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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 2 - 이오덕 씀

정우가 저녁에 와서 말했다
- 권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요
이렇게 말해요
아버지 밥 못 잡수신다고 하거든
좀 야단쳐.
죽은 먹어도 헛거야
약이고 주사고 다 소용없어.
밥 안 먹으면 안 돼.
나도 먹고 토하고 또 먹고 토하고
그래도 죽기살기로 먹었어.
한 숟깔 떠 넣고, 오백 번 씹으면
죽보다 더 잘 넘어가
어떻게 해서라도 밥 드시도록 해.
그랬어요.
정우 말 듣고 눈물이 났다.
권 선생이 지금까지 그렇게
내 곁에 있는 줄 몰랐다.
2003. 6. 17 / <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가운데

권정생과 이오덕

곽병찬 (한겨레신문)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은 포숙아를 그리며 “날 낳으신 것은 어머니지만, 나를 알아준(知己) 것은 포숙아”라고 했다. 거문고의 신 백아는 종자기의 죽음 앞에서 “내 소리를 알아줄 사람(知音)이 없으니 이제 무슨 소용인가”며 줄을 모두 끊어버렸다. 두 고사는 관포지교(管鮑之交)와 백아절현(伯牙絶絃)으로 남아 있지만, 지극한 신뢰와 헌신으로 쌓아올린 이오덕과 권정생의 우정을 오롯이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오덕은 그를 잊을 수 없어 당신의 무덤가에 그의 시비를 세우도록 했고, 권정생은 그가 떠나자 한동안 사람도 원고지도 마주하지 않았다. 이오덕은 그의 작품과 삶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고, 권정생은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제가 여태껏 살아올 수 있었을까요”라고 고백하곤 했다. 둘은 서로에게 살아가는 이유였다.


이오덕이 안동 일직면 조탑리로 권정생을 찾아간 것은 1972년 가을. 환상과 허구로 도배질한 동화들 틈에서,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삶의 진실을 건져낸 동화 <강아지똥>을 읽은 뒤였다. 시골교회 종지기였던 지은이는 결핵이 골수에 스며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했다. 이오덕은 그에게서 ‘우리 동화의 희망’을 발견했고, 권정생은 그에게서 진실로 믿고 의지할 사람을 찾았다. “바람처럼 오셨다가 많은 가르침 주시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선생님 앞에서 마음 놓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 선생님을 알게 돼 이젠 외롭지 않습니다.”(권정생) “산허리 살구꽃 봉오리가 발갛게 부풀어 올라,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걸 보고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괴로울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해봅니다.”(이오덕)


이후 이오덕은 그의 작품을 알리고 그를 지키고자 서울로 대구로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다. 당시만 해도 원고료를 주는 출판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제가 무능해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저 용서를 바랍니다.” “우편환으로 7천환을 부쳐드립니다. 급한 대로 양식과 연탄 같은 것을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 더 보내주시면, 상경하는 길에 어느 잡지에나 실리도록 하겠다”고 욕심을 내곤 했다.


이오덕 덕분에 권정생은 창작에 몰두했다. 전신결핵으로 하루를 버티는 것도 기적만 같았던 그였다. “누워 있지도,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가 16일간 계속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른다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몽실언니> 등을 썼다. “이틀간 가까스로 원고지 20장을 썼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비참해서 쓰기가 고통스럽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이오덕은 “사람 같지 않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한없이 미워진다”며 자책하곤 했다.


3년 전 이오덕은 떠났다. 권정생을 두고 떠나는 게 못내 걱정됐던지 이런 유언을 했다. “괴로운 일, 슬픈 일들이 많아도 하늘 보고 살아갑시다. 부디 살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담에 때가 되면 선생님이 걸어가신 그 산길 모퉁이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만나 뵙겠다”고 답했던 권정생. 그도 엊그제 이승의 모퉁이를 돌아섰다.


