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13

DoMath
기사 원문(김현준)

※ 지난 2010년 4월 12일과 13일, 양일에 걸쳐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송창식의 공연이 펼쳐졌다. 준비과정을 둘러싼 소소한 뒷얘기와 두 번째 날의 공연이 끝난 뒤에 가진, 그러나 시간 관계상 방송에서는 공개하지 못할 인터뷰 내용을 기초로 백스테이지 패스(Backstage Pass)를 엮는다. 평소 100BEAT에 업데이트되는 글보다 좀 길다. 이해를 구한다. 방송은 이번 주 금요일, 5월 14일 밤 12시 35분이다.



2010년 4월 12일 월요일 저녁 6시. 스태프들이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그가 무대에서 기타를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었다. 7시는 돼야 방송국에 도착할 거란 얘길 미리 전해들은 터라, 나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조명이 꺼진 무대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그 노랫소리에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왠지 그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한다는 직감. 이내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방송국 로비로 올라온 작가들이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송창식이 노래를 하고 있어!”


EBS 스페이스 공감이 개관 6주년을 맞았다. 이를 위해 4월 한 달 동안 “초대”라는 타이틀로 특별기획이 마련됐다. 홈페이지를 통해 “다시 보고 싶은 음악인”과 “초대해 주었으면 하는 음악인”이 누구인지 설문이 진행됐고,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들에게 “EBS 스페이스 공감이 반드시 마련해야 할 공연의 주인공”에 대한 의견도 물었다. 세 번째 항목에서 수위를 차지한 인물이 송창식이었다. 제작진은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수년 전부터 섭외 대상 1순위였다. 그러나 모두들 표정은 밝지 못했다. 과연 그를 섭외할 수 있을까. 나 역시 프로그램의 기획위원으로 4년째 힘을 보태면서도 이 작고 소박한 무대에서 그의 노래를 듣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여러 경로로 확인한 결과 그는 오래도록 단독 공연을 벌이지 않았으며, 어떤 식이든 자신의 이름을 메인 타이틀로 붙인 무대를 고사하고 있었으니까.


제작진은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송창식은 간간이 큰 무대에서 두어 곡씩 노래하곤 했는데, 최근 들어 그가 곁에 두는 연주자가 바로 함춘호였다. 3월의 어느 날 밤, 경기도 구리에 위치한 송창식의 연습실로 사람들이 몰려(!)갔다. 정윤환 PD와 백경석 PD, 선우일영 작가, 그리고 이 자리를 주선한 함춘호(나는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크게 후회하고 있다). 어떤 결과가 전해질지 저녁때부터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선우 작가에게 분위기를 봐서 문자 하나 보내줄 것을 당부했었다. 11시가 조금 넘었을까. 그녀에게서 세 음절의 문자가 왔다. “우하하.” 결과는 OK. 더구나 단독공연으로 허락을 받아냈단다. 우려했던 대로 애초에 송창식은 공연 자체를 크게 부담스러워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컴퓨터로 방송의 다시보기를 연결해 기타리스트 토미 임마누엘(Tommy Emmanuel)이 신명나게 연주하는 동영상을 보여준 순간 그의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던가. 선우 작가가 다음 날 오후 상기된 표정으로 전날 밤의 상황을 그렇게 얘기했다.


세세한 일정이 조율되면서 송창식과 함춘호의 듀오로 편성이 확정됐다. 아울러 올가을 수십 년 만에 공연을 준비 중인 트윈 폴리오의 또 다른 주인공 윤형주가 게스트로 초청됐다. 선우 작가는 송창식의 어느 노래를 듣고 싶은지 제작진의 의견을 구했다. 나는 ‘나의 기타 이야기’와 ‘사랑이야’, 두 곡이면 족하겠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송창식의 음악이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을 아우르는지 새삼 확인했다. 정 PD는 ‘상아의 노래’를, 백 PD는 ‘선운사’를, 함께 기획위원으로 일하는 박은석 비평가는 ‘담배 가게 아가씨’를 꼽았다. 이렇게 놓고 보니 그 감성의 폭이 상당했다. 백 PD도 동의했다. “방송을 준비하면서 되짚어보니 송 선생님의 레퍼토리는 말 그대로 ‘방대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틀에 걸쳐 펼쳐진 공연 무대가 이 사실을 고스란히 입증했다.



