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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최교진 선생님께

무척 오래 전이었습니다. 교회 문간방에 있을 때였으니 20년도 넘었습니다. 혜담 스님께서 찾아오셔서 한 5분 간 앉아 이야기하다가 먼데서 걸어 오셨으니 잠깐 누워 쉬시라고 했지요. 스님이 누워 한 1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옆구리에 통증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통증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무딘 송곳 끝으로 계속 찌르고 있는 듯한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카데타에 소변 찌꺼기가 막힌 것입니다. 나는 스님께 이런저런 설명을 할 여유도 없이 "스님,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님은 영문도 모르고 일어나 돌아갔습니다. 얼마나 황당했을지 스님의 화난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나는 스님께 그 때의 사정 얘기를 못 하고 있습니다. 여기다 혜담 스님이란 걸 밝히는 것은 혹시나 스님께서 이 글을 읽으시면 그 때의 상황을 알고 오해가 풀릴 테니까요.

나는 스님을 보내 놓고 부랴부랴 방문을 잠그고 석유 곤로에 불을 붙이고 모든 의료 기구를 꺼내 놓고 손수 카데타(고무 호수)를 갈아 끼우는 준비를 했습니다. 물을 끓이고 새 카데타를 끓는 물에 넣고 가위와 핀센트도 함께 소독을 하고 거즈를 알맞게 잘라 수증기에 찌고.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뒤 옷을 벗고 막힌 카데타를 뽑았습니다. 요강 안에 시뻘건 피고름과 함께 막혔던 오줌이 물총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뻗쳐 나옵니다. 옆구리를 지긋이 눌러 모든 찌꺼기를 다 뽑아 내고 나서 과산화수소에 탈지면을 적셔 구멍난 옆구리 둘레를 깨끗이 닦아 냅니다. 둘레의 피부가 헐어 벌겋게 벗겨져 있습니다. 깨끗이 닦은 다음 소독한 카데타를 끼워 넣습니다. 30센티 중에 25센티가 몸 속으로 들어갑니다. 눈물이 찔끔찔끔 나올 만큼 몹시 아픕니다.

작업이 끝나 요강을 비우고 모든 걸 치우고 나면 몸은 파김치가 되어 버립니다. 그대로 누워 하루 이틀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세균 감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올해로 37년 간을 그렇게 카데타에 온 신경을 쓰면서 살아왔습니다. 오늘은 얼마쯤 움직일 수 있을지 항상 계산을 해야 하고 외출을 할 때나 빨래를 할 때도 몸 상태를 가늠해야 합니다.

전에 철이 없을 때는 요령도 모르고 먼 데까지 갔다가 혼이 난 일도 있습니다. 1976년인가 서울에 갔다가 이현주 목사네 집에 하룻밤을 묵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이 터져 버린 것입니다. 이 목사한테 끌려 이곳저곳 비뇨기과 병원을 찾아가니 비뇨기과에서는 이런 시술을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간신히 어느 대학병원까지 가서 일을 치렀습니다. 이현주 목사도 그 때까지 결핵을 앓고 있었기에 아픈 것에 대해 이해하는 편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먼 길엔 거의 가지 못했습니다. 누구하고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불안한 것입니다.

지난 5월 28일 내가 아무리 오지 마라고 해도 손님은 찾아옵니다. 김중미 선생, 박기범, 김환영, 정광호 선생… 모두 여섯 분이 오셨습니다. 반가운 분들이지만 걱정이 안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걸 체념하고 재빨리 계산을 했습니다. 어디 가서 점심을 먹고 한 바퀴 돌아 오면 세 시간이면 되겠지. 세 시간 정도면 얼굴 찌푸리지 않고 억지로라도 웃을 수 있겠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유명한 대중 가수가 된 어느 분의 중학교 시절 살았던 마을 근처에서 골부리국밥을 점심으로 먹고 고운사라는 절집에 들러 왔습니다. 전쟁 고아였던 그 대중 가수의 소년 시절 함께 중학교에 다녔던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마을에 시집 와서 살고 있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다녔던 학교길을 승합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이웃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최교진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는 전교조가 분열한 것도 모르고, 그래서 만나지 않겠다고 한 건 절대 아닙니다.

나도 이럴 때는 서 교장처럼 자살을 해야 하는지 어찌해야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못 오게 한 많은 분들이 참 속상하신 걸 알지만 도리가 없습니다.

재작년에 나는 두 권의 아나키스트에 대한 책을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신채호 선생님이 먼 중국 땅에서 고향의 아내에게 굶주리고 있는 어린 자식들을 차라리 고아원에 보내라는 절박한 편지를 보냈다는 대목을 읽고 울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편하게 사치하게 살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병든 사람은 예의 같은 것 지키지도 못하고. 그래서 착하게 살 수도 없습니다. 거듭거듭 죄송합니다.

2003. 6. 17. 권정생 씀 <한국글쓰기연구회>회보 2003년 7월호


'작은책'에 기고 :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을 안할 수 있다

승용차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달아나야 한다. 30평짜리 아파트에서 달아나 이전에 우리가 버려두고 떠나왔던 시골로 다시 돌아가서 15평짜리 작은 집을 짓고 살아야 한다. 가까운 데는 걸어다니고 먼 곳에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 달에 백만 원 들던 생활비는 50만 원으로 줄어들 것이다.


