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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어깨동무 소아병동’ 산파 홍창의 박사

남쪽의 지원으로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소아 전문 병원이 지난달 24일 평양에서 문을 열었다. 평양의대병원 안에 들어선 220병상 규모의 어깨동무 소아병동은 사단법인 ‘어린이어깨동무’(이사장 권근술)가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의 도움을 받아 세웠다.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소아병동은 진료실, 중환자실, 검사실, 입원실, 놀이방, 의료교육센터 등 현대적인 의료 시설을 고루 갖춰, 앞으로 북한 어린이 의료의 중추적인 구실을 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깨동무 자문위원으로 소아병동 건립의 발판을 만든 홍창의(85·사진·전 서울대 의대 교수) 박사는 “미래 세대의 건강을 위해,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큰 병에 걸렸을 때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에서 소아과가 있는 유일한 종합병원이 평양의대병원인데, 시설이 너무 낡고 좁아서 소아병동을 새로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홍 박사는 2002년 1월 첫 방문에 이어 이번 소아병동 준공식까지 모두 4차례 북한을 다녀왔다. 처음에는 주로 어린이들의 영양 관리를 지원했고, 급성설사나 영양부족으로 폐렴 등 중한 합병증까지 생긴 아이들을 보고 소아 전문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던 중 2005년 11월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의료진들로부터 평양의대병원의 소아과 방문기를 듣고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소아과에 의약품이나 의료기기 시설이 부족한 것은 물론 1950년대에 지었다는 건물은 냉·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고 좁아서 입원한 어린이 환자들이 더 아프게 될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이후 홍 박사를 포함한 어린이병원 의료진의 제안으로 어깨동무에서 마침내 평양 소아병동을 짓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 2006년 6월 착공한 뒤 2년 4개월 동안 시멘트 등 건축 자재 지원을 위해 모두 79차례, 의료·건축·실무 분야 인력은 모두 481명이 72차례 현장을 방문한 끝에 병원이 완성됐다. 이 병동에서는 중이염, 충치 등 어린이들이 흔히 앓는 질환부터 백혈병, 심장질환 등 중환자의 치료까지 가능하다. 초음파나 방사선촬영기 등 의료기기도 최신 시설로 갖췄다. 어깨동무 쪽은 “소아병동 개원으로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어린이들이 이전에 비해 2배는 늘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고 밝혔다.

홍 박사는 “평양의대가 북한의 의료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만큼, 북한의 전 지역 어린이들이 중병에 걸리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새 소아병동이 도울 수 있을 것”이라며 “더 많은 북한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해 다른 지역에도 소아병동이 들어서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지난 9~10월 두 달에 걸쳐 서울대병원 의료진들이 수십명이 평양을 방문해 평양의대 의료진들과 토론을 거쳐 소아병동 의료기기의 사용법을 전수하고 오기도 했다.


홍 박사는 서울대병원에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병원을 짓도록 제안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병원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 그는 병원 장기발전위원회에서 어린이병원을 새로 지을 것을 제안했으며 2년 뒤에 병원 기공이 이뤄졌다. 결국 남북의 첫 소아병동과 어린이병원이 모두 그의 생각과 손으로 이뤄진 셈이다.

47년에 의대를 졸업한 뒤 서울대병원에서 줄곧 환자들을 진료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소아과학 교과서를 펴내기도 했으며, 현재까지 6종의 소아과학 교과서를 쓴 바 있다. 이 책들은 평양의대의 소아병동에도 비치돼 있어 북쪽의 의사들도 보게 됐다. 87년 항쟁 당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던 의사들이 결성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도 홍 박사는 첫 이사장직을 맡는 등 주도적 역할을 했다. 홍 박사는 “의사는 아픈 사람들이 있다면 그 누구든 어디에 있든 달려가야 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택 돌담 등 온통 정원…두터운 세월 냄새 가득 : 보성 강골마을

강골마을 운영위원장 이정민(46)씨의 주장은 단호했다.“구석구석 선조의 숨결이 살아 있고, 손때가 남아 있는 전통마을입니다. 관광 수입을 내세워 상술이 판치고, 박제화 된 또 하나의 민속마을로 치장해선 안 됩니다.”