간간이 짤막한 담소의 시간이 포함되긴 했지만 공연은 제작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고, 진지하고, 차분하게 진행됐다. 노래 하나를 마치면 순간의 감성에 따라 다음 곡이 결정됐고, 관객이 요청한 노래를 즉석에서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알던 그의 명곡들은 거의 빠짐없이 연주됐으며, ‘영이야’와 ‘꽃, 새, 눈물’처럼 새롭게 발견한 곡까지 있었다. 어찌 보면 산만해질 수 있는 구성이었으나 근년 들어 마주했던 그 누구의 공연보다 팽팽한 긴장감이 내내 전율을 느끼게 했다. 평생토록 쉼 없이 노래했던 거장이 노년에 이르러 선보인 무대. 그러나 그는 아직도 패기만만했다. 이토록 진한 감성을 불러일으킨 데에는 나이를 무색하게 한 송창식의 ‘소리’가 결정적이었다. 이틀에 걸쳐 그를 직접 눈앞에서 마주한 300여 명의 관객들은 무대가 떠나가도록 뿜어내던 그의 내공에 예외 없이 탄성을 질러대지 않았을까. 심지어 송창식의 묵직한 존재감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어린 관객이라 해도 말이다.


송창식의 음악사적 가치를 높이 사는 사람일수록 그의 새 노래를 기대하고 있었을 법하다. 하지만 공연에서 그가 부른 곡들은 결국 20여 년 전에 발표한 것이 가장 최근의 작품이었다. 인터뷰 때도 이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송창식은 이른바 ‘신곡 발표’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개념을 아예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의 곡들이라 해도 모두 새 곡이나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옛날식으로는 안 부르니까. 지금 목소리를 가지고 젊었을 때처럼 노래하면 그게 웃긴 거죠. 물론 새 곡을 써서 발표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하지만 노래 부르는 것만큼 중요하진 않아요.” 그는 작곡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지론을 피력했다. “곡을 쓰는 건 지성으로 소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노래는 소리를 가지고 몸 대 몸으로 직접 소통하는 것이고. 젊었을 때는 지성으로 소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그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더라고요. 내겐 결국 노래가 더 소중해요, 어떤 면에서 좀 아깝긴 해도. 그런데 아직 세월이 많이 남아 있지 않나요?”


64세의 나이에 세월이 많이 남았다고 웃으며 얘기할 만큼 송창식은 매우 건강했다. 화사한 그의 얼굴은 마치 50대 초반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에 임하는 꾸준함이 한 몫 했겠다. “사람들은 내가 노래를 잘하기 위해 매일 연습하는 줄 아는데, 그건 의미가 달라요. 기본적인 연습을 안 하면 몸에 따라 변하는 노래와 음악을 따라가지 못하거든요. 평소 카페 말고는 노래할 데가 없는데, 물론 그것도 가수에게는 연습이죠. 하지만 내가 집에서 하는 건 ‘소리를 내는’ 연습이에요. 소리를 이렇게 내고 저렇게 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연습인 거죠.” 인터뷰에서 송창식이 들려준 얘기 중 음악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바로 여기였다. 구체적으로 연습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얘기가 이어졌다. “내가 왜 연습하는지 알 필요도 없어요. 그냥 무조건 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내가 부족했던 것이 뭔지 알게 되는 거예요. 뭐가 모자라는지 먼저 알면, 다들 신이게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연습을 하다 보면 오히려 모자라는 부분이 생기기(보이기) 때문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연습은 해야 합니다.”



