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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첫 완역 권중달 중앙대 명예교수

번역에 착수한 지 13년, 출간 작업에만도 4년여가 걸린 대장정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춘추(春秋)' '사기(史記)'와 함께 중국 3대 역사서로 꼽히는 사마광(司馬光ㆍ1019~1086)의 '자치통감(資治通鑑)' 294권이 32권(해설서 1권 포함)의 우리말 번역으로 완간됐다. 쪽수로 따지면 1만9,566쪽, 200자 원고지 8만여매에 달하는 거질(巨帙)이다. 번역자가 단 각주만 4만5,000여 개. 원저가 완성된 1084년 이래로 1,000년 가까운 역사 동안 중국 이외 국가에서 '자치통감'이 완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엄청난 번역과 출간을 가능케 한 것은 정부 기관이나 학술 관련 공공 단체가 아니었다. 퇴직금을 털어 직접 출판사를 차리고, 그것도 모자라 은행 빚까지 지면서도 무릎 꿇지 않았던 한 학자의 집념이었다. '필생의 역작'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권중달(69) 중앙대 사학과 명예교수. 8일 서울 봉천동 전철역 인근의 10평 남짓한 오피스텔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제 할 일을 한 것"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그 감회를 무엇에 견주랴마는, 백발의 학자는 "여여(如如)합니다"라며 담담했다.

북송시대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이 20년 간 매달렸던 '자치통감'은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건국 직전까지 1,36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장대한 통사다. 송 신종(神宗)에게 바쳐진 이 책은 '정치를 하는데 밑천이 되는 통시대적인 거울'이란 뜻의 책 이름대로 용병과 치세 등을 담은 '제왕학의 교과서'이자, 2만여개의 사건과 16개 왕조의 흥망성쇠를 통해 인간관계의 삼라만상을 아우르고 있는 세상살이의 보고다. 마오쩌둥은 대장정 중에도 '자치통감'을 휴대하며 생애 17차례나 통독했다 하며, 훗날 직접 '자치통감 평석'을 쓰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종대왕이 '자치통감 훈의'를 편찬하는 등 사대부의 필독서로 꼽혔다.

출간 과정에 대해 권 교수는 "선학들에 비하면 제가 겪은 어려움은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울 것"이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13년의 세월이 그런 겸양으로 갈무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석사와 박사학위 논문을 모두 '자치통감'을 주제로 썼던 그가 완역 작업에 뛰어든 것은 1997년. 10년간의 보직교수 생활 뒤 학문 인생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였다. 2002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번역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는 기회도 잡아 제자들과 함께 번역팀을 꾸려가며 2005년말 완역 초고를 완성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방대한 분량의 책을 선뜻 출간하겠다는 출판사가 없었던 것. 그에게 완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자비 출판밖에 없었다. 비용은 2006년 1월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이었다. 부인이 출판사를 차렸고 딸이 실무 진행을 맡았다. 2007년부터 6개월마다 4권씩 책을 펴냈는데, 판매 수익금으로 출간을 이어가겠다는 요량은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수금이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었다. 결국 은행 대출로 메울 수밖에 없었던 권 교수는 그러나 "손해 좀 보면 어때요. 후학들이 이 책을 보면서 큰 도움을 받으면 족하다"며 "약속된 기한에 책이 나오지 않으면 출판사로 전화해 독촉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았는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원서로 '자치통감'을 완독하려면 3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원서를 완독한 이도 드문 게 현실. 특히 원서가 디지털화되면서 키워드를 입력해 필요한 부분만 읽는 소위 '색인(索引) 연구'로 논문을 쓰는 게 요즘 학계 풍토라고도 한다. 권 교수는 "학계가 화석화된 역사 지식만 공급하는 실정인데,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 사회의 큰 물줄기를 읽는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선 '자치통감'을 꼭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치통감'은 기록을 위해 만들어진 백과사전식 역사서가 아니라 황제의 독서를 위해 만들어진 까닭에 읽기에도 편하고 좋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이번 완역본이 한국 문화산업의 콘텐츠 확대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책에 등장하는 2만여개의 사건과 무수한 인물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도 무궁무진한 소재가 될 이야기의 광맥입니다."


세계적 신학자 테드 제닝스 교수 초청 강연

요약 기사

요즘 일부 언론에 동성애 반대 광고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동성애를 표현한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방영한 ‘<에스비에스>(SBS) 시청거부운동 및 광고 안내기운동’에 나선 단체들 가운데 상당수는 개신교 보수단체들이다. 기독시민운동연구소, 기독시민운동중앙협의회, 기독교세진회,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에스더기도운동, 인터콥, 의회선교연합, 한국교회언론회, 한국기독교신앙실천협의회, 한국세계선교협의회…. 기독교 보수단체들의 동성애 혐오 뿌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

지난 7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1가 안병무홀에서는 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펼쳐졌다.

세계적 신학자인 미국 시카고신학대의 테드 제닝스 교수는 이날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해외석학초청 특별강연회에서 2시간에 걸쳐 ‘교회와 성’을 주제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그는 동성애 문제가 미국에서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한 1964년부터 성서의 관련 구절과 교계 문건을 연구해왔다.

