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06-1-LeeYongHee

DoMath
이 영희 글 모음

구글 문서 는 불안하여 이리로 복사하고 옮겨 저장한다.

저서

  1. 전환시대의 논리. 창비사,1974
  2. 우상과 이성,한길사,1977
  3. 분단을 넘어서, 1984
  4.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 1984
  5. 베트남 전쟁, 두레,1985
  6. 역설의 변증, 1987
  7. 역정, 창비사, 1988
  8. 自由人, 자유인, 범우사,1990
  9. 인간만사 새옹지마,1991
  10.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1994
  11. 스핑크스의 코, 까치,1998
  12. 동굴속의 독백, 나남,1999
  13. 반세기의 신화, 삼인,1999
  14.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 한길사, 2006-8
  15. 21세기 아침의 사색
  16. 리영희저작집(전12권), 한길사, 2006-08-30


번역·편역서

  1. 8억인과의 대화,창비사,1977
  2. 중국백서, 1982
  3. 10억인의 나라, 1983
  4. 일본어로 번역된 평론집 『分斷民族の苦惱』(1985), 『朝鮮半島の新ミレニアム』(2000)

관련도서

  1.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 김만수, 2003
  2.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강준만, 2004
  3. 리영희 프리즘, 2009-3
  4. 리영희 평전, 김삼웅

인터뷰 모음

  • 서중석, ‘사회평론’ 1991년 6월
리영희 - 냉전 이데올로기의 우상에 맞선 이성의 필봉’, 역사비평’ 1995년 여름호 인터뷰 ‘
  • "미국에 예속상태에서 통일은 불가능"
김치관, 통일뉴스, 2001-10-30, 리영희- 이계환 대담
  • <인터뷰>“우리민족 미래 낙관 하게 됐다”
배문성, 문화일보, 2003-01-13
  • “대통령-외교보좌관 미국 정확히 알라"
프레시안, 2003-07-12
  • “미군철수 15년 계획 세우자”
한겨레21, 2003-07-17, 리영희-박노자 대담
  • [원로인터뷰] 리영희 “南이 北보다 더 변해야”
문학수, 경향신문, 2004-01-26 , 리영희-한홍구 대담
  • “긴 안목에서 역사를 보라”
권태선, 한겨레, 2004-3-3, 한겨레 지령 5천호
  • [신춘특별대담] 리영희 교수
평화통신, 2005-1-1,
  • <연합인터뷰>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이봉석, 연합뉴스, 2005-03-16
  • 자서전 ‘대화’ 낸 리영희 전 한양대교수 산행 인터뷰
김문, 서울신문, 2005-03-28
  • "일본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
프레시안, 2005-03-29, 리영희-김민웅 대담
  • 리영희교수 “이젠 펜을 놓습니다”
김진우, 경향신문, 2006-9-4
  • 시대의 스승' 리영희, 그에게 한국사회를 묻다
문경미, 오마이뉴스, 2006-9-25
  • 집필활동 마감한 리영희 선생을 만나다
한승동, 한겨레, 2006-9-28
  • [신춘특별대담]리영희 교수에게 듣는다
민족시보, 2007-01-01
  • “생명·자연·평화의 사회주의적 가치 받들 때”
김봉선·오동근, 경향신문, 2008-03-27, 경향신문 독립언론 선언 10년 기념 인터뷰
“8년만에 만년필을 잡아보네”
  • 리영희 선생에게 듣는 한겨레와 오늘
권혁철, 한겨레, 2008-5-14, 한겨레 창간 20주년 기념 인터뷰, 리영희-김효순 대담
  • “지능적인 폭압체제… 사회모순 키워 투쟁사회로 돌아갈 것”
안수찬, 한겨레21, 2009.12.04
  •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길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 2009-12-5
  • 또 다른 전환시대
.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 2010-1-2
  • [대담] 투병중인 리영희 선생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
오마이뉴스, 2010-9-1


관련방송

  • 리영희 교수, EBS「지성과의 만남」출연 (연합, 2002-08-14)
  • 광복절특집-리영희에게 듣는다 (MBC미디어비평, 2002. 8. 16)
  • 특별대담 : 리영희에게 듣는다 (MBC 미디어비평 제 94 회, 2003년 4월 25일)
  • KBS<인물현대사> 2004년 6월 4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편


글모음

  • 다나까 망언에 생각한다 (1974년, ‘우상과 이성’ 수록)
  • 노신의 글과 마음 (1982년)
  • 노신과 나 (역사춘추, 1988년 7월)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1988년 9월 15일)
  •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 (사회와 사상 . 1권 1호, 1988)
  •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가 아니다 (사회와사상, 1989년)
  •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 (신동아,1991-3)
  • 내가 아직 종교를 갖지 않는 이유(월간 말, 1994년 4,5월)
  • 북방한계선은 합법적인 군사분계선인가 (통일시론, 1999년7월 여름호)
  • 마음 아파서 하고 싶지 않는 이야기(법보신문, 1998-05-13)
  • 하늘 나는 새에게서 배우는 마음 (법보신문, 1997-06-11)
  • 불교계가 한 번 생각해 볼 일(법보신문, 1997-04-23)
  • 성직자의 삶과 죽음 육체와 소유 (법보신문, 1997-03-26)
  • 남북관계와 주한미군 문제 (당대비평 통권 제12호, 2000.9)

관련논쟁과 기사

  • 진보지식인 대부 리영희 ’공과'를 되묻는다 - 한신대 윤평중 교수의 비판
배영대, 중앙일보, 2006-11-08
  • 리영희 비판에 되묻는다
강준만, 한겨레, 2006-11-15
  • 윤평중 교수에게 말한다
홍윤기, 한겨레, 2006-11-15

‘전환시대의 논리’와 리영희

윤무한, 신동아, 2008-10-24

지동설을 증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의 출판을 위탁 맡은 신학자 오리안더는 교회권력과 신학 도그마와 그에 사로잡혀 있는 민중의 박해 때문에 그 책이 ‘사실’이 아니라 ‘가설’이라는 궤변을 서문에 삽입해 출판했다.”

어느 시대에든 궤변은 필요한지 모르겠다. 리영희는 1974년 6월 ‘창비신서’ 제4권 ‘전환시대의 논리’를 내놓으면서 머리말에 자신의 글이 ‘가설’이라고 ‘궤변(?)’하는 구절을 넣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발표된 때로부터 500년이 더 지난 1974년에도 ‘가설’들을 묶어 책으로 내놓다니, 2000년대를 8년이나 경과한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이게 도대체 어느 시절의 케케묵은 이야기인가 싶다. 그러나 그때는 ‘정치적 신학’의 도그마가 지배하던 때였고, 가설로라도 지적 굶주림을 채워야 할 만큼 우리 사회는 허기져 있었다.

