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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열람실 없고 카페 분위기

지난 14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번컴 카운티에 있는 팩 메모리얼 도서관. 어린이실 한 귀퉁이에서 3~6살 아이 6~7명이 귀를 쫑긋 세운 채 선생님의 말을 듣고 있다. 스토리 텔링 시간이다. 선생님은 책장을 넘겨가며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중간에 잠깐 덮고 노래를 불러준다. 손수 기타를 튕겨 가며. 그리곤 아이들을 모두 일으켜 세워 같이 춤을 춘다. 6살 조슈아는 “너무 재미있다. 매일같이 (스토리 텔링이 있는) 수요일이면 좋겠다”며 밝게 웃었다.

‘라지 프린트’(large print; 큰 활자)라는 표지가 붙은 책장 앞에서는 70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4명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목들을 살펴보고 있다. 왼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책을 고르던 한 그리섬(72)은 “5년 전부터 일주일에 나흘 정도는 도서관에 온다.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벽 쪽에 있는 서가로 가보니 벽에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젊은이는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앉아 낚시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온 한 아주머니는 서너 권의 책을 펼쳐놓고 뭔가를 베끼고 있다.

일주일 동안 둘러 본 미국의 도서관들을 한 마디로 말하긴 어렵다. 운영 방식, 예산 및 장서 규모, 사서의 수, 운영 프로그램 등 저마다 특색이 있다. 하지만 최소한 한국의 도서관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주민을 위한 열린 도서관은 그 무엇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 미국 도서관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언제든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우체국이나 소방서, 동사무소, 시민체육센터처럼 지역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애틀시는 아예 ‘모두를 위한 도서관’(Libraries for All)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지난 1998년부터 대대적인 도서관 신설 및 정비 작업을 벌이고 있을 정도다.



■ 책읽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가 기본…곳곳에 소파 놓여 편하게 독서

둘러본 13곳 도서관 어디에도 우리나라와 같은 대규모 열람실은 없었다. 다만 군데군데 1~2인용 책상이나 소파가 놓여 있다. 사람들은 서가 사이에서 벽장에 기댄 채 책장을 넘겨보다가 더 편하게 읽고 싶을 땐 책상이나 소파로 옮겨 앉았다. 간단한 메모 공책을 가져와 중요한 대목을 옮겨 적거나, 노트북을 열어 타이핑하는 모습도 흔하게 띄었다.

시애틀 공공도서관 캐피톨힐 분관은 편하게 책을 읽도록 벽 사이에 거의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해 놓고 있었다. 마침 그 공간에서 영화 잡지를 보고 있던 사무엘 리치몬(21)은 “집에서보다 더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라며 “비번일 때나 주말에 자주 찾는다”고 도서관 예찬론을 폈다.

널따란 책상은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보거나 지도책을 뒤적이는 노인들이 주로 애용하는 장소. 철학서적을 읽듯 진지하게 신문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 늦은 나이에 러시아어를 배우겠다고 러시아어 교본을 보고 공부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무위고(無爲苦)’라는 단어를 무색케 했다.

서가의 구조 또한 책읽는 사람들을 배려한 흔적이 역력했다. 군대 열병식처럼 줄을 딱딱 맞춰 배치된 서가 대신 사람들의 동선을 고려해 자연스럽고 편한한 느낌의 서가가 들어서 있었다. 채플힐 공공도서관 케이 엘 톰슨 관장은 “픽션·논픽션 코너와 참고도서(레퍼런스북) 코너, 신문·잡지 코너, 어린이 코너 등을 유기적으로 배치하고 서가 높이도 적절히 조절해 편의성을 최대한 높였다”고 설명했다. 시애틀 공공도서관도 각 서가의 층이 약간의 경사를 두고 죽 이어져 있고, 바닥마다 책 분류 번호가 크게 적혀 있어, 원하는 책을 곧바로 찾을 수 있는 편리성을 극대화했다.

편리성은 이동도서관 운영에서도 확인된다. 상당수 도서관이 전화나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책을 무료로 배송해 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시애틀 공공도서관의 분관인 ‘와싱톤 말하는 책과 브래일 도서관’은 관내 도서관들의 배송 요청을 전담해주는 독특한 기능을 하고 있다.



■ 풍부한 장서와 다채로운 프로그램…책 외에 음반 등 자료 무궁무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뉴욕 공공도서관은 연구자들을 위한 자료 중심으로 구성된 연구도서관 4곳과 지역별로 거미줄처럼 설치된 분관 85곳으로 이뤄져 있다. 이 곳의 도서자료는 무려 1억점이 넘는다. 한 곳당 약 110만점의 도서자료를 갖고 있는 셈이다.

도서자료는 단지 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책의 비중이 가장 크기는 하지만, 이밖에도 시디, 음반, 비디오·오디오 테이프, 디브이디, 오디오북, 이(e)북(전자책), 사진, 영화필름, 무대의상, 포스터, 악보 등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뉴욕 공공도서관 도넬 분관은 16㎜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작품 8500점을, 미드맨해튼 분관은 출판·광고업자, 일러스트레이터 등을 위한 사진컬렉션만 1만2천점을 소장하고 있다. 미드맨해튼 분관 사서 월수 리(72)는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드는 모든 것이 장서”라고 설명했다.