강골마을(오봉 4리)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에 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군량미를 확보했다는, 득량 땅 바닷가 인접 마을이다. 400년 전 광주 이씨가 들어와 살며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옛집들과 돌담길, 대숲과 정자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때 타지 않은’ 몇 안 되는 전통마을로 평가된다.


개발 바람을 비켜간, 고리타분하고도 아름다운 집들과 선인들의 생활 유적들이 생생하다. 중요민속자료 네 집을 포함한 25집에 평균 나이 70살이 넘는 주민 50명이 산다. 국회의원도 나고, 판사도 나고, 대법원장도 난 마을이다. 전쟁의 포화에서도 벗어나 있던 이 마을이 요즘 뒤숭숭하다. 3년 전부터 추진되고 있는 ‘강골 전통마을 조성사업 계획’ 때문이다. 보성군이 용역을 주어 펴낸 ‘기본계획’에 따르면 2015년까지 강골마을과 마을 주변에 숙박·휴식시설을 갖춘 대규모 한옥촌과 문화 체험장·저잣거리·박물관·국악공연장을 갖춘 민속촌이 들어서게 된다. 


이에 대해 이정민씨는 “전통마을 보전은 겉치레에 있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옛 모습과 정신을 온전히 지키는 데 있다”며 “요란하게 인위적인 민속촌을 건설해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건 시대에 역행하는, 한심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골마을은 조상들의 문화·생활 흔적과 정취가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마을로, 요즘 각광받는 슬로시티 개념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어르신들만 남은 강골마을에서 번거로운 일들을 도맡아 하는 일꾼이자 마을 지킴이다. 수백억원을 퍼부어 관광지를 만들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비용으로 빈집·낡은 집들을 고치고 다듬는 작업만으로도 살아 숨 쉬는 전통마을을 지키고 가꿀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애써 지키고자 하는 강골마을은 어떤 마을인가. 한마디로, 구닥다리 옛 마을의 모습이 ‘제대로 방치돼’ 있는 매혹적인 마을이다. 낡았으나 위엄 있고 위엄은 있으되 정감어린 고택들과 돌담, 대숲 사이로 난 마을길, 마을길 끝의 호젓한 정자, 마을길 옆의 자그마한 연못, 연못가로 이어진 돌담길, 돌담 옆에 깊숙한 우물, 우물가의 돌절구와 뜰 앞에 나뒹구는 맷돌 등이, 오래 전부터 눌러앉은 그 자리에 그대로 편안하게 놓인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자연 정원이다.


강골마을의 스물다섯 집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네 채의 조선시대 집(열화정 포함),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예닐곱 채의 한옥, 70년대 새마을운동 때 슬라브집으로 변형된 대여섯 채의 초가, 그리고 옛집을 허물고 양옥집으로 새로 지은 집 서너 채로 이뤄져 있다.집 대문들엔 독특한 명패가 붙어 있다. 택호다. 청주댁·내동댁·구례댁·침동댁·수원댁·아치실댁…. 모든 집 이름은 그 집에 시집 온 며느리의 고향 이름을 따서 부른다.


안채 5칸, 사랑채 4칸으로 이뤄진, 1891년에 지은 이식래 가옥, 솟을대문에다 정갈하고 기품 있는 멋을 자랑하는 이용욱 가옥(1904년 건립), 아기자기한 정원에 섬세하고 소박한 멋을 지닌 이금재 가옥(1900년 전후 건립) 등 세 채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고택이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하나같이 할아버지 냄새, 꼬질꼬질하게 손때 묻은 생활도구들 냄새, 서늘한 가부장 냄새, 섬세하고도 엄격한 시어머니 냄새, 두껍게 쌓인 세월의 냄새들이 가득하다.


