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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 나인’ 마사키 다카시

마사키 다카시. 머리칼을 뒤로 묶은 그의 표정에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1945년생이니 예순여섯. 한겨레신문사 하니티브이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바로 전날 휴전선 가까운 임진각에서 100일간의 ‘워크 나인’(Walk 9) 한국 순례를 막 끝낸 참이었다.

“지금 일본에선 (평화)헌법 9조를 바꾸려는 아주 강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위기감을 갖고 있다. 일본이 9조를 버린다면 전쟁이 일어날 위험성이 있다. 9조를 바꾼다는 것은 군대를 보유하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거기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다.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 반대 기운이 높다. 나는 일본의 진로를 바꿀 이런 큰 문제를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게 없었지만, 기도하고 걷는 일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공감하고 참여해주었다. 빛나는 순례가 됐다.

‘워크 나인’은 그러니까 일본 헌법 제9조를 지키기 위한 걷기운동이다. 일본 헌법 9조는 일본의 군대 보유와 교전권, 집단자위권 발동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헌법을 흔히 ‘평화헌법’이라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최근 10여년간 일본에선 보수우파 중심으로 9조를 없애거나 바꾸려는 움직임이 강화돼 마침내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일본을 재무장시켜 자국의 패권 전략에 동원하려는 미국의 압박이 크게 작용했다.

마사키는 9월9일부터 12월17일까지, 강화도를 출발해 서울을 지나고 동해 강릉으로, 거기서 해안선을 따라 부산까지 갔다. 거기서 다시 남해안을 따라 광주 쪽으로 걸었고, 영광, 평택 등을 거쳐 북상한 뒤 임진각까지 갔다. “날마다 아주 인상깊었다. 정말 멋진 여행이었다.” 동참자들은 장소나 때에 따라 늘기도 줄기도 했는데, 100일째인 마지막날엔 100여명이 함께했다. 일본인 20명 정도가 한국 순례 내내 함께 걸었다. 숙식은 한국 사람들 도움으로 해결했다. 그는 일본에서 먼저 순례를 시작했다. “2년 전에 일본 남쪽에서 북쪽까지 3개월 정도 걸었다. 그때는 생명이 전쟁으로 상처받지 않기를 염원하며 해안선 따라 죽 걸었다. 혼자 걸으려 했는데 막상 시작하니 많은 젊은이들이 동참해주었다. 그때부터 워크 나인은 아주 즐거운 순례단이 됐다.”


왜 한국에서도 걸을 생각을 했을까? “내 나름대로 사죄하기 위한 순례였다”고 했다. 평화헌법을 지키려면 한국과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헌법 9조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그것은 이웃나라와 관련돼 있다. 평화도 전쟁도 한 국가 내부 문제가 아니라 이웃과 어떻게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다. 따라서 두 나라가 함께 생각해야 한다. 나아가 나라와 나라를 넘어선 관계, 특히 동아시아 의식, 동아시아인 의식이 높아져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젊은이들이 많이 동참했다. 나이든 사람은 나 혼자일 정도였다. 20대만이 아니라 10대도 많이 왔다. 정말 멋진 일이다. 그걸 보고, 아 이런 젊은이들은 이미 동아시아인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배 등 최근 역사에서 가해자가 됐던 일본 쪽이 먼저 사죄하고 위무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키나와에서 징병·징용으로 그곳에 끌려간 조선인 1만4000여명이 일제의 전쟁정책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가슴 아픈 사실도 그의 발길을 한국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이번 한국 순례에 나선 일본인들도 그런 생각을 공유했다.

규슈 산속에서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살던 그가 헌법 9조 지키기에 나선 것은 나무심기를 통해 그 자신이 자연의 품에 온전히 안기면서부터다. 돌아다니면서 본 일본 전국의 숲은 인공식림한 일본삼나무 단일종으로 뒤덮여 있었고 자연림은 황폐해져 있었다. 특히 서부 시마네현 사타 신사 인근 이노시마 원전을 지나면서 체감한 공포가 그를 더는 머뭇거릴 수 없게 만들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 원전들이 파괴되면 길게는 수만년간 동아시아 일대의 모든 생명이 말살되거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공포감.


“10년 전부터 나무심기를 시작했는데 당시만 해도 일본에선 자연을 되돌리기 위해 나무를 심는 조직은 없었다. 지금은 많아졌다. 나무심기 자체가 기쁨을 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땅 파고 나무 심다 보면 대지, 자연이 나와 연결되는 기쁨을 실감할 수 있다. 그 결과 인간에서 자연 쪽으로 완전히 입지를 전환하고 모든 걸 자연 쪽에서 바라보게 된다. 헌법 9조도 자연 쪽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원전이 공격당하면 몇만년이나 바다도 산도 고통을 받게 되겠구나.”