특히 오디오북은 미국 도서관에서 특색 있고 인기를 끄는 도서자료다. 도서관마다 오디오북 코너가 따로 있고, 그 곳엔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만권까지의 책이 꽂혀 있다. 뉴욕 공공도서관 도넬 분관 조안 로자리오 선임사서는 “오디오북은 차를 타고 가면서나 집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책이라는 장점이 있다”며 “하루에만 1천권 넘게 대출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일주일에 5권 정도의 오디오북을 빌련간다는 산 안드리아(34)는 “아이들 침대 맡에서 들려주기에 딱 좋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의 다양성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독서토론 모임, 스토리 텔링, 숙제 지원, 영유아 서비스, 가족 서비스, 직업 상담, 건강정보센터 운영 등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심지어 이력서 첨삭강의, 자영업자 센터까지 두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은 전문 사서들보다는 지역내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지원을 받는다. 예컨대 숙제 지원은 대학생들이, 독서 토론은 교수나 연구자들이, 직업 상담은 컨설턴트들이 해주는 식이다.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이 지역내 도서관에 없다면 다른 도서관 프로그램을 찾거나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도서관 프로그램을 이용하기도 한다.

채플힐 공공도서관 매기 하이트 사서는 “공공 도서관의 제일 목표는 지역사회가 제공하지 못하는 공공서비스와, 정보화 사회에서 필요한 고도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디지털 서비스는 미래도서관의 핵심…도서관끼리 소장 책 목록 공유

1996년 벤튼재단이 미국 시민 1015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이 미래의 공공도서관에 요구하고 있는 역할 가운데 디지털과 종이매체의 정보자원을 결합한 복합 서비스가 중요하게 꼽혔다(60%). 온라인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높은 것이다.

국민들의 요구에 걸맞게 미국 내 어느 도서관을 가더라도 인터넷 서비스는 기본이다. 인구 1만명이 안되는 작은 동네도서관에 가더라도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가 최소한 2대 이상 설치돼 있다. 노트북을 가져와 쓸 수 있도록 무선인터넷 환경도 거의 대부분 구축하고 있다. 시애틀 공공도서관 캐피톨힐 분관 낸시 슬로트 관장은 “인터넷이 안되는 도서관은 이제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디지털 서비스를 위해 미국 공공도서관들은 저마다 ‘오피에이시(OPAC; Online Public Access Catalog)’라는 종합정보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는 관내 장서에 대한 목록 정보를 검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출 상태를 확인하거나 및 희망 도서 대출을 예약할 수 있게 해준다. 또 희망도서 구입을 신청하거나, 도서관 이용이나 도서 정보에 대한 질문을 올리고 답을 받을 수도 있다.

오피에이시는 도서관끼리 도서자료를 서로 공유해서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함도 제공한다. 가령 어떤 책을 검색했는데, 관내 도서관에는 없고 다른 도서관에 있다면 온라인으로 대출을 예약해서 받을 수 있고, 자기 동네에서 빌린 자료를 다른 도서관에 반납할 수도 있다. 뉴욕 공공도서관 58번가 분관 존 박 완딘 관장은 “주 또는 카운티마다 관내 모든 도서관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고 했다.



■ 학생, 학교와 손잡은 공공도서관…학교숙제 도와주는 서비스까지

도서관은 나이, 계층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곳이지만, 아무래도 가장 긴요하게 이용하는 층은 학생들일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미국 공공도서관들은 갖가지 학습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시애틀 공공도서관은 최근 몇년 동안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특별히 고안된 다양한 프로그램과 과외활동을 운영해 오고 있다. 우선 5개의 분관에 ‘숙제 도움 센터’가 있다. 학생들은 도서관에 와서 주로 대학생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로부터 숙제에 대한 도움을 받는다. 숙제 도움은 인터넷으로 가능하다. 8개의 분관에서 온라인 숙제도움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방과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시애틀 시내에 8곳이나 된다. 6~12살의 학생들에게 숙제 도움, 컴퓨터 교육, 읽기와 쓰기 능력 향상 등의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3개 도서관에는 ‘부모 자원센터(parents resource center)’가 있는데, 부모가 어떻게 자녀의 학교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보를 얻고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도서관은 학교 수업 공간으로서의 기능도 한다. 뉴욕 공공도서관 도넬 분관은 교사가 원할 경우 언제든지 수업을 도서관에 와서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도서관 조안 로자리오 선임사서는 “아이들 수업을 위한 교실을 따로 마련하고 있는 공공도서관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채플힐 공공도서관 카보로 분관은 아예 학교 안에 설치돼 있다. 1995년부터 맥더글 초·중학교 안에 있는 학교도서관을 공공도서관으로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구가 1만8천명으로 극히 적은 이 지역 주민들은 관내에 공공도서관을 갖게 됨으로써 차로 40분 넘게 걸리는 채플힐 도서관에 가는 불편을 덜게 됐다. 제임스 레러 사서는 “초등학교, 중학교, 공공도서관 담당 사서가 각각 1명씩 있어서 유기적 협조를 하기 때문에 운영에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며 “지역민들도 자녀들과 함께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뉴욕·애쉬빌·채플힐·시애틀/글·사진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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