훗날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이하 ‘전논’으로 약칭)를 내놓은 이유와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재량을 지니는 자율적인 인간의 창조를 위하여,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해 저항적 입장에서, 군인통치의 야만성 반(反)문화성 반지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시대정신과 반제 반식민지 제3세계 등에 대한 폭 넓고 공정한 이해를 위하여, 남북 민족 간의 증오심을 조장하는 사회현실에 반발하면서 두 체제 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다는 입장에서 글을 썼다.” (권영빈, ‘책과 시대/저자를 찾아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교수’, 중앙일보 1993년 2월20일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전논’은 출간되자마자 우리 독서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특히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은 지식인 사회에 미친 영향은 폭탄 같았다. 김동춘이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까지 한 ‘전논’은 과연 어떤 책이었나. 1970년대 중반의 암울한 시기에 대학 초년생이던 조희연은 “유신교육 아래서 이미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냉전적 의식 및 사고의 깊은 중독상태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이 책에서 맛보았다”고 하면서, “유신 말기 젊은 지식인들의 비판의식의 세례 현장에 언제나 이 책이 있었다”고 했다.

밤새 ‘전논’을 읽고 또 읽은 김세균은 자신이 만나는 동료 후배들에게 ‘전논’을 권했다. ‘전논’이 그에게 전해준 메시지는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버려라. 네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많은 것은 허위의식 혹은 미신들이다. 그런 것들을 네 머릿속에 주입한 이 우상(偶像)들의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새로운 눈으로써 이 세계를 다시 보라”는 것이었다. 김세균은 그런 메시지를 받아들이려면 “내가 진실로 믿고 있던 것, 내가 나의 ‘건강한 상식’에 비추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을 먼저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진실에 관한 최초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진실을 받아들이려면 괴로움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괴로움 속에서 종전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깨부술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74년 그해는 긴급조치 1호에서 9호까지 줄지어 발동된 해였다. 문인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등으로 사회는 꽁꽁 얼어붙었다. 서슬이 퍼렇고 흉흉하던 그해 초여름에 리영희의 첫 저서가 간행되어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소설가 이호철은, 그러나 그렇게 될 만한 충분한 까닭이 있었다고 했다.

“바로 그 전환시대의 전환시대적 요소에 주로 서슬 퍼런 칼을 들이댄 것이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었고, 끝내 1975년 초봄, 황사 불던 날 무더기 처형까지 감행되는 속에(민청학련 및 인혁당사건 관련자 8명 전원에 대해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내린 지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 이들은 2007년 재심 끝에 전원 무죄판결을 받고, 이어서 사상 최고액의 국가배상판결을 받음), 정작 바로 전환시대의 논리를, 그 불가피성 불가역성을 정정당당하게 논파한 저서는 시중을 휩쓸고 있었으니, 이것이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호철, ‘산 울리는 소리 : 이호철 문학비망록’, 정우사, 1994)

흥미롭게도 당시 학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노재봉은 리영희의 ‘전논’ 뒷표지에 이런 추천사를 썼다.

“가설의 증언이라는 형식에 담은 이 책의 내용은 기실 증언에 의한 시대의 심판이다. 여기에 우리는 혼탁한 정치의 기류를 고발하는 양식과 지성의 용기를 본다.”

위에서 언급된 인물들은 모두 지적 작업에 종사하는 전문적 교양인이었거니와, 이들보다 훨씬 많은 청년 대학생 샐러리맨 노동자 등에게 리영희가 준 충격은 더욱 컸고 심층적이었다. 한국사회의 기득권적 또는 상투적 의식세계의 덫에 갇혀 있던 신념체계가 일제히 붕괴되면서 그들은 모두 아찔한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의식화의 원흉’으로 몰리기도

광복 후 30여 년, 오로지 반공 냉전 극우논리가 휩쓸고 있던 우리의 정신풍토에서 리영희는 광기 어린 국가권력과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날카로운 비판의 면도날을 들이댄 것이다. 1974년 유신의 한복판에서 리영희는 ‘전논’을 통해 인간해방, 사상과 언론의 자유, 권위에 대한 저항, 이성의 승리 등 일관된 신념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체념에 빠졌을 때 중국의 부상, 베트남전쟁, 한미·한일관계 등 당시 가장 민감한 주제들에서 비켜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리영희는 베트남전쟁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냉전시대의 신화·우상의 실체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쟁과 국가의 기만성을 비판했다. 한국 국민이 닉슨의 중국 방문에 대해 하늘이 무너질 듯 놀라는 것을 보고 그는 탄식했다. 그는 ‘전논’을 통해 남한적 가치관 및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진실을 위장했던 굳고 딱딱한 ‘가면’을 벗기려고 했다. 가치의식의 총체적 해체를 의도한 것이다. 극우 반공정권이 그 책과 저자를 ‘의식화의 원흉’으로 단정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전논’은 중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지식을 담고 있다. 저자 자신은 중국 문제에 관한 한 ‘해설자’ 이상을 자처한 일이 없다고 했지만, 이 책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중국 종합보고서였다. 중국은 우리의 영원한 적(敵)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던 1970년대에 이 책은 정치 외교 역사 등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중국의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중국은 4000년에 이르는 전통적 정신문화의 토양에 서구적 전통과 사상을 접목시키는 거대한 실험을 전개하고 있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요소들에 과감하게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리영희는 이 책을 통해 중국 화교의 역할, 무역·군사대국화,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서의 위상 등을 내다보았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도 이 중국 종합보고서는 사실관계의 현실성에서 뿐만 아니라 전망에서도 전반적으로 일치하는 분석이었다.

‘전논’에서 그는 1970년대 동북아 국제정치의 격변기에 일본 재등장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했으며, 그 정치대국화 군사대국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투시하고 있다. 미국의 대리자로서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떠맡은 일본이 과거 역사를 되풀이할 수 있음을 리영희는 일찌감치 경계했다. 일본 자위대의 역할이 방위력에서 공격력으로 변질되고 일본산업의 군사화와 평화헌법의 개헌 가능성 속에 아시아를 위협할 일본의 미래를 리영희는 그 시절 이미 구체적으로 예측한 것이다.

옛 국가안전기획부 남산 청사의 지하 취조실.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리영희는 베트남 인민의 80년에 걸친 반외세 투쟁,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항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리영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2년까지 베트남전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 성격 등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한마디로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제3세계 국가와 그 국민들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거대한 국가권력으로 개입했음을 해부했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논리는 30여 년이 지난 오늘 크게 보아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 개입의 논리로 연장되고 있다.

우상에 대한 이성의 도전

1975년 4월30일 베트남이 패망하자 한국사회는 완전히 병영(兵營)체계로 돌변했다.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있던 리영희는 1976년 제1차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교수직에서 강제 해임되어 실업자가 되었다. 리영희는 해직 6개월 만인 1977년 9월 창작과비평사에서 ‘8억인과의 대화 : 현지에서 본 중국대륙’을 펴냈다. 리영희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우리 정부도 중공을 ‘비적성국가’로 규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식 명칭도 사용하며, 종래의 제한조치의 일부를 해제하는 등 이해성 있는 정책으로 전환한 지도 몇 해가 되었다. …체제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 하더라도,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리영희, ‘8억인과의 대화 : 현지에서 본 중국대륙’, 창작과 비평사, 1977)

중국 하면 우리와 역사적으로 가장 관계가 오래고 깊은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프랑스 영국 같은, 중국 땅에서 가장 먼 곳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정작 바로 이웃인 우리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알면 재미없다”는 음험한 편견이 그때까지 우리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 중국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경제 사회체제, 문화정책이나 홍위병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숱하게 들어왔지만, 대개는 관념적인 것이어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었다.

