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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이 뻘밭이 예전엔 피바다였지. 그렇게 일하면서 2만 톤 배를 23일 만에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적도 있어.”

수명이 다한 폐선을 맨손으로 해체하는 사람들의 잊혀진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박봉남(43·사진 오른쪽) 피디는 이 말을 필름 위에 담으려고 2년을 끙끙댔다. 2007년부터 지난 봄까지 그는 방글라데시 치타공 해안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폐선박을 해체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살았다. 그렇게 기록한 다큐 <철까마귀의 날들>(<한국방송>7월19일 방영)은 인내의 열매였다.

그리고 그 열매는 의미 있는 씨앗을 품었다. 이 작품은 2009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중편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라이프치히 다큐멘터리 영화제, 선댄스 영화제 등과 함께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이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첫 진출한 한국 작품이다. 지금까지는 비전향 장기수 북한 송환문제를 다룬 다큐 <송환>(연출 김동원)이 2004년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을 뿐이다.


“상처 투성이인 그들의 노동을 불쌍하게 다루지 않은 것이 눈에 띄었나 봅니다. 서구인들이 기록한 아시아 노동자들의 모습에는 동정심이 가득해요. 그러나 안전장치 하나없이 죽음을 무릅쓰고 벌이는 그들의 노동은 경이로운 인간 삶의 모습이죠.”

박봉남 피디가 스스로 설명하듯, 쩍쩍 갈라진 발바닥과 시뻘건 핏자국에 물든 노동자의 어깨를 비추는 카메라는 정직하고 겸손했다. 고된 노동을 미화하지도 않지만 동정하지도 않았다.


방글라데시 치타공의 폐선 해체 작업장은 배들의 무덤이고, 동시에 인간의 무덤이기도 하다. ‘8시간 일하면 8시간이 위험한’ 이 작업장에선 한 해 20여명이 죽어나간다. 방글라데시 철 생산의 85%를 담당하고 있기에, 정부도 이런 위험한 현장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나 치타공 노동자들은 이곳을 “알라신이 축복을 내린 곳”이라고 말한다. 굶주린 배를 채워줄 ‘철로 된 식량’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루에 고작 천원(하루 일당 1달러)을 벌 지언정. 박 피디는 그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역설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필름에 담아냈다.

그는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다. “상을 받게 되면 90분짜리로 다시 편집할 생각입니다. 검게 그을린 단단하고 아름다운 노동자의 육체를 제대로 담지 못했거든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이것이 방글라데시의 산업을 일구고 있는 위대한 육체라는 것을….”

박 피디는 행복한 계획도 세우고 있다. “내년 초 치타공에 돌아가 노동자들 앞에서 이 다큐를 상영할 겁니다. 당신들의 이야기가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는 영화제에서 받은 상금과 명예를 치타공 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줄 생각이다.

기사 원문(허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