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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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임진택씨, 항쟁 전과정 담은 창작 판소리 완창

‘우리 시대의 광대’ 임진택(60·사진)씨가 17일 광주에서 창작 판소리 <오월 광주>를 선보였다. 이날 오후 3시부터 전남대 용봉문화관에서 열린 공연에서 임씨는 고수 이규호씨의 북 장단에 맞춰 <오월 광주>를 1시간30분동안 완창했다.

이 작품엔 1980년 5월17~27일 10일간의 민중항쟁 전 과정이 담겨 있다. 18일 0시 계엄포고령 발표부터 시작돼 계엄군 배치~시민공동체, 옛 도청 앞 발포 순간~계엄군 퇴각 장면으로 이어진다. 해방광주, 시민군의 갈등, 정부 회유, 마지막 도청 진압 등 그날의 처절한 상황까지 소리로 풀었다.

“판소리는 기록이고 증언이며, 통곡이고 절규입니다.” 임씨는 지막 대목을 연습하면서 몇번이나 통곡했다고 했다. “80년 당시 옛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장렬히 산화한 벗 윤상원을 그리며 90년 이 작품을 썼다.…결연하게 죽음을 택한 사람들을 그리워서 울었지만, 그들이 남기고자 한 역사적 대의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기막힌 현실 때문에 더 눈물이 났다.”

18일 오후 2시 광주 서구 빛고을 국악전수관에서 또 한차례 <오월 광주>를 완창하는 그는 “판소리란 관중이 광대의 너름새와 발림을 보면서 소리꾼의 아니리와 소리를 듣는 예술양식”이라며 “ 판소리 오월 광주는 소리로 빚어내는 그림이며 영화”라고 말했다.

서울대 외교학과 재학 때부터 민중문화운동을 했던 임씨는 80~90년대 초까지 <똥바다>, <오적> 등 군사정 권에 저항하는 판소리를 창작했다. 그는 영화 <천년학>에서 소리꾼 ‘유봉’ 역을 맡기도 했다. 그는 창작판소리 열두바탕 추진위원회 예술총감독을 맡아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을 다룬 창작 판소리 12편을 제작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 첫편으로 지난 2월 백범 김구의 삶과 사상을 소리에 담은 3시간짜리 대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 독일 사진가의 광주항쟁에 대한 특별한 시선 ‘리멤버링 광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9년 뒤에 일어난 중국의 톈안먼 학살 사건과 달리 대부분의 서구 사회에서 잊혔다. 미국은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의 인권유린 상황에 대해선 툭하면 비판을 하고 나서지만, 정작 광주항쟁의 유혈 진압과 관련해 그 자신이 행한 역할에 대해선 한 번도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나는 한국인 아내와 함께 2009년 10월부터 12월 초까지, 그리고 2010년 들어서도 3주가량 광주를 방문해 ‘리멤버링 광주’(REMEMBERING GUANGJU)라는 제목의 사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우리는 사전 준비로 많은 책을 읽었지만, 광주의 역사적 현장을 직접 거닐며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것보다 좋은 책은 없었다. 역사가 살아나는 경험이었다.

= 강길조

1980년 5월18일 광주 전남대 앞 교차로에서 학생들이 공수부대에게 구타당하고 있었다. “나는 내 차로 학생들이 도망가는 것을 여러 차례 도왔습니다.” 강길조씨는 군인들이 그를 학생 주모자로 오인해 차의 창문을 깨고 난폭하게 밖으로 끌어냈다고 한다. “군인들은 내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구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군용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이송되고 있었습니다. 죽은 듯한 사람들이 내 몸 위로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몇몇 군인이 트럭 안으로 최루탄을 쏘았다. 그들은 붙잡힌 포로들이 극도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재미있어했다. 광주교도소에 도착한 뒤, 그는 많은 주검이 트럭에 실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모의 사형장이나 다름없었다. 광주교도소에서의 시간은 지옥이었다. 강길조씨의 증언 내용이다. “며칠 동안 물도 못 마신 우리는 물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한 공수부대원이 말했어요. ‘저놈들에게 오줌이나 줘.’ 그러자 한 군인이 정말로 오줌을 컵에 받아서 우리에게 흔들어 보였습니다. 붙잡혀온 사람 중 하나가 그 컵을 받아들고 마치 시원한 물을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어요. 단지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주검 사이에서 먹고 잤습니다. 한 사람씩 기어서 화장실을 갔고 배설물을 핥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윤상원