강골마을의 고풍스런 멋과 옛 정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정자 열화정(중요민속자료)이다. 대숲 옆으로 난 돌담길을 돌아 돌계단을 오르면, 이 마을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게 아늑하고도 고즈넉한 정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 헌종 때 이진만이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팽나무 그늘 아래 ㄱ자로 꺾인 연못이 있고, 못 가운데엔 자그마한 탑이 놓여 있다. 누각형 마루에 올라앉으면 바람소리만 아득하다. 숲과 나무로 가려진 격리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자 옆으론 대나무숲이 빽빽하고, 뒤쪽엔 동백나무 고목들이 울창하다. 보성땅으로 귀양 왔던 조선 말 유학자 이건창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열화정 오른쪽 숲길을 오르면 마을 뒷산이다. 대나무숲과 거대한 소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폐가와 옛 집터들이 이어진다. 숲길을 천천히 걸으면 대나무숲에 부는 바람결에 실려 마을 내력이 전해져 오는 듯도 하다.


이정민씨가 말했다.

“우리 마을엔 집마다 대부분 속 깊은 우물이 있고, 그 주변엔 대개 두꺼비가 산다. 기와지붕마다 와송(바위솔)이 자라는 마을인데 문화재청에서 지붕 보수를 하면서 많이 사라졌다. 또 집마다 광엔 관이 하나썩 들어 있다. 이건 자신의 죽음을 일상적으로 대비해 온 선조들의 자세를 이어받은 것이다.”

그는 “마을에서 1번을 꼽으라면 이것”이라며 마을 공동우물에 대해 말했다.

“요것이 그랑게, 옛날에 마을을 먹여 살린 젖줄이요 근원이라요. 오래 전엔 이 우물밖에 읍었으니께.”

공동우물은 큰우물·소리나는 샘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마을의 여론이 이곳에서 생성되고 전파됐기 때문이다. 아낙네들에겐 소통의 공간이자 해방 공간이기도 했던 우물이다. 

마을 내력에는 밝고 귀는 약간 어두우신, 명봉댁의 바깥어른 이병철(78)씨가 말했다.

“한 40년 전까지도 마을에 한 200집이 살았는디, 인자 다 떠나고 다 비아갖고 시방 젊은이들은 몇 읍서라. 쩌그 열화정에선 어르신들이 놀고, 아낙들은 요짝 큰샘물터에서 놀았제라. 요 앞산에 옛날 만유정이 있었는디, 거그서 일제 항거 모임을 허다가 경찰 온다는 연락이 오면 열화정쪽 뒷산으로 숨어들어갔제. 순경이 쫓아오면 돌을 굴러내려 쫓았는디 거긴 늘 돌을 준비해 놨었지. 아 나도 열화정서 서당글 깨나 배왔는디, 거가 연못도 옛날엔 음청 컸어라. 근디 다 말라갖고 인자 메와지고 쬐껨하지라. 그 뒤짝으로 이정례씨 대밭이라고, 무자게 빽빽이 들어찬 대나무밭이 있었어라. 또 거긴 이런(팔을 한 아름 벌리며) 소나무들이 한 100그루쯤 꽉 들어차 있었제. 근디 해방 뒤 다 산판해갖고 실어가부렀어.”

대나무숲에 오래 서 있으면 좋은 소리가 난다. 쏴아 하는 바람소리 끝에 청아하게 울리는 ‘삐이익 따다다당…’.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다. 강골 마을 이름에서 느껴지는 고집스런 뻣뻣함, 대나무숲이 가진 청아하고도 꼿꼿한 성품을 지닌 까칠한 ‘강골’이 바로 이정민 위원장이다. 그가 있어 마을의 대소사가 진행되고 전통이 유지된다.

“우리 마을써 묵으실라문 가족단위로 와야 한단게요. 단체는 안 받아요. 사람 많이 올까 걱정이락게요. 놀고 먹고 가는 데로 알려질까 그라요. 가족끼리 와서 조용히 쉬고 느끼고 가면 쓰것소.”


가족단위로 가면 마을 한옥에서 하루 묵으며,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고집스러우면서도 정감 있는 주민들의 안내를 받아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다. 이씨는 “불편하고 성가신” 숙박체험을 즐기려는 도시민들이 부쩍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번 묵어간 가족단위 방문객의 재방문율이 80%를 넘는다고 한다. 한번 묵어간 이들의 대부분이 강골마을의 민속촌 개발에 반대 뜻을 표시하고 간 건 물론이다. 이씨가 덧붙였다.