그는 교회 내 동성애 혐오론자들은 성서를 조각조각 뜯어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증거하는 문구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성서의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고린도전서 6장9절 등 동성애 혐오의 논거로 삼고 있는 단어와 문건을 비교하면서 동성애 혐오론자들이 성경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 조목조목 따졌다. 예컨대 ‘소돔과 고모라’는 약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집단적 강간을 저지르려 한 소돔의 불의에 대한 경고였는데, 5세기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이후 성서 본문이 의도적으로 왜곡돼 ‘사회의 약한 구성원들에 대한 폭행을 허가한 핑계’로 뒤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제닝스 교수는 이런 왜곡의 이유를 ‘교회의 타락’ 때문으로 보았다. 성서를 상세히 살펴보면 ‘죄’는 ‘힘 있는 자들이 사용하는 오만과 폭력’임이 분명한데, 교회가 ‘힘 있는 사람들’과 한편이 되기로 마음먹으면서 ‘죄’가 성서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특권층의 죄를 거론하는 대신 보통사람들의 ‘성’을 ‘죄악’의 대타로 등장시켰고, 가장 대표적으로 약자인 동성애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결혼과 가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가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가정 내 폭력을 언급하기도 어렵게 됐다고 한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 성폭력을 경험한 이들이 20%나 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지만, 가정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실로 침묵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제닝스는 동성애 혐오론자들의 왜곡과 달리 실은 성서에선 다윗과 요나단, 롯과 나오미, 마태복음에서 소년을 사랑하는 백부장 등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동성애가 상식적인 ‘결혼과 가정’에 해가 된다며 ‘가족제도’를 신성시하는 이들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 성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찾아나선 마리아를 향해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형제자매냐?”라거나 ‘어머니와 아버지와 아내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고 하는 등 오히려 가족제도에 반하는 말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가족제도’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예수야말로 동성애자들보다 훨씬 위험한 인물이 아니냐?”고 묻는다.


제닝스 교수는 “자라면서 가정과 교회에서 ‘게이인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메시지를 듣는 수많은 게이 성향의 아이와 젊은이들이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택하고 있다”며 “이 고통은 자본주의나 군사독재 때문도 아니고 바로 교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제자 가운데 보수적인 장로교회에서 온 학생이 레즈비언이었는데, 학교 커리큘럼에 따라 유대교회당의 예배에 참여했다가 오히려 편견 없이 환영하는 것을 보고 유대교로 개종했다”며 “그 학생에겐 지금까지 자신이 듣던 것과는 반대로 기독교는 ‘율법의 종교’이고, 유대교는 ‘은혜의 종교’로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성애 혐오론은 교회가 고통 받는 약자들을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게 아니라 상처를 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기사 원문(조현 기자)


일문일답 요약

다음은 참석자들과 테드 제닝스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가?

“동굴의 반대편에 엄청나게 큰 괴물이 있다고 두려워하지만 막상 보면 난쟁이가 엄청나게 큰 그림자로 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76년에 내가 동성애 관련 책을 쓸 때 주변 친구들이 난리 날 거라고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제 생각에 대부분의 교인은 동성애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에 대해 긍정하거나 지지했을 때 나머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두려워해 침묵한다. 이 때문에 목소리가 큰 2~3명이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뿐이다. 성서로 대화하기 어렵다면 먼저 동성애를 다룬 영화 <쌍화점>이나 <왕의 남자>, 드라마 <개인의 취향> <인생은 아름다워> 등으로 쿨하게 얘기해보면 어떤가.

-동성애자가 에이즈를 유발한다고 한다.

“이미 25년 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에이즈는 게이들의 병이라고 알고 있다. 게이나 레즈비언의 절대다수가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고, 에이즈에 걸린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게이나 레즈비언이 아니다. 미신일 뿐이다.”

-동성애자들이 합법적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환경에 의해 동성애가 된다는 얘기도 있다.

“내 집엔 졸든이란 아이가 9~10년 동안 1주일에 하루씩 와서 함께 지냈다. 졸든은 레즈비언 부부의 입양 아들이다. 아이의 생모는 산부인과에서 수많은 입양 희망 부부 서류들을 검토한 결과 그 레즈비언 부부를 입양가정으로 선택했다. 우리 부부는 졸든의 대부·대모 구실을 함께 했다. 졸든은 학교에서 ‘나는 엄마가 둘’이며 엄마들은 백인인데 자신은 흑인이고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늘 자랑한다. 졸든은 게이로 자라지 않는다.”

-동성애를 수용하면 뒤늦게 이혼을 선택한 동성애자들도 나올 수 있을 것 아닌가?

“온전함이 아니라 위선에 기반한 것이었다면 이혼은 결혼 안에서 이미 벌어졌던 것이다. 끝나는 것은 결합이 끝나는 게 아니라 위선이 끝나는 것이다. 온전함을 갖는 것이 모든 참된 관계의 시작이다.”