권 선생의 유골이 뿌려진 조탑리 빌뱅이 언덕, 이 선생의 무덤이 있는 충주 무너리 마을 어디에도, 이제 두 분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살구꽃은 지고 없다. 대신 그 산모퉁이 숲 그늘에, 찔레꽃이 한창일 것이다. 가난한 아이를 닮은 꽃, 포근한 향기로 그 아픔을 위로하던 꽃. 사랑과 헌신, 눈물과 감동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두 분은 찔레꽃 향기로 남았다. 우리는 언제 다시 그런 인연을 볼 수 있을까.


아동문학가 권정생선생의 흙집을 찾아보니

“정생이 집? 저기제, 저기.”

낮술로 불콰해진 마을 어귀의 한 촌로는 서울에서 온 객의 소매를 끌더니 저 너머 둔덕을 가리킨다. 일러준 대로 고샅길을 따라 올라가니 과연 ‘권정생’이란 종이 문패를 붙인 토담집이 나타났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67)의 5평 남짓한 집은 마을의 가장자리에 나앉아 있었다. 울도 담도 없이 홀로 떨어진 누옥. 붉은색 슬레이트 지붕의 이 흙집은 주인의 검박함보다 먼저 궁기를 떠올리게 했다.

툇마루가 없는 탓에 창호지 붙인 방문을 열면 바로 바깥이다. 쇠 문고리와 돌쩌귀는 녹이 잔뜩 슬었고, 모퉁이에 놓인 호미, 낫, 종다래끼, 쇠톱에는 손길이 간 지 오래인 듯 마른 흙이 달라붙어 있다. 인적이 끊기지 않았음을 확인해주는 건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 한 짝과 희미하게 돌아가는 전기계량기뿐이다. 아동문학계 큰 어른의 집이라 하기엔 보는 이가 면구스러울 정도다.

“권선생님 계신가요?” 몇 번을 불러도 인기척이 없다. 19살부터 앓은 폐결핵 탓에 병을 달고 산다는 그이기에 글쓸 때 빼고는 꼼짝없이 구들장 신세일 터. 권선생의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문을 열고 재차 방문객의 존재를 알리자 저 안쪽에서 “누구요?”하는 쇠잔한 목소리가 들린다.

핼쑥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문지방 너머에 꼿꼿이 선 채로 눈을 끔벅였다. 예상했던 대로 취재 목적의 방문이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봄비가 추적추적 흩뿌리고 있었지만 손님을 안으로 들일 태세가 아니다.

“할 말이 없슴미더. 기냥 가시이소.” “신문에 나오고 할 게 없슴미더.”

그는 계속 양손을 비비고 매만지며 송구한 태를 냈다. 몇 마디 말을 튼 차에 신발이라도 벗으려 하자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의 단단한 고집 앞에 입가를 맴도는 많은 질문들은 속절없이 발이 묶였다. ‘어린이날 특집’ 삼아 찾아오긴 했으나 이쪽 욕심만 차린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는 방 안에서, 이쪽은 문 밖 처마끝에 선 채로 한동안 서로의 어색함을 견뎠다. 그러다 간간이 이쪽에서 가볍게 물었고, 그는 그 물음마저 박절하게 내치진 않음으로써 최소한의 손님 대우를 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냥 가끔 숨 쉬러 밖에 나오는 정도지요.”

-친분을 유지하시던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많이 적적하시겠습니다.

“그래도 그분이 남긴 책이 곁에 있으니까 괜찮지요.”

-건강은요.

“이전에는 안그렀터이만 인자는 (육신의) 고통을 참아내기가 힘들어요. 이렇게 서 있으모 몸에 열이 잔뜩 오릅미더.”

-몇 년 전에 생긴 (중앙)고속도로 때문에 여기까지 쉽게 올 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가 생겨 더 나빠졌어요. 농로(農路)도 마이 없어지삘고.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술 묵고도 맘놓고 댕겼는데, 지금은 차가 쌩쌩 달리고 하니까 조심 조심해야 함미더.”


