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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6일 (금) 21:02 기준 최신판

지난 3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에서 흰저고리 검정치마를 입은 단정한 차림의 원불교 여성 교무 500여명이 사뿐사뿐히 걷는 모습을 본 일부 관람객들이 작은 탄성을 질렀다. 여성교무들이 집단으로 이곳에 들른 것은 이날부터 이틀간 국립중앙박물관, 북촌 은덕문화원, 경복궁, 창덕궁 등에서 펼쳐지는 ‘정화인의 날’ 행사 때문이었다.

‘정화인’(貞和人)이란 평생 독신으로 수도하며 살아가는 원불교 여성 성직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교단을 창립한 초기부터 세계 종교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책임을 지게 한 원불교에서 정화인들은 불과 93년째인 원불교가 국내 4대 종단으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 단 한 푼의 돈과 음식,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는 자태와 정결한 주위 환경을 유지하면서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는 여성 교무들의 삶은 종교계 내에서도 경탄의 대상이다.

‘정화인의 날’은 이들이 3년 만에 한 번씩 여는 잔치다. 여성 수도자로서 평생 한길을 걸으면서 청빈을 집 삼고, 고독을 친구 삼으며, 헌신을 기쁨 삼고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위로’받을 기회는 많지 않은 도반들끼리 모여 서로에게 힘을 주고 힘을 받는 자리이다.

박물관 콜렉션을 관람한 뒤 오후 2시 무렵 국립박물관 대강당에 ‘학’들이 모여 앉았다. 여성정화단 총단장은 이선종 서울교구장. 원불교 내 생명운동 단체인 천지보은회를 창립하고,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기도 한 여걸이다. “여러분을 만나니 힘이 샘솟는다”고 입을 연 이 단장은 “정화인은 정산 종사(2대 종법사)가 ‘정결은 연화같이, 지조는 송죽같이, 덕화는 부모같이’ 하라고 붙여준 이름이라며, 곳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 지구촌을 정화인들이 생명과 평화의 땅으로 가꾸어 가자”고 말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의 축사와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문화정체성’ 특강을 듣고 영화 <살이있는 지구>를 관람한 이들은 오후 6시쯤 차편으로 이번 축제의 백미인 야외 음악회가 열릴 북촌 은덕문화원으로 갔다. 그러나 막 모여들기 시작한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춧불문화제 참가자와 경찰버스들로 인해 광화문 일대를 관통하는 버스들이 옴짝달싹을 못했다. 때마침 비도 내려 야외음악회마저 불투명해졌다. ‘난관’을 맞은 셈이다. 하지만 마음 씀씀이의 진가는 난관이 있을 때 나타나기 마련이다.


은덕문화원은 5백여명을 모두 실내에 수용하기엔 턱없이 좁았지만, 이들은 ‘그게 무슨 대수랴’ 하는 표정으로 불평 없이 마당 주위와 처마 밑에 모여 앉았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부모의 고향에서 독신 수도자의 삶을 시작한 햇병아리 송상진 교무가 서툰 한국말과 특유의 생기발랄함으로 사회를 진행하면서 여성 수도자들은 한 우산 아래 들어온 듯 오붓해 보였다. 빗속에서 중앙대 국악대학장 김성녀씨가 등장했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중학교 다닐 때 내 공부를 돌봐주던 이웃집 언니를 50여년 만에 이곳에서 만났다”며 “수재였던 그 언니가 왜 독신수도자의 길을 걷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아름답고 평안한 모습을 보니 이제야 언니가 왜 이 길을 택했는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의 노래가 시작되자 머리에 수건을 쓴 채 몇 교무들이 나와서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평소 정숙해 보이기만 한 여성 수도자들의 내면에 감춰진 끼와 신명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5백여 ‘학’들이 함께 웃고 어깨춤을 추는 사이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원불교 수위단(최고의결기구) 중앙단원인 황영규 교무는 “비가 오든 무슨 어려움이 있든 일심으로 믿음과 정성을 이렇게 모으다 보면 어느새 즐거움 속에 있게 된다”며 활짝 웃었다.

그의 웃음 뒤로 음악회 말미에 마련된 영상 슬라이드에서 여성 성직자로서 고귀한 삶을 살다 간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와 구타원 이공주 종사에 이어 용타원 서대인 종사의 사진과 글이 떠올랐다.