-게이라고 커밍아웃한 친구가 있는데,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친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친구에게나 마찬가지로 친구를 사랑해주고, 친구 옆에 서 있어 주는 것이다. 그 친구가 커밍아웃한 이후엔 더 나의 친구이다. 솔직하게 자신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한테 커밍아웃한다면 그 친구가 큰 선물을 준 것이다. 신뢰를 주었기 때문이다.”


기사 전문

기사 원문(조현 기자)

연일 천안함 정국에서 대북강경 분위기를 조성하는 광고를 내던 우익단체들이 이번에는 보수언론에 동성애 반대 광고를 쏟아내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민심이 ‘전쟁’ 분위기에 등을 돌리자 표적을 잃은 총구를 동성애들에게 돌려 ‘며느리가 남자라니 동성애가 왠말이냐!’며 소리를 높이고 있다.

드라마 내용 가운데 동성애가 포함된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방영한 <에스비에스>에 대해 ‘시청거부운동 및 광고 안내기운동’에 나선 단체들 가운데 상당수는 개신교 단체들이다. 기독시민운동연구소, 기독시민운동중앙협의회,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에스더기도운동, 인터콥, 의회선교연합, 한국교회언론회, 한국기독교신앙신철협의회,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이 개신교인들은 왜 동성애자들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일까.  

지난 7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1가 안병무홀에 온 세계적인 신학자인 미국 시카고신학대학의 테드 제닝스 교수가 이 질문에 답했다.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가 주관한 해외석학 초청 특별강연회에서 홀을 가득 메운 100여 명을 대상으로 2시간 동안 ‘교회와 성’을 주제로 한 그의 강연은 흥미를 넘어 충격적이었다.

동성애 문제가 미국에서 이슈화하기 시작한 1964년부터 성서의 관련 구절은 물론 교계의 문건을 철저히 연구해온 그는 교회 내 동성애 혐오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성서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성서를 조각조각 뜯어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증거하는 문구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한다. 성서의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고린도전서 6장9절 등 그들이 동성애 혐오의 논거로 삼고 있는 단어와 당대의 문건 비교를 통해 그들이 자신들의 혐오증을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나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지를 철저히 파헤쳤다. 가령 ‘소돔과 고모라’는 약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집단 성폭행을 저지르려 한 소돔의 불의에 대한 경고였는데, 5세기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이후 성서 본문이 의도적으로 왜곡돼 ‘사회의 약한 구성원들에 대한 폭행을 허가한 핑계’로 뒤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제닝스 교수는 이런 왜곡의 이유를 ‘교회의 타락’ 때문으로 보았다. 성서를 상세히 살펴보면 ‘죄’는 ‘힘있는 자들이 사용하는 오만과 폭력’임이 분명한데, 교회가 ‘힘있는 사람들’과 한편이 되기로 마음먹으면서 ‘죄’가 성서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특권층의 죄를 거론하는 대신 보통사람들의 ‘성’을 ‘죄악’의 대타로 등장시켰고, 가장 대표적으로 약자인 동성애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결혼과 가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가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가정 내 폭력을 언급하기도 어렵게 됐다고 한다. 어린시절 가정에서 성폭력을 경험한 이들이 20%나 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지만, 가정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실로 침묵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제닝스는 동성애혐오자들의 왜곡과 달리 실은 성서에선 다윗과 요나단, 롯과 나오미, 마태복음에서 소년을 사랑하는 백부장 등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동성애가 상식적인 ‘결혼과 가정’에 해가 된다며 동성애를 혐오하며 ‘가족제도’를 신성시하는 이들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 성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찾아나선 마리아를 향해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형제 자매냐?”라거나 <누가복음>에선 ‘어머니와 아버지와 아내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등 오히려 가족제도에 반하는 말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가족제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야말로 동성애자들보다 훨씬 위험한 인물이 아니냐?”고 묻는다.


제닝스 교수는 “자라면서 가정과 교회에서 ‘게이인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메시지를 듣는 수많은 게이 성향의 아이와 젊은이들이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택하고 있다”면서 “이 고통은 자본주의나 군사독재 때문도 아니고 바로 교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제자 가운데 보수적인 장로교회에서 온 학생이 레즈비언이었는데, 학교 커리큘럼에 따라 유대교회당의 예배에 참여했다가 오히려 그쪽에선 아무런 편견 없이 환영하는 것을 보고 유대교로 개종했다”면서 “지금까지 듣던 것과는 반대로 놀랍게도 기독교는 ‘율법의 종교’이고, 유대교는 ‘은혜의 종교’로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테드 제닝스가 강연 전에 미리 배포한 강연문 전문

  미국 내의 주요 교파들은 교회 생활에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그리고 트랜스젠더들을 완전히 포함시키는 문제에 의해 더욱 더 분열되는 양상을 보여왔습니다. 신학자로서 저는 교회들이 예수의 모두를 아우르는 복음에 충실할 것을 요청하는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한 차별철폐 프로젝트(affirmative project)의 전개에 참여해 왔습니다.


