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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17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된 서지우(당시 36살)씨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8년 동안 이렇게 오래 두지 말고,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도 사형을 신속히 집행해주십시오. 사형수들은 매일 아침 해가 뜨면 ‘아! 죽었구나’ 하고, 해가 지면 ‘아! 살았구나’ 합니다. 이렇게 1년 365일 동안 매일 죽었다 살았다 합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두려움이 죽음의 고통보다 더 심하다는 절규였다.
2009년. 사형제를 부활하자는 말이 나온다. 아니, 폐지하지 않았으니 그냥 집행하자고 한다. 10년간 유예된 죽음, 다시 그 죽임을 되살려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겨레21>은 사형의 당사자인 사형수들을 만나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봤다. 또 그들을 가장 오래 지켜보는 교화위원들을 통해 그들의 말을 들어봤다. 그리고 그 죽음의 또 다른 당사자인 교도관과 피해자 가족들도 만났다. 과연, 죽음은 죽음으로밖에 갚을 수 없는가. 편집자
3월2일 오전 8시50분. “△△△번 접견 신청자는 2번 대기실 앞에서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접견실 복도는 좁고 어두웠다. 접견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접견실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10초쯤 지났다. 유리창 너머로 그가 들어왔다. 수감 번호가 찍힌 빨간 명패. 사형수임을 알리는 주홍글씨.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맑았다. 죽음과 싸우다, 죽음을 넘어선 자의 얼굴일까. 그를 소개해준 지인의 이름을 댔다. 그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눈이 빨갰다. 이유가 있었다.
“저는 매일매일 ‘하루’를 사는 사람입니다. 1분 1초가 너무 소중하고 아깝습니다. 잠자는 게 너무 아까워 보통 하루에 3시간을 안 잡니다. 어제는 밤부터 비가 내리더니, 새벽 2시부터 비가 눈으로 바뀌더군요. 그걸 보자니 마음이 너무 설레어, 새벽 3시가 넘도록 잠을 못 잤어요. 오늘은 유난히 더 빨가네요.”
시간을 아껴 그는 편지를 쓴다. 밖에 있는 딸들에게, 딸과 자신을 돌봐주는 누이에게, 몸이 아픈 노모에게 보낸다. 사회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형들과 동생들에게, 교도소 안에서 인연을 맺은 교정위원들에게. 편지 쓸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에 200통이 넘는 편지를 쓴다. 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편지로나마 ‘좋은 아버지’가 돼주고 싶기 때문이다.
”편지를 자주 쓰는 것은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고, 내가 느끼는 이 감정, 생명의 소중함, 이런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교정위원으로 그와 오래 인연을 맺어온 황수경 동국대 강사는 “사형수 아버지라는 존재가 딸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딸들은 아버지가 교도소 안에서라도 살아 있어 계속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전한 교도소 안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사형수들도 장기수들도 날카롭고 예민해졌다. 규율이 엄해진 탓이다. 다가온 죽음의 공포에 식음을 전폐한 사형수도 있다고 한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고, 지금은 단지 시간이 길어진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하루하루가 소중하다”고 했다. 사형수로서의 삶은 생명의 귀중함을 일깨워주었다. “모기가 내 피를 빨아먹어도 죽이지 않습니다. 모기에게라도 뭔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좋을 뿐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거칠었다. 잔인했다. 동료 수감자들을 괴롭히고 군림했다. 몰래 담배도 피웠다. 어차피 죽은 목숨, 자포자기였다. 시간과 종교가 그를 깨우쳤다.
“지금은 그런 것 절대로 안 합니다. 살아 있음이 감사하니까. 그렇다고 죽지 않기를 감히 바라지는 않습니다. 내 목숨은 내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 10분의 면회는 짧았다. 주변을 통해서도 그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영치금으로 돈 없는 수감자들을 돕고 있었다. 안경, 속옷, 내복, 법률 서적…. 그가 동료들에게 사준 ‘선물’들이다. 정작 자기가 간식을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3월5일 오전 11시40분. 또 다른 사형수를 만나는 시간이다. “×××호 접견자는 1호실로 가세요.” 그가 왔다. 짧은 머리에 껑충한 키, 옅은 갈색 수감복에 빨간 명패.
