 생각으로 애초부터 한정된 기간만 종사할 의도로 접근하는 직업’이다.


<제너레이션 X>의 저자 더글러스 커플런드는 이것을 ‘반안식적 직업’이라고 칭했다. 그의 책이 출판된 해는 1991년. 이듬해 한국에선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과 함께 1970년대에 태어난 ‘신세대’가 등장했다. 뒤이어 신세대 이전 세대들에겐 ‘386 세대’라는 라벨이 붙었다. 나는 종종 이 두 세대가 기치로 내세웠던 가치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잘은 몰라도 386 세대의 기치는 ‘정의’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신세대의 기치는 아마도 ‘자유’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지금 이 나라를 한마디로 딱 잘라서 이렇게 이른다. 배신자들의 나라. 가령 “니네 아빠 한 달에 얼마 벌어?” “니네 아파트는 몇 평이야?”라고 천연덕스레 묻는 아이들은 다름 아닌 ‘386 세대’와 ‘신세대’의 아들딸들이다. 아들딸은 부모의 대화를 듣고 배운다.


서울을 출발해 강원도의 폐교, 동해안의 월송정, 거제도의 구조라 해수욕장을 지나 제주항에 차를 내려놓았다. 나는 모슬포에서 사진 찍는 H를 만나 저녁 무렵에야 제주도 중산간으로 올라갔다. 삼나무 숲과 나란히 달리는 도로가에 세워져 있는 팻말. ‘말 타는 곳’. “오늘은 자고 내일 천천히 일을 배우면 돼.”

버려진 마구간에 딸린 방 한 칸이 숙소라고 했다. 삼나무는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나무. 방문을 열자 천장이며 벽이며 온통 곰팡이로 가득했다. 네 모서리에 매달린 거미들이 불청객을 동시에 째려보았다. 넌 뭐야? 바닥엔 지네가 발을 뻗고 죽어 있었다. 맙소사! 첫날 밤 나는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어쨌든, 잤다. 그러나 이튿날 저녁, 숙소로 돌아온 나는 더는 그 방에서 잠들 수가 없었다. 부화한 곤충의 애벌레들 수천, 아니 수만 마리가 어디 한번 같이 놀아 보자며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쪽 컨테이너를 비워 주시지 않으면 제 차에서 지낼 테니 그렇게 아세요.”

결국 나는 초원 한가운데 컨테이너를 차지했다. 해발 500미터, 멀리 제주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더없이 전망이 좋은 자리였다. 컨테이너 안의 짐을 옮기고, 바닥의 묵은 때를 닦자 비록 샤워시설이나 화장실은 없지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 되었다. 흠, 컨테이너 외벽에 꽃이라도 그려 넣으면 히피들의 거주지처럼 보이겠군! 나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했다.

아침 7시. 컨테이너의 문을 열어젖힌다. 들판에서 풀을 뜯던 사슴들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100마리가 넘는 사슴 떼가 들판에서 풀을 뜯는 모습은 장관이다. 승마목장과 사슴목장 사이에 울타리가 없다면, 아프리카 세렝게티 공원이라고 해도 의심하지 못할 풍경. 어이, 좋은 아침! 사슴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며 목장의 사무실로 나가는 길. 수평선을 따라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이제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슬슬 일을 시작해 볼까.


더~ 더~, 더~ 더. 초원에서 풀을 뜯거나 잠든 말들을 모은다. 안장을 채우고, 재갈을 물리고, 손수레로 사료를 싣고 와 열두 마리 말들에게 먹인다. 이 녀석들은 승마장에 말 타러 오는 손님들을 태우기 위한 말들이다. 다시 사료를 트럭에 싣고 제2목장으로 간다. 더~ 더~, 더~ 더. 언덕을 넘어 말 수십 마리가 달려온다. 그렇게 제3목장까지 돌고 나면 마지막으로 종마에게 먹이를 주러 가야 한다. 해가 솟아오르자 땀이 배기 시작한다. 이제 말똥을 치워야 할 시간. 말들이 풀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한 똥에서는 풀 냄새가 난다. 말 한 마리가 하루 평균 5㎏에 이르는 똥을 싸대니 그 양은 정말 엄청나다. 날마다 똥을 치우다 보면 미추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들이 있다. 어느 날엔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초록색 풍뎅이가 날아와 말똥 위에 앉았다, 새파란 하늘 위로 날아가기도 했다. 그 모습에선 어떤 아름다움도, 추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러할 뿐.