저는 1991년부터 시카고신학대학(Chicago Theological Seminary, 이하 CTS)에서 게이에 대한 연구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제가 소속되어 있는 신학 대학원의 게이 및 레즈비언 연구 영역에서 가르쳐왔습니다. CTS에서 우리는 석사 및 박사 과정 학생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왔을 뿐 아니라, 또한 현재 LGBTQ(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 Questioning) 센터를 운영하여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 homophobia)에 맞서 싸우기 위한 우리 학교의 제도적 참여에 발맞추어 교회와 사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를 발전시켜왔습니다. 현재 이 센터는 또한 미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의 많은 다른 국가들의 호모포비아 문제를 다루기 위한 자원들을 계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진보적인 한국 기독교 그룹들에 여러 훌륭한 친구들과 졸업생들이 있음을 행운으로 여기며, 또한 2001년부터 LGBT 연대 인권 그룹(LGBT Solidarity Human Rights Group)과 함께 일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저의 희망은 이 친구들이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께서 율법의 보다 중요한 문제들이라고 칭하셨던 바, 즉 정의와 자비를 향한 교회와 사회의 변환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호모포비아는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저는 게이들과 레즈비언들에 대한 배제가 교회의 정체성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호모포비아와의 싸움에서 교회가 내세우는 증거의 진정성, 즉 그 선포의 진실성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더욱 명백해지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나사렛의 예수를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로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의 제단 위에 번영과 권력의 우상을 올려놓을 것인지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호모포비아가 교회 그 자체에 대해 해가 되고 있는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카고신학대학에서 제가 가르치고 있는 과목들 중 하나는 동성애와 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수 십 개의 교파들에 의해 개진된 연구 문서들과 성명서들(position papers)을 살펴보면 동성애에 대해 교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섹슈얼리티(sexuality)이라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교회들은 성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데 대해 겁에 질려있습니다. 교회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었거나 또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불가피한 딜레마에 대해 사람들에게 제공하기를 바라왔던 오직 하나뿐인 조언은 “그냥 ‘No’라고 말하라(just say no)”는 것입니다.


만일 이 조언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별 상관이 없다면, 교회는 그 이상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성적인 관계에서 실현되는 가치들에 대해서나, 성적인 친밀함(sexual intimacy)의 위험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관계 외에는 성관계를 하지 말라고 하는 기계적이고 관례적이고 전혀 상관성이 없는 표어 이외에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는 교회가 이런 영역에서 진실되거나 또는 도전이 되는 것을 아무것도 그들에게 말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비상태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교회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6~337년) 이후로 죄에 대해 성서적으로 말하기를 주저해 왔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죄는 억압과 불의(injustice), 탐욕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대해서 성서적으로 사회의 지도층을 공격하는데 겁을 먹거나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을 친밀함(intimacy)의 분야로 집어넣고 섹슈얼리티를 인간의 도덕적 실패를 대신할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수단으로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회는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껴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하도록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동시에 불의와 탐욕에 대해 고백하지 않은 죄에 대해 사면(absolution)을 베풀어 왔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에 대해서 성서적으로 진실하게 말한다면, 교회가 세상의 권력자들과 공모한 것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의 침실로 들어갔고 그래서 이 땅의 약한 자들과 실로 이 땅 자체를 파괴한 이 속임수를 폭로해야만 할 것입니다. 죄의 교리(doctrine)를 이렇게 왜곡한 것은 우리가 예언자들의 하나님(the God of prophets) 또는 예수의 아버지(the Abba of Jesus)가 아니라 세속적 성공이라는 맘몬(the mammon)을 숭배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성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에 대한 우리의 부정직함(dishonesty)이 우리가 죄에 대한 성서적 진실을 피하는 방편이 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가 오늘날 “결혼과 가정의 가치들(marriage and family values)”이라고 부르는 것과 복음을 치명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말하는 것이 교인들에게 정기적으로 결혼과 가정의 신성함을 상기시키게 된 점에 대해 저는 크게 놀랍니다.


이에 관련하여 놀라운 것은 예수가 모든 복음서에서 가족이라는 제도를 공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의 가족이 그에게 왔을 때 예수는 그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니라고 말하고, 그의 유일한 가족, 곧 어머니, 형제, 누이는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지배)의 가치에 헌신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제자도(discipleship)를 말할 때 심지어 어머니와 형제, 누이 그리고 배우자와 아이를 미워하지 않는 누구도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얻을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복음서들의 구절구절마다 예수는 복음이 소위 가족적 가치들이라는 것들과 화해할 수 없는 상충관계에 있음을 명확히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가치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의 안정성에 대한 보장이라는 필수불가결한 기능을 작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사회에 설득하려고 했던 방법입니다.