그는 오전에 작업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정말 좋다고 했다. 정부는 그간 사형수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원하는 이들에게 작업을 시켰다. 그들에게 작업은 노동이 아니다. 삶을 살아갈 이유다. 그에게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 물었다.
“뉴스 봤습니다. 방 식구들은 뉴스 보면서 ‘저런 놈은 죽여버려야 해’ 이런 말을 하곤 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참…. (얼마간의 침묵이 있었다) 그럴 것 아닙니까.”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동료들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표정이었다.
“내가 봐도 강○○은 이해가 안 되더군요. 저는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면이 있었는데, 강○○은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도 그렇게 살인을 했다니….” 그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잘못을 저질러 형을 살고 있는 몸이라 사형에 대해 할 말은 없습니다. (사형이 집행된다는 말 등에 대해) 애써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법이라도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살인입니다. 저라고 왜 살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또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는 요즘 작은 것에도 큰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환한 표정으로 “요즘처럼 날이 따뜻할 때는 밖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도 이루 말로 못할 행복감을 느낍니다. 요즘은 서울에 있는 보살님(교화위원)이 편지로 많은 깨달음과 도움을 주시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0분이 됐다. “다음 사람을 위해 속히 접견실을 비워주십시오”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에게 “혹시 소원이 있냐”고 물었다. 유리 칸막이를 너머 마이크는 이미 꺼진 상태였다.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안 들린다는 듯 귀를 한 번 가리킨 뒤 조용히 합장을 했다. 그는 그렇게 떠났다. 그 역시 사동 안팎 청소와 식당 설거지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고 했다.
서울구치소에서 불교 쪽 교화위원으로 일했던 황수경 동국대 강사는 최근 한 사형수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
“요즘 공장(교도소 작업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직원들도 ‘아무렇지 않냐, 힘들지 않냐’고 묻고는 해요. 그러면 저는 ‘왜요?’라고 되물어요. 요즘 한나라당에서 정부에 사형수들 집행하라고 연일 떠들어대는 것을 TV 뉴스나 신문에서 보고도 제가 우울해하지도 심각해하지도 않고 늘 웃고 밝게 생활하니 이상했던가 봐요. 그런데 꼭 그렇게 심각해야 하나. 주어진 하루를 늘 열심히 살고, 나의 죄에 대해 늘 참회하고 살면 되는 것을. 두려워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는 것을.” 마음은 죽음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도 다른 사형수들의 상황은 걱정했다. “사형수들 대부분은 힘들어하고 있나 봐요. ○○가 편지를 보냈는데 서울 형제들 몇은 무척 힘들어한다고 하네요.”
그랬다. 힘들어했다.
3월6일 오후 2시40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 소설가 공지영씨를 만났다. 천주교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사형수 2명을 접견하고 나온 자리였다. 공씨는 지난 2003년께부터 사형수들을 만나왔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 경험의 축적이기도 하다.
“오늘 만난 사형수들은 강○○씨 사건을 접하는 순간에 자신이 가해자가 된 듯한 고통을 느꼈다더라고요. 살해된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기가 죽인 피해자들과 그 가족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한 괴로움도 들고….” 사형수들의 얼굴은 평화로웠다고 한다. 하지만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배어나왔다고 한다.
“사형 집행 관련 뉴스가 나올 때는 맨 처음 사형 판결을 받던 때의 공포감이 되살아나더래요. 물론, 그 사형수들이 죽인 사람들도 그런 공포에 떨었겠죠. 그래도 죽음으로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 인위적인 죽음을 기어코 안긴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천주교 대전교구 교정사목부 강창원 신부는 지난 2월27일 사형수들을 접견했다.