어 쩌면 이야기를 샘솟게 하던 산골마을을 고속도로가 휑하니 뚫어놔서 불만인 것인지도 모른다. 권선생은 “인자 고마 하입시더”라며 조용히 방문을 걸어 닫았다. 다시 정적이다. 처마 밑에서 바라본 집앞 뜰에는 민들레가 곳곳에 피어 있다. 그의 1969년 데뷔작 ‘강아지똥’에서 민들레는 설움과 소외를 딛고 일어선 ‘희망’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그의 동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강아지똥처럼 서글프고 보잘것 없는 존재가 많다. 매맞는 할미소, 자식들 잃은 엄마, 잡혀죽는 양….

그로 하여금 ‘무명저고리와 엄마’ ‘바닷가 아이들’ ‘몽실언니’ 등 100편이 넘는 생생한 동화를 쓰게 한 힘은 ‘진실’이라고 권선생의 지인들은 말한다. 30년 지기인 숭실대 이반 교수(극작가)는 “권선생은 ‘어린이라고 해서 아름다운 것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전달해 줘야만 진정한 아동문학이 된다’고 믿고 있다”고 전했다.

많은 책을 냈으니 제법 돈을 모았을 법 한데도 그는 지독히 가난하다. “지금보다 더 크거나 화려한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환갑때 친구들이 “그동안 펴낸 책을 모아 전집으로 묶자”고 제안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책 한권씩 내는 조그만 출판사는 죽는다”는 게 이유였다. 무공해 식품이라며 독자들이 가져온 선물도 같은 이유로 받지 않았다. “내가 이런 걸 먹으면 동네 구멍가게 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요 즘 그는 세상사에 가끔씩 탄식도 보탠다. 끝내 사랑이 이긴다고 믿는 그의 입에서 “시상에 정의가 어디 있노? 힘이 정의지…”라는 말까지 나왔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을 때였다. 최근에는 허락도 얻지 않고 자신과 이오덕 선생간에 오간 편지글을 책으로 펴낸 한 출판사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책을 모두 수거하는 것으로 일은 매듭됐지만 지금은 정작 손해를 본 출판사쪽에 미안해하고 있다.

올 여름 출간 예정인 ‘금강산 호랑이’(가제)는 어쩌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기력이 달려 책상머리에 앉아 있기조차 힘든 탓이다.

뭔가 허전해 다시 문을 몇 번 두드렸지만 무반응이다. 어느새 빗발은 더 굵어졌다. 젊은 시절 그가 ‘종지기’ 생활을 하며 살았다는 함석지붕의 시골교회가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안동/글 조장래·사진 서성일기자 joy@kyunghyang.com〉 / 입력: 2004년 04월 30일 17:32:12


20 년 전의 방문

권정생 선생하면, [몽실 언니]를 지은 작가로, 또 교과서에도 나오는 동화 [강아지똥]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어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이십년 전에는 그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이를 내게 처음 소개해주신 분은 작고하신 이오덕 선생이다. 이오덕 선생은 주지하다시피 평생 동안 어린이문학의 정립과 글쓰기에 혼신을 다하신 분이다. 이오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팔십년 대 초 내가 웅진출판사 편집장을 지낼 때였으니 이십년이 훌쩍 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그때 나는 [어린이 마을]이라는 종합교육서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 들어갈 동화를 좀 추천해 달랬더니 서슴없이 바로 권선생의 그 [강아지똥]을 추천해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 말씀이, 그이는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종지기를 하며 지내는데, 거처가 되는 작은 방에는 생쥐가 와서 함께 밥을 얻어먹고 가는가 하면 여름에는 함께 자도 유독 그이에게만은 모기가 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약간 반신반의 하였지만 이오덕 선생이 누군가. 그런 농담이나 실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실 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면 그런 고지식한 어른이 아니던가.


아무튼 나는 약간 긴 [강아지똥]을 저학년 아이들이 읽기 쉽게 다소 줄이고 다듬은 다음, 그것을 작가 본인에게 허락받기 위해, 겸하여 인사도 드릴 양 하여, 권선생 더러 서울 나들이라도 한번 하셨으면 했는데, 이오덕 선생의 말씀인즉슨 본인의 몸이 불편하셔서 수십년째 일체 먼길 외출을 삼가시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줄인 원고를 들고 그이가 계신 안동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추수도 끝난지 한참 지난 어느 늦가을이었다.


