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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칼럼]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한다. 싫든 좋든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떠나야 한다.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인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모든 크고작은 이별의 시간과 장소,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허망하지만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고, 사랑이 떠난 자리를 붙들고 있다고 해서 사랑은 돌아오는 것은 아니므로 고통을 견뎌내야만 한다.

연초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예인 부부의 이별과정은 너무나 서글펐다. 단 한마디 모두 내가 잘못했다는 말만 했으면 됐을 일이다. 그러나 내탓이 아니라고 상대를 비방하고 흠집내기를 하는 동안 사랑했던 시간들과 그 사랑의 진정성까지도 의심하게 만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별의 고통을 견뎌낼 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일주일 뒤인가 30년 결혼생활을 한 미국의 갑부 부부가 이혼하면서 소송도 없이 재산을 의논껏 나누고, 지난 결혼생활은 행복했고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가겠다고 기자회견을 한 것을 보았다. 이별의 고통을 과거에 진정으로 사랑했던 시간에 대한 존중으로 바꾸어낸 것이다.

남녀 사이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직업과 학문, 예술에 걸었던 열정도 사랑이다. 나라와 겨레, 혹은 어떤 이상을 위해 뭉쳤던 뜨거운 순간들도 사랑이다. 사회적 이슈에 몸과 마음이 아플 정도로 헌신했던 터질 것 같은 순간들도 사랑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런 순간들을 뒤로 하고 헤어져야 할 때가 온다. 사랑의 순간이 뜨거웠을수록 이별의 고통은 크다. 왜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의 순간들까지도 훼손하는 것일까?

최근 열린우리당의 탈당사태를 보면서도 이별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꾀하는 바가 다르면 정치집단의 이합집산이야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처음 당을 만들었을 때의 역사적 소명감이나 명분, 기대, 서로 손을 마주잡고 부풀어 오르던 일체감의 순간들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 순간들을 기억한다면 이런 방식의 헤어짐이 너무 염치없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싶었다.

10년 전에 고향인 경남 진해에 내려가신 사회학자 이효재 선생께 물은 적이 있다. 이곳저곳에서 선생님이 필요하다는데 왜 갑자기 낙향하셨냐고. “어느 순간 내가 한 말을 또 하고 한 말을 또 하더라. 아차 싶어서 중요한 자리를 맡거나 선두에 나서기에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선생의 답변이었다. 생물학적인 나이와 거기에 따른 노쇠현상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놀라운 자기억제로 고통의 순간들을 이기고 떠날 시기를 선택한 것이다. 지난 주말 찾아뵈었더니 선생은 진해에 ‘기적의 도서관’을 유치하고 그곳에서 스탬프를 찍으며 건강하게 지내고 계셨다.

우리 사회엔 자신의 시대는 지나갔는데도 망녕된 글이나 발언을 하는 인사들이 더러 있다. 한때 빛나던 사람들이다. 그 빛나던 순간까지도 추레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서 세월에 대한 겸손함이나 염치와 예의를 차리지 않는 아집을 본다. 봄이 지나 여름이 왔는데도 지난 봄을 붙잡고 봄은 어떠해야 한다고 말한다. 봄은 다시 오지만 다시 오는 봄은 과거의 그 봄은 아니고 새로운 봄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자신이 어떤 시대의 대변자였다고 해서 자기 삶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시대를 대변하겠다는 것은 만용이다. 슬프지만 인정하고 떠날 때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 서먹서먹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주춤주춤 다가간다. 그 아름다웠던 순간들, 인생에서 많지 않았던 그 뜨거운 사랑의 순간들을 잿빛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우리는 이별을 맞아야 하고 고통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모든 사랑했던 순간들에 대한 예의고 또한 이별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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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비극’ 김광호씨 가족

사연을 풀어내던 김광호(58)씨의 눈이 어느새 붉게 충혈돼 있었다. 그는 “숨진 조부와 부친의 인생을 돌아보면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라고 말했다.

김씨 가족이 겪은 비극은 국권 침탈과 해방, 전쟁과 군사독재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의 압축판이라고 부를 만하다. 김씨의 증조부 김종일(1861~?)은 경남 김해 지역의 큰 부자였다. 19세기 말 지역에 혹심한 가뭄이 들자 사재를 털어 백성을 구휼한 공으로 고종에게서 표창도 받았다.

