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23
식판의 슬픔
서울시의 무상급식 반대 광고는 착잡하고 슬프다. 난센스 퀴즈 같은 사지선다형 광고도 그렇지만 벌거벗은 아이에게 식판 하나 들고 서있게 한 사진 옆에 ‘전면 무상급식 때문에’라는 헤드라인을 큼지막하게 박아넣은 광고는 슬픔을 넘어 분노를 일으킨다. 다른 건 몰라도 무상급식 때문에 ‘서울시와 대한민국이 무너지는 상황’이 올까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오세훈 시장의 조악한 상황인식과 과장된 걱정은 충분히 전달된 것 같다.
특정 정책적 사안에 대해 팽팽한 대립각이 생기는 것은 언제나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사안의 본질적 요소가 무엇이었는지를 잊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무상급식 논쟁에는 그런 본질적 고민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전면 무상급식’을 서울시교육감의 역점사업,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 야권 어젠다, 유권자의 지지가 높은 사안으로 먼저 인식한다. 그 밥을 먹는 아이들의 입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이들은 절대적 사고패턴을 가지고 있다. 사고의 중간지대가 없다는 말이다. ‘아빠가 나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다면 뭔가 나에게 잘못이 있을 것이다’라거나 ‘엄마가 나를 버린다면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릴 것이다’라는 식으로 사고한다. 그런 아이들이 지금의 무상급식 논쟁을 바라본다면 어떤 심정일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나의 밥 문제 때문에 우리 학교가 위험해지고 내가 공짜로 밥 먹는 것 때문에 누군가 추운 겨울에 벌거벗고 거리로 나서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 아이들의 속 상처가 어떤 것일지를 헤아리지 않는다.
예산을 어디에 먼저 투입할지를 결정하 는 우선순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저런 논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산을 배분하는 일뿐 아니라 인간사 모든 일에서 우선순위를 정할 때는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상식과 원칙이 있다. 집안에 시급히 치료받아야 할 심장병 환자가 있으면 모든 자원은 거기에 우선적으로 집중되는 게 상식이다. 명품 가방을 사지 못해 견딜 수 없는 박탈감을 호소하는 가족 구성원이 있더라도 그 욕구는 뒤로 밀려나는 게 당연하다. 내가 보기에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문제는 그런 최우선 기준이 적용되어야 하는 사안이다.
전면 무상급식은 부자급식에 방점이 찍힌 게 아니다. 그간 선별적으로 무상급식을 지원받아온 아이들이 느끼는 불필요한 열등감이나 수치심을 없애주고 인간적 품위를 지켜주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법정신에 비유하자면, 무상급식을 받는 1명의 아이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99명이 부자급식을 받는 상황이라 해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사회다.
가끔 외국의 어느 학교에서 학급 아이들 전부가 까까머리를 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항암치료를 받느라 민둥머리가 된 친구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학급 아이 전부가 까까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잖아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부모 처지에서는 내 아이가 멀쩡한 머리를 밀어버리는 게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부모와 학교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그런 개별성에 대한 존중이다. 전면 무상급식은 그런 개별적이고 꽃봉오리 같은 영혼에 생채기가 나지 않도록 배려하자는 행위다.
지난해 어느 지방 도시에서 무상급식을 지원받을 아이들에게 보호자 가출 확인서, 신용불량자 확인서 등 아이의 가정사가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증명서류를 요구했더니 30명의 대상 학생 중 20명이 무상급식을 포기했다.
인간에게 밥을 주는 행위란,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그득하게 할 수 있는 보살핌의 원형적 행위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치유적 밥상을 제공하는 게 왜 망국적 행태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밥상조차 차려주지 못하는 사회라면 존재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우리 사회가 그런 정도의 어른성은 가진 사회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