정작 8억(1977년 당시)이라는 인구가 와글거리는 실체를 우리는 접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 미망과 금기를 깨고 리영희는 사실 자체에 정직하고 간명하게 다가갔다. 세계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중국에 대해 사실 자체를 사실대로 알리려 한 것이다. ‘8억인과의 대화’가 일으킨 지적 파동은 ‘전논’이 나갔을 때 못지않게 컸다.

이어서 3개월 후인 1977년 11월1일 리영희는 한길사에서 ‘우상과 이성’을 냈다. 훗날 한국일보의 평가에 따르면 이 책은 “한번도 의심 받지 않았던 당시 한국사회의 도그마(우상)들에 대한 ‘이성’이란 이론의 도전장”이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지식인들의 자기부정적 직무유기의 시대”에 출판된 이 책이 지식인 사회, 특히 대학가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대학가 서점에는 ‘우상과 이성’을 찾는 이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던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리영희는 ‘우상과 이성’의 서문에 책 제목과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곳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옥중에서 쓴 장문의 상고이유서

리영희는 중국 지식인 노신(魯迅)을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생각했다. 그 노신의 글 가운데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임을 토로한 대목이 있다. 리영희는 이렇게 전했다.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 속에 갇혀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궁리하면서 고민하는 상황의 이야기가 있다. 방 속의 사람은 감각과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까닭에 그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지 않을뿐더러, 자연스럽게까지 살아(죽어)가고 있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진실을 보는 시력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되살려줄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은 차라리 죄악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우상과 이성’이 나온 직후 리영희는 남영동의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 다시 조사를 받은 뒤 12월27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이 다 “해외 공산집단을 고무 찬양”했으므로 반공법 위반이라는 게 이유였고, 그전에 낸 ‘전논’까지 문제가 되었다.

리영희가 기소된 바로 그날 리영희의 어머니는 86세로 사망했다. 그는 감방 이불에다 어머니 빈소를 마련해 사과, 건빵, 관식과 김지하가 준 사탕을 차려놓고 임종도 못한 불효자가 되어 소리 죽여 울었다. 리영희는 2심에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한심한 것은 2심 판결문이 검사의 기소장을 글자 하나 안 바꾼 채 검사 이름만 판사 이름으로 바꾸어 나왔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 매서운 추위 속에서 2심의 기소장과 똑같은 판결문의 내용을 기억력만으로 떠올리며 리영희는 공중에서 구름 잡듯이 대법원에 제출할 상고이유서를 썼다. 리영희는 추위에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참고할 단 하나의 자료도 없이 1주일 동안 갖은 고생 끝에 200자 원고지로 121매 분량의 상고이유서를 썼다. 글자수로 2만4200자였다. 옥중에서 쓴 글로는 가장 긴 글이었고 논리 정연한 내용이었다. 이 글은 1987년 두레출판사에서 나온 ‘역설의 변증 : 통일과 전후세대와 나’에 실렸다.

1979년 대법원 최종 확정판결도 2심과 다름없었다. 확정판결을 받은 후 리영희는 다른 죄수들과 굴비처럼 엮인 채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빨간 딱지를 왼쪽 가슴에 붙이고 용산역에서 일반객차의 한구석에 탔다. 비타민 결핍증으로 머리에서는 진물이 줄줄 흘렀다. 시베리아의 죄수들이 혹형을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박정희의 사망소식을 광주교도소에서 전해 들었을 때, 리영희는 감격에 벅차 눈물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뒷날 술회했다. 그때 리영희는 자신이 역사를 선취하고 살았다는, 새로운 역사가 바야흐로 실현된다는 감회에 젖었다.

르몽드, ‘사상의 은사’로 평가

리영희는 1980년 1월 광주교도소에서 나왔지만, 5월17일 이번에는 신군부에 끌려갔다. 바로 이틀 전 비상계엄령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 134인 선언’에 참여한 것뿐이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남산 중앙정보부 암굴 지하3층 감방에 끌려간 것이다. 거기서 두 달가량 감금되었다가 7월에 석방되어서야 리영희는 자신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기가 막혔다. 그가 지하실에 감금되어 햇빛도 보지 못하던 그 기간에 이른바 제5공화국의 틀과 구도가 완성되고 있었다.

석방된 리영희는 대학에서 이미 해직된 상태였다. 그러나 리영희의 분신이던 책들은 판금조치로도 결코 가둬지지 않았다. ‘전논’은 1979년부터 불온서적으로 지목돼 시판이 금지되었으나 학생운동권에서는 ‘필독서’가 되어 비밀리에 읽히고 있었다. 초판 발행 당시 정가 1300원짜리가 헌책방에서 1만원 이상에 불티나게 팔렸을 정도다. 웃지 못할 일은 당시 검찰 관계자들까지 출판사에 ‘전논’을 단체로 주문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우상과 이성’도 금서목록에 올랐지만 1986년 7월초까지 7만여 부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리영희가 1977년 펴낸 저서 ‘우상과 이성’.

1980년대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한국 학생운동의 맥락을 다룬 연구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대학생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친 30권의 책 중 1위가 ‘전논’, 2위가 ‘8억인과의 대화’, 5위가 ‘우상과 이성’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의 유력지 ‘르몽드’는 리영희를 한국 젊은이들의 ‘사상의 은사’로 평가했다. 그러나 군사정권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리영희를 ‘의식화의 원흉’이라 생각했고 그를 ‘사상의 시장’에서 제거하기 위해 비열하고 폭력적인 온갖 올가미를 만들어냈다.

지식인의 삶 앞에 던져진 과제들을 회피하거나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얼버무리는 태도를 경멸했던 리영희에게는 그 후 많은 고통이 뒤따랐다. 1980년부터 4년 여의 세월을 리영희는 호구지책을 위해 주로 번역일을 하며 보냈다. 이 기간 중 그는 주로 ‘편역’ 작업을 했고, 그 결과 1982년에 ‘중국백서’, 1983년에 ‘10억인의 나라 : 모택동 이후의 중국대륙’(두레) 등을 잇따라 펴냈다. 그중 ‘10억인의 나라’는 ‘8억인과의 대화’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

해직 기간이던 1984년 1월 리영희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각급 학교 북한 찬양모임’ 사건으로 반공법에 위반되어 또다시 구속 기소되었다. 리영희에게는 이 사건이 정말 황당무계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결국 리영희는 기소유예로 두 달 정도 만에 석방되어 해직 4년2개월 만인 1984년 7월 한양대학교에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이른바 유화정책 덕분이었다.

노신의 삶과 글이 길잡이 노릇

1980년대에 리영희는 그밖에도 1984년 ‘분단을 넘어서’(한길사), 1985년 ‘베트남전쟁 : 30년 베트남전쟁의 전개와 종결’(두레)을 출간했으며, 1987년에는 ‘역설의 변증 : 통일과 전후세계와 나’(두레)를 내놓았다. ‘역설의 변증’에 실린 ‘우상과 이성 일대기’라는 글에서 그는 “노신의 글에는 현학적인 요소가 없고 자신이 사는 시대에 한정된 역할로 만족하는 소박한 태도가 보여 좋다”고 했다. 리영희는 이에 앞서 ‘신동아’ 1977년 7월호 ‘명사를 감동시킨 119권의 책’에서 ‘노신선집’을 들며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넘어서 삶의 궤적에 이르기까지 노신은 자신의 스승이면서 자신의 삶 속에 녹아 있다고도 했다.