“죄송허게도 우리 마을엔 도시사람들 위한 편의시설이 없소잉. 군불도 본인이 직접 때야 헌게로 불편허고 성가시고 깝깝할 것이요. 그게 시골 아니것소.”


여행쪽지

  • 강골마을 체험

1박에 2끼 식사, 체험비, 여행자보험 포함해 어른 1인 4만원, 어린이 3만7천원. 조미료를 일체 쓰지 않는 식사를 하고, 방바닥은 뜨끈하고 ‘우풍’은 센 낡은 한옥에서 잠을 잔 뒤 새벽 녹차밭 감상, 갯벌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정보화마을 홈페이지(dr.invil.org)나 전화로 예약해야 한다. 하루 3~4인 가족 10가구까지 수용할 수 있다. 이중재 가옥, 이용욱 가옥, 소천댁, 아치실댁 등에서 묵을 수 있다. (061)853-2885. 이정민 위원장 010-6211-5777.


  • 가는 길
수도권에서 갈 경우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 동광주나들목에서 나간다. 29번 국도 따라 화순 거쳐 보성으로 간다. 보성읍내에서 2번 국도 타고 벌교·순천 쪽으로 가다 군두사거리에서 득량 쪽으로 우회전(845번 지방도)한다. 득량 삼거리 주유소 앞에서 좌회전(851번 지방도)한 뒤 1킬로미터쯤 가다가 오봉역전에서 강골마을 팻말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다 작은 네거리 만나 직진(강골마을 팻말이 있다)한다. 좁은 시멘트길 따라 오르다 산밑에서 좌회전, 녹슨 철문 앞에서 우회전, 좁은 대나무숲길로 들어서면 강골마을이다.
  • 강골마을(오봉4리)
남쪽에 마을의 상징 산인 오봉산이 있다. 줄기에 다섯 개의 봉우리를 거느렸다 해서 오봉산이다. 주민들이 부르는 오봉산 말고도 지도에 표시된 오봉산이 또 하나 있다. 더 남쪽에 자리한, 수려한 바위경치를 자랑하는 칼바위와 용이 살았다는 용추폭포를 거느린 산이다. 칼바위가 있는 오봉산에 올라볼 만하다. 정상에 칼처럼 휘어진 바위를 비롯한 거대한 바위 무리들이 장관을 이룬다. 바위 사이로 깊은 동굴들이 형성돼 있다.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산 정상에 오르면 득량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 개흥사 터
두 오봉산 사이쯤에 도촌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보를 건너 좌회전해 물길을 따라 오르면 빽빽한 삼나무숲 사이로 무수한 돌담 흔적이 흩어져 있다. 고려 초기의 절터로 알려지는데,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없다. 골짜기 쪽에 쌓아진 높이 7~8m에 이르는 석축은 고색창연한 성곽의 모습이다. 계곡 물길을 사이에 두고 돌담 흔적들과 깨진 기왓장, 사기그릇 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압권은 골짜기 물길의 한 지류에 쌓아올린 석축이다. 골짜기 물길에 돌을 쌓아 위에 평지를 만들고 밑에 하수구와도 같은 물길을 만들었다. 이 주변에서도 무수한 기왓장과 그릇 파편들이 발견된다. 이 절터에서 일제 강점기 때 순금불상 등 불상 3기와 철마 2기, 돌 도가니 등이 발견됐다고 전해진다.


보성군에 따르면 사유지인 이곳에 45만평 규모의 골프·승마·레저 단지인 ‘시니어 타운’ 건설이 추진돼 논란이 일고 있다. 강골마을 이정민씨는 “숙박시설만 900세대가 들어선다는데, 이 석축 유적들이 제대로 발굴도 되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판”이라고 말했다.


금장태 교수는 학문에 대한 열정의 상징이다

금장태(64)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학문에 대한 열정의 상징이다. 한국 유학의 최고 전문가로 우리 유학의 독자적인 틀이 갖춰지기 시작한 통일신라 시대부터 현대에 이어지는 유학의 학맥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얻은 평가는 그가 공부로 암과 싸워가며 이룩한 것이다. 그는 15년째 뇌종양과 싸우며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오고 있다. 병세에도 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듯하다. 내년 2월 정년을 앞두고 있는 금 교수는 올해에만 5권의 연구서를 펴냈다. 서울대는 올해 처음 제정한 서울대 학술상을 그에게 안겼다. ‘공부 의지’ 하나로 육체를 극복하는 이 공부의 화신처럼 첫 수상자로 걸맞는 이도 없어 보인다.