텃밭을 가꾸고 묵혀 둔 논에 쌀농사 지어 자기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농사 짓고. 그리고 남는 시간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뜨개질, 바느질 예쁘게 하면서 살면 된다. 그러면 실업자도 없어지고 거지도 없어진다. 한국 사람 절반만이라도 이렇게 살면 자연 환경은 더 이상 파괴되지 않고 쓰레기도 사라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김선일 같은 착한 젊은이가 억울하게 죽지 않아도 된다. 구태여 이라크에 파병을 해가면서 석유를 더 많이 얻어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패권주의 미국한테 발목 잡혀 계속 끌려가다 보면 통일도 점점 멀어지고 우리들 자유민주주의도 위태로워진다. 전쟁의 불안은 계속될 것이고, 미국한테 엎드려 빌면서까지 미국 군대를 우리 땅에 붙잡아 둬야 할 것이다. 비싼 돈을 주고 무시무시한 전쟁 무기도 계속 사들여야 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작은 집에서도 네 식구 다섯 식구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승용차를 버리면 기름 걱정 안 해도 되고 일부러 걷기 운동 안 해도 자연히 걸어다니게 되고 살찔 걱정도 없다. 고기 안 먹어도 싱싱한 나물을 손수 가꾸어 먹으면 더 건강해진다. 아이들은 시냇물이 흐르고 솔숲이 우거진 작은 시골 학교에서 공부하면 된다. 거기서 중학교까지 공부하고 더 공부하고 싶은 학생은 마을마다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스스로 공부하면 된다. 꼭 필요한 사람만이 대학에 가서 공부하되 출세를 하기 위한 공부가 아닌 사람과 자연을 위한 인간교육이어야 한다. 과학도 철학도 정치도 모든 게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교육을 할 때 훌륭한 대학교육이 될 것이다. 시골 마당에 둘러앉아 밤마다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면 즐겁다. 가벼운 우스갯말도 하고 심각한 철학 이야기도 하고. 구태여 대학에 가서 고급 강의를 듣지 않아도 훌륭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지난 6월, 김선일 씨가 피살당한 소식을 듣고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다. 이라크 파병 찬성이 늘고 복수를 해야 한다고 분노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파병 때문에 김선일 씨가 죽었으니 파병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정부에서는 더욱 강하게 파병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김선일 씨의 죽음을 이라크 무장 집단이 저질렀고 그것을 미리 막지 못한 한국 정부 탓도 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들의 풍요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죄 없는 김씨를 죽이게 한 것이다. 지금 내가 타고 가는 승용차 기름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고 느낀다면 평화의 길은 멀지 않을 것이다. 풍요롭게 살면서 우리는 우리 주권도 못 가진, 강대국에 예속된 허울뿐인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면 통일도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이라크 테러 집단의 학살 방법은 너무나 잔인했다. 하지만 우리도 옛날을 돌이켜 보자. 칠팔십 년 전 고통받던 시절, 우리에게도 일본 침략자에 맞서서 싸운 테러리스트들이 있었다. 김구 선생이 아직 김창수라는 이름으로 살던 열아홉 살 나이 때, 이 청년은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원수인 일본 군인 쯔찌다 중위를 죽이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용케 사면되어 기적같이 살아났다. 김창수가 김구가 된 뒤에도 중국에 가서 한국독립당을 만들어 윤봉길, 이봉창 같은 애국 청년을 길러 내어 테러를 감행했다.


그 밖에도 안중근 의사는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이고, 흑도회의 박열은 천황 암살을 노리다가 들키고, 시인 이육사는 의열단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다. 이 시대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내어 놓고 무장투쟁을 했다. 그 시대에선 이 분들이 오늘의 알 카에다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고, 한국인과 다른 약소국 민중에겐 존경의 대상이었다.


침략에 대한 저항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라크 무장 단체가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그이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강대국 미국처럼 핵무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뉴욕이나 워싱턴을 공격할 수 있는 전투기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이들은 말 그대로 맨주먹으로 미국과 맞서서 목숨을 내걸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김선일 씨의 죽음은 백번 말해도 가슴아픈 일이지만 우리는 김선일 씨를 죽인 이라크 무장 단체에게 분노할 수만은 없다. 그이들은 우리 군대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미리 경고를 했다. 침략국인 미국을 도와 보내는 군대는 미국과 똑같이 그 사람들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김선일 씨는 죽기 직전에 "노무현 대통령은 큰 실수를 하고 있다"고 절규했는데, 정말 우리 모두 큰 실수를 했던 것이다.


미국이 한국 정부에 대고 어떤 협박을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이 한반도에 핵 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내비쳤다. 만약 우리가 이라크 파병을 거부하고 미국의 심사를 불쾌하게 해서 핵폭탄을 한 방 맞는다면 어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고 그 속에서 얼마만큼 살아남아 나라를 지속 유지해갈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전멸할지 아니면 반은 살아남아 고통 속에서나마 계속 나라를 지켜나갈지 상상조차 못한다. 옛날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과는 비교도 안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과연 무서운 나라다.


최민식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파이란>에서 이강재는 뒤늦게 찾아낸 파이란과의 가슴아픈 사랑을 깨닫고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이강재는 오랫동안 복종하며 기대 살았던 깡패 소굴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끝내 죽임을 당한다.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이다.


미국 역시 우리 한국을 꼼짝 못하게 목을 조르고 있다. 지난 시절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쪽을 전리품으로 얻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 평등한 동맹국이라면 절대 이럴 수는 없다. 약소국의 슬픔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미국과 이런 기막힌 관계를 모르고 있다.


몇 해 전에 죽은 이곳 마을 박씨 노인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 남쪽에 남게 되었다. 박씨 노인이 스무 살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일으킨 집단 항의 사건으로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분산 수용하게 되었다. 미군 감시단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전향할 것인지 공산군으로 남을 것인지를 물었다. 스무 살짜리였던 박씨는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전쟁터에서 포로가 될 때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것이 살기 위해 두 손을 번쩍 드는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는 또다른 생사의 갈림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산군으로 남는가, 아니면 미군 쪽으로 전향을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는지 그걸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가슴을 옥죄었던 것이다. 박씨는 그때, 어쩐지 우람하게 생긴 미군 장교를 쳐다보자 살아남을 길이 훨씬 높아 보여 결국 미군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그때 선택이 박씨 노인을 영원히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실수였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가난한 고학생 이수일을 버리고 부자 청년 김중배를 선택할 것인가.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더라도 패권주의 미국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를 얻는 길은 어머니가 아기를 낳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를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치러야 할 과정이다. 통일만이 미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통일이 되고 난 다음에라야 우리는 온전한 하나의 국가로서 미국과 동등한 동맹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가난한 삶을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승용차를 버리고 30평 아파트를 반으로 줄이는 길뿐이다. 그래야만 석유 전쟁에 파병을 안 해도 떳떳할 수 있다.