“병장 말년 때였는데 말이야, 내무반에서 술을 마시다 안주가 다 떨어진 거야. 그때 마침 연대본부 수족관의 열대어가 딱 떠오르더란 말이야. 그래서 열대어를 잡아 와서 취사병을 깨웠지. 이거 회 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병장님, 안 됩니다, 안 됩니다 하는 취사병보고 안 되는 게 어딨어, 너 죽고 싶어? 소리를 질렀더니 결국 회를 쳐 오더군. 물론 다음날 죽은 건 나지. 말년에 영창 들어가서.”

그랬던 Y도 이젠, 스스로, 철이 들었다 한다. 그는 승마조련사가 되려고 제주도에 왔다. “근데 열대어 회는 맛이 어땠어?” “술 취했는데 그 맛이 기억나겠어?” “하하하!” 저녁이면 둘러앉아 잔에 소주를 따라 마시곤 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일을 배우며 길동무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길 위의 가장 큰 기쁨. 중년의 목장장은 한때 고기잡이배의 선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방향과 불빛만 봐도 어디로 무엇을 잡으러 떠나는 고깃배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바다에선 닻이 생명줄이에요. 태풍 불 때 닻이 끊어지면 끝장이에요. 그날 바다에 나갔는데 태풍이 올라왔어요. 그런데 내 배의 닻이 끊어져 버린 겁니다. 다른 배에 계속 구조신호를 보냈죠. 살 수 있는 길은 닻이 있는 다른 배에 내 배를 묶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런데 폭풍우 치는 바다에선 아무도 도와주러 가지 않아요. 닻 올리고 구조하러 가는 사이에 침몰해 버리니까. 죽을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데, 배 한 척이 왔어요. 목숨을 건졌지요. 그리고 몇 년 뒤 바다에 나갔는데 이번엔 나를 구해준 선장 배의 닻이 끊어진 거예요. 그 선장이 계속 구조신호를 보내왔어요.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고, 그래서 고민을 했어요. 결국 폭풍우 속에서 닻을 올리려는데 다른 배에 탄 동료들이 무전을 보내오는 거예요. 닻 올리면 네가 죽어, 너뿐만 아니라 네 선원들 다 죽어. 다른 사람 목숨까지 걸린 문제니 갈 수가 없었어요. 망설이는 사이 배는 침몰했어요. 그길로 다시는 배를 타지 않았어요. 배를 팔고, 매일 술만 마셨어요. 죄책감 때문에 맨정신으론 살 수가 없었어요. 세월이 흐르고, 이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바다 대신 찾은 직장이 이 목장이죠.”

목장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목장 일을 시작했는데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 희한하게도 목장 옆 묘지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선장이 묻혀 있었다. 그는 목장에서 지내며 그 무덤에 풀이 자라면 풀을 베러 간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말없이, 홀로, 풀을 베러 갔다 오곤 한다.

“<타이타닉>을 보면 마지막에 한 명씩 물속으로 가라앉는데, 진짜 그래요. 겨울 아니래도 바닷물이 계속 체온을 빼앗아가니까, 그 뭐냐 저체온증으로, 정신이 희미해지고, 그러면 가라앉아 버려요. 친구가 타던 배가 침몰했어요. 각자 구명튜브를 잡고 매달려 있었는데 구명튜브 하나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친구는 동료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죠. 서로 정신 잃지 말라고 격려를 하면서 버티는데 시간이 지나자 한 사람, 한 사람씩 가라앉았어요.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한 명씩 물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는 기분이 어떨 거 같아요? 다 죽고 딱 한 사람만 살아남았어요. 누군 줄 아세요? 동료 어깨에 매달려 있던 제 친구예요. 자기가 붙잡고 있던 사람이 가라앉는 걸 보면서 삶과 죽음이 한순간이란 걸 번쩍 깨달았죠. 살고 죽는 건 정말 한순간이에요. 찰나예요.”