나는 예의를 차린답시고 평소에 하지 않던 양복에 넥타이까지 한 정장 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이오덕 선생이 막연하게 가르쳐주신 주소를 따라 권선생을 찾아 떠났다. 이오덕 선생이 가르쳐주신 주소로 말할 것 같으면, 안동에 가서 김서방을 찾아보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 말하자면 안동군 일직면에 가서 거기 교회에서 종지기를 하는 동화작가 권아무개를 찾아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그런 것을 꼬치꼬치 묻고 점검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가보면 만나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냥 나섰던 것이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뚫려 지방 어디를 가든 횅하니,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을터지만 그때만 해도 안동을 가려면 버스를 타고 지방 도로를 따라 왼종일을 달려야 했다.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국도에는 늦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다. 안동에 도착하여 다시 일직면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한참을 달려서 어딘가에서 내렸다.


그리고나니 약간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어디 가서 물어볼 마땅한 데도 없었다. 그래서 우선 다짜고짜 아무 구멍가게나 들어가서 이 부근에 동화 쓰시는 권아무개 선생이라는 분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가게 안에 앉아있던 촌로들 몇이 고개를 외로 틀고 서로 바라보며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교회에서 종을 치며 사신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이들의 눈빛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가만있자.... 저어기 사는 그 영감인지 몰라.”

그리고는 안노인 한분이 일어나 문 밖으로 나오며 길 끝 어딘가를 가르키셨다. 감나무가 심어진 길 따라 가면 마늘밭이 나오고 그 밭 옆으로 조금 더 가면 교회 십자가가 보일 것인즉 거기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안노인의 가르침 대로 한참동안 걸어갔다. 과연 저 만치에 양철지붕 끝에 얌전히 고개를 내어 밀고 있는 십자가 하나가 보였다. 그곳으로 가보니 가꾸어진 교회라기 보다는 그저 허름한 농가처럼 생긴 작은 건물과 옛날식 종루가 서있는 비좁은 마당이 나타났다. 나는 마치 초짜 도둑질이라도 나선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작은 마당에 붙은 방의 툇마루에 늙수레한 남자어른이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허름한 옷에 고무신을 신은 그이는 비쩍 말랐지만 한 눈에도 매우 기품 있고 평화로운 인상을 한 사람이었다. 나는 첫눈에 그가 바로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내가 찾아왔던 바로 그 권정생 선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이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그이는 내가 서울 출판사에서 원고 허락 차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그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이의 방은 사방에 온통 책꽂이 없이 아슬아슬하게 쌓아둔 책 때문에 그나마 비좁은 방이 겨우 두 사람이 앉아있는데도 무릎이 서로 닿을 정도였다. 윗목에는 일인용 밥통 하나와 그릇 몇 개, 고무줄로 밧데리를 뒤에서 묶어놓은 낡은 라디오 하나가 있었는데 얼른 보아도 살림은 그게 전부였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었더니 과연 이오덕 선생의 말씀대로 그이가 식사할 무렵이면 생쥐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 나와 함께 밥을 먹고 가곤 한다는 것이다. 어둑한 방에는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독특한 내음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나는 나의 양복 차림이 어쩐지 이 방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가방에서 가져온 원고를 꺼내 선생에게 보여드렸다. 그이는 돋보기를 쓰고 가만히 원고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됐다는 뜻이었다. 나는 속으로 출장(?) 온 보람을 느끼며 호주머니에서 원고료가 든 봉투를 꺼내어 그이에게 드렸다. 그때로서는 꽤 큰 원고료라 은근히 뽐 내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봉투를 열어본 그이가 대뜸 하시는 말이, 원고료가 왜 이렇게 많으냐는 것이었다.

“예?”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이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원고료가 적다고 불만을 표하는 필자는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원고료가 많다고 뭐라하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권선생은 이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배추 한포기 값이 얼만데.....”