“노신의 작품에서 나는 구체적 상황 속 개인의 삶을 배운다. 변혁의 사상을 배운다. 그리고 앞으로는 질타하면서 뒤로는 울고 있는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느낀다. 노신은 55년간의 길지 않은 인생을 유감없이 살다 갔다. 혹독한 권력의 탄압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불굴의 정신으로 ‘5억의 우매한 머리’를 깨우쳤다. 그는 해군사관, 광산·철도 기사, 의학도, 생물학 교사, 문학교수, 문학가, 사상가의 길을 걸었다. 꽤나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이다. 나와 비슷한 인생 궤적 때문에 더욱 타인 같지 않다.”

리영희는 1987년 8월부터 1988년 2월말까지 한 학기 예정으로 미국 버클리대학의 초청을 받아 아시아학과에서 ‘한민족 현대정치운동사’를 강의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1988년 3월 리영희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역정 : 나의 청년시대’란 자전적 에세이를 출간했다. ‘책을 내는 변명의 말’에서 리영희는 ‘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내놓으려니 독자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에서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1960년대부터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이른바 ‘의식화의 원흉’으로 몰아치는 권력에 의해서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각기 한 차례씩, 그에 대한 정권의 보복으로 세 차례 반공법에 의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혁명의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권력에 의한 탄압을 받는 법정에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한 나의 저서들이 문제의 발단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권력의 대리인인 검찰의 논고는 사건마다 나의 저서들을 열거하며 매도했다.… 그로 인해서 나는 수많은 재판의 증인으로 지정되고 또 증인대에 서야 했다.”

반골에의 ‘역정’

“권력의 핍박을 받는 그들 정의감에 넘치는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자신의 저서를 처음으로 접한 뒤부터 겪은 내면적 변화에 따르는 희열과 갈등, 그로 인한 실천적 삶의 과정에서 당한 시련과 고통에 관해서 리영희는 무한한 기쁨과 동시에 무거운 도의적 부담을 느꼈다. 그들의 삶의 질과 내용과 방향에 일어난 변화에 일단의 책임을 느낀 리영희는 자신의 삶과 살아온 과정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배후 조종자’의 한 사람으로 땅속에 갇혔다가 풀려 나온 1982년 겨울부터였고, 이 책에 등장하는 리영희의 인생역정은 소년시절부터 1963년까지였다.

리영희의 삶을 반골로 ‘전향’시킨 계기로는 주로 군대생활의 체험이 언급되고 있다. 6·25전쟁의 무의미에 대한 회의,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 후방에서 겪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실체, 무엇보다 군복무 중에 일어난 동생의 사망사건이 리영희를 그렇게 몰고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다른 계기로는 합동통신사와 조선일보사 기자 시절에 겪은 체험을 들 수 있다.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를 신속하게 접하면서 1960년대에 알게 된 베트남전쟁과 중국의 문화혁명 등이 리영희의 세계관을 바꾼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대생활을 하면서 군대의 부정과 부패, 민간인 학살사건, 가족의 사망(소식)에 접한 사람은 리영희만이 아니다. 같은 논리는 리영희의 기자 생활에도 적용된다. 그 무렵 같은 정보에 접하고 일하면서도 전화에 자동차까지 구입하고 ‘섰다판’을 벌이며 호화로운 생활을 한 기자가 훨씬 더 많았다.

2006년 5월 제1회 ‘기자의 혼’상 수상자로 선정된 리영희 교수가 한국기자협회 정일용(오른쪽) 회장으로부터 상패를 받고 있다.

이 많은 평범한 학생이던 리영희는 뒤늦게 민족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다.

분단과 전쟁을 체험하면서 리영희는 민족분단에 대해 느리지만 분명하게 눈떠 갔다. 군대생활은 리영희에게 ‘의식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지리산’이 리영희에게도 서서히 다가왔다. 1950년 지리산의 ‘공비토벌’에 리영희는 두려움 없이 끼어들었다. 지리산에서 ‘태백산맥’의 염상진과 리영희가 서로 적으로 대면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고 보면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기를 통해 리영희의 의식에 이데올로기적 당파성이나 충성심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순진하고 직선적인 정의감에 불타는 애국주의자였던 것 같다”고 그 무렵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후방에 배치된 뒤 리영희는 본격적으로 ‘현장체험 학습’을 했다. 그는 우선 한국군대의 무원칙하고 비효율적이며 즉흥적인 인사배치에 놀랐다. 또한 미국군대가 사용하다가 철수하면서 남긴 재산을 접수하며 ‘군사원조’의 실체를 똑똑히 목격했다. 예컨대 “이 전기소켓은 신품이 1달러짜리인데 인계인수 서류에서는 중고품 가격으로 30센트, 콘크리트 보도는 거의 무상”이라는 식이 미군의 군사원조 계산법이었다. 미군 장교의 복장이 바뀌어 그때까지 입고 있던 폐품을 지급하면 한국 군대는 덥석 받아 들고 ‘한국군의 장교 정복’으로 만들어버렸다.

리영희가 7년간 지낸 군대는 인간에 대해 ‘근원적으로’ 아무런 인식이 없던 사회였으며 본질적으로 반민중적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한 청년의 내면에 끊임없는 회의와 질문, 허위와 가식으로 가려진 진실을 밝혀내려는 종교적인 신념이 자리 잡아갔다. 리영희에게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 어떻게 봤나

소심하고 착하며 유순하고 순응적인 리영희가 이러한 모순과 부패 속에서 ‘돌아버리지’ 않고 살았으니 그 가슴속에 쌓인 것이 무엇이고 얼마만큼이었을까. 마침내 포화상태를 분출할 기회가 왔다. 군대에서 익힌 영어로 통신사에 입사한 것이다. 거기서 리영희는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했다. 체험이 토대가 되고 지식과 관찰을 통한 인식이 덧붙여져 그의 내면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반공주의의 비이성적인 색맹상태도 극복되었다.

뒤늦게야 역량이 발휘되는 대기만성형의 리영희는 30대 말까지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위해 공부하며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썼다. 리영희의 해직과 투옥의 역사는 리영희식 실천의 증언이다. 1964년 조선일보 기자로 있을 때 ‘아시아·아프리카(AA) 외상회의에서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안 검토 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리영희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2심에서 선고유예판결을 받고서 풀려났다.

1960년대에 리영희는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대한 반대 입장 때문에 신문사 안팎으로부터 거센 시달림을 받다가, 1968년 결국 조선일보에서 쫓겨났다. 1970년에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있었으나 이듬해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합동통신에서 다시 해직되었다. 1972년에 한양대학에 들어간 리영희는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에 가담, 1976년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당했다. 리영희는 언론사에서 두 번, 대학에서 두 번 해직당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아래서 두 번, 전두환 정권 때 두 번, 노태우 정권 때 한 번 등 모두 다섯 번에 걸쳐 구속되어 세 번의 유죄판결을 받고 총 1012일을 감옥에서 보냈다.