“미사를 올리던 사형수 한 명이 갑자기 몸을 떨면서 ‘불안하다’고 고해했습니다.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리니까, 목숨에 무심해졌다고 말하는 사형수들이 눈앞에 닥쳐온 죽음을 느끼는 겁니다.”
자포자기한 사형수도 있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60대의 사형수다. 영화 <마이 파더>에 나오는 사형수 아버지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인물이다. <마이 파더>는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이 자신의 친아버지를 찾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20여 년간 그려온 아버지를 찾아보니, 교도소에 있었다는. 그것도 사형수였다는.
광주교도소 교화위원인 안영목 목사는 “지난 2월에 그를 만났더니 ‘목사님, 우리 그냥 죽였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더라”며 “자기는 사형제 폐지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고 말했다. 안 목사는 “사형이 확정된 뒤 벌써 14년이 흘러 나이도 들고 몸도 마음도 약해지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사형수들은 중죄인들이다. 적어도 1명 이상의 사람을 고의로 죽였다. 그들이 삶에 매달릴 수만은 없는 이유다. 그러나 그들의 상당수는 변했다. ‘살인마’에서 ‘신실한 신앙인’으로, 지독한 ‘앙심’에서 다른 이들을 도울 줄 아는 ‘양심’으로.
서울구치소 안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미결수가 입소했다. 그는 목욕은 물론 일상적인 세수도 거부했다. 감방 안도 도저히 사람이 머물 수 없을 만큼 비위생적으로 만들어버렸다. 벽에 오줌도 눴다고 한다. 감방 안을 소독해야 하는데, 반항이 너무 심해 쉽지 않았다. 그때 사형수 도○○씨가 나섰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던 이 미결수는 도씨 앞에서는 조금 고분고분했다. 도씨는 교도관들에게 “제가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함께 씻을 테니, 그사이 감방 안을 치우시라”고 했다. 그 사형수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 미결수의 몸을 구석구석 씻기고 옷도 빨아 갈아입혔다.
믿음을 깨친 사형수들은 자신의 남은 삶을 ‘교화’에 바치고 싶다고 빈다. 사형수 시몬(세레명)이 이영우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일기가 함께 실려 있었다.
“내가 받은 사도직은 교화다. 나의 사명은 출소자의 재범을 한 건이라도 줄일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재소자들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고, 가장 자연스레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이 같은 재소자라고 생각한다. 그 재소자가 최고형을 받은 이라면 상대 재소자의 마음을 더 잘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영우 신부는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이 가장 잘 따르는 존재가 사형수들”이라며 “사형수들이 재소자들, 특히 소년범들의 교화에 나서면 정말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사형수에게 새로운 삶을 주면 그는 어떻게 바뀔까. <한겨레21>은 지난해 1월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된 ○○○씨를 3월4일 만났다(그의 죄목은 살인강도였다). 그는 “신부님은 잘 계시냐”고 첫 말문을 열었다.
사형과 무기는 뭐가 다를까. “이제 교도소에서나마 ‘내일’이 있다는 점입니다. 감형받고, 처음엔 멍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유영철이 잡혔을 때부터 그때까지 매일밤 죽음을 준비하던 저였거든요.” 죽음만 있던 생활이 삶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교도소 내 봉제공장에서 일한다.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고아 출신인 그는 중학교를 겨우 마쳤다. “무슨 비전이 있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한 저에게 새로 주어진 목숨인데 어떻게든 값되게 써야 한다는 생각뿐….”
‘소원이 뭐냐’고 묻자, 그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교도소 안에서라도 한 번 더 새롭게 삶이 주어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사회에서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겠죠. 달갑게 받아들여야겠죠. 그래도 교도소 안에서 영원히 참회하고 반성하면 안 될까요. 다른 재소자들을 교화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요. 그런 기회는 주어질 수 없을까요.”
사형수들은 법명이나 세례명으로 얻게 되는 새 이름을 좋아한다. 죄인이었던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새로운 이름으로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개명만으로 이들은 부활하는 셈이다.