'한겨레' 신문 5천호 기념

사발장수가 등짐을 지고 마을 이 집 저 집 다니고 있었다. 어느 모퉁이 집에서 마침 밥그릇이 필요했던 어머니가 사발장수와 사발 한 벌을 놓고 흥정을 했다.

“이것 너무 작아서 안 되겠어요, 바깥 양반 밥그릇은 좀더 커야 하니까요.”

어머니 말에 사발장수는 아주 능숙한 말로 너스레를 떨었다.

“작은 게 뭐가 안 되는가요. 밥 한 주걱 고봉으로 더 담아내면 될 텐데요.”

하기야 그것도 말이 된다. 솜씨껏 위쪽으로 부피만 높이면 되니까.

결국 어머니는 사발장수의 너스레에 그냥 넘어가 사발을 사기로 했다.

그때였다. 곁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던 다섯 살배기 꼬마가 어머니 치마를 잡아당기며 황급히 말한다.

“엄마 엄마, 죽도 고봉을 담을 수 있어”

순간 어머니와 사발장수 둘 다 머쓱해버렸다. 흥정은 깨지고 사발장수의 너스레는 들통이 나고, 어머니는 다섯 살배기 아들놈한테 구원을 받은 셈이었다.

<한겨레신문> 창간호가 나왔을 때 흡사 또다른 개천절을 맞는 기분이었다. 평생 주식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 한푼두푼 주머니를 털어 주주가 되었다. 그래서 국민신문 <한겨레>는 태어났다. 그게 벌써 5천호를 맞이한 것이다.

베트남전에 갔던 인재의 전사통지를 받고 인재 어머니는 부엌바닥에 주저앉으면서, ‘그놈의 박○○가 미국X 강냉이 가루하고 우리 인재 바꿔다 죽였어!’

그런데 인재네 어머니는 그 말을 산꼭대기 높은 곳에서 소리높이 외치지는 못했다. 일본 마시로라는 곳이 어디인지 그 마시로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남편을 상곡댁 할머니는 평생 기다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은수네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50년이 넘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한겨레를 받으면 사설부터 먼저 읽고, 그리고 각계 인사들의 칼럼을 보고, 사회면, 정치면, 국제면 차례로 읽는다.

이라크 파병은 끝까지 반대를 지켜줬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도 농민 편에 서 주었다. 하지만 에프티에이나 이라크 파병문제는 단순히 ‘예, 아니오’로만 대응할 것이 아니라 한겨레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야만 옳지 않았을까

엄청난 고통에 신음하는 국민에게 꿈을 열어줘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한겨레가 탄생한 이유이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1)

주중식한테서 소포 하나가 왔다.
끌러보니 조그만 종이상자에 과자가 들었다.
가게에서 파는 과자가 아니고 집에서 만든 것 같다.
소포에다 폭탄도 넣어 보냈다는데
잠깐 동안 주중식과 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생각했다.
십 년이 넘도록 알고 지냈지만 원한 살 일은 없는 것 같다.
과자 부스러기를 하나 혀끝에 대어보니 아무렇지 않다.
좀더 큰 것을 집어 먹어봐도 괜찮다.
한 개를 다 먹고 다섯 시간 지나도 안 죽는다.
겨우 마음이 놓인다.
주중식과 나 사이는 아무런 문제없이 돈독함이 확인되었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학년인 도모꼬가
일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밭 한 뙈기

사람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 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달팽이

달팽이 마을에
전쟁이 났다
아기 잃은 어미가
보퉁이 등에 지고 허둥지둥 간다
아기 찾아 간다
목이 메어 소리도 안나오고
기운이 다해 뛰지도 못하고
아기 찾아 간다
달팽이 지나간 뒤에
눈물 자국이 길게 길게 남았다


죽을 먹어도 함께 살자

그 해, 온 들판이 황모가 들어 보리가 벌겋게 말라 죽어버렸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던 사람들은 망연자실 넋을 잃고 말았다. 기다리던 보리가 이삭이 패기도 전에 말라 죽어버렸으니 그 정황이 어떠했겠는가? 보리 한 톨 거두지 못했던 그 해, 이곳 안동지방에서만도 굶어죽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먹을 것이 있었던 집도 도무지 먹을 기회가 없었다.


밤낮으로 거지가 몰려드니 밥을 지을 수도 지은 밥도 마음놓고 앉아 먹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한밤중에라도 밥을 지어 문을 닫아 잠그어 놓고 숨어서 먹고 있으면, 어느새 느닷없이 나타난 거지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 밥그릇째 빼앗아 달아났다. 심지어는 입안에 든 음식도 따귀를 내리치고는 튀어나오면 뺏어먹을 만큼 절박했다.


돌아가신 박실 어르신네가 들려준 보리흉년 때의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무서웠다. "……그 해 뒷산 애총(애기무덤)엔 발디딜 틈도 없이 애기들이 죽어갔제." 어르신네는 마지막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아랫마을 진수네 할머니가 들려준 또 다른 기근이 든 해의 이야기는 더 끔찍했다. 진수네 할머니가 열여섯 살에 시집와서 이듬해쯤이니 지금부터 70년 전이다.


이곳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톨게이트로 이어지는 진입로 중간쯤 수재개골이란 골짜기 건너편이다. 널찍한 봇도랑 건너 구릉지밭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이어서 다른 어느 밭보다 보리가 빨리 익었다. 이제 보리알이 누릇누릇 알이 들 무렵, 어디선지 수많은 거지떼가 몰려왔다.


굶주린 사람들은 허겁지겁 보리이삭을 따서는 걸신들린 것처럼 비벼 먹었다. 그러나 빈속에 날보리를, 그것도 껍질째 먹은 사람들은 배를 움켜쥐고 하나 둘씩 나뒹굴었다. 누가 어떻게 손을 볼 사이도 없이 겉보리에 체한 사람들은 그냥 쓰러져 몸부림치다가 죽어버렸다.


할머니 말씀엔 "수백 밍이 넘었으끼구망" 하셨다. 순식간에 보리밭엔 사람들이 죽은 시체가 쌓였다. 근처 마을사람들이 가서 시체를 끌어다 여기저기 산비탈에 묻었지만 대부분 시체는 그냥 그 자리에서 썩어갔다고 했다. " 및 해 동안 거게 농사도 못지었제."