그의 아들 정태(1895~50·90년 애족장 서훈)는 3·1운동에 참여했다 옥고를 치렀다. 국가보훈처의 공적조서를 보면 “(김해군) 하계면 진영리 장날을 맞아 (김정태가) 2천여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격문을 나눠주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며 “그 죄로 대구 복심법원에서 1년6개월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보훈처의 기록은 김정태의 죽음 앞에서 침묵하고 만다. 독립운동가가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6월 검찰·경찰이 좌익 인사들의 사상을 관리하려고 만든 국민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예비검속을 당한 뒤 처형됐기 때문이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3월 김해군(지금의 김해시) 진영리에서는 친일·우익(대창국민학교)과 민족주의·좌익(진영중학교) 세력이 3·1절 기념행사를 따로 열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지역의 명망가로 이름 높았던 김씨의 조부는 당연히 진영중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 일로 지방 우익들의 미움을 사게 된다.

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 시작됐다. 그의 조부는 보도연맹원이 아니었지만, 그를 점찍은 우익 청년들에게 김해군 생림면 나밭고개로 끌려가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씨는 “조부는 3·1운동에 참여한 민족주의자로 보도연맹과는 관계가 없었다”며 “전쟁의 혼란 속에서 개인적인 원한으로 벌어진 학살도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때는 서슬이 시퍼렇던 이승만 독재 치하였다. 김씨의 부친(영욱·23~2005)이 도움을 청할 곳은 없었다. 10년 쯤 죽은 듯이 지내자 세상이 변했다. 4·19혁명(60년)이 터진 것이다. 때맞춰 경북 거창 등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김해에서도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돼 희생된 이들의 유해를 모아 장례를 지내자는 의견이 나왔다. 김씨는 “재력가였던 아버지가 ‘금창(김해·창원)지구 피학살 양민 장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유골 발굴 비용을 댔다”고 말했다. 그렇게 찾아낸 유해가 272구나 됐다. 그러나 신원이 확인된 것은 금니를 하고 있었던 김씨의 조부 한 사람 뿐이었다. 김씨의 부친은 ‘전국 피학살 양민 유족회’ 총무간사 등을 맞으며 진상규명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러나 ‘60년의 봄’은 1년만에 종막을 맞았다.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터졌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잡혀가던 그 날의 기억이 선해요. 그때 검거령이 내려진 아버지와 부산 영도에 숨어 지냈거든요.” 찾아온 형사들이 단칸 셋집 마루에 뛰어 올라와 김씨의 부친을 무작정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개○○, 내가 니 잡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나? 죽어봐라’ 그때 김씨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김씨 부친의 죄목은 5·16 이후 급조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특수반국가행위) 위반이었다. 당시 혁명재판(군사재판)부가 남긴 판결문을 보면 “전쟁이라는 국가 비상상황에서… 만부득불 좌익분자 등이 (국민보도연맹 사건 등으로)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족회 활동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다면 일반국민이 반공의 국시에 의혹을 느낄 뿐 아니라 민심이 정부시책에서 이탈하게 된다”고 적혀 있다. 부친이 검사에게 ‘내 아버지 뼈 가져다 묻는 게 무슨 죄냐’고 묻자, 검사는 ‘빨갱이들을 묻어준 게 죄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씨의 부친은 62년 1월 혁명재판부에서 7년 징역을 선고받고, 2년7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 김씨의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석방된 부친은 고문 탓인지 험한 일을 하지 못했다. 김씨를 비롯한 8남매 대부분은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손위 누이는 이혼을 당했다. ‘빨갱이 집안’이라는 게 이유였다. 고통은, 그 뒤로도 10년 이상 이어졌다. 크고 작은 간첩 사건이 터지면 부친이 어디론가 끌려가 초죽음이 된 채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노년에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전국 유족협의회 상임대표를 맡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2004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 24주년 기념식에 참여했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의식을 잃었다. 김씨는 “부친은 식물인간이 되고 나서도 ‘아버지, 과거사법이 통과됐대요’라고 말하면 내 손을 꽉 쥐며 신음 소리를 내곤 했다”고 말했다. 김씨의 부친은 진실화해위법이 국회를 통과한 2005년 12월1일 숨을 거뒀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다. 김씨는 또다른 싸움을 준비중이다. 그는 “국가가 조부와 부친에게 가한 일들에 대해 진실된 사과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가 생겨 많은 이들의 억울함이 풀렸지만, 여전히 국가가 국민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지는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전쟁 전국유족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물었다. “진정한 화해 없이 폭죽만 터뜨리는 6·25 60주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부산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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