5월27일 아침 계엄군이 도청 진압을 위해 마지막 습격을 전개했을 때, 학생 지도부로서는 유일하게 도청을 사수하다 목숨을 잃은 윤상원 열사의 나이는 29살이었다. 그는 광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임곡 농가에서 태어났다. 젊은 윤상원 열사는 집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힘든 일에 비해 아주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전남대에 다니며 철학에서부터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섭렵했다. 윤석동씨는 힘주어 말한다. “내 아들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단지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공정한 대가와 평등한 대우에 관심을 가졌던 것뿐입니다.” 광주항쟁 초기, 윤 열사는 극단 ‘광대’의 단원들과 함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회보와 전단지로 만들어 배포했다. 그는 시민군이 무기창고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이후 점령한 도청에서의 마지막 날, 윤 열사는 시민군 대변인으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5월26일 도청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윤 열사는 미국이 개입한다면 더 이상의 유혈 사태는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더욱 또렷하게 말했다. 그와 그의 동지는 이미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이경남

이경남씨는 현재 경기 평택에 있는 한 감리교회의 목사다. 1979년 그는 군대에 막 입대한 신출내기 신병이었다. 그는 특수훈련을 받으며 광주항쟁 진압을 위한 공수부대원으로 차출됐다. “광주로 가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우리는 다음날 새벽 2시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는 군용트럭을 타고 다니며 시위대에 겁을 줘서 해산시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이 때리고, 찌르고, 죽이기 시작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선과 악의 경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폭력과 살인에 동참하지 않았다. 5월24일 이씨가 탄 장갑차가 광목간 도로를 지나는 중에 로켓포를 맞았고 10여 분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격전으로 40여 명의 부상자가 났다. 이씨는 날아오는 파편 수십 개를 맞았고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나중에 공수부대와 보병 간의 오인 사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오인 총격전은 사병들을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어 급기야는 부대 이동 중 여러 인근 마을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박병준, 나일성

박병준(왼쪽)씨와 나일성씨, 그들은 당시 시민군의 일원이었다. 박씨는 광주를 지키기 위해 시민 스스로가 무장했을 때를 떠올리며 말한다. “우리는 그때 정말로 한마음이었습니다. 시민 모두가 하나 되어 싸웠고, 아주머니들은 우리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며 힘을 북돋아주었습니다.” 군부대가 도청을 습격했을 때, 그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눈앞에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밖에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나일성씨, 당시 그의 나이 19살.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첫쨋날 그의 친척은 19살인 그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광주로 되돌아오기로 결정했고, 5월23일부터 시민군에 합류했다. 그의 임무는 식량과 차량 오일 보급선을 안전하게 경비하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체포돼 505보안대에서 취조와 고문을 당했다. 지금도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상태다.

문귀덕

그 녀는 꽃같이 어여쁜 딸을 잃은 정신적 충격으로 여전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1980년 5월21일, 당시 17살의 여고생이던 딸 박금희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그녀가 탄 버스가 매복해 있던 공수부대의 사격을 받아 젊은 목숨을 잃었다. “내 딸 금희는 그저 헌혈을 하고 싶어했어요.” 딸은 활동적이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문씨는 어린 딸의 꿈이 학교 졸업 뒤 좋은 직장에 들어가 큰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내 자식을 잃은 뒤, 그 어린 것이 죽고 없어지고 나서 내 마음도 다 죽었어.” 80살의 그녀는 심장병과 합병증,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박상철

박상철씨는 1980년 도청 근처에 살았다. 당시 14살이던 그는 5월21일 시위대를 보러 도청으로 향했다. 그는 길 한옆에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군중을 향해 계엄군이 발포했고,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힘들게 말을 잇는다. “사방이 피로 물들고 울음바다 같았습니다. 모두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달렸고요.” 그는 척추에 총을 맞았고, 이후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에게 필요한 진통제는 한 달에 500정. 이 진통제들은 그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게 한다. 병원 한 곳에서 입수할 수 있는 진통제는 그가 필요로 하는 양보다 적어서 여러 병원을 다니며 필요한 양을 모은다. 1년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두 달 정도 입원하며 욕창을 치료한다. 10년 전에는 미국에 건너가 그곳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지만, 불행히 통증은 끊이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을 찾아내 접촉하는 일은 극도로 힘들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일단 접촉이 이뤄지면 흔쾌히 우리를 만나줬다. 그들 대부분은 5·18 당시 왜곡 보도 때문에 한국 언론을 믿지 않았다. 독일인인 내가 환대를 받은 이유이리라. 그들은 큰 감명을 줬다.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말 그대로 넌더리 나는 일이겠건만, 많은 이들이 우리를 자애롭게 맞이했고 때론 몇 시간씩 이야기를 들려줬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소박하고 겸손하고 상냥하고 고결한 모습을 보여준 그들의 용기에 무한한 존경을 표한다. 대화를 나눈 뒤 내 육중한 4×5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나서는 다들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말해줬다.

