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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아버지’ 도요한 신부 선종

한국인 노동자들의 벗이자 아버지였던 ‘노동자의 대부’ 도요안 신부가 (미국명 존 트리솔리니)가 22일 오후 3시께 선종했다. 향년 73세.

도 신부가 소속돼 있던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는 “도 신부님이 오늘오후 3-4시께 서울 성북구 보문동 노동사목회관 사제관에서 선종했다”며 “책상에 앉아 책을 집필하시던 중 조용히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도 신부는 1993년 신장암으로 한쪽 신장을 떼어낸 뒤 나머지 신장에도 종양이 생겨 그마저도 절반을 잘라내 매주 두번씩 투석을 해야하고, 2004년에는 척추암에 걸려 척추뼈 이식 수술까지 받았으나 일상적인 업무를 계속해왔다.

미국 뉴저지주 출신으로 남자수도회인 살레시오회 소속인 도요안 신부는 1959년 뉴저지 돈보스코 신학대 학생 때 선교사로 파견돼 광주 살레시오고에서 영어교사로 사목 실습을 하면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신부가 된 그는 1968년 다시 귀국해 공장지대였던 영등포의 도림동 성당에서 노동자들과 인연을 맺고, 1971년 설립된 노동사목위원회 초대 위원장이 되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암울한 시절 박대받던 노동자들과 함께 한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추억하곤 했던 고인은 800여쌍의 노동자들에게 주례를 서줄 정도로 노동자들과 가까이 지냈다.

고 전태일 열사 분신사건 이듬해인 1971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노동사목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한국 노동자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애써 왔던 그는 1986년 종로성당에 노동사목회관을 마련한데 이어 1992년 명동에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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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병마가 엄습해 선종을 앞둔 최근까지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소년처럼 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노동사목회관 인근 성북천변을 산책해왔다.



고인의 장례는 살레시오회에서 주관한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살레시오회 관구관 7층에 마련됐으며 23일 오후3시 입관예절이 진행된다. 살레시오회는 “고인이 생전에 시신기증을 해 장지는 따로마련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장례미사는 25일 오전 9시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다. (02)828-3500.

2007년 4월23일자 도요안 신부 인터뷰 기사 

“신부님. 저 ○○○입니다. 저 모르시겠어요. 신부님이 계속 병원에 찾아와 주셨잖아요. 저도 이제 60이 다 됐어요. 나이가 드니 신부님이 생각나 수소문했어요.”

며칠 전 도요안(70)신부는 한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남자는 70년대 명동에서 유명한 맥주집이던 유토피아에서 일하던 웨이터였다고 했다. 유토피아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찾아와 손을 잡아주며 위로해주던 도요안 신부를 잊지 못하고 전화한 것이다.

도요안 신부는 그렇게 대연각 호텔에서 불이 나 어린 웨이터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의 친구와 동료들이 잔업과 저임금에 지쳐 쓰러질 때도, 영등포와 구로의 작은 작업장에서 일하다 근로자들이 손가락이 잘렸을 때도 아픈 그들 앞에 나타나 따뜻한 미소로 그들의 불안을 녹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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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 돈 보스코 신학대 학생이던 그가 한국에서 봉사의 삶을 다짐하고 1959년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만도 공항은 콘센트 청사였고, 영등포까지 길도 비포장이었다. 광주 사레지오고에서 3년 간 영어를 가르친 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신부가 된 그는 1968년 다시 귀국해 공장지대였던 영등포의 도림동 성당에서 노동자들과 인연을 맺고, 1971년 설립된 노동사목위원회 초대 위원장이 되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겐 암울한 시절 아파하는 그들과 함께하면서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행복하지 않았다면 떠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를 찾아오는 옛 노동자들은 “아무데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우리들이 사목위원회에서 신부와 동료들과 앉아 많은 얘기를 나누며 인간적으로도 성숙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곤 한다.

어느 한국인보다 한국의 노동문제에 정통한 그는 “비정규직이라고 하더라도 정말 저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많이 버는 프리랜서들이 있다”며 “이주노동자 문제도 고용자와 노동자로만 나눌 수 없는 것이, 지금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분들이 대부분 소규모 사업장을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의 처지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그는 또 보수언론에 의해 ‘귀족노조’로 비판받곤 하는 대기업 노동자들과 관련해선 “노동자들이 임금을 많이 받는 것을 배 아파 해서는 안된다”면서도 “자꾸 임금이 높아지다 보면 공장이 외국으로 이주해 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800여쌍의 주례를 볼 정도로 노동계의 ‘인기 스타’였던 그는 “재미있게 주례사를 해서 그렇게 인기가 많으냐”는 물음에 “예식장에서 엄숙하지 않게 유머를 하면 어르신들이 외국인이라서 법도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냐”며 웃었다. 말끝마다 “우리나라”라며 “우리나라에서 살다 우리나라에서 죽을 것”이라는 도요안 신부가 목발을 짚고 산책길에 나서며 배웅해주다 “또 놀러 오라”며 손을 흔든다. 100년 된 장맛 같은 손짓이다.


기사원문 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