“오늘 하루가 영생이요, 오늘 하루에서 좌우된다. 작은 일이 쌓여 큰 일이 되고 작은 공부가 쌓여 큰 공부가 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착수하라. 실지로 하라. 쥐도 새도 모르게 하라. 그러면 열리고야 말 것이다. 정성은 만사 성공의 어머니, 만사 성공의 원천수, 만사 성공의 뿌리다.



'평양냉면의 장인’으로 한 길 걸어온 김태원의 인생과 노하우

“개인적인 생각으론 섭생의 변화가 왕조, 심지어 종교의 변화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세계대전만 하더라도 통조림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 (중략) … 그런데도 음식의 중요성이 정당하게 평가되지 않는 건 희한한 노릇이다. 정치인과 시인과 주교의 동상은 곳곳에 서 있는 반면, 요리사나 베이컨 숙성 전문가, 채소 재배 농부의 동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동물농장>을 쓴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37년 저술한 르포 <위건 부두로 가는 길>(The Road to Wigan Pier)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오웰의 비유법을 빌린다면, 한국에서 냉면 장인의 동상을 찾아볼 수 없는 건 희한한 노릇이다. 여름날 더위에 지친 민중들을 누구보다 핍진하게 달래준 건 정치인도, 기업인도, 기자도 아닌 냉면 한 그릇일 게다. 그래서 는 지난달 22일 평양냉면 특집기사에 이어, 50년 넘게 평양냉면을 만들어 온 ‘장인’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김태원(70) 벽제갈비 조리부 실장(현재 봉피양 방이점 근무중)의 삶 속에는 음식·삶·역사가 함께 발효돼 있었다. 그에게는 실장이라는 정식 직함보다 ‘장인’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린다.

1952년 여름밤 을지로4가의 한 처마 밑에서 좁은 어깨의 소년이 소나기를 피하고 있다. 비에 젖은 누더기 옷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소년의 등 뒤에서 끼익, 창문이 열렸다. 소년은 흠칫 놀랐으나 빠끔히 고개를 내민 중년 여성의 선한 눈빛에 겨우 경계를 푼다. 중년 여성은 징집을 피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는 소년을 딱하게 여겼다. 그날 밤 찬밥을 허겁지겁 욱여넣던 소년은 중년 여성의 소개로 며칠 뒤 ‘우래옥’ 주방에서 주방장의 불호령을 처음 들었다. 김태원 장인의 ‘냉면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충청도 옥산이 고향인 김 장인은 평양냉면은커녕 냉면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다. 한국전쟁에서 형 셋을 모두 잃은 뒤 김 장인은 ‘나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징집을 피해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교착상태인 전선에 끌려가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용산역에서 미군 헌병의 검문에 걸려 붙들렸으나 사흘 뒤 몰래 빠져나왔다. 우연히 비를 피하던 집의 주인은 경찰 치안국 감찰부장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김 장인은 당시 곰탕으로 유명했던 ‘우래옥’ 주방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거제도에서 풀려난 반공포로 3명이 동료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석방된 반공포로에게 사회 적응의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식당에 보냈다.

그날부터 김 장인의 이마에는 주방장의 매질에 혹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김 장인에게 평양냉면의 모든 것을 전수한 주병현 주방장은 장신에 어마어마한 덩치의 사나이였다. 국수틀을 밟는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국수를 말릴 때 사용하는 대나무대가 이마에 떨어졌다. 50년대의 주방에는 변변한 세제도 없어, 손님 몇 사람이 냉면을 먹고 나가면 빨랫비누로 냉면 그릇을 닦아야 했다. 수세미도 없어 풀뿌리를 말려 만든 수세미로 그릇을 박박 닦았으나, 기름때는 쉬 사라지지 않았다.