병자년 물난리가 나던 해는 처녀들이 일본으로 만주로 팔려갔다고 했다. 대호네 할머니가 세 살 때 다섯 살 된 오빠와 남매를 남겨놓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서간도로 떠나갔다. 남매는 외갓집에 더부살이를 하다가 다섯 살 때 술도가집에서 술지개미를 함께 훔쳐먹던 오빠는 누군가가 데리고 갔다. 할머니는 재작년에야 "글쎄 내 성(姓)이 권가가 아니고 김가란다" 하셨다. 칠십 평생 외갓집 성을 따라 권가로만 알고 살았는데, 먼 친척되는 고모님이 이제서야 가르쳐준 것이다. 할머니는 새삼 서러워 우신다.


어릴 적 어쩐 일인지 영문도 모르고 외사촌 형제들 틈새에서 항상 밀려나 구석 쪽에 외롭게 지내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설움이 복받치신다. 서간도로 간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부산인가 어딘가로 양자로 간 오빠 소식도 모른다. "지끔이라도 신문에 내보마 오라배라도 찾을 수 없으까?"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일이다.


구판장 뒷집 상동댁 할머니는 더욱 애절하다. 해방되던 이듬해 스무 세 살 꽃다운 나이로, 징용에 끌려간 남편을 찾아 부산까지는 갔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하루하루 부두에 나가 들어오는 연락선을 바라보며 기다렸지만 남편은 오지 않았다.


김천동 산비탈에 움막을 짓고 할머니는 먼 먼 바다를 바라보며 24년을 기다렸다. 1970년, 할머니는 더 이상 기다릴 힘이 없어졌다. 할머니는 한쪽 다리마저 다쳐 절룩거리며 고향에 돌아왔다. 지팡이를 짚고서도 할머니는 걷기가 힘이 든다. 특히 버스를 오르내릴 때는 부들부들 떨며 시간을 끈다. 할머니의 사정 같은 것 알리 없는 운전기사가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치면 할머니는 더욱 사는 게 서러워진다.


한번은 윗골쪽에서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걸어오시기에 어디 갔다오시는가 물었더니, "빠스에서 더디 내린다고 저어쯤 실고 가서 내리놓잖애……" 하신다. 마을에서 1킬로나 먼 곳까지 끌고 가서 내려놓은 것이다. 내작년부터 북한에서 가뭄과 물난리로 동포들이 살아가기 어렵다는 소문들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맨날 들어온 그 소리가 그 소리로만 여겼다. 6·25 전쟁 이후 우리는 귀가 따갑도록 북한동포들의 참상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해마다 농사지은 건 당에서 다 빼앗아 가고, 한 식구끼리도 서로 감시하며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한다고, 교과서에서, 동화책에서, 라디오의 김삿갓 북한방랑기에서, 유치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웅변대회에서 "때려잡자, 김ОО!" 이렇게 자나깨나 들어온 소리다.


그래서 우리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어떤 소리도 북한소식은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정작, 요즘 들려오는 소식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배고픈 아이들이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기차역에서 50명이 얼어죽었고, 두만강가에다 거적에 싸서 버린 아이들의 시체가 줄을 잇고, 처녀들이 백만 원에 중국사람에게 팔려가고,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러 곡식을 훔쳐가고, 심지어 사람고기까지 먹는 끔찍한 일도 일어난단다.


올 여름까지6백 만에서 8백만이 굶어죽을 위기에까지 왔다고 한다. 8백만이면 북한주민 3분의 1이 죽는다는 말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어버이 수령님의 보살핌으로 세상에서 부러움 없이 살아가는 나라라고 큰소리치던 것이 모두 거짓말이었던가? 정말 기가 막힐 일이지 않는가. 너무도 오랜 세월 우리는 남의 나라 침략에 시달리고, 가뭄과 홍수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아왔다.


하지만 지나간 시절의 고생은 돌이킬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분단과 6·25전쟁까지는 그래도 외세에 의한 고통이라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다. 온 세상 지구 반대쪽까지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고, 팩스가 통하고, 전화통화를 할 수 있는 세상에, 한 땅덩어리 안에서 굶어 죽어 가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건 부끄러움을 넘어 죄악이다. 천만 이산가족은 바로 부모 형제인 직계가족들이다.


차를 타면 몇 십분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곳에 우리는 50년이 넘도록 서로의 소식도 모르고 살아왔다. 사람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어도 그게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의심하게 된 이상한 나라로 살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만 될까? 아직도 장벽은 두껍게 막혀있고 전화도 안 통하고 편지도 못한다. 제발 당장 통일은 못하더라도 서신연락이라도 주고 받게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얼마간 휴전선 한 귀퉁이라도 뚫어 굶어죽는 동포에게 밀가루라도 강냉이라도 보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조금씩만 나눠 보내면 올 여름 햇강냉이가 나면 굶어죽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하루 한끼씩 죽을 쑤어 먹더라도 한줌씩의 쌀을 보내 앞으로 몇 개월만 함께 고생을 하자. 비록 얼굴은 마주 보지 못해도 함께 나눠 준 쌀과 밀가루로 우리 한 겨레 한 동포라는 걸 확인하면서 살자. 그래서 이 땅에 다시는 한스러운 역사를 남기지 말자.

《녹색평론》제34호, 1997년 5-6월호)


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1937년 9월에 나는 일본 도쿄 혼마치(本町)의 헌옷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동무했던 아이들과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늘 외톨일 골목길에서 지내야 했다. 삯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저녁때면 5전짜리 동전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이때 나는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키도 작고 손도 조그만 히데코 누나는 항상 말이 없고 외로워 보였다. 함께 극장에 가면 고구마튀김을 수건에다 겹겹이 싸서 식지 않도록 품속에 넣어뒀다가 영화가 중간쯤 진행될 때 꺼내어 내 손을 더듬어 쥐어주던 그 따뜻한 촉감은 평생을 잊을 수 없다.