강력범죄 예방에 무엇이 도움이 될까
사형수를 죽이는 것과, 사형수들이 재소자들의 마음을 돌려 범죄의 세계에 다시 빠지는 것을 막는 것. 어느 것이 강력범죄 예방에 더 도움이 될까.
공지영씨는 2월6일 오전, 사형수를 만나러 나서다 휴대전화로 들어온 ‘오늘의 성경’ 내용을 보고 그대로 꿇어앉아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오늘의 성경은 에제키엘 예언서 18장 21절부터 28절의 내용이었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명박 정부는, 믿음의 정부, 섬기는 정부라고 한다. 그 말씀을 한 신은 다른 신이었을까.
유영철 변호인 차형근 변호사
차형근(51·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사무총장) 변호사. 2004년 7월부터 12월까지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변론을 맡았다. 사형 폐지라는 평소 소신에 따라 지존파와 온보현 등 연쇄·잔혹 살인범들의 변호를 도맡아왔던 차 변호사다. 차 변호사도 유영철의 변론을 맡았을 때 ‘과연 사형제를 폐지해야 하는가’ 하는 심한 번민의 시간을 보냈다.
“그 이전의 지존파나 온보현은 변론을 하다 보면 ‘아,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영철은 ‘저런 존재도 살아 있을 이유가 있는가’ 하는 생각만 거듭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유영철의 변론을 맡았던 때를 되돌아보는 것도 힘들어했다.
“유영철을 처음 만나서 ‘난 사형 폐지가 신념이다. 그 일환으로 사형선고를 한 명이라도 줄이는 변론을 하고 있다. 그러니 변론을 맡겠다’고 하니 변론을 맡기더군요. 그런데 구치소로 유영철을 만나러 간 첫날, 구치소장이 불러요. ‘당신의 신변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변호사와 피의자의 접견 장소에는 교도관이 입회하지 못하니까. 당시 접견실은 철문이 닫히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는 구조였어요.”
유영철은 대뜸 차 변호사에게 “제가 죽기 전에는 사형 폐지 안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차 변호사가 접견을 오면 경찰이나 검찰에서 밝히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하나씩 밝히기 시작했다. 주로 여성들을 어떻게 살해하고 주검을 어떻게 훼손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육의 어떤 부위를 어떻게 먹었는지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기자도 그 말들을 도저히 옮길 수 없다).
차 변호사는 “매일매일이 앉아서 생고문당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법정에서 유영철의 태도는 더 잔인했다. 딸을 잃은 충격으로 사지에 중풍이 온 아버지에게 유영철은 “딸을 죽이기 전에 마지막 배려로 당신과 통화하도록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피해자 아버지는 이 말에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뒤틀며 거친 신음만 토했다. 차 변호사는 “그 아버지는 이후로 얼마 살지 못한 것으로 안다”며 고개를 저었다. 유영철의 증언을 듣던 황학동 피해자의 형은 그 충격으로 자살했다. 그 고통은 차 변호사에게도 그대로 밀려왔다. 변론을 하던 넉 달 사이에 10kg의 체중이 빠졌다. 평소 자신했던 건강도 1km 거리만 걸으면 지칠 정도로 악화됐다. 변론을 마친 뒤에도 심한 정신적 외상(트라우마)과 신체적 고통으로 1년 가까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뒤로는 유영철의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돌렸다.
“2년쯤 지난 뒤에 한 수녀님으로부터 유영철이 그간 숨겨왔던 자신의 딸 이야기를 하면서 딸을 부탁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습니다. 일가족을 잃고도 자신을 용서한 피해자 유족에게 유영철이 보낸 편지도 읽게 됐습니다. ‘아, 기회가 주어지니 유영철도 변하는구나’ 싶더군요.” 그 뒤 차 변호사는 다시 용기를 얻어 사형 폐지 운동에 나서게 됐다. 지금도 유영철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창백해지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