송창식의 말을 들으며 나는 오래 전부터 멘토로 모셔온 앨토 색소포니스트 강태환을 떠올렸다(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시기에 서울예고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다). 수십 년의 내공이 쌓이고 세인들이 말하는 음악적 가치의 한계와 범주를 넘어선 명인들은 어쩜 모두 같은 얘길 하는 걸까. “나이가 40대 쯤 되면 감성은 좋아지니까 노래를 잘하는 거라 착각들을 하는데, 그러다가 50대가 되면 정말 감성만 가지고는 안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왜 안 되는 거냐 하면, 자기 노래에 걸맞은, 나이(몸)에 걸맞은 노래를 안 하기 때문이에요. 나도 지금 이 나이에 또 변성이 되고 있어서 다시 실험 중이죠. 근데 이럴 때 지속적으로 기본적인 연습을 하면 변성이 지나간 다음에 또 노래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옛날 얘기에서 무술 하는 노인을 보면 젊은이들보다 고수잖아요? 그게 다 공력이 쌓여서 그런 거예요. 소리가 쉬고 문드러져도 노래할 수 있는 공력만 있으면 문제없어요. 좌선하는 스님들 봐요. 평생 그렇게 하잖아요? 젊었을 때, 제일 잘 할 수 있을 때 다 해버리고 그만 두면 나이 들어서 되겠어요? 그런 것처럼 몸으로 하는 것은 늘 새로운 게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머리로 하는 것과 몸으로 하는 걸 구분하는데, 머리는 몸 아닌가요?


결국 송창식의 음악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깊어지는 노래, 그 자체에서 가치를 찾아야 옳다. 사람들은 그가 또 다른 ‘가나다라’와 또 다른 ‘왜 불러’, 그리고 또 다른 ‘담배 가게 아가씨’를 발표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양식의 발전으로 예술의 발전을 가늠하려는 태도가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테너 색소포니스트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가 수십 년 전에 행했던 어법만으로도 여전히 감동적인 프레이징을 연출해내는 것을 떠올려 보자. 물론 양식은 매우 중요한 척도다. 그러나 적어도 송창식의 노래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이보다 훨씬 더 크고 높은 가치를 솎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가 이틀 동안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꾸민 공연이 그랬다. 그가 부른 모든 노래들이 이렇듯 놀라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공력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송창식은 노래하는 행위가 스스로에게 “만사여의(萬事如意)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하면서 만사여의를 하고, 불자들은 불교 공부를 해서 만사여의를 하듯, 나는 노래도 만사여의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확신하지는 않아요, 아직 거기까지 가 보진 못했으니까. 그러나 세상 그 어떤 것도 만사여의일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다른 누군가가 말했으면 뻔한 얘기로 들렸겠지만, 송창식이 건네는 말이었기에 깊이 공감이 됐다. 끝으로, 조금 상투적이지만 음악 하는 후배들에게 건네는 당부의 말을 부탁했다. 그의 얘기는 충고라기보다 하나의 경고처럼 들려왔다.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하던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이걸 포기하고 다른 걸로 그만큼의 효과를 보려면 그것 이상으로 또 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마음에 와 닿지 않더라도 아주 ‘무자비하게’ 연습해야 해요. 몸으로 하는 건 연습과 결과가 정비례하거든요. 처음에 재주만 가지고 할 때는 재주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차이가 나요. 그런데 3, 4년 지나면 차이가 안 나기 시작하고 5, 6년 지나면 뒤집히고, 10년이 지나면 처음 갖고 있던 재주는 중요하지 않아요. 계속하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죠.



평소 EBS 스페이스 공감을 찾는 이들과 달리, 어느 때보다 높은 연령의 관객들이 이틀 동안 객석을 메웠다. 한정된 좌석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보다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이 기회에 송창식의 노래를 직접 들었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그만큼 그의 공연은, 여느 7080 세대의 옛 스타가 관객들과 오래된 히트곡을 함께 부르며 추억에 젖게 하는, 이른바 힐링(Healing) 무대와는 차원이 아예 달랐다. 아니, 이건 모든 공연 일정이 끝난 뒤 차분히 앉아서 갖게 된 생각이다. 막상 객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그 순간에는 감동에 휘말려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야 했으니까. 아, 기타리스트 함춘호에 대한 찬사를 빼놓을 뻔했다. 시종일관 송창식의 곁에 앉아 믿음직한 연주를 선보였지만, 특히 ‘담배 가게 아가씨’에서 그가 들려준 슬라이드 기타는 압권이었다.


이틀 동안의 공연과 인터뷰까지 모두 끝난 뒤, 송창식이 무대에서 사용한 앰프를 주차장까지 대신 들어다 주며 나는 다음과 같이 짓궂은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었다. “재주 없는 사람이 10년 이상 했는데도 달라진 게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르긴 해도, 그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진짜 열심히 했어? 무자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