아무렇게나 흘러들어와 모여사는 빈민가 사람들의 가족구성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골목길 끄트머리 노리코네 아버지는 조선사람, 어머니는 일본여자, 노리코는 고아원에서 데려온 딸이었다. 건너편 집의 미치코는 주워다 키운 아이고 동생 기미코는 조선아버지와 일본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고 우리 앞집 일본인 부부도 양딸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한집 건너 경순이는 관동지진 때 부모를 잃고 거기서 식모살이처럼 얹혀살고 있었다.


경순이는 가끔 얻어맞아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우리집으로 쫓겨왔다. 어머니는 어루만져 달래주고 밥을 먹이고 재워줬다. 경순이에 대한 추억은 이따금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스무살이 넘었을 것이라 했지만 경순이는 제 나이가 몇 살인지 몰랐다. 오테다마(팥주머니)를 만들자면 보통 팥알을 넣는데 경순이는 그럴 수 없어 우리집 추녀밑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만들어진 자잘한 돌멩이를골라 만들곤 했다.

소설 《몽실언니》는 혼마치에 살았던 히데코 누나이기도 하고 경순이 누나이기도 하고 그외의 가엾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1946년 해방 이듬해 우리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때, 조선인연맹에 가입했던 형님 두분은 다음에 돌아오기로 했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울타리의 동백꽃이 피던 3월에 후지오카의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차에 오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끝내 떼밀려 태워졌고 차는 떠나고 말았다. 만 8년 6개월 동안 어렵지만 정들어 자라온 땅을 떠난다는 것은 가슴이 쓰리고 서러운 일이었다.


1946년 4월은 보릿고개가 심했다. 거듭된 흉년으로 웬만한 집 모두가 쑥과 송피로 죽을 끓여먹고있었다. 그것도 하루 세끼 먹는 집은 드물었다. 만주와 일본에 갔던 동포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당장 거처할 집이 없는 우리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외가가 있는 청송으로 갔고 아버지와 누나는 안동으로 갔다. 함께 모인 것은 47년 12월이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네군데 다녔다. 도쿄의 혼마치에서 8개월, 군마켕에서 8개월, 조선에 와서 청송에서 5개월, 그리고 나머지는 안동에서 졸업을 했다. 그것도 잇따라 다닌 것이 아니라 몇 달씩 몇 년씩 쉬었다가 다니는 바람에 1956년 3월에야 겨우 졸업을 했다.


아버지의 소작농사만으로는 월사금을 못내어 어머니가 행상을 하셨다. 한달에 여섯 번씩 가시는데 장날 갔다가 다음 장날 돌아왔다. 그러니 자연히 밥짓는 일은 내가 맡아야 했다. 아침밥을 지어먹고 설거지하고 학교 가자면 바쁘게 달려가야 했다. 그때 열살 때부터 밥을 짓는 것을 배웠으니 훗날 혼자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시작한 것이 나무장수였고 다음이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그리고점원노릇.

결핵을 앓은 것은 열아홉 살때부터였다. 처음엔 숨이 차고 몹시 피곤했지만 그런대로 두해를 더 버티다가 결숫 1957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마을에는 객지에 갔다가 결핵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나 말고도 10여명이나 되었다. 식모살이갔던 성애와 철도기관사 조수로 일하던 태호, 산판에서 일하던 청수, 기덕이, 옥이, 성란이. 우리는 이따금 나오는 항생제를 배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허탕치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약이 필요한 만큼 공급되지 않아서였다.

하나 둘씩 차례로 죽어갔다. 열일곱살의 기덕이는 빨간 피를 토하다 죽고, 열다섯살의 옥이는 주일학교 동무들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다 죽고 마지막 나 혼자만 남았다. 나는 늑막염과 폐결핵에서 신장결핵 방광결핵으로 온몸이 망가져갔다. 병을 앓는 나도 고통스럽지만 식구들의 고통은 더 심했을 게다. 어머니는 내가 아니었으면 좀더 오래 사셨을 텐데 자식 병구완하시느라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첫아들을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사산(死産)하시고 셋째는 열일곱살 때 잃고, 둘째와 넷째는 해방 이듬해 헤어진 뒤 결국 다시 만나보지 못하셨다. 그런 어머니는 1964년 가을에 세상을 뜨셨다. 몸져 누우시기 전날까지 병든 자식 걱정하며, 헤어진 자식 기다리며 사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나는 세상이 싫어졌다. 그래서 이 무렵 나는 동생을 결혼시켜야 하니 어디 좀 나갔다 오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무작정 집을 나왔다.


1965년 4월에 나갔다가 8월에 돌아왔다. 그때 대구에서는 이윤복군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영화화되어 거리마다 극장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다. 나는 대구에서 김천으로, 상주로, 점촌, 문경, 예천으로 3개월을 떠돌아다녔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 생활인 걸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병 한가지를 더 얻었다. 그때부터 앓기 시작한 부고환결핵으로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열이 올랐다. 산길에 쓰러져 누워있다보면 누군가가 지나다 보고 간첩으로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 사이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이곳 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은 1967년이었다. 전에 살던 집은 소작하던 농막이어서 비워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한평생 당신들의 집이없었다. 가엾은 분들이다.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건물의 토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곤 했다. 그래도 그 조그만 방은 글을 쓸 수 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개구리들이 그 구멍으로 뛰어들어와 꽥꽥 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지금 우리집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심성이 착해서 좋다. 이름을 '뺑덕이' 라 지었더니 아이들이 왜 하필이면 뺑덕이라 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어미가 훨씬 인간적인 가엾은여인이어서 좋기 때문이다.


예배당 문간방에서 16년 살다가 지금은 이곳 산밑에 그 문간방과 비슷한 흙담집에서 산다. 사는 거야 어디서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과 굶주림, 그 속에서도 과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앞서간다는 선진국은 한층 더 심하다. 그들은 침략과 약탈과 파괴와 살인을 한 대가로 얻은 풍요를 누리는 천사처럼 보이는 악마일 따름이다.

우리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선진과 후진이 없어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분단도 하루속히 무너뜨려야 한다. 경제적 후진만으로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을 먹은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가 구분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 아닐까.

누가 이렇게 물었다.

