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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공양 문수 스님 :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했던 이

1일 경북 군위군 군위읍 한 병원에 차려진 문수 스님의 영안실에서 만난 지인들의 한결같은 이야기였다. 이 날 이 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문수 스님의 중앙승가대 동문들과 이웃 사찰 스님 등 도반들과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추모객들은 차분한 분위기에서 스님과의 이별을 가슴 아파했다.

전날 문수 스님은 위천 강변에서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폐기하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자기 몸을 불살랐다. 3년 동안 문수 스님과 군위 지보사에서 함께 지내온 견월 총무 스님은 “스님이 세상을 뜨기 전날인 지난달 30일 밤 뭇생명을 해치는 4대강 사업 등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한 뒤 ‘나를 던져서 이를 막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스님과 오랜 교분을 맺어왔다는 산재 스님은 “지난 해 봄에도 스님이 ‘누군가 소신공양을 해서라도 4대강 사업을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스님은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기기 직전, 옆에 개어놓은 승복 윗도리 앞자락에 유서를 써놓았다. 승복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에도 같은 내용의 유서를 썼다. 또 자신이 3년 동안 공부했던 선방을 깨끗이 치운 뒤 탁자 위에도 같은 유서를 남겼다. 유서의 내용은 대체로 같았으나, 승복 안 유서에는 “미안하구나”라며 가족들에게, 선방의 유서에는 “후일을 기약합시다”라며 도반들에게 남긴 내용이 따로 더 담겨 있었다. 실천불교승가회 대표 퇴휴 스님은 “아마 자신의 죽음의 진의가 알려지지 않을까 우려해 여러 장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문수 스님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불가에 귀의했다. 1986년 시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여러 강원과 선방을 두루 거치고 공부에 전념해 온 이판승(선승)이다. 의협심이 강해 1994년 조계종 개혁 당시 범종단개혁추진위원회에서 핵심 구실을 했고, 중앙승가대 재학 시절에는 총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통도사와 해인사 부설 선원 등을 옮겨다니며 용맹정진해왔다. 지인들은 문수 스님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왼손가락 네마디를 불태우는 연비(불법을 수호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육신의 일부를 불태워 고통을 견디며 결의를 다지는 불교의식)를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2006 청도 대산사 주지를 맡기도 했지만, 사판승(행정승)은 못하겠다며 주지 소임을 버린 채 군위 지보사로 와 수행해왔다. 그 뒤 3년 동안은 하루 한 끼만 먹고 두문불출하는 힘든 수행을 계속하면서도 신문을 읽으면서 사회와 대중에 대한 관심은 놓지 않았다고 한다. 지보사 주지 원범 스님은 “앞으로 종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승려였지만 오직 수행에만 전념해 온 분”이라며 “항상 대중과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이”라고 말했다. 스님과 오랫동안 교분을 맺어온 관행 스님은 “타협을 모르고 자신의 원칙을 지켰던 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기사원문(박영률 기자)



수경스님 "승적반납…초심으로"

기사원문


불교 환경운동의 상징인 수경스님이 “조계종 승적을 반납한다”고 선언해 충격을 주고 있다.

스님은 화계사 주지와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소임을 내놓겠다는 자신의 심경을 밝힌 글 한편을 남긴 채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스님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불교계 환경운동은 물론 수경스님을 중심축으로 진행되어 온 시민사회단체의 환경운동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스님은 13일 측근을 통해 남긴 ‘다시 길을 떠나며’라는 글에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난다. 화계사 주지와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하게 살고 싶다”는 심경을 밝혔다. 돌연한 결정에 쏠리게 될 세간의 이목에 대해서는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다”는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수경스님의 이 같은 결정은 4대강사업 중단을 촉구하며 소신공양한 문수스님의 입적 이후 이어져온 고뇌의 결과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4대강사업 반대운동을 이끄는 과정에서 느꼈을 조계종단에 대한 아쉬움과, 사실상 불교 환경운동을 짊어지고 온 무게감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스님은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고 적었다. “환경운동을 통해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지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다”고도 털어놨다.

이어 스님은 “제 자신의 생사문제로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나.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다”는 처절한 자기반성의 목소리도 담았다.

스님은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다”는 말로 글을 맺었다. 승적과 주지소임을 내려놓겠다는 결정이 상징적 ‘선언’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실 수경스님은 지난해부터 ‘중노릇’에 대한 고민을 수차례 내비쳐왔다. 오체투지 2차 순례를 시작할 당시 스님은 “환계(還戒)의 심정으로 길을 떠난다”고 밝힌 바 있다. 환계는 수행자가 수지한 계율을 지키지 못할 불가피한 상황에 부닥치면 계를 반납하는 것을 말한다.

문수스님의 입적 다음 날인 1일 수경스님은 “이제 큰 결단을 하라는 가르침을 주셨다”라는 말로 착잡한 심경을 내비쳤으며, 5일 조계사에서 열린 국민추모제에서는 “중답게 살자. 더 이상 저처럼 거리로 나서는 수행자들이 없게 해 달라.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는 당장 바랑 지고 산골로 들어가 촌로로 살 것”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수경스님은 문수스님 입적 이후 줄곧 조계사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조문객들을 맞았으며, 최근 탈진으로 인해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현재 스님이 사용하던 휴대전화와 이메일 계정은 해지된 상태다.

다시 길을 떠나며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
먼저 화계사 주지 자리부터 내려놓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인생은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하게 살고 싶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분들로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