리영희는 1989년 12월 화갑을 맞았다. 그때 그는 “아무리 의로운 일도 어떤 선에서 멈출 줄 모르면 오만이 된다”(리영희, ‘자유인, 자유인 : 리영희 교수의 세계인식’, 범우사, 1990)고 하면서 “지나온 생의 한 장을 접고 새 삶의 장을 열기에 앞서 잠시 자신을 성찰해야 할 건널목”에 섰다. 리영희의 성찰은 1990년대 내내 침묵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지식인은 대개 솔직하지 못하다. 권력의 탄압에 굴복해 오직 ‘공부’로만 얻은 기존의 사회과학이론에 숨어 한국 현대사의 온갖 현실 해석과는 담을 쌓거나 고답적인 알레고리 속으로 잠수해버리기 일쑤다.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 사회과학은 학문의 세계 속에서 일종의 우상이 된다. 이들은 법칙상의 효용에 묻혀 현실적인 사회환경의 변화에 대해 속수무책이거나 외면하기 일쑤였다.

1991년 1월 리영희가 강연 아닌 간담 형식으로 술회한 ‘지적 고민의 고백’은 지식인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그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 : 사회주의는 이기적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인가?’를 통해서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했다. 그는 이 간담에서 지식인 집단의 환경예측 능력 상실의 시대를 고백했다. 이날의 간담 내용은 그해 ‘신동아’ 3월호에도 게재되었다. 수많은 리영희의 제자가 아우성쳤다.

2006년 9월 서울 교보문고 강남점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진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가 저서에 사인하고 있다.

리영희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사회평론’ 1991년 6월호에서 서중석과 인터뷰한 대화의 한 대목에 그런 곤혹스러움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지금 거대한 역사적 변혁 앞에서 지적, 사상적 그리고 인간적 겸허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심정입니다. 그와 동시에 주관적 오류나 지적 한계가 객관적 검증으로 밝혀질 때, 부정된 부분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진실은 균형 잡힌 감각과 시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와 우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의 상태다. 이 자연의 법칙은 인간 사유에 있어서도 가장 건전한 상태다.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갈 수가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 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 리영희는 1994년 7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에서 이런 이치를 역설했다. 이 책의 제목은 리영희의 1990년대에 걸친 대표적 화두였다.

‘역사비평’ 1995년 여름호 인터뷰 ‘리영희 - 냉전 이데올로기의 우상에 맞선 이성의 필봉’에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그의 화두는 좀 더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김동춘이 리영희에게 그의 책이 반공체제라는 거대한 우상을 무너뜨리는 효과적인 무기로서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를 끌어들인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중국이나 베트남 사회를 지나칠 정도로 이상화한 측면이 있지 않으냐고 질문하자, 리영희는 그에 대해 대체로 인정했다.

“우리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사상의 칼을 들이대거나 대항할 수가 없어서, 외부의 유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나 대안을 비추어줌으로 해서 같은 효과를 얻으려다 보니, 마치 시계의 추가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맞추어야 하는 것 같은 의미에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 후 더 많은 정보가 자유롭게 들어오면서 지난날에는 밑에 깔려서 밝혀지지 않고 숨겨지고 잠재해 있던 그런 일면의 사실들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그런 측면은 분명 시인합니다.”

1998년에 들어 리영희는 시민적 유대를 통한 계몽적 사회개혁 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운동을 관통하는 이념은 폭력이나 제도, 계급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의 행복, 생명의 존중을 동기와 목적으로 하는 아주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여야 한다고 했다. 이어서 1999년 리영희는 “휴전선 남과 북에는 지옥도 없고 극락도 없다”고 하면서 ‘반세기의 신화’(삼인)를 출간했고, 그해 말 고희 기념선집으로 ‘동굴 속의 독백’(나남)을 냈다.

‘연세대학원신문’은 1999년 12월 ‘20세기 인문과학 분야에 가장 영향을 끼친 학자의 저작’란을 마련,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리영희는 그때 국내학자 중 첫째로 꼽혔다.

그는 무슨 ‘주의자’인가

1990년대에 이르러 리영희는 30여 년 동안 사회현실과의 끊임없던 긴장관계, 자신과의 내면적 싸움을 반납하고 소용돌이의 시대상황에서 한걸음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던 2000년 말 리영희는 느닷없이 닥친 뇌출혈로 쓰러졌다. 시대와 역사 앞에 너무 혹독하게 자신의 기를 다 소진한 탓이리라. 그 후 한동안 사고와 행동과 언어의 장애 속에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그러던 중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리영희는 파병반대 시위현장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전논’을 집필하던 때 리영희는 서울 제기동의 대지 26평에 건평 13평짜리 허름한 집에 기거했다. 당시 그의 서재는 여느 지식인 또는 독서인의 그것과는 판이했다. 그의 서재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손때 묻고 낡은 스크랩북과 파일들이었다. 국제정세 관계기사를 오려 붙인 스크랩북은 누런 포장용지를 접고 자르고 구멍을 뚫고 풀로 붙여서 만들었다. 거기에는 미국, 중국, 베트남, 제3세계 등 국제정세에 대한 사실이 만재되어 있었다. 특히 미 국무부, 국방부, 의회의 비밀문서와 공청회 기록 등은 좀처럼 개인이 입수하기 어려운 고급정보였다.

‘단순한 생활, 드높은 정신’은 리영희의 생활신조다. 물질에 대한 집착은 도덕적, 정신적 성숙도에 반비례한다고 리영희는 보았다. 글을 쓸 때 그는 통계수치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자료실을 뒤져 20년 전 그날의 관련 보도자료를 찾아내는 작업을 반복한다. 늘 새로운 발상, 새로운 근거자료를 찾아 헤맨다. 그는 또 새로운 지식과 정보, 독자의 판단을 위한 균형 잡힌 자료 제시, 자료에 대한 관점, 의미, 사실성에 특별히 공력을 들인다.

리영희는 글을 쓸 때 ‘난해하게 꼬아 트는 문화주의적 세련’을 혐오한다. 그런 허영스러운 지적 논리 대신 글 한 편 한 편에서 이유와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이론적 틀을 단단하게 구축한다. 그는 연구를 하거나 학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적 사변에 의한 이론조작을 중시하지 않는다. 무슨 문제든지 치밀하게 구성하는 것, 문제의 구조를 통계나 보고서 등을 통해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중요 문제를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짚어내는 현실분석의 탁월함이 이로부터 나왔다.

글을 쓸 때 리영희가 바치는 에너지는 자료수집에 70%, 나머지 10%는 구성에, 20%는 쓰는 데 할애되었다. 200자 원고지 몇 장을 쓰기 위해 예닐곱 권의 책을 뒤적이는 일이 보통이며, 칼럼 한 편을 쓰기 위해 미국 상원의원 회의록 1200쪽을 읽어 겨우 한두 가지 통계자료를 찾아낼 때도 있었다. 독한 기자정신이며 실증정신이다.