이에 대해 치러야 할 인간의 대가는 끔찍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스스로 침묵해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폭력과 범법의 현장으로서의 가족을 폭로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라는 제도를 지지하는 그런 결정이 예수의 가르침과 희생자들의 탄원을 필연적으로 무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정이라는 제도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가정 내 폭력, 학대 및 근친상간은 계속 줄어들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인정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설명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편으로 교회는 죄에 대한 얘기를 성에 대한 얘기로 축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약한 자들과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을 학대함으로써 섹스가 정말로 죄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교회가 침묵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교회에 의해 성사된 이 악마의 거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동성애입니다. 게이와 레즈비언 그리고 양성애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교회는 성이 죄악이라는 신화를 영속화하는 한편 교회가 가족적 가치들에 대해 질문하지 않아도 될 만한 구실을 강구합니다. 호모포비아는 가족이라는 제도로써 불의를 영속화하는 일에 우리가 공모한 것과 섹슈얼리티에 대해 우리가 혼동하는 것에 대한 구실이 되어왔습니다.


저는 이미 이 공모관계에 대한 인간적인 대가가 무엇인지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인간의 대가에는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청소년 자살(adolescent suicide)의 발생입니다.


십대 동성애자의 자살이 유난히 많은 것은 적어도 미국 내에서는 내면화된 호모포비아의 산물입니다.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 십대 청소년들이 스스로 세상 어디에도 자신이 있을 곳이 없는 괴물이라는 메시지를 갖게 되어 생긴 결과라는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항상 성적인 자극이 있는 세상,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부모가 “그냥 ‘No’라고 말.”라는 공허한 표어를 말하는 세상에서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란 이미 충분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의 나침반이 없는 광야입니다. 게이 또는 레즈비언 청소년에게 그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욕구(needs)와 욕망(desires)의 양상 때문에 신과 공동체로부터 영원히 단절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수백만의 (교회) 가족들 안에서 그들은 게이가 되는 것보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뚜렷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게이 및 레즈비언 십대 청소년들이 교회가 공모하는 두려운 메시지를 믿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누가 그들에게 섹슈얼리티가 서로를 찾고,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말했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동성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욕망이 축하 받을만한 귀한 선물이며 존경과 신뢰 그리고 성실의 관계를 향해 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까? 교회는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누가 교회의 호모포비아에 대한 대가를 계산할 수 있습니까? 그 대가는 인습적인 체면의 제사상 위에 놓인 우리의 아이들이라는 섬뜩한 희생제물입니다.

교회의 호모포비아의 또 다른 희생자는 성서 그 자체입니다. 이전에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교회와 사회 내에서 여자들의 완전한 성적 평등을 부인하는데 사용된 것과 동일한 해석적(exegetical) 기교가 오늘날 또한 호모포비아 문제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호모포비아적인 성서 읽기가 성서를 비열한 횡포의 규정집(rule book)으로 만들었고, 복음의 포도주를 율법적(legalistic)이고 보복적인(vindictive) 비난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해석적 도착(exegetical perversion)의 가장 뻔뻔스러운 사례들 중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입니다. 수 세기 동안 이 이야기는 거꾸로 뒤집어져 서구의 세속 및 종교 담론에서 동성 간의 친밀함(intimacy)에 관련된 행위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약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집단적인 강간을 저지르려 하는 형태를 취했던 소돔의 불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서 윤리의 기반에 대한 극단적인 위반입니다. 외국인이나 여행자 또는 이주 노동자(이들 모두가 성서적 범주에 대한 적당한 번역이 되는데)는 씨족이나 부족의 유대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이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에서 그들 자신도 외국인이었으므로 이주민을 특별한 배려로 대하라는 정기적인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9장에 제시된 방랑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에 대한 집단 성폭행 시도 또는 사사기 19장의 레위인의 첩을 성폭행했던 사건에 대해 혐오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5년)의 시대로부터 이 성서 본문은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사회의 약한 구성원들에 대한 폭행(violation)을 허가한 핑계(pretext)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중세로부터 나치(Nazi)의 공포스런 시기까지 (동성애) 인류에 대한 범죄들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게 되었습니다.


소돔의 이야기에 대한 문제에 덧붙여 동성애의 긍정(차별철폐, affirmation)에 반대하는 교회 사람들이 사용하는 몇 안 되는 다른 성서 본문들이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성서적인 긍정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저는 이 부정적인 성서의 본문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최소한 레위기를 전거로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그에 대해 언급하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읽어보지도 않고 인용을 하고 그래서 성서를 조각조각으로 뜯어내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증거하는 본문으로 만드는 것이 통상적인 문제입니다.