그러니까, 배추 한포기에 드는 농사꾼의 품에 비해 자신의 원고료는 터무니없이 높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는 봉투를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책 위에 던져 놓으셨다. 나는 본의 아니게 죄 지은 꼴이 되어 앉아 있었다. 더구나 양복쟁이의 반지르한 나의 외모가 더욱 나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슴 안 쪽 어디메선가 어쩐지 통쾌한 웃음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느끼한 양식 종류를 먹고 나서 깍두기 김치 한 조각을 와드득 씹어 먹는 느낌이었다.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런 방에서 얼마의 세월을 흘러 보냈던가. 영점 칠평의 어두운 감옥. 아무 장식도, 물건도 없이 단지 책 몇 권만 놓인 그 가난한 방.... 나는 그이의 그 방에서 오래간만에 그런 평화를 느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나중의 일이지만, 어느 방송국에서 ‘느낌표’라는 것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그 속에 책 추천하는 코너가 있는데 여기에 한번 선정되면 수십만부의 책이 순식간에 나가는 것이 관례였다. 말하자면 출판사나 저자나 갑자기 돈방석에 앉는 것이었다. 물론 그 중에 삼분의 이 이상을 벽지 도서관 건립에 희사하게 되어 있지만 그러고 나서도 남는 것이 보통 억대는 넘었다. 그런데 여기서 권선생의 아무개책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방송사 피디는 자랑스럽게, 그리고 약간은 거만한 마음으로, 그 사실을 알리려고 그이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런데 권선생 일언지하 왈,

“하지 마세요.”였다.


당황한 것은 피디였다. 설명을 하고 사정을 하였지만 대답은 끝내 노였다. 자신의 책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였다. 이것은 출판계에 적지 않는 화제가 되었던 너무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이다. 아마 그 피디 역시 내가 이십여년 전 그날 맞았던 그 당혹감을 맛보았을지 모른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말없이 앉아있다 시간이 어느 정도 되어 이제 나오려고 하자 그이가 먼저 일어나시더니 선반에서 부시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었다.

“먼 길 오셨는데 대접해 드릴 것도 없고.... 가면서 입맛이나 다시세요.”


무언가 하고 보니 대꼬챙이에 곱게 꿴 곶감 꾸러미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곶감인지라 언감생심 얼른 받아서 가방에다 넣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이는 고무신을 끌고 버스가 오는 한길까지 뒤따라 마중을 나와 주셨다. 벌써 오후도 기울어 날이 저물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기다려 한길 가에 무심히 서있었는데, 마침 저녁 노을이 길가 탱자나무 울타리 위로 붉게 무너지고 있었다. 권선생의 흰 머리 위에도 노을이 물들었다. 차갑지만 선선한 바람이 한길을 따라 불어왔다. 그이의 흰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나는 그 순간, 그이야말로 이 시대에 드물게 남아있는 은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이가 준 곶감 맛은 입떼까지도 곶감을 먹을 때면 아련한 추억처럼 떠오른다.


나는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이랑,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쓰셨던 전우익 선생과 권정생 선생, 이 세분을 일컬어 영남삼현(嶺南三賢)이라 부르고 싶다. 각기 다른 삶을 사셨고, 성격도 다르지만 그분들이야말로 평생 변함없이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살아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분들을 보면 마치 이 산하의 도처에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아름답게 늙어가는 고목과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고집불통인 이오덕 선생은 자신의 충주 돌집 한쪽에 권정생 선생을 위해 손수 흙집을 지어놓으셨다. 불편한 몸을 감안하셔서 정말 아늑하고 편하게 지어 놓으셨던 것이다. 두 분의 우정으로 말하자면 관포지교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권선생은 지금도 여전히 그 비좁은 교회 종지기 방에서 살고 계신다.


