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활동의 간단한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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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8일 (목) 17:08 기준 최신판
우리 활동의 소사(小史)
우연찮게도 우리가 맨 처음 수업한 날의 날짜가 어떤 메모지에 적혀있었다. 1980년 3월 23일이다. 꼭 정기적으로 한 건 아니지만, 남자 아이들과 했던 활동은 4년 동안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딸인 줴냐가 자라났고 두번째 동아리 활동이 시작되었다. 줴냐와 줴냐의 여자친구들이 함께 했다. 이 동아리는 2년 동안 계속 되었다. 다른 아이들과 해보던 시도가 띄엄띄엄 있긴 했으나 그 활동은 곧 끝나버리곤 했다. 사실 내가 '근무'라고 부르고 싶은 기본적인 일들을 하고 나서 이 모든 것을 했는데, 그것을 어쨌든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몇 번인가는 심지어 마스터 클래스를 하는 다니는[1] 이상한 역할도 맡아보았다.
그러나 어느 날 학교로 진출하게 되었다! 처음엔 지마가 배우던 1학년 동아리에서의 활동이었다. 이와 비슷한 수업들이 더 있었다. 나중에는 정말 극단적인[2] 지경까지 이르렀다. 어떤 교육학 실험의 일환으로 모스크바의 한 학교에서 1학년 평교사로 한 달 내내 일한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스스로가 지성인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언제든 학교와 교사들을 비판하고 지혜로운 조언을 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자신을 두고 했던, 힘들었지만 정말이지 매우 유익했던 이 실험 덕분에 관점들을 많이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연대기적인 순서를 껑충 앞질렀다.
이 역사가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우리 가족의 친구이고 유명한 언어심리학자 레베카 프룸키나 덕분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집에서 열리던 세미나를 함께 하고 있었는데 내 일기를 읽게 된 그녀는 나를 «아는 것이 힘» 잡지 편집부로 데리고 갔다. 곧이어 이 곳에서 동아리에 대해 쓴 나의 두 논문(1985년 제8호, 1986년 제 2호)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나중에 세 번째 논문도 게재되었지만 그것은 그리 «큰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런데 첫 두 논문들이 기대하지도 않은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훌륭한 동요 시인이자 교육자인 바짐 레빈은 그 논문들이야 말로 교육학 분야의 고전이라고 내게 말하기까지 했다. 이후 이 논문들의 운명은 다음과 같았다. 얼마가 지난 후 논문들은 영어로 번역되어 The Journal of Mathematical Behavior라는 잡지에 실렸다. 그리고나서 네 개의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된 것으로 기억한다. 또 이후에는 «취학전 교육»이라는 신문(2000년 5월과 6월 호)에 실렸는데 이번에는 레빈의 해설과 함께 실렸다. 나중에 논문들은 레빈의 «부모를 위한 수업»(모스크바: 폴리오, 2001)이라는 책에 또 실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바로 최근인 2005년에 «9월 1일»[3] 편집부에서 «미취학 아동들을 위한 가정 학교»라는 제목의 얇은 책을 내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레빈의 이름은 빠져있다.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해서 레빈이 내게 했던 어느 정도의 칭찬은 - 찬양이라고 말 하진 못하겠고 - 내 개인에게만 쓰여진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런 건 어떻게 해보는 것이 쉽지 않다. 예를 들어 «9월 1일» 잡지사에서 소책자 출간에 대해 내게도 레빈에게도 알리지조차 않았다.)
어쨌든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었다. 나의 절친한 친구였던 스테판 파치코프는 모스크바에 어린이 컴퓨터 클럽을 조직했다. 가리 카스파로프가 컴퓨터를 사서 클럽에 기증했다. 그 당시(1986년) 이 곳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초등학교 아동들이 컴퓨터를 배우고 쓸 수 있던 유일한 장소였다. 자연스럽게 가장 어린 아이들과의 수업을 내게 맡겼다. 나중에 페레슬라블-잘레스크에서 여름 컴퓨터 캠프가, 즈베니고로드에서는 겨울 캠프가 열렸다. «조지악»이라는 또 다른 컴퓨터 클럽도 있었다. 모두 다 열거하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어느 곳에서나 필요했고 모든 곳에서 자연스럽게 나를 유아교육에 관한 전문가로 받아들였다. «임시 학술연구 집단 "학교-1"»이라는 조직으로 나를 불러들였다. 거기서 모든 학교 시스템의 개혁을 준비해야만 했다. 이 조직의 형식적인 책임자는 학술원 회원 벨리호프였지만 실질적인 리더는 알렉세이 세묘노프[4]였다. 그 당시 우리가 했던 여러 활동 중 특별히 우리가 집필한 5-7학년용[5] 교과서 «알고리듬학» (저자 A.K.즈본킨, A.G.쿨라코프, S.K.란도, A.L.세묘노프, A.H.쉔)를 언급하고 싶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로타프린트 판이 나온 이후에 책은 «드로파» 출판사에서 1996년 출판되고 이후 여러 차례 출판되었다. 처음엔 우리 동아리에서 다루었던 어떤 주제들이 조금 복잡해진 형태로 바뀌어 이 교과서에서 활용되었다. 어떤 미국대학에서 저학년학생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이후에 아니 신기했다.