레위기는 이상하고 놀라운 책입니다. 이 책은 제사와 의례라는 주제에 할애된 것이며, 따라서 이름이 레위족의 성직에서 유래했던 것입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성전의 장식과 제사장들이 착용했던 예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레위기에는 경제적 윤리에 관한 또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희년에 모든 채무를 감면하고, 모든 농지를 원주인에게 반환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은행과 농산업(industrial agribuisiness)에 종사하는 친구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런 본문 중 어떤 것도 절대로 인용하지 않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들은 아예 이런 본문을 읽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등록 이민자들(undocumented immigrants)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투옥되어서는 안 되고 환영해야 한다거나, 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쓰여야 한다는 레위기의 주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이제 이런 맥락 내에서 우리는 섹슈얼리티를 다루고 있는 듯이 보이는 부분을 대하게 됩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본문인 듯합니다. 저는 이 본문들을 나의 책 『야곱의 상처』1)에서 다루었고, 그래서 여기서 그 본문들을 전부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문서인 구약성서 내에서 몇 개의 율법적 규정 (legal codes) 중 오직 하나가 남자 간의 섹스 문제에 대해 어떤 언급이라도 하는 것에 주목하려 합니다. 만일 이 규정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에서는 동성애가 금지되지 않았다고 가정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학자들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가장 마지막 또는 가장 근래의 율법 규정이며, 바빌론 유배(the Babylonian exile)가 상당히 지난 후에나 씌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스라엘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동성애적 관계에 대해 그 어떤 부정적인 언급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약성서에 실린 더 오래된 서사적 자료가 동성 에로티시즘 (same sex eroticism)을 상당히 개방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레위기 본문 중 둘째 구절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종류의 행위에 대해 사형선고를 명합니다.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은 모든 기록된 역사에서 절대로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그랬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당연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다만 약 1500년의 세월이 지나 기독교인들만이 이 규정을 다른 기독교인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다고 실제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레위기의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레위기는 젊은 유대인 남자들의 교육에 대해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유대인들이 바 미츠바(bar mitzvah, 유대인들의 성인식)를 앞두고 암기하는 본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개혁 유대교와 보수 유대교는 그 본문들이 무슨 뜻이든 간에 동시대의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 본문들은 역사적인 가치를 갖겠지만, 오늘날 법적으로 전혀 구속력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즉 이 본문들이 이 시대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보다는 복음을 옳게 여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여기에 쓰디 쓴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제 학생 중 한 명이 있는데, 보수적인 기독교 교파 출신인 이 여학생은 기독교인들이 그녀에게 적대적이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맹목적이고 경솔한 율법의 종교가 된 기독교를 떠나 은혜의 종교를 발견하고자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유대인 이웃에게서 나사렛 출신의 유대인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저는 구약성서의 본문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신약성서는 어떨까요? 가장 열렬한 동성애 혐오자들조차도 레즈비언과 게이에 대한 적개심을 정당화 하고자 복음서에서 무어든 찾아내기가 힘에 부쳤을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예수가 말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이 있습니다. 책을 열면 그 책의 페이지들은 비어 있습니다. 저는 잠시 후에 다른 방식의 읽기를 제시할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부정적인 구절들은 모두 바울에게 돌려집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의 한 두 단어, 디모데전서의 한 단어, 그리고 로마서의 두 구절이 전부입니다.

이들 단어와 구절은 어떨까요? 단어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는 고린도 전서 6장 9절의 말라코이(malakoi)라는 그리스어 단어입니다. 그것은 신약성서의 다른 곳(마태 11:8)에서 사치스러운 것을 의미하고, 요한 그리고 아마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입었던 단순한 의복에 대비시켜 부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이 입었던 의복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기독교의 초기 몇 세기 안 이 단어가 일반적으로 이해되었던 방식입니다.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들에 대한 비판은 아무튼 남자적인 오만함의 방식에 따르지 않는 약한 젊은 남자들을 공격하는 용도에 쓰이는 단어로 바뀌게 됩니다.

바울(고전 6:9)과 디모데전서(1:9~10)의 저자가 쓴 다른 단어는 아르세노코이타이(arsenokoitai)입니다. 이 단어는 침대 또는 잠자리에 드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와 남자를 의미하는 단어의 조합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고 그래서 그것이 목록에 나올 때 무슨 뜻인지를 확신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2세기 문서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목록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범죄에 대한 서사에서 사용됩니다. 그래서 그 범죄는 무엇일까요? 납치와 성폭행입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남성적 성행위의 모델은 정확히 성폭행이었습니다. 즉 지배로서의 성행위였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의 경우 그 단어가 나타나는 목록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부모의 살인, 단순한 강도질이 아니라 인간을 훔쳐 노예로 파는 강도질 등과 같은 폭력적인 범죄의 목록이므로 이것은 상당히 명확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권력자들의 사치와 폭력이 그들을 하나님의 지배(하나님 나라)에서 배제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명확하고 설득력이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바울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의 분명한 연속성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당연히 만일 우리가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면 우리는 성서의 어조를 낮추고 그들의 죄로부터 주의를 돌려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의 약한 구성원들을 고통 당하게 만드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입니다.

다음으로 로마제국의 문명을 기소하는 로마서 1장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제국은 바울이 한 그대로 진리를 불의하게 감옥에 가두는 사회요, 하나님의 정의에 대비되는 불의한 사회인 것입니다.