언로가 폐쇄되고 사실과 진실의 발설에 억압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리영희의 글쓰기는 그 자체가 지식인의 실천이었다. 변화무쌍한 한국사회, 그것도 추상이 아닌 현실의 세계를 실증적으로 다룬 지식인 중 리영희처럼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된 인물은 드물다.

리영희와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이호철은 인간적인 정을 듬뿍 담아 리영희를 “꼼꼼하고 쫀쫀하고 깐깐한 좁쌀영감”이라고 했다. 그를 두고 무슨 ‘주의자’라고 규정하고 싶은 이들도 있겠지만, 현상을 분석함에 있어 이론이나 법칙이 아니라 사실과 진실에서 출발하는 그의 태도를 놓고 볼 때, 리영희는 차라리 ‘무(無)주의자’ 또는 ‘반(反)이데올로기 주의자’, 아니 ‘진실주의자’일지 모르겠다. 혹시 그런 ‘주의자’도 있을 수 있다면 말이다.


[자서전 읽기](12) 리영희의 ‘대화’

이권우, 경향신문, 2008-12-12

자서전을 쓰고 나서 전문가들한테 상찬받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자기 삶을 미화했다고 비난받기 일쑤고, 문제적인 대목을 충분히 해명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욕먹기 십상이다. 더욱이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다른 누군가가 써주는 천박한 자서전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경우, 널리 인정받는 자서전을 만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다행히 예외가 있으니, 리영희의 자서전이 그렇다.

리영희의 자서전은 두 권이다. 첫 권은 1988년 나온 <역정>(창비)이다. 일제 식민기를 보낸 소년시대부터 이승만 정권말기에 이르는 삶을 회고한다. 이 자서전은 잡지에 연재된 바 있는데, 당시에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이러한 글을 문학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문학관은 옹졸하고 편협한 것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두 번째 권은 2005년 나온 <대화>(한길사)이다. 앞의 자서전을 전사(前史)로 해서 자신과 삶과 사상을 되짚어보고 있다. <대화>는 대담 형식으로 쓰여진 자서전이다. 건강이 나빠져 집필이 어려워지자 문학평론가 임헌영씨와 대화를 나누고, 이를 정리했다. 이 책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리영희를 비판한 윤평중도 “자서전 문화가 척박한 우리 문화지형의 질곡을 일거에 깨트린 쾌거인” 역저이며, “자화자찬만이 넘쳐나는 불모의 다른 자서전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며 높이 평가했다.

<대화>에는 꿈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리영희는 자신의 삶과 우리 민족의 역사를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빗대어 분석한다. 의외라고 여길 이들도 많을 텐데, 그만큼 그의 사상적 프리즘이 넓다는 뜻이다. 리영희에게는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무의식을 형성한 계기가 되고, 융에 기대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의식의 역사’가 되는 사건이 둘 있었다. 그 하나는 외삼촌인 최인모가 1920년대초 일본 유학을 갔다 돌아와 소작인들에게 땅을 나누어준 사건이었다. 다른 하나는 외할아버지 살해사건. 머슴이었던 문학빈이 독립군으로 변신, 외할아버지에게 독립자금을 늑탈하려다 벌어진 사건이었다.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평생 한이 되었을 사건이 그에게는 올바른 삶의 표본이 되었으니 말이다.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주변의 만류와 협박도 드세었다. 일본에 가 자유주의적이고 선진개혁적인 사상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숱하게 많았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자발적으로 이른바 농지개 혁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외삼촌은 앎과 함의 일치를 실천했다. 선각자의 삶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여겼던 것이리라. 사회계급으로 보자면 문학빈은 외삼촌의 대척점에 있다. 그럼에도 “혁명가이자 독립투사의 계급적 각성과 사회혁명”을 실천했다. 비록 나중에 변절해 아쉽지만, 민중의 성장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사례라 여긴 듯싶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에서 볼 수 있듯, 리영희의 사상적 유전자는 반항아 기질이 짙다. 참된 것 앞에 부나 혈연이 무슨 상관이냐는 이 정치적 무의식은 리영희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다섯 가지의 꿈으로 유형화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정말 리영희의 삶이 그러했구나, 라며 주억거리게 된다. 자신의 삶을 인상적으로 요약할 줄 아는 사람이 뛰어난 자서전의 저자가 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첫째는 행복했던 유년시절이 꿈속에 재현되는 경우다. 한반도의 변방이었으나, 금광 덕에 풍요로웠던 대관에 서 보낸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황금시대였다. 더욱이 그는, 부계는 압록강변의 제법 이름난 선비집안이었고, 모계는 벽동 최부자집이었다. 그에게서 식민지 소년의 우울한 초상을 발견할 수는 없다. 두 번째는 결핍의 고통이 재현되는 꿈이다. 월남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 ‘동물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버둥쳤다. 세 번째는 정서적 상흔이 빚어낸 꿈이다. 전쟁 한복판을 관통하면서 20대 청년이 입은 영혼의 상처가 재현된다. 네 번째는 굴욕과 괴로움이 등장하는 경우다. 이성의 힘으로 우상에 도전한 것이 죄가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비굴하게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꿈”이다. 다섯째는 권력의 탄압이 꿈으로 생생하게 나타난다. 걸핏하면 쫓기다 잡히는 악몽을 꾸었다. “이런 고생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할 바에는 차라리 자살을 해버리는 것이 낫겠다”며 깨어났단다.

<대화>에는 상당히 도전적인 논쟁거리가 담겨 있다. 대담자인 임헌영도 “난감한 쟁점”이라 말할 정도다. 융의 표현에 빗대면 민족심리학이 될 터이고, 리영희 스스로 민족적 유전자라 이름 붙였는데, 내용은 이렇다.

그는 우리 역사를 볼 적에 결정적인 순간, 분열과 대립으로 비극이 되풀이된 경우가 많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일제시대 민족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분열한 것은 물론이고 각 진영의 내부도 적대관계에 놓였다. 작은 이익에 매몰되어 대의를 잃은 경우다. 1960년이 그러했고, 1980년에도 그러했다. 이런 작태는 조선시대에도 나타난다. 숱한 사화, 당쟁, 분당, 족벌정치라는 폐단이 있었지 않은가. 수백년에 걸쳐 비슷한 현상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이것이 한국(조선)인의 민족성을 형성하게 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노라고 말한다. 비판하는 처지에서 보자면 식민사관의 재판이며 자학적인 민족관이라 할 만한 발언은 또 나온다. 그는 광적인 반공주의나 극우적 사고방식을 지닌 집단이 북한과의 군사대립을 부추기는 현상을 지적하며 “어쩌면 남한만을 말할 때의 민족성 같은 것이 냉혈적이고 잔인함의 어떤 유전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고 고백한다.