‘리멤버링 광주’는 한국인과 외국인 모두를 겨냥한 프로젝트다. 그렇다고 예술가인 내가 한국인에게 그들의 역사에 대해 가르치려 들려는 건 분명 아니다. 다만 한 이방인의 다소 특별한 시각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80년 5월의 저 비극은 결코 잊혀서는 안 된다.

시민군 이충영씨의 그후

총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군홧발 소리가 커지자 하수구 밑으로 숨었다. 하지만 “하수구에 수류탄 던져봐” 하는 소리에 놀라 “사람 살려”라고 외치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계엄군들은 바지를 벗기고 대검을 들이댔다. 무릎을 꿇고 앉자 뭇매가 쏟아졌다. 80년 5월27일 새벽 4시께 광주시 동구 계림동 계림초등학교 앞 육교 부근에서 당시 경희대 한의대생이었던 이충영(49·울산 ㄱ한의원 원장)씨는 시민군의 ‘2분대 6번 소총수 폭도’로 분류됐다.

79년 10·26 이후 자퇴하고 광주에 내려왔던 그는 5월 초부터 전남대생들 틈에 끼여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5월26일 밤 시민군 상황실이 있던 옛 전남도청으로 들어간 이씨는 이튿날 새벽 “비상이다”라는 고함 소리를 들었다. 5월27일 새벽 3시께 옛 전남도청 입구에서 카빈 1정과 실탄 30발을 지급받은 그는 시민군 14명과 트럭을 타고 계림초등학교 쪽으로 이동했다. 총소리가 나고,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계엄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노리쇠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도 도청에 계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요.” 나중에 이씨는 군 영창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체포 소식을 전해듣고 놀랐다. 아버지 고 이종기(1917~1997) 변호사는 73년 대통령 명예훼손과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변호사 자격이 정지된 상태였다. 수습대책위원회 임시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이 변호사는 5월26일 계엄군의 강제 진압을 막기 위해 16명의 인사들이 벌인 ‘죽음의 행진’에 참여했다. 이 변호사는 5월26일 밤 집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부인에게 “이제 나가면 죽어서 돌아올지도 모른다”며 집을 나섰다.


“어르신들 중 도청에서 시민군과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분은 이종기 변호사가 유일할 것입니다.” 시민군 기동타격대 7조장 김태찬(48·당시 석공)씨는 5월26일 밤 11시30분께 도청 2층 농림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노신사’(이 변호사)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노신사는 ‘젊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나이 먹은 내가 집에 있겄는가? 자네들하고 같이 있을라고 왔네’라고 말한 뒤 총을 침대 밑에 밀어넣었다. 이튿날 새벽 계엄군에 맞서 총을 쏘며 저항하다가 쫓겨들어온 김씨 등 어린 시민군들에게 이 변호사는 “살아서 후세에 알려야 한다. 저항하지 말라”고 설득해 목숨을 부지하도록 했다. 사로잡힌 김씨의 등엔 ‘극렬분자’라고 적혔고, 이 변호사도 체포돼 군 영창으로 끌려갔다.

아들 이씨는 80년 10월 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뒤 형 집행 면제로 출소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이씨는 “봤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풀고 싶어서” 89년까지 광주의 진실을 밝히는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는 96년 경희대 한의대에 재입학해 2002년 한의원을 개업했다. 이씨는 요즘 침과 뜸, 부항 등 단순한 도구로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보는 재미로 산다. 그는 “그때는 부당한 국가 폭력에 대해 시민들이 총을 들고 ‘아니다’라고 말했다”며 “지금은 촛불과 투표용지로라도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시대 아닌가요”라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