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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20일 (수) 12:10 기준 최신판
- 늦게 점심을 먹었다. 늦게 먹고 나가려는데 라디오서 좋은 음악이 나와 멎었다. 멎어서 들었다. 듣고 나갔다. 등산화를 신고, 장갑을 끼고, 자전거를 끌고. 우체국을 들렀다가 자전거를 몰고 장산으로 달렸다. 나는 앞으로 나가라 페달을 굴리는데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셌다.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야단법석이다. 길에는 차들이 질주한다. 이 시간이면 학원차가 많다.
- 장산 입구에 다다를 때 즈음 몇 발짝 안되는 건널목이 있다. 몇발짝 안되지만, 사람들은 신호등을 지키고 섰다. 거기는 고등학교의 큰길가쪽 구석이다. 오르막에 바람 때문에 느릿느릿 자전거를 달리다 신호등에 섰다. 내 리듬대로 가고 서야하면 서고 가야하면 또 내 리듬대로 가면 된다. 그래서 섰다. 내 앞에는 중학생 쯤 되보이는 소녀가 서 있다. 몇 발짝 안되는 맞은 편에는 산을 다녀온 사람들이 서 있다. 몇 발짝 안되는데도 사람들은 신호등을 지키고 섰다. 차는 지나가지 않았다. 신호등이 바뀌고 막 건너려는데, 교복입은 그 소녀가 건너려는데 큰길에서 꺽어 들어오는 봉고차가 있었다. 아이! 어마 ! 소녀는 놀랐고 차는 섰다. 부딪히지는 않았다. 운전사는 한번 질러본 것임에 틀림없다. 굳이 건너지 않았어도 됐고 건넜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 그리 써있었다. 소녀는 두 발을 뛰며 놀라고 길을 지나며 차 안을 보았다. 운전하는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원차다. 나도 페달을 밟으며 그의 얼굴을 본다. 어떤 얼굴일까? 소녀가 건너고 나서 창에 팔을 걸쳐놓고 느긋하게 앞을 보는 그는 힘좀 쓰게 생겼다. 턱이 각지고 어깨가 다부졌다. 여유있었고 사람들이 지나가면 바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호등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남자다왔다. 다부진 몸, 세상 잡소사에는 마음 두지 않는 저 여유, 언제든 목표를 향해 돌진할 돌격정신, 신호등이 바뀐 줄 알면서도 한번 밀어부쳐보는 추진력... 사내대장부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아 장산으로 남은 길을 달렸다. 갑자기 방구가 나와 뽕! 끼었다.
- 늦게 갔더니 벌써 석양이 가까왔다. 바람이 세다. 얇은 옷을 입고 바람막이 점퍼는 가방에 넣었다. 땀이 금방 났다. 몸이 허약해진 건 분명하다.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그게 뭐 중요한가. 나는 지금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러 나왔을 뿐이다. 산을 오르기로 했으니 오를밖에. 다른 생각할 필요없다. 땀이 범벅이 된다. 바람이 차서 금새 몸도 차진다. 그럴 수록 더 발을 빨리 놀렸다. 정상에 오르니 혼자였다. 몸이 몹시 차가와졌다. 점버를 꺼내 입고 옷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멀리 광안대교와 수영만 해운대를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왔다. 바람에 갈대가 누웠다 섰다 한다. 산은 끄떡없다. 산을 이루는 풀이며 갈대며 나무며 흔들거렸지만, 그 작은 생명들의 뿌리, 산은 끄떡없었다. 나무들 사이 어디선가 맑은 새소리가 들린다. 지금도 들린다.
- 내려와 자전거를 달리니 다리가 뻐근하다. 바람은 여전하다. 벌써 어둡다. 가로등 사이를 지난다. 신호등이 깜박거리길래 달렸다. 차들은 신호등을 지키지 않았다. 살짝 위험했다. 이번엔 뒤도 안돌아보고, 아무런 기대와 실망없이 그냥 페달을 밟았다. 남자다운 사람 하루에 한명만 봐도 된다. 그게 입술을 바르고 화장을 했던 안했건 머리를 길렀건 안길렀건, 여자든, 남자든. 내 앞에 어두워진 길을 천천히 달렸다. 마침 다리도 뻐근했다. 신호등 앞에 섰다. 사람들이 많다. 많은 지역이다. 많은 시간이다. 학원차가 꽤 많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봉고차의 반 이상이 학원차 인 것 같다. 학원도 별놈의 학원이 다있다. 자전거에 엉덩이를 걸치고 한쪽 발을 땅에 딪고 섰다. 초등학교 육학년 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수다다. 돼지가 어떻고, 거기가 무얼 먹이면 안되고, 산 돼지는 어떻게 그랬다. 잠시 딴 생각을 했다. 한 여자아이가 '랍스터', 아 입에 살살 녹는 랍스터.. 라는 말을 할 때 귀가 틔였다. 무슨 이야기지 ? 하는데 신호등이 바뀌었다. 자전거를 달린다.
- 세상이 이 모양이라고 학교를 탓하고 사는 것을 탓하고 사는게 팍팍 하다고들 한다. 아이들은 그 나이 때 몰라도 되는 것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고 느끼고 알아야 할 것들로부터 쫓겨나 산다. 세상을 망치는 건 우리고 나인데, 나는 우리는 그것을 아이들에게 풀에게 길에 내던지고 만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냥 다음 신호등을 건너려고 서 있을 때 픽 불들었다가 픽 사라졌다.
- 길을 떠난다.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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