"장가는 못가봤는가요?"
"예, 못가봤습니다."
"그럼, 연애도 못해밨나요?"
"연애는 수없이 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하고도 아이들하고도 강아지하고도 생쥐하고도 개구리하고도 개똥하고도……"
우리들의 하느님 / 녹색평론사 / 1996 에서


토종 씨앗의 자리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부들은 다음해 농사지을 씨앗을 갈무리해야 한다. 나락씨는 봉태기에 담아 시렁에 얹어두고 조와 수수는 이삭째 엮어 방 안 보꾹에 매달아 놓는다. 참깨씨, 팥씨, 녹두씨 같은 자잘한 것은 무명주머니에 담아 역시 보꾹 서까래에 달아 놓는다. 목화씨는 박두구미에 담아 바깥 처마 밑에 매달아두고 삼(대마초)는 촘촘하게 엮은 짚오쟁이에 담아 역시 서까래에 매단다. 어떻게 해서라도 쥐한테 먹히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해 씨앗이 썩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감자씨와 토란씨는 무를 묻은 땅 속에 함께 묻어놓는다.


농부가 여름에 농사를 지어 추수를 끝냈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다. 다음해에 또 심고 가꿀 씨앗까지 갈무리를 하고 난 다음에야 마음놓고 겨울을 난다. 우리 인간들이 남자 여자 서로 만나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라 가정을 이루어 손자를 보고 나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제야 대를 이을 후손이 생긴 것에 마음놓고 죽는다.


우리집 마당가 은행나무엔 지난 겨울 까치가 집을 지었다. 2월 한 달 동안 조금씩 조금씩 나뭇가지를 물어다 쌓아가더니 6월에야 새끼 한 쌍을 키워 떠나보냈다. 이땅 위에 살아 있는 목숨은 이렇게 하나같이 자손을 낳아 키우며 퍼뜨린다.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정작 수박농사 짓던 농부들은, 그런 다음해 수박농사를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했다. 한편으론 무슨 요술 같은 수박을 만들겠나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씨 없는 수박은 소문만 떠돌았지 그 시절 사람들은 구경조차 못 했다. 그런데 이제는 씨 없는 것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도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농부들은 해마다 씨앗을 그냥 사다 쓰면 된다. 씨앗은 종묘사에서 팔고 집에서 애지중지 보관하는 농부는 아무도 없다. 아예 씨앗을 보관했다가 심는 것을 잊어버렸다.


<문학동네> 지난 여름호에서 김진경 선생은 콩씨를 심었더니 싹이 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내 경험은 조금 다르다. 몇 해 전에 어째서 씨앗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지 궁금해서 그해 말린 고추에서 씨앗을 받아뒀다가 다음해 텃밭에다 직접 심어보았다.


씨앗은 싹이 트더니 아무 탈 없이 자랐다. 가지가 뻗어나가고 꽃이 한두 개쯤 필 때까지는 정상으로 자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하게 문제가 생겼다. 종묘사에서 사다 심은 것과 비교해보니 사다 심은 고추 포기엔 마디마디 고추가 열리는데, 내가 직접 받아 심은 것은 두세 마디씩 건너 띄엄띄엄 열리는 게 영 시원치 않았다. 고추 열매의 크기는 별로 다르지 않고 고추 맛도 괜찮은데 도무지 열매가 달리지 않는 것이다. 거름을 아무리 줘도 가지만 무성하지 꽃이 안 핀다. 결국 종묘사에서 사다 심은 고추에 비해 십분의 일도 열리지 않았다.


왜 이런 걸까? 이것이 바로 씨앗 장수들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땅호박이라고 하는 채소용 호박은 직접 열매에서 씨앗을 받아 심으면 잎만 무성하지 아예 열매는 맺지도 않았다. 참으로 요술 같은 세상이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원은 매점매석으로 돈을 벌어들였다지만 첨단과학시대는 더욱 지능적이다. 이젠 농민들은 이런 지독한 장사꾼들에게 꼼짝없이 얽매여 살 수 밖에 없다. 농민들은 해마다 각종 농약에 비료에다 비닐 같은 농자재와 씨앗까지 모든 걸 돈을 주고 사야 한다.


며칠 전엔 우리 마을에서는 새 고추건조기를 주문하라고 이장님이 마을 스피커를 통해 알려주었다. 얼마 안 있으면 양파씨에 겨울을 나는 비닐하우스 감을 사라고 할 것이다. 1월이면 고추씨 장수가 오고 이어서 각종 채소와 참외, 수박씨 장수가 온다. 돈 쓸 데가 끝이 없다.


중간 고샅집 윤씨 어르신네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 혼자 계시는 집에 가봤더니 할머니가 그러신다. "저것 봐, 영감이 죽으면서 남긴 거야." 마당가 둘레엔 경운기를 비롯해서 고추건조기, 관리기, 이앙기, 이런저런 농기계들이 널려 있고 모두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옛날 소작농사를 지을 때는 가을이면 타작마당에서 양쪽에 가마니를 놓고 곡식을 나누었다. 먼저 땅주인 쪽 가마니에 한 말 붓고 다음엔 소작인집 가마니에 한 말 부었다. 그럿게 번갈아 한 말씩 한 말씩 똑같이 나누었다. 그런데 타작마당에는 으레 북데기라고 해서 찌꺼기 곡식이 남는다. 좀 욕심 많은 땅주인은 그 찌꺼기 곡식마저 정확히 나누어 가졌다.


나는 어린 시절 보아온 소작농사의 조건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땅임자니까 반을 가져가는 것이 꼭 나쁘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땅임자는 빌려준 것이니 오히려 고맙다고 생각했지 다른 나쁜 감정은 없었다. 다만 가을이면 힘들여 거둔 곡식을 반씩이나 주어버리는 게 아깝고 섭섭하다는 마음은 들었다. 부모님들도 언제나 우리 땅에서 온근농사를 지어보고 싶어하셨지만 역시 땅주인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지금은 이 소작농사가 도지(도조)라고 해서 몇 년씩 임대료를 내고 있다. 사용료는 그다지 비싸지 않다. 비교적 좋은 땅이라도 일 년에 이백 평당 십 만원이 조금 넘는다. 그래서 남의 땅이라도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게 빌려 쓰고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옛날에는 농사가 식량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돈을 얻기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한두 가지 작물에 집중되어 오곡농사라는 게 없어졌다. 이곳 안동 지방에서는 고추농사와 양파농사가 주된 농사다.