이십여 년 전에 콩팥과 방광 결핵 수술을 받고 단지 석 달만 살면 잘 살거라는 의사의 판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신과 가난한 이웃, 그리고 [몽실 언니]에 나오는 것처럼 불행했던 이 나라의 역사를 사랑하며 살아오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그이의 가난과 낮은 마음이 지금까지 그이의 생명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자산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너무나 쉽게 가질 수 있지만 아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자산이다. 다음은 권 선생께서 이십여 년 전 동화집 [강아지똥]의 서문에 쓰셨던 글이다.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 마당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버린 끝에 참다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됩니다. 너무도 불쌍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김영현 / 새길


권정생 선생과 나눈 수박

1990년대 초반이니, 오래됐다. 삐삐를 찬 허리에 진동이 왔다. 회사의 출장 명령. 동화 '몽실 언니'가 드라마로 만들어지니 안동에 사는 원작자를 만나라는 주문이었다.

권정생이라…. 이름만 들었을 뿐 생면부지였다. 출판사에 연락처를 물어 전화했다. "오지 마이소, 뭐 할라꼬…". 완강한 거절이었으나 데스크는 강행을 지시했다. 기차에서 '몽실 언니'를 읽었다. 내용이 서럽도록 아름다웠다. 눈물이 책장을 적셨다. 친상(親喪) 이후 첫 낙루였다.

대구에서 안동 일직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였다. 먼지 속에 버스를 보내고 초막을 찾으니 우물가에 앙상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오지 말라 캤더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들고 간 수박 한 통을 양동이에 담고, 찬물을 채웠다. 그래도 미동하지 않았다. 바가지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세수를 하면서 입 안의 먼지를 캭∼뱉었다. 이런 촌스런 행각을 한참 동안 보더니만 굳은 눈매를 조금 풀었다. 그러고는 "볕이 세다"며 실내로 들였다.

머슴방도 그런 곳이 없었다. 곤로와 식기 몇 개, 이부자리, 책더미와 앉은뱅이 책상, 그 정도였다. 손바닥만한 공간에 마주앉아 질문을 했다. 묵묵부답. 얼른 나가 수박을 들고 왔다. 칼을 대니 속이 붉었다. 씨를 털고 권하니 드디어 엷은 웃음을 지었다. 첫 신문 인터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나중에는 사진 촬영도 말리지 않았다. "건강하시라"는 인사와 함께 좁은 마당을 쓸어주고 올라왔다.

다음날 신문에는 '몽실 언니'와 그 작가에 대한 기사가 한 페이지 가득 실렸다. 그러나 그의 아득한 인생은 한 줄도 설명하지 못했다.

본대로 기록하자면, 그의 삶은 거룩했다. 얼굴은 경건했고, 눈은 깊었다. 입 매무새가 단정한 만큼 논리도 정연했다. 세상을 보는 태도는 선하고, 진지하고, 치열했다. 인공배설을 하며 고환에 결핵을 앓는 고통 속에서도 주옥같은 작품을 지어냈다.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기 힘든 조건에서도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끝없이 걱정하는 지식인이었다. 이오덕, 전우익과 더불어 경상북도 내륙지방에서 보여준 그들의 아름다운 동행은 세속을 향한 명징한 빛줄기이자 푸른 바람이었다.

지난주 그의 부음이 날아들었을 때 나는 '성자의 삶'이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생각컨대, 그는 예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늘 하늘의 뜻을 생각하고, 자연과 생명과 평화를 존중하며, 땅의 정의를 실천한 사도였다. 작품은 한결같이 낮은 자리에서 고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듬었다.

권정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매!(엄마)"를 불렀다고 한다. 평생을 고독 속에 살면서 품어온 사모곡이었으리라. 그러나 유언장에서는 예의 마지막 티끌까지 털어내는 의연함이 있다. "인세는 어린이로부터 얻어졌으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하고, 5평짜리 흙담집은 헐어 자연으로 돌리며, 나를 기념하는 일은 일체 하지 말라."

그가 살던 누옥 빈터에 작은 비석 하나 세운다면 누가 될까. 수박 한 통 들고, 조탑동을 찾고 싶지만,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으니, 어디서 그의 영혼을 위로할까.

국민일보 / 문화산책 / 손수호 / [2007.05.22 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