늦가을 고요한 서울대 교정에서도 유독 정적에 싸인 듯한 인문대학, 그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할 수 있었는지, 공부란 그에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연구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자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낮은 목소리로 금 교수가 손님을 맞았다. 그는 꼿꼿했다. 나이는 들어 보였지만 암환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연구실은 놀랍게도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허름한 책상 두 개와 조그만 탁자 하나. 책장엔 책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책이 없는 교수 연구실은 처음 봅니다.

“저도 젊을 때는 책 욕심이 남 못지않았어요. 하지만 뭔가 늘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더라고요. 높은 데서 먼지 덮어쓴 책을 보면 ‘내가 읽겠다고 사둔 건데 계약을 위반하고 있구나’라는 자책감 같은 것도 들고요. 그래서 다 여러 번 나눠서 여기저기 도서관에 기증했어요. 필요한 책이 있으면 빌려서 읽어요.”병은 모든 것을 바꾼다. 그가 욕심을 버리기 시작한 것도 병을 얻고 나서였다고 한다. 생사의 갈림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절실하게 보이면서 허상을 쉽게 버릴 수 있었을 터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그런 얘기는 안 하고 싶어요. 학문이나 책으로 인정받고 싶지, 아프다는 얘기가 내세워지는 건 참 마음에 들지 않아요.”금 교수는 단호하지만 담담하게 잘라 말했다. 공부에 일생을 건 학자의 단단한 자존심이 전해졌다. 그래도 암 선고를 받고 이렇게 오래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물었다. “그럭저럭 해왔어요. 치료는 받고 있고, 공부는 할 만합니다. 시력은 점점 나빠지고 의식도 자꾸 흐려지긴 하지만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암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고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종양이 커지면서 시력은 계속 나빠져 책을 한번에 오래 읽기 어렵고, 투병과 공부로 약해지는 체력 탓에 병치레도 잦아지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은 귀띔했다.

금 교수가 암 판정을 받은 것은 안식년이었던 1994년이었다. 건강검진에서 눈 뒤편에 종양이 있는 것이 발견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아홉. 코 내시경으로 대수술을 받았지만 종양 덩어리가 너무 커 모두 제거할 수는 없었다. 병원에선 종양 위치가 위험하니 두개골을 절개해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자고 권했다. 그는 마다했다. 자칫 뇌에 영향을 미쳐 공부에 지장이 있을지 몰라서였다. 공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결단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종양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지는 않아 다행이다. 금 교수는 지금껏 호르몬제 약물 치료를 계속해오고 있다.

-암수술을 포기하면서까지 공부에 매달리신 건데,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무슨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공부를 하기로 했던 건 아닙니다. 제가 62학번인데요, 먹고살기 참 어려웠을 때죠. 다들 회사에 취직해서 밥벌이하기에 바빴는데, 저는 회사에 취직해서 살아가는 게 영 맞질 않을 것 같아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잘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거죠.”

금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학부를 마친 뒤, 우리 종교에 관심을 갖고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다.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은 기독교 관련 전공자 외엔 뽑으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성균관대에서 유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렵게 교수가 되어 열심히 학문을 꽃피울 시점에 병이 찾아왔다. 수술 대신 공부를 선택한 결단력은 책 쓰기로 이어졌다. 1999년 이후로 그는 해마다 최소 3권 이상의 책을 썼다. 가히 놀라운 생산력이다. 금 교수는 “이제는 공부한 걸 정리해야 할 때여서 책을 계속 내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답할 뿐이다.

-공부 말고 다른 걸 할걸 하고 후회한 적은 없으신가요?

“그런 후회는 해 본 적이 없지요. 오히려 가장 후회가 되는 게 뭐냐면, 젊은 시절 공부 제대로 안 하고 놀았던 거예요. 학부와 대학원 다니면서 철없이 술 마시고 놀러다닌 게 후회가 돼요. 요즘에는 이쪽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문 공부를 가르쳐 주는 데가 있지만 제가 다닐 때만 해도 없었어요. 그때 미리 공부를 많이 해서 한문을 잘 알면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운 거지요.”