그러니 심으면서 값을 먼저 계산하게 된다. 지나치게 풍년이 들어도 값이 폭락하니 그것도 걱정이다. 사람 살아가는 데 걱정 없는 곳이 어디 있겠냐만 농산물을 거두어 값이 어떻게 되나 걱정부터 하는 건 옛날에는 없었다. 그냥 풍년만을 들면 즐거웠다. 그런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농사꾼도 장사꾼이 되어버렸다.


돈을 계산하게 되면 밑지는지 남는지 따지게 된다. 좀더 남기기 위해서는 깍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장사꾼 속이는 건 하늘도 눈감아준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지금 농사꾼이 허생원처럼 매점을 하거나 매석을 하는 직업 장사꾼이란 건 아니다. 농사꾼은 어떻게 해서라도 소비자가 좋아하는 농산물을 생산해내는 것이 목적이다. 사먹어주지 않으면 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사꾼은 소비자라는 또다른 상전을 모시게 되었다.


언젠가 북한에서 양계장을 닭공장이라 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닭공장이란 말이 솔직할지는 모르지만 우리네 정서에는 아무래도 살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농촌의 모드든 것이 공장이 되어버렸다.


아랫마을 김씨가 처음 제초제를 쳤을 때 풀이니 벌레니 모조리 죽어가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제는 면역이 생겨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 농촌의 중심이 이렇게 변한 것도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세상에 착한 사람이 별로 없다. 착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없어진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먹어라, 입어라, 마셔라, 신어라, 발라라.....이렇게 돈 쓰게 하는 광고 천지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어찌 보면 강요하다 못해 협박을 하는 듯도 하다. 마치 그렇게 안 하면 좋지 못할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있다.


요즘 시골 버스를 타보면 아주 깨끗해졌다. 시골 사람들도 옷차림이 말쑥하게 세련되어졌다. 겉모습만으로는 잘사는 선진국처럼 따라가고 있다. 시골 사람도 고무신 신은 사람은 없다. 깨끗한 구두에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짧은 치마에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를 하나같이 짧게 파마를 했다. 남자들도 여느 도시의 신사처럼 차림새가 깨끗하다.


전에는 신문지를 오려 뒤를 닦는 것도 황송했는데 이제는 부드러운 두루마리 화장지가 익숙해졌다. 텔레비전도 작은 것은 답답해서 못 보겠다고 일흔 살이 넘은 큰대추나무집 할머니도 대형 텔레비전으로 바꿨다. 텔레비전에서 선전하는 대로 모두 잘 따라 살고 있다.


마을 집들도 깨끗해지고 골목길도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집집마다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뺍자구라고 하는 질경이풀이 돋아나고 봄이면 민들레가 노랗게 피던 고샅길도 모두 사라졌다. 시멘트에 뒤덮인 속에서 모두 질식해 죽었을 테고, 거기다 빈틈이 있는 곳에 풀이 돋아나면 여지없이 제초제를 쳐버린다. 제초제는 집 안 마당에도 어디에도 뿌려대어 아예 상비약처럼 되어버렸다.


수돗물이 들어오고 나서 집 안에 목욕실이 생기고 세탁기도 생겼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편리해졌고 풍요로워졌다. 이런 것을 아랫마을 손씨가 우리집까지 목욕을 하러 왔다. 우리집엔 따로 목욕실이 없어 마당가 수돗물로 몸을 씻었다. 손씨는 아랫마을에 수도관이 고장나서 수리를 하느라 모든 집에 물이 나오지 않아 우리집으로 왔다고 했다. 들에서 흙투성이가 되도록 일을 하고 왔는데 씻을 물이 없으니 답답했을 게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농촌의 개울물이 몸을 씻을 만큼 깨끗한 곳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집 안이 깨끗해진들 개울물이 시궁창처럼 더럽다면 그게 어떻게 농촌이 되겠는가. 참으로 모순된 삶이 오늘의 농촌인 것이다. 유리알처럼 맑았던 시냇물은 이젠 아무 데도 없다.


우리가 걱정하는 씨앗 문제는 한 부분일 뿐이다. 아이엠에프(IMF) 당시 우리 종묘회사가 모두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고 걱정을 했다. 우리 농민의 삶의 일부가 외국 자본에 예속된 것이다.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우리 농촌의 주체적 삶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옛날엔 농민이란 말을 안 쓰고 '여름지기'라고 했다.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열매는 모든 목숨이 먹어야 살 수 있는 귀한 생명의 씨앗이다. 밥이 하늘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 있었을 게다. 하늘이란 말은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우리 농민들이 수백년, 수천년 동안 그토록 알뜰살뜰 보관했던 우리 토종 씨앗이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렸지만 지금이라도 제자리를 찾았으면 한다. 토종 씨앗은 오랜 세월 우리 기후와 토질에 맞게 진화되어 웬만한 질병에도 면역이 생겨 있다. 그래서 농약이 없어도 깨끗하게 자라 열매를 맺어 탈없이 먹고 살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토종 씨앗 이름들을 적어보면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 돼지나락, 까투리나락, 쌍두배나락, 오두바리수수, 눈까막이수수, 개파리콩, 어금니콩, 게발차조, 개똥차조, 물푸레차조, 오누이강냉이, 모두 정답다. 감자는 자주감자, 흰감자, 분홍감자 세 가지가 있었다. 돌아가신 박실 어르신네는 자주감자를 자지감자라 하고 분홍감자를 보지감자라 했다.


"야아들아, 자지감자캉 보지감자캉 한데 두지 마라. 바람피운다."

그렇게 한바탕 웃었다.


이렇게 우리 토종 씨앗엔 웃음이 있고 시(詩)가 있고 동화가 담겨 있었다.

우리 씨앗을 잃어버리면 우리 혼도 함께 잃어버릴 것이다.