리영희의 민족비판은 방향을 바꿔 다시 제기된다. 강력한 지배권력이 있어 통제력이 강하게 작용할 적에는 분열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일례로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체를 구성하려 했을 때를 든다. 북한은 단일권력체제가 자리잡아가는 과정이었는지라 내부에서 분열하거나 대립하는 현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남한의 경우는 그러지 않았다.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상태가 보장되자 정당단체만 해도 300여개로 세포분열했다. 그는 우리 민족이 과연 “자율적 자기규제 능력과 슬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4·19 이후의 혼란도 이 입장에서 재론된다. 지배권력이 막강할 때는 평신저두(平身低頭)하지만, 정권이 자유를 주면 “돌변해서 제각기 자기 주장대로 행동”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한국민중에게 민주주의적 책임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요.”

리영희의 민족비판은 전방위에 걸쳐 있다. 권력욕에 눈멀어 사분오열하는 엘리트집단에서 시민적 자율성과 책임성이 결여된 민중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서전 읽기는 이 대목에서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는 민족에 대한 애정이 없고 민중을 불신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를 비난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 루쉰 이야기가 장황하게 나오는 이유가 이런 오해와 편견을 막기 위해서였으리라. 리영희가 루쉰을 얼마나 존경하는지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민족에 대한 비판이 루쉰이 걸어간 길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노신은 당시의 중국 인민대중의 무지·나태·우매·탐욕·교활·갈등·분열·약육강식 등등의, 민족적 결점과 약점을 미화하거나 은폐하거나 합리화하거나, 심지어 정당화하는 따위의 값싼 ‘과잉민족지상주의’를 거부해요. 그 모든 약점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그것을 중국 인민대중의 눈앞에 잔인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던져 보여주었어. 노신이 의도한 바는 그런 자신의 약점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또는 인식한다 하더라도 민족적 편애심 때문에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기기만적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거요.”

개인적으로는 리영희가 우리에게 던진 의미 있는 토론거리라 생각한다. 그의 민족 유전자론은 근거 있는 주장인가. 민족의 아픈 생채기를 굳이 들춰보아야 하는 것일까. 정말, 그런 기질이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 할 말이 많은 주제다. 그럼에도 우리 지식사회는 이 질문을 두고 깊이 있는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상논쟁을 벌였을 뿐이다.

리영희에 대한 비판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리영희의 이념좌표를 소박한 인본적 사회주의라며 맹렬한 비판을 시도한 윤평중이 대표적인 경우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일부의 비판을 알고 있노라며 스스로 변호하는 발언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왜 중국혁명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소상히 밝힌다.

그는 중국혁명에서 희망을 본 듯하다.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나 소련의 관료주의적 공산주의를 극복한 제3의 사회제도로 중국 공산당을 눈여겨 본 것이다. 중국혁명을 이처럼 높이 쳐준 것은 “민중적 공감과 인민대중의 적극적이면서 자발적인 참여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에 대한 관심은 “무조건적 공감이나 편애 때문”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사회의 병든 생활방식과 존재양식에 대해서 대조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고 싶었노라 해명한다. 그렇다면 홍위병으로 상징되는 문화혁명의 폐해가 드러나고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상황에서 리영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시 사뭇 논쟁적인 문제의식을 만난다.

“결론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결한 사회주의도, 사회주의적 요소를 결한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로 비인간적 제도라는 신념이 굳어졌어요. 인류의 한 발달 단계로서는 부족한 대로 ‘북구라파식 사회민주주의’가 현실적 선택이라고 생각했지.”

홉스봄이 말했듯, 지난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였다. 리영희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한쪽은 “하반신적 욕구우월주의”로 팽배했고, 다른 한쪽은 “상반신적 도덕우선주의”가 득세했다. 두 진영의 대결과 반목은 전쟁과 혁명을 나으며 인류를 도탄에 빠트렸다. 균형이 무너지자 시장논리가 세계를 장악했고, 지금 그 종말을 지켜보고 있다. 이제 비로소 우리는 중용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리영희는 오늘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회민주주의를 주목하자고 말해놓았으니.

이 문제의식도 우리 지식사회가 깊이 있게 토론하지 않고 있다. 말로만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라 할 일이 아니다. 그는 과거의 은사만이 아니라 미래의 은사이기도 하다. 경험에 바탕하고 상당 부분 수사학적 묘사에 그친 그의 지향점을 화두 삼아 더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 <대화>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대화>에는 꿈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리영희는 자신의 삶과 우리 민족의 역사를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빗대어 분석한다. 의외라고 여길 이들도 많을 텐데, 그만큼 그의 사상적 프리즘이 넓다는 뜻이다. 리영희에게는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무의식을 형성한 계기가 되고, 융에 기대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의식의 역사’가 되는 사건이 둘 있었다. 그 하나는 외삼촌인 최인모가 1920년대초 일본 유학을 갔다 돌아와 소작인들에게 땅을 나누어준 사건이었다. 다른 하나는 외할아버지 살해사건. 머슴이었던 문학빈이 독립군으로 변신, 외할아버지에게 독립자금을 늑탈하려다 벌어진 사건이었다.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평생 한이 되었을 사건이 그에게는 올바른 삶의 표본이 되었으니 말이다.

상식이 범죄가 되는 사회, 우상을 깨고 이성을 깨우다

한승동, 한겨레, 2010-12-5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지난 5월 위중한 중에도 딸에게 구술한 <한겨레> 창간 22돌 격려 메시지에서 리영희는 더글러스 맥아더가 자신의 퇴임사에서 인용해 유명해진 이 19세기 말 풍자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 말을 한 장군을 존경하진 않는다며 그는 “20여년 전의 상황과 같은 험난한 현실”이 다시 찾아왔는데도 “여러분과 동석하지 못함을 몹시 슬퍼한다”고 했다.

그가 ‘야만의 시대’라 했던 한국 현대사의 미몽을 깨운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1999년 <연세대학원신문> 조사 등)이요, 그를 두려워하고 미워한 자들에겐 ‘의식화의 주범’이었던 리영희는 마침내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그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은커녕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됐던 대한민국에서랴.”(<대화>, 2005년)