평양이 고향인 주병현 주방장의 평양냉면은 인기가 많았다. 김 장인은 “손님이 많아서 하루 종일 육수를 끓여야 했다. 당시 하루 380초롱까지 끓여 봤다”고 말했다. 당시 한 초롱(석유나 물 따위의 액체를 담는 데 쓰는 양철로 만든 통)을 끓이면 평양냉면 30그릇이 나왔다. 매일 새벽 네 시께 주방장이 발밑에서 잠든 김 장인을 툭툭 건드리면, 김 장인은 졸리는 눈을 비비며 장작불을 때웠다. 연기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김 장인은 주방장이 일러준 냉면 육수 비법을 외우고 외웠다. 호랑이 같던 주병현 주방장은 60년대 중반 주방에서 평양냉면에 고명을 얹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숨졌다.


불가피하게 병역기피자가 돼 주방을 벗어나지 못하던 김 장인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인 61년 군에 입대해 ‘양지’로 나왔다. 주 주방장이 쓰러지고 난 60년대 중반부터 김 장인이 주방을 책임졌다. 같이 평양냉면을 배웠던 반공포로 3명은 휴전 직후 식당을 뛰쳐나가서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된 상태였다. 이들 반공포로들은 한 여성을 두고 싸움을 벌이다 53년 여름밤 결국 칼부림을 벌인 뒤 사라졌다.

주방의 총책임자가 된 김 장인은 책임감을 무겁게 느꼈다. 매일 기술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도 만만찮았다. 냉장고가 귀하던 60년대 평양냉면을 시원하게 만드는 일은 전쟁과 같았다. 겨우내 한강에서 떼어낸 얼음은 서빙고에 보관된다. 김 장인은 여름이 되면 매일 서빙고에서 얼음을 떼다 파는 업자에게서 얼음을 구입했다. 냉면에 올릴 편육을 차갑게 만드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주방에는 냉장고 대용의 커다란 궤짝이 있었다. 김 장인은 일단 담배를 마는 데 사용하는 종이에 쇠고기 편육을 돌돌 말았다. 서빙고에서 사온 얼음덩이를 궤짝 밑에 깔고 그 위에 종이에 만 고기를 올렸다. “냉장고를 처음 사용한 70년대 후반까지 ‘하꼬짝’(궤짝)을 냉장고로 썼다”고 말하며 김 장인은 웃었다.


당시 서울에서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만드는 곳은 고려정·한일관·조선옥·우래옥·서래관 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김 장인의 명성이 사대문 안에서 서서히 퍼져갔다. 80년대 초반 대원각의 이경자 사장이 당시 파격적인 월급 50만원을 제시했다. 서울 성북동 대원각은 당시 최고급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겨레> 89년 9월3일치 2면을 보면 대원각 이경자 사장은 88년 전국 소득 순위 7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73위였다. 김 장인은 밀실정치가 이뤄지던 독재의 뒤편에서 묵묵히 평양냉면을 만들었다.

김 장인을 스카우트한 뒤 평양냉면으로도 명성을 떨치던 대원각은 이 사장의 불법 행위로 된서리를 맞는다. 이 사장은 91년 12월 여종업원에게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성매매를 시키고 받은 돈을 가로챈 혐의(윤락행위 등 방지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 강력부에 구속됐다. 대원각은 절 길상사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대원각 시절을 ‘보따리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요정 아가씨들이 월급 밀린 걸 안 준다고 대원각 앞에 죄다 보따리를 싸들고 나오니, 이경자 사장이 파자마 바람으로 뛰쳐나와 밀린 월급을 줘서 겨우 말리더라구.”

그는 칠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직접 육수를 만든다. 올해로 10년째 일하는 봉피양 방이점에서 후계자도 찾았다. 김 장인에게 육수의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푸근한 웃음을 터뜨리며 김 장인은 못 이기는 척 한 가지를 귀띔해 줬다. “쇠고기 등 재료를 넣고 오래 끓이면 물이 증발되잖아. 그래서 나는 중간에 한 시간쯤 되면 육수를 퍼내고 물을 다시 넣어서 우린다. 그러고 나서 처음 우린 육수와 두 번째 우린 육수를 적절히 섞는 거야. 이게 어려워. 평범한 냉면집은 그냥 끓이다 육수가 졸아들면 거기다 물을 넣고 다시 짠맛을 내기 위해 간장을 넣어. 반면 나는 물 한 방울 쓰지 않아.” 그는 이 시대의 장인이었다. (* 봉피양 강남역본점 : (02)587-7018)

2008년 봄부터 겨울까지 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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