바울의 기소장을 상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불의, 탐심, 악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기, 살인, 다툼, 사기, 간교함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은 남의 뒷이야기나 하는 자들, 중상하는 자들, 신을 미워하는 자들이고, 무례하고, 거만하고, 악한 행위를 꾸미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어리석고, 믿음이 없고, 무자비하고, 무정합니다. 그들은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신의 율법을 알면서도 그런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을 행하는 다른 사람들을 환호합니다.”(로마서 1장 29절, 저자 사역) 이제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들이 사형선고 하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만일 타키투스(Tacitus, 56~117년)나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155?~229?) 또는 수에토니우스(Suetonius, 69~130?) 같은 로마의 역사가들이 저술한 로마 상류 사회에 대한 묘사들을 읽어보았다면 티베리우스(Tiberius, 재위 14~37년), 칼리굴라(Caligula, 재위 37~41년), 네로(Nero, 재위 54~68년) 등과 같은 황제의 독재에 대해 거의 한 단어로 묘사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서술적 묘사들에서 여자들 역시 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제국의 여자들은 본성에 반하여 남편과 아버지, 심지어 아들의 암살자로 활동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여자들은 네로나 티베리우스 또는 라우디우스(Claudius, 재위 41~54년)는 같은 황제들을 지배하는 자들이요, 소위 자연스런 남자들의 자리를 찬탈하고, 심지어 권력 게임(power game)에 모두가 보는 데서 성을 사용한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자들이 본성에 반해 행동한다고 했을 때 제국 사람은 모두 누구의 얘기를 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섹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 사람들과 그들의 성적인 관행에 대해 말할 때, “모든 여자의 남편이자 모든 남자의 부인”이라 묘사된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나, 또는 극단적인 성적 취향으로 성폭행에 대한 환상을 실행한 칼리굴라, 또는 자신이 살해한 이전 부인과 가장 비슷해 보이는 여자나 살찐 노예와 공적으로 결혼한 네로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 얘기를 하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황제들의 극단적인 성적 잔인성을 비난했던 이교도나 바울은 동의와 상호성에 의한 일반인들의 성적 관계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성폭행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이 자들은 또한 자신들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자신들의 몸으로 지고 가는 자들입니다. 젊은 병사의 아내를 성폭행한 후에 그 병사에게 성기를 칼에 찔려 죽은 칼리굴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아가 로마 질서를 전복시키려는 범죄자라고 처형한 로마의 지도층을 바울이 고발한 것은, 어떤 이상한 마술에 의해 기이하고도 우연히, 같은 성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구하는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을 낙인찍는 것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선입견이, 예수가 마태복음에서 율법의 보다 중요한 문제들이라고 칭했던 것들, 즉 정의와 자비의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게 만드는 하나의 방편으로 기능했는지를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정죄(condemnation)는 부유한 자들과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며, 성서가 죄라고 판정하는 것이 탐욕(avarice)과 만(arrogance)과 폭력이라 것을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본질을 완수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수단이며, 사랑이 없는 정의로는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논쟁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숙고되어왔던 이 적은 구절들이 정말로 동성애에 대해 성서가 말하는 것의 전부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성서를 호모포비아라는 눈가리개 없이 읽는다면 우리는 그저 한 두 구절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비롯하여 놀랍도록 다양한 인간의 사랑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appreciation)를 드러내는 글자 그대로 수십 개의 내러티브들(서사들)과 가르침을 보게 됩니다.

제가 쓴 가장 최근의 책들 중 한 권은 구약성서를 다룹니다.2) 이 문헌은 어떤 독자라도 알고 있듯이 인간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진솔한 특징을 지닙니다. 그것이 삼손과 데릴라, 다윗과 밧세바 등과 같은 할리우드 대작 영화들의 주제가 된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성생활에 개방적인 문헌이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리 놀라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자면 다윗과 요나단, 또는 룻과 나오미처럼 사람들이 명백하게 발견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심지어 이 이야기들조차도 동성 간의 성애에 대한 서사로 읽혀지는 일이 드뭅니다. 우리는 다윗과 사울 그리고 요나단 사이에 형성된 흥미로운 사랑의 삼각관계를 거의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야기 안에서 다윗의 아름다움은 반복적으로 회자되고, 사울과 요나단은 다윗의 사랑을 기 위해 경쟁하며, 사울이 이 사랑스런 젊은이의 애인으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요나단이 차지했다고 생각할 때 보이는 사울의 질투, 그리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의 목숨을 취하기를 거부하는 다윗의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 대해서 말입니다.


또는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처럼 서구 문학에서 처음 등장하는 레즈비언 로맨스가 있는데, 실제로 룻과 나오미 간에 오가는 사랑의 말은 이성 간의 결혼을 축하하는 예전에서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나더러 당신 곁을 떠나라고 하지 마세요. 당신의 겨레가 내 겨레입니다. …”(룻기 1:16. 저자 사역) 그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가부장적 세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늙은 보아스를 유혹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마을 여자들은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아들이 태어났을 때 룻이 보아스에게 아들을 안겼다는 말을 하지 않고, 룻이 나오미에게 아들을 안겼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오늘날 호모포비아와 이성애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기로 공모하는 여자들을 상기시킵니다.