40년 전에 리영희는 상식조차 범죄가 되는 이 땅의 현실을 ‘조건반사의 토끼’에 비유했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중공(中共)’이라는 말만 들으면 즉각적으로 ‘기아’ ‘괴뢰’ ‘피골상접’ ‘야만’ ‘무과학’ ‘반란’ ‘정권타도’ ‘침략’ ‘호전’…” 등을 떠올리도록 훈련된 조건반사의 토끼들. 1970년대 한국사회에 강력한 지적 충격파를 가하며 리영희의 존재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린 첫 저작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에 재수록된 ‘조건반사의 토끼’(1971년 발표)에서 그는 토끼장을 벗어나야 한다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그의 글에서 ‘중공’ 대신 ‘북한’을 넣어보라. 지금 우리는 과연 그 토끼장에서 벗어났을까. 그 글을 쓸 무렵 그는 군부독재·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가담했다가 언론사에서 두 번째 강제해 직을 당한 터였다. 이듬해(1972년)에 박정희 유신독재체제가 시작됐고, 그 3년 뒤 <전환시대의 논리>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사실’이 아니라 ‘가설’로 발표해야 했던 코페르니쿠스처럼 역시 ‘가설의 해설서’임을 서문에 적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은 1977년에 나온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토끼장에 갇히기를 거부한 그를 반공법의 이름으로 2년 간 감옥에 가두는 구실이 된다. 그리고 1980년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로 구속, 그해 다시 교수직에서 해직(1976년에 1차 해직), 1984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주관 반통일적 교과서 시정연구회 지도사건으로 구속, 1989년 <한겨레> 창간기념 북한취재단 방북기획 건으로 구속 등 모두 아홉 번의 연행과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 유예, 1천 일을 넘긴 세 번의 징역살이…. 그 후유증으로 그는 쓸개를 떼어내야 했고, 만성기관지염으로 고생했으며, 성한 이빨이 없었다. 2000년에는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반신마비가 돼 고생하다 최근 간 기능 악화로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1968년 소설가 선우휘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자마자, 외신(국제)부장을 맡고 있던 리영희를 난데없이 조사부장으로 발령냈다. 1년 뒤에는 직제에도 없던 심의부라는 걸 만들어 다시 거기로 보냈다. 나가라는 얘기였다. 사표제출을 거부하는 그에게 선우휘는 베트남 파병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부의 언론사 외신부장들 현지시찰 주선을 두 번이나 거절한 것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고 회사와 정부의 반공정책에도 어긋난다며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통고했다. 이후 거듭되는 언론사·교수직 해직의 시작이었다. 그 사건 뒤에는 특별대우를 약속하며 리영희에게 베트남행을 요구한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그 4년 전인 1964년엔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비동맹그룹)가 남북한을 동시 초청해 유엔 동시가입 가능성을 토의할 것이라는 특종을 썼다가 ‘국가기밀을 누설한 이적행위’(반공법 위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61년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첫 미국방문 수행기자로 갔다가 도중에 본국으로 조기소환당했다. 역시 특종보도 때문이었다. 다른 언론사들이 박정희-케네디 회담에서 미국이 군사원조도 하고 경제원조도 하고 쿠데타에 대한 정치적 승인도 해주기로 했다는 ‘박정희 외교의 대성과’를 선전했을 때, 리영희는 케네디 쪽이 조속한 민정이양과 군의 원대복귀, 조속한 한-일 국교정상화, 베트남사태 협력 등을 촉구했다는 ‘놀라운’ 내용을 타전했다. ‘특종 기자’, ‘진짜 기자’ 리영희의 특종 행진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우상과 이성>)

그는 자신이 해온 일을 “오랫동안 미신처럼 남한사회에서 믿어오던 ‘허위’와 여러가지 크고 작은 정치적·사상적 우상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라고 했고, ‘리영희 저작집’ 마지막 제12권 <21세기 아침의 사색>(2006년), 50여년에 걸친 자신의 연구와 집필생활의 마지막 마무리이기도 했던 그 책에서도 말했다. “난 휴머니스트입니다. 인도주의자 그리고 평화주의자이고, 덧붙인다면 우상파괴자!” 그렇다. 타협을 몰랐던 선비 리영희, 그는 한국 현대사 최강의 우상 파괴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유일한 무기는 ‘진실’이었다. 그를 가둔 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그 자신을 일평생 고통 속에 몰아넣은 괴물은 ‘진실’이었다. 그 빛에 비춰 보면, 그의 생애를 관통했던 고난이 곧 그의 영광이었다.

리영희는 1929년 금광으로 유명했던 평안북도 운산군의 북진면이란 외진 곳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주로 자란 곳은 5살 때 영림서 직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옮겨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이다. 김소월이 “물로 사흘 배 사흘 … 산너머 먼 육천리”(<삭주구성>)라고 노래했던 대관은 말년의 그가 “오늘까지도 해가 갈수록 더 그리워지는 추억”(<역정> 1988년)이 서린 고향이었다. 거기에 남은 형과 작은 누이를 그는 끝내 이승에선 다시 만나지 못했다.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초등학교(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성공립학교 전기과에 들어갔다. 동창도 친구도 없이 살아야 했던 가난하고 외로운 그 시절, 오직 스스로를 단련하고 키워야 했던 고달픈 서울 유학생활이 연줄을 거부하고 타협을 물리쳤던 나중의 ‘외로운 호랑이’ 리영희의 탄생을 가능케 했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1946년 그가 국립해양대학 항해과(2기)를 택한 것도 그런 간난과 무관하지 않다.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을 비롯한 경비 일체를 국가가 부담한다는 모집공고를 보고 그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고 했다. 재학시절 ‘여순반란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했고 백범 김구에 경도됐던 리영희는 졸업 뒤 친구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경북 안동공립중학교 영어교사가 됐으며, 전쟁이 터진 뒤 영어교사를 우대한다는 미군 상대의 연락(통역)장교 모집에 응했다. 이후 7년 백발백중의 권총 명사수였던 그는 군의 부패와 폭력, 병무행정의 난맥상, 미국의 이면을 무참하게 경험하면서 “국가관과 전쟁관 그리고 이 사회에서 살 앞으로의 나의 마음가짐 같은 것에, 말하자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다.

리영희가 언론사 기자가 된 것은 말년 통역장교 시절 부산 양정동의 8평짜리 셋집 변소에서 우연히 찾아낸 신문 밑바닥 기자모집 광고였다. 1957년 리영희는 남다른 영어실력을 밑천 삼아 당시 한국 최대 통신사였던 <합동통신>에 입사했고, 통신사 일을 하면서 1959~61년까지 <워싱턴 포스트>의 통신원(4·19혁명 전까지는 익명)으로 활약했다. 지금도 <워싱턴 포스트>를 뒤지면 나오는 그의 기사들은 미국사회에 당시 다른 누구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 없었던 이승만 독재정권 치하의 한국 실정 제대로 알리기를 한 셈이 됐고 그것은 이승만 하야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활약 덕에 1959년 그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신문학 연수를 받을 수 있었고, 귀로에 들른 일본 도쿄 서점에서 사들고 온 책들 중의 하나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였다.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조선인 혁명가 김산(장지락)의 생애를 담은 그 책은 리영희가 본격적인 중국연구자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야만의 시대’에 맞선 ‘전사’, ‘의식화의 교사’가 됐지만 리영희는 ’타고난 투사’ 또는 ‘의식화의 원흉’은 결코 아니었다. “소음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의 지적(정신적) 수준과 반비례한다”는 영국 속담까지 인용할 정도로 시끄러운 것을 못견뎌 하고 행동의 절제를 미덕으로 안 그는 자신이 소심한 사람이라며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문익환 목사처럼 낭만주의자가 못 되고, 용기도 없는 사람이야. 다만 냉철한 현실감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니까.”(<대화>) 그는 결코 대세나 주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주류가 아무런 근본적 인식 없이 그냥 거죽만 보고 한 방향으로 쏠릴 때 나는 항상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2006년 인터뷰 때 리영희는 “미국이 장차 동북아에서 강대해지는 중국과, 과거 소련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전쟁을 하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으로선 그 때문에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필요하고 남한은 거기에 ‘0.5 군사국가’로 덧붙이려 한다. 특히 강대국으로 행세했던 일본의 과거에 대한 향수는 지극히 강하다. 지금의 이런 동북아 상황은 1930년대 초와 아주 흡사하다”는 준렬한 정세인식과 함께 그들에게 동조하는 국내 기득권세력의 지배욕을 비판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정신은 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