문학동네 / 2006년 가을호


몽실언니 머리말

1984 초판 머리말

가끔 운동장이나 골목길에서 조그만 아이들에게 큰 아이들이 싸움을 시키는 것을 봅니다. 뒤에서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자꾸 이간질하고 부추겨서 결국 치고 받고 싸우게 만듭니다. 그럴 땐, 싸우는 아이들보다 뒤에서 싸움을 시키는 아이들이 얄밉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물건이나 돈을 훔친 사람을 '도둑놈'이라고 부르며 욕을 합니다. 아 책에 나오는 몽실이라는 주인공도 한쪽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된 것을 아이들이 놀려 줍니다. 몽실은 자기가 절름발이가 되고 싶어 일부러 다친 것도 아닌데, 결국은 남의 놀림감이 되는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의 것을 훔친 사람도 일부러 도둑이 되고 싶어 훔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괴로운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작은 아이들을 큰 아이들이 싸움을 시키듯이, 도둑질도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일을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까닭은 덮어놓고 도둑놈만 나쁘다고 욕하고 벌을 줍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몽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한 것과 나쁜 것을 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딴 데 시집을 간 어머니도 나쁘다 않고 용서합니다. 검둥이 아기를 버린 어머니를 사람들이 욕을 할 때도 몽실은 그 욕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나무랍니다.


몽실은 아주 조그만 불행도, 그 뒤에 아주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실은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라나면서 몸소 겪기도 하고 이웃 어른들에게 배우면서 참과 거짓을 깨닫게 됩니다.


아주 조그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 몽실 언니한테서 그 조그마한 것이라도 배웠으면 합니다. 몽실 언니는 제가 너무도 어렵게 쓴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쓴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끝까지 읽어 주셔요.

1984년 4월 지은이




개정판을 내면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 아침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바로 이웃 나라 중국에서 열 여섯 살 고등학생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십 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다그치자 화가 난 아들이 굵은 막대기로 어머니의 정수리를 내리쳐서 숨지게 했다는군요. 언제나 ‘천천히’ 하면서 느긋하게 살아가던 중국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요?

옛날 어린 시절, 일본 토오꾜오 시부야의 변두리 동네 아이들이 조그만 흙 무더기나 언덕배기에 올라가 부르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산꼭대기 대장은 나 하나뿐이다.
뒤에 올라오는 놈은 차 던져 버려라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노래군요. 육십 년이 지난 지금, 일본 아이들이 아직도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요?


《몽실 언니》는 1981년 울진에 있는 조그만 시골 교회 청년회지에 연재를 시작해서 3회쯤 쓰다가 《새가정》이라는 교회 여성잡지에 옮겨 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열 번째 꼭지까지 썼을 때 갑자기 연재가 중단되었습니다. 두 달을 쉬고 나서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용은 아홉 번째와 열 번째 꼭지에 나오는 인민군 이야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이상 잡지에 싣지 못하게 한 것을, 앞으로 잘못 쓴 것은 모두 지울 테니까 계속 연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문화공보부에 사정을 해서 겨우 허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열 한 번째 꼭지는 원고지 열 장 분량이 잘려 나간 채 연재가 되었습니다. 잘려 나간 부분의 내용은 인민군 청년 박동식이 몽실이를 찾아와 통일이 되면 서로 편지를 하자고 주소를 적어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자 그 뒤부터는 이야기 줄거리까지 조금씩 고쳐 써야만 했습니다. 박동식이 후퇴를 하다가 길이 막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와 빨치산이 된 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몽실이한테 보낸 편지엔 이런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몽실아, 남과 북은 절대 적이 아니야. 지금 우리는 모두가 잘못하고 있구나……" 몽실이가 편지를 받아 읽고 나서 주저앉아 흐느끼면서 최금순 언니, 박동식 오빠를 부르는 대목도 모두 지워야 했습니다. 그러고는 난남이를 양녀로 보내고 나서 삼십 년을 훌쩍 건너뛰어 부랴부랴 이야기를 끝내야만 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1천장 분량으로 쓰려고 했는데 겨우 7백장으로 끝을 맺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창작과비평사에서 개정판을 낸다는 연락을 받고 지워져 나간 모든 장면을 다시 살려보려고 했지만, 그동안 많은 독자들이 읽었고 이제 와서 고치는 것도 별로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런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이 책을 읽는 여러 독자의 이해를 얻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단기 4333년 3월 1일 권정생 씀




작가의 말

1923년 무서운 관동지진이 덮쳤을 때 조선 사람 대략 5천 명이 죽었다고 했다. 영순이 누나는 그때 갓난아기로 혼자 살아남아 친척 되는 아주머니 손에서 자랐다. 1944년까지 우리 식구는 토오꾜오의 시부야 변두리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 스무살이나 다 된 영순이 누나는 우리 집에 가끔 놀러왔는데 덩치만 커다랬지 아직 열다섯 살 어린애 같았다. 겨울이면 얼어터진 손등을 우리 어머니께 내밀며 질금질금 울기도 잘했다. 그 누나를 마지막 본 것은 해방이 된 뒤 청송 어느 국밥집 부엌데기로 일할 때였다.


빨치산이었던 춘자네 아버지는 경찰에 끌려가 죽고 집안은 온통 난리가 아니었다. 장독대가 모두 깨지고 세간이 불태워지고, 할머니는 넋이 나간 듯이 먼산만 바라보시다가 돌아가셨다. 춘자가 세 살때 엄마는 춘자를 데리고 어디론가 멀리 떠났다.


6·25때 송서방 아저씨는 인민군 부역자라고 해서 너무 많이 두들겨맞아 미쳐서 발가벗은 채 온동네를 뛰어다니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대추나무옥분네도, 큰우물집 인수네도 모두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학교에서 가르쳐준 대로 나도 반공주의자였다. 그러다 60년대가 되면서 차츰 생각이 달라졌다. 반공도 용공도 아닌, 다른 무엇인가 고약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 영순이 생각, 송씨 아저씨 생각, 춘자랑 인수, 옥분이, 그애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두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 『몽실언니』를 쓰면서 나도 많이 울었다.


어쩌면 이 작은 이야기가 통일의 밑거름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고통스럽게 살아온 전쟁의 어린이들에게 조금 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싶었다.


2001년 육이오 쉰한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