엄청난 본문으로 가득한 성서에는 여기에서 손댈 수도 없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심지어 예언자들의 상상에서는 하나님조차 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나님은 남자 이스라엘을 여자처럼 입혀서 와 결혼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리아나 바빌로니아 제국이라는 더 아름다운 남자들에게 끌렸기 때문에 불성실합니다. 촌티 나는 사막의 하나님 대신에 위풍당당한 기병 장교들이나 부유한 인과 같은 그런 남자들에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노로 이스라엘을 공격한 후에 후회하고 이 복장 도착적인(transvestite) 사랑하는 이를 이제 보다 상냥하고 부드러워진 애인에게 돌아오라고 초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 애인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이 문자적으로 질투를 하거나 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남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동성애자나 또는 트랜스젠더를 말하는데 거의 거리낌이 없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상당히 쉽고 자연스럽게 사용했다는 것에 주목할 뿐입니다. 그들은 남자인 애인들이 돌을 맞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충실하며,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그래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배경이 있다면 복음서가 예수 또한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재현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성매매 여성과 간통녀의 자손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적인 비정규성(irregularity)에 대해 크게 문제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에게 성매매 여성들이 그들에 앞서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두려운 초자연적 힘과 동맹을 맺고 있는 강력한 유대인 마술사로 상상하고 예수를 찾아왔던 백부장의 부탁을 예수가 받아들인 사건을 마태가 그리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이 백부장은 한 소년에 대한 무모한 사랑으로 인해 예수에게 왔는데, 그는 이 소년을 남자 애인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표준어―파이스(pais)로 칭합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믿음이 사용되는 방식과 궤를 같이 하여 우리는 자신의 평판이나 또는 안전에 대해 염려하는 것보다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온전함(wholeness)을 바라는 대담함이나 용기에 주목하게 됩니다.


동성애가 결혼과 가족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오직 가족이라는 제도에 대해서는 그 어떤 동성애 관계보다 예수가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아내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동성애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성서 문헌에서 여자들만이 했던 봉사를 하기 위해서 예수가 옷을 벗었다는 것을 상기시킬 뿐입니다. 친구들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또는 마태복음에서 제자도(discipleship)에 대한 모델로서 멸시받는 환관들을 드는 것을 상기시킬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사랑한 남자』라는 제 책이 예수가 ‘게이’라는 주장을 한다고 말할 입니다. 저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 또는 게이라는 용어는 현대의 삶과 경험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용어들 자체가 자꾸 변하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우리의 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1세기의 고대 이스라엘 또는 그리스-로마 세계의 문화에 대해 설명할 때 설명력이 훨씬 더 떨어집니다.


그러나 복음서 중 가장 괴이한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여러 측면에서 예수를 다른 남자, 즉 예수가 사랑한 남자(the man Jesus loved)의 애인으로 묘사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관계를 육체적 친밀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관계로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무릎 또는 가슴에 누워있는 이 자세는 남자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그리스-로마 세계의 모든 묘사에서 언제나 그들이 육체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즉,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애인들’인 것입니다.


예수와 그가 사랑한 남자가 이런 근거에서 실제로 또는 요한복음 저자의 상상 속에서 성관계를 가졌는가에 대해 제가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순히 문서 자체가 확연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가 친밀하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사랑한 모든 사람들 중에 육체적인 친밀함이라는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가 사랑한 사람으로 알려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할 따름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가 그래서 예수가 죄인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상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의 죄 없음은 율법과 규칙을 몇 개든 세고 예수가 잘 지켰는지 본다고 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은 예수가 죄인이었을 뿐 아니라 죽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들은 그가 사탄과 연합했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했습니다. 예수의 죄 없음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으로 하나님의 대의에 굳건히 헌신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종교인들은 예수를 죄인들의 수라고 판결했고, 제국의 법과 질서의 수호자들은 그가 체제 전복적인 범죄자였다고 판결했지만 말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를 부활시킴으로써 그가 무죄임을 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예수가 죄인이었다고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호모포비아가 죄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저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기는커녕 예수의 신성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처럼 주장합니다. 곧 진정한 하나님의 진정한 하나님이신 이 신성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된 진정한 인간이 되십니다. 사랑과 성실함으로 성적인 친밀함을 갖는 능력과 그것이 주는 위로를 그리워하는 것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저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정통인 교회의 고대 신조와 논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의는 게이에 대한 다소간의 불만스런 수용(acceptance) 또는 관용(toleration)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끼쳤던 피해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끼치고 있는 피해에 대한 교회의 회개라는 문제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관용의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학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여전히 기꺼이 교회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는 수많은 게이와 레즈비언,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교회가 그들을 외면하기 위해 과거로부터 해왔고 또 계속 행하고 있는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를 따르는 일에 스스로를 헌신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입니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박해와 억압의 희생자를 자처한 구세주의 복음 메시지와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를 그들은 여전히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용기가 믿음의 씨앗이 되어, 적대감의 행위자인 교회를 감사와 축하의 공동체로 변화시키기를 기원합니다.

 옮긴이 박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