태어나는 동시에 인간은 바다에 내동댕이쳐진 채 구명튜브에 매달린 존재가 된다. 그곳에서 삶과 죽음은 한순간이다. 한순간을 놓치면, 비록 살아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산송장에 불과한 것이다. 내겐 선지식과 다를 바 없는 길동무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홀로 목장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자판 위를 토닥토닥 달리곤 한다. 간혹 말들이 초원에서 내려와 마구간 앞마당의 커다란 물통에 코를 박고 물을 마시다가 그런 나를 바라본다.


“이봐, 카우보이! 삼나무 숲 위로 보름달이 떴어.” “그렇군, 정말 환상적인 밤이야.” 말들이 들판으로 돌아가고 보름달이 정수리 위로 지나갈 무렵 샤워를 한다. 물통 가득 고인 달빛을 몸에 붓는다. 안 춥냐고? 춥다. 그렇지만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다. 이제 들판 한가운데 컨테이너로 돌아갈 시간.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사슴의 눈동자에 알몸의 사내가 달빛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맺힌다. 나는 컨테이너 문턱에 걸터앉아 밤바다를 내려다보며 롤프 포츠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그는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행의 자유를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그 일이 여행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또다른 여행이 또다른 지혜로 나를 이끌어 줄 것이다.



다랑쉬오름에서 보름달 바라기

◎ 다랑쉬오름 | 제주도에는 368개의 오름(기생화산)이 산재한다. 제주도의 진면목을 보려면 반드시 오름을 경험해야 한다. 다랑쉬오름은 해발 382m, 동북지역에서는 가장 높고 큰 오름이다. 오름들은 바깥에서 바라보면 여인의 젖가슴처럼 생긴 언덕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제각각 다른 모양의 분화구를 감추고 있다. 꼭대기에서는 성산과 우도가 보이고, 1.5㎞에 이르는 분화구 테두리를 따라 걷노라면 태고의 신비가 느껴진다. 필자는 다랑쉬 정상에서 키 작은 소나무를 바람막이로 삼고 비바크(Biwak)를 한 적이 있다. 다음날 새벽 “저기 사람이 죽어 있어요”라고 소리치는 여자 목소리 때문에 잠이 깼는데, 침낭에서 머리를 내밀고 자던 필자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다랑쉬에서 비바크를 하며 바라본 보름달은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

◎ 거문오름 | 한라산 북동쪽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동부관광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말굽형 분화구로서 전체 능선이 아홉 봉우리로 이뤄져 있고 분화구 중심에는 알오름이 솟아 있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한라산을 중심으로 거친오름, 성널오름, 물장오리, 물병아리 등 이름난 오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직박구리, 제주휘파람새, 동박새, 곤줄박이, 박새, 어치와 같은 텃새가 살고 있고, 팔색조, 삼광조, 흰눈썹황금새와 같은 철새들이 날아온다.

◎ 용눈이오름 | 다랑쉬가 하나의 오름으로 이뤄져 있다면 용눈이오름은 세 오름이 서로 겹쳐지며 마치 용이 노는 듯, 용이 누운 듯 보인다고 해서 용눈이오름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세 개의 분화구 테두리를 따라 용눈이를 걷다 보면,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는 사이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에 놀라게 된다. 높낮이에 따라, 시선의 각도에 따라 순간적인 공간이동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엔 한 바퀴를 다 돌아 처음 출발한 지점에 왔을 때, 미로 안에 들어온 듯했다. 분명 한번 지나친 곳인데 조금만 서 있는 위치나 시선의 각도를 달리하면 전혀 낯선 곳에 있는 듯한 환각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