그런데 삶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이건 동아리와는 간접적으로 연관되어있다. 1989년 나는 직장을 옮겼다. 이 전까지 13년 동안 나는 «석유 가스 산업의 종합 자동화를 위한 연방 학술연구 프로젝트 기획 연구소»에서 일했다.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이 «얼마안된 복고»의 의미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삼류의 실용 연구소, 잡역부들과 협동농장으로의 출장. 직장 동료이자 인생의 동반자인 사람들과의 가슴 따뜻하고 절친한 관계.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일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고 의미 없는 것이었다. 지금 그곳의 그 사람들은 다들 의미있고 유익한 일을 하고 있지만 이미 이 연구소에서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 나는 자신의 일을 싫어했다. 그러나 어떤 다른 일을 찾을 기회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소련 과학 학술원 산하 «복합적 문제에 관한 연구위원회 '사이버네틱스'» 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내가 속한 팀에서는 학교 교육에 정보학 과목을 도입하기 위한 준비와 정보학과 관련하여 모든 가능한 여타 교육학적 새 제도를 준비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우리는 모두 아마도, «항상 그렇겠지만», 그 당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신의 일에 미쳐있었다. 때때로 우리는 완전히 육체적 힘이 바닥 날 때까지 일하기도 했다. 만약 이 일을 큰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내 개인의 전기적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동아리가 없었더라면 나의 새로운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일과는 별도로 나는 여전히 이전과 같이 수학공부를 계속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이해하기 쉽게 설명 할 수 있을까? 교육학 분야에서의 학문적인 연구가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 수학 분야에서도 역시 학문적인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 활동에서 나는 역시 완전히 내 전공을 바꾸었다. 나를 이 일에 종사하게 한 원인은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도 내가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페레슬라블과 잘레스크의 어린이 컴퓨터 캠프에서 두 명의 동료를 만난 이유였다. 이들 역시 우리 모두에게는 생소한 주제인 이 새로운 일에 빠져있었다. 이들은 세르게이 란도와 게오르기 샤바타이다. 우리는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같이 활동해 오고 있다. 란도와 공동집필한 단행본이 바로 얼마전인 2004년 Springer-Verlag출판사에서 발행되었다.
1990년에 나는 처음으로 프랑스로 갔다. 이전에 내가 일하던 연구소였더라면 나를 그곳으로 그렇게 쉽게 보내 주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그 때 당시 나는 내가 연구하고 있던 수학 분야의 전문가들을 아직 잘 알지 못했다. 이 출장은 나로 하여금 내 연구의 방향을 설정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내 연구분야와 가장 가까운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보르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곳을 다녀왔다. 그리고 또 한번 더 다녀왔다. 나중에는 나를 일년 동안 교환연구원으로 초청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나는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정말 놀랍게 이루어졌다. 내가 지금 보르도의 한 대학교수로 있다는 사실은 언젠가 수 년전 내가 아이들을 위한 수학 동아리를 연 것과 아주 큰 상관관계를 가진다.
(이미 내가 회상록을 쓴 것 처럼 되어버렸으니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더 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조금 자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서는 이야기를 해 나갈 수가 없다. 나는 즉 말하자면 보르도에서 1년 간 교환교수로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교사들의 [능력 고취]를 위한 연수에서 «теория сложности»에 대한 네 개의 강의를 맡게 되었다. 문제는 수학교사, 물리교사, 생물교사, 역사와 문학교사들이 모두 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이런 여러 전공의 교사들이 한 데 모인 강의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전 연도에 이 강의를 들었던 청강생들은 매해마다 왜 프로그램에 이런 이상한 주제를 포함시켰느냐고 불평을 했었다. 아무도 이 강의를 맡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유레카! 나는 앞에서 언급했던 алгоритмика 교과서에서 몇몇 자료들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것들은 어느 누구에게나 이해가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단순하면서도 한편 수학 교사들에게 있어서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교사들이 원한다면 이 자료들을 더 복잡하게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 대성공이었다. 청강생들이 «너무 만족해했으며» 왜 강의가 겨우 네 번 뿐이냐고 물어 오더라고 내게 전해주었다. 그래서 내가 두 번 더 강의하기로 했다.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이것은 겨우 반이었다. 마지막 반은 이 에피소드가 스무 명의 후보자들 가운데 정규 교수직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하는 교수 임용에 의심할 여지 없는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유아와 수학 : 서론 | 제1장 | 제2장 | 제3장 | 제4장 | 제5장 | 제6장 | 제7장 | 제8장 | 제9장 | 제10장 | 맺음말
Note
- ↑ maitre 프랑스 말인데, metr 라고 그냥 러시아 말로 쓰이나 봅니다. 찾아보니, mister 나 master 뜻이 있습니다. ... 하는 사람 정도로 번역하면 직역에서 멀지 않은데, 번역에서 관형어가 세번이나 나와서 빼버렸습니다. 문장의 어감의 살리기 위해 proezhevo metra(찾아보니 이 단어는 굳이 '숙어'처럼 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를 어떻게든 넣으려고 하니 매끄럽지 않지만, 아예 빼면 어감도 조금 다르고, 무엇보다 proezhevo 때문에...
- ↑ kak golovoi v omut 이 부분 슬쩍 미뤄두었습니다. omut는 소용돌이, 깊은 데, 혼란, 미로 란 뜻이군요. 해석이 영 안되는 부분입니다.
- ↑ 러시아의 새학년 개학일. 따라서 "9월 1일"은 우리나라의 "3월 2일"과 같은 의미. -- 역자 주.
- ↑ 수학자(수리논리). 교육행정가. 열린 교육 대학 총장. 모스크바 연수원장, 모스크바 교육청 자문위원.
- ↑ 러시아 학제는 현재 11제, 5-7학년이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5-6학년에서 중학교 1-2학년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