다른 학자들이 그다지 관심 갖지 않았던 유학에 그는 평생을 바쳤다. 그의 공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금 교수는 구한말 유학자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진암 이병헌이라는 분이 있어요. 유학을 종교로 승화시켜려던 인물이죠. 배산서당을 세웠는데 여기가 사실은 유교 교회였던 셈입니다. 서양 문물이 밀려들어오고 일제가 침략해 올 때,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유교를 체계화하려 했던 거죠. 유림들로부터 이단이라는 비판을 받아가며 했던 일이에요.”

이어 서우 전병훈이라는 유학자를 언급하면서 뜻이 좀 더 명확해졌다. “이분은 정말 스케일이 큰 생각을 하셨는데, 유불선은 물론이고 칸트 철학 같은 서양 사상까지 하나로 아우르는 사상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셨던 유학자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원대하고 웅장했던 분들이 많았었죠. 이론의 체계화를 통해 사회를 변혁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꿈꿨던 것이지요.

학문은 책상 위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사회를 변혁하는 도구로써 의의가 있다는 말이다. 격동기를 온몸으로 살았던 숨은 유학자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금 교수는 신명이 난듯 눈이 밝아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금 교수는 1980년대 현장을 답사해가며 근세 유학자 70여명을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그렇게 쌓아온 성과를 이제는 책으로 체계화하는 중이다. 유교를 넘어 도교와 불교, 천주교까지 연구 영역은 계속 넓어져왔다.

-선생님도 독자적인 이론, 사상을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진 않으셨는지요?

“저는 디딤돌이죠. 우리 세대가 그래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역사적 단절이 있어서 남아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문헌들을 정리하고 앞으로 후배들이 독자적인 이론을 내놓기 위해 디디고 올라설 수 있도록, 연구 성과를 정리했습니다. 후배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지만, 정리하는 것 그뿐입니다.”

내년이 정년이지만 공부만을 해온 이니 당연히 명예교수로 연구를 계속하리라고 지레짐작했다. 뜻밖에도 그는 “쉬겠다”고 했다. “정년 퇴임하면 못 만나던 친구들도 만나고 바둑도 두고, 여행도 해야지요.”

말은 그런데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 다시 커다란 돋보기가 세워져 있는 집필용 책상으로 돌아갔다. 책상에는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제8책이 펼쳐져 있었다. “춘추시대 의례에 관한 연구가 나와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시 목소리가 커진다. 정말 금 교수가 정년 뒤 공부를 쉬고 바둑과 여행에 나설까? 사뭇 궁금해졌다.

금장태 교수

금장태 교수는 전통 유학을 되살려 정리하고 오늘날에 맞게 적용하는 한편 유학을 종교적으로 확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를 위해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화서 이항로 등을 중심으로 연구했다. 퇴계의 성리학, 다산의 실학을 거쳐, 화서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유학의 전모를 규명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그의 주전공이다. 이런 작업과정에서 구한말 일제 침략과 더불어 단절되고 묻혀버렸던 근세 유학자 70여명을 발굴하기도 했다. 요즘 그의 관심사는 유학을 넘어서, 유불선 사상을 통합해 이해하는 문제다. 학계에선 그가 이런 성과를 밑바탕으로 우리 유교 역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해줄 인물로 평가한다.

평생 유학을 연구한 학자답게 그는 삶의 태도에서도 선비들의 자세를 실천하고자 노력해왔다. 인터뷰가 어려울 정도의 겸손함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다.

자신의 학문에 대해서도 그는 정당한 자평보다도 반성을 앞세운다. 대표적 저서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욕심(人心)과 이성(道心)이 가슴속에서 싸울 때는 반드시 욕심을 누르고 이성이 지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다산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결국 내 마음속에서 욕심이 이성을 이기고 말아 나는 분수를 망각한 채 무모하게 덤벼들었다. 그러니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 내내 부끄러움과 후회스러움을 감당하기 어려웠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