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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서문


편지란 제때제때에 소식을 알리거나 용건을 적어 보내는 글로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이러한 상례를 어겼으니 못내 당혹스럽다.

옥살이란 막히고 닫힌 세상에서 다름쥐 쳇바퀴 돌듯하는 단조롭고 호젓한 일상의 반복이지만, 살다보면 옥담 너머의 사람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마음의 소식'(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알리고 싶은 충곧을 가끔 받곤 한다. 잊혀가던 추억이나 향수, 즐기던 명시나 잠언, 뜨락의 한포기 풀이나 꽃, 두둥실 떠 있는 달, 흘러가는 시간, 송구영신 등 극히 예사로운 일들이 이러한 충동의 계기가 되는 것이 또한 옥살이다. 그래서 종종 편지를 쓰게 되는데, 쓰고 나면 심란하기도 하지만, 후련하기도 하다. 이것이 아마 옥중편지만의 속성인 듯싶다.
여기에 실린 편지는 보낸 편지의 전부가 아니고 그 일부이며, 내용도 '마음의 소식'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 주종을 이룬다. 잠깐의 옥살이에 무슨 넋두리가 그렇게도 지루한가 싶기도 하며, 충동의 계기마다 토출(吐出)한 것이어서 각설(却說)로 말머리를 돌릴 정도로 따분한 장광설을 요량없이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래서 출소 직후부터 편지를 묶어내라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지만 응하지 않았다. 출간을 앞둔 싯점에도 망설임은 여전하다.
이렇게 편지글로서도 허술한 데가 있어 여러가지로 머무적거리다가 감히 책으로 엮어내놓은 것은 남들의 궁금증엣 자신을 자유로워지게 하고, 읽은 이들에게 조금의 얻음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기대에서다. 더불어, 편지를 쓰는 과정은 겨레의 다시 하나됨에 뜻을 두고 기꺼이 수의환향(囚衣還郷)해 진작 내세웠던 '시대와 지성, 그리고 겨레'라는 삶의 화두를 한번 점검해보고,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슬기도 터득하는 기회였음을 자긍해본다.
지면이 제한된 데다가 생각나는 대로 끼적거린 글이라서 막상 책으로 엮고자보니, 자구는 물론 내용이나 엮음새를 가심질하면서 첨삭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특히 소략한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고 생각을 완결하기 위해 필요한 해석이나 설명을 가했으며, 몇곳에는 추기(追記)를 붙이기도 하였다.
감옥은 한낱 외로움과 괴로움의 공간만은 아니고, 서로의 사랑과 믿음, 연대를 확인하고 굳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에 있는 동안 여러가지 혜려를 베불어주신 주위 여러분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짖궂은 옥바라지에 노고를 아끼지 않은 집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위로는 '글로 쓰기에는 너무 모자라다'는 말 한마디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러저러한 미흡함과 걱정을 깊이 헤아리면서 책을 잘 꾸미려고 최선을 다한 창비 편집진 여러분과 귀중한 사진을 제공한 이시우 선생께 깊은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분단의 아픈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이 남긴 글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2004년 8월 15일 출옥 네 돌에 즈음해

무쇠막에서 집에서 정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