그는 한국에선 ‘일본해’라는 이름을 용인할 수 없고 일본에선 서쪽 바다를 ‘동해’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난제도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통해서 해소할 수 있다고 했다. “과거사 청산이나 평화 만들기는 국가의식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나라라는 건 전쟁을 하기 위해 그리고 전쟁에 의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전쟁을 없애기 위해서는 국가 아이덴티티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아시아 의식을 갖게 되면 전쟁은 없어질 것이다.” 평화헌법과 모순관계인 천황제 문제도 “금방 바꾸긴 정말 힘들 것”이라며 “먼저 9조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저지하는 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 미사일도 걱정했지만 일본을 재무장시키기 위해 납치문제를 과장하는 등 북한을 비롯한 이웃나라들을 자극하고 그것을 통해 일본 국민들을 개헌 쪽으로 선동하는 일본 우파정권의 ‘연출’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는 걸 직감했다. “일본 정부는 최근 10년간 9조를 바꾸기 위해 여러가지 준비를 해왔다. 그 일환으로 이웃나라들을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며 자극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 결과 20년 전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일본 국민들이 아니라 정권 쪽의 선전활동이 그렇게 이끌었다. 죄송한 마음이지만 그런 정치인들에게 한국인들이 너무 과민반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들이 바라는 것이다. 9조를 지키기 위해선 그런 프로파간다에 반응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낫다. 외부 반응 강하면 일본내 개헌 움직임도 거기에 맞춰 강화된다.”


9조는 미국이 중심이 돼 만들었으나 지금 9조를 바꾸라고 압박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을 (미국의 전략에 따라)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 자신들이 무기를 팔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어한다. 지금 새롭게 9조를 지켜낸다면 미-일 동맹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이 후텐마 기지 이전문제로 미국과 불화하고 있다. “이번 동참자들 중에 오키나와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들과 미군기지를 크게 확장하고 있는 곳(아마 평택인 듯)에도 가서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일본 젊은이들은 주일 미군기지와 주한 미군기지는 서로 이리저리 이동하는 등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연대하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힘을 줄여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순례 도중 한국 자연이 많이 훼손된 것을 봤다. “한국을 걸으면서 몹시 놀란 게 있다. 아주 큰 규모의 공사들이 여기저기서 매우 왕성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고속도로, 터널 공사들이 진행되고 있었고, 어떤 곳엔 고속도로 두개가 나란히 달리는 것도 봤다. 새만금에도 가봤는데, 정말 가슴 아팠다. 일본에서도 그런 문제가 많았는데, 한국에선 생명문제를 더욱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4대강 개발에 대해서는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엄청난 계획이 있다는 얘긴 들었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일본에서도 예전엔 그랬다.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메우는 큰 공사들을 벌였다. 하지만 이젠 사회적으로 반대 움직임이 활발해져 개발주의가 약화되고 댐 건설 등 큰 공사는 거의 중단됐다.” 하토야마 정부는 출범 직후 얀바 댐 등 대규모 댐 공사들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환경문제는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더 심각한 것 같다. 남북이 갈라져 있는 것도 그렇고,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한국에선 더욱 심화된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

“나는 규슈 산속에서 차 농사를 짓고 있는데, 봄이 되면 애벌레들이 잎들을 갉아먹는다. 사람들은 애벌레가 잎을 자꾸 먹으면 결국 나무가 말라죽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애벌레는 얼마 뒤 고치가 되고 나비로 우화한다. 나비가 되면 더는 잎을 먹지 않는다. 꿀 향기에 끌려 하늘을 날아다니며 꽃의 꿀을 빨아먹고 열매를 맺게 한다. 환경문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자연을 망쳐왔는데 어느 때가 되면 아, 나 자신이 자연 그 자체구나 하는 의식을 갖게 되는 변환이 일어날 것이다. 인간 중심으로 환경을 보고 환경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코페르니쿠스가 무너뜨린 천동설과 같다.”

그는 자신의 네트워크를 통해 2011년에 있을 지방선거에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무장한 젊은 ‘그린 후보’ 1000명을 내세우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환경운동은 의회에서 개발 의안들이 통과되고 난 뒤에야 대처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는 자연파괴를 막을 수 없다. 국가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수많은 크고 작은 공사들을 막아야 하는데, 개발안들이 의회를 통과하기 전에 중단시켜야 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자연파괴를 멈출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역시 2011년에 치러질 가능성이 높은 9조 개헌 국민투표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젊은이들 의식을 정치나 사회로 향하게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그것도 즐겁고 폼나게” 해서 일대 문화운동으로 만들어갈 생각이다.

국민투표가 치러진다면 결과는? “여론을 보면 좌우를 막론하고 50 대 50 정도다. 20년 전까진 4 대 1 정도로 반대가 강했다. 하지만 정권이 열심히 선전해댄 결과 50 대 50까지 왔다. 지금까지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젊은이들의 참여 정도가 결과를 좌우할 것이다. 3~5%의 젊은이 표만 더 있어도 막을 수 있다. 만일 그게 된다면 자신들의 힘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 사람들이 원전 개발도 막고 미-일 동맹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기사원문(인터뷰/한승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