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Remark

DoM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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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일기

문학 장르 가운데 다음과 같은 장르가 존재한다: 육아 일기. 아이들은 자라고 많은 일들이 아이들과 함께 일어난다. 한편 부모들은 이 모든 일들을 정성스레 공책에 옮겨 적는다. 나중에 많은 세월이 흘러 이 공책들은 그저 읽기만 해도 마음 넉넉해지는 독서를 제공한다. 특별히 부모 자신들에게 있어서 그렇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너무나 귀여운 시절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부모 자신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이기도 하다. [1]

존경하는 독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자기 자녀가 아닌 남의 어린 자녀들의 사진들을 볼 기회가 종종 있는가. 손님으로 초대되어 가면 집 주인들은 두꺼운 앨범을 꺼내 들고 와서는 넘기기 시작한다… 열 장을 넘어 스무 장으로 갈 때 쯤이면 여러분들은 간신히 하품을 참기 시작하는데 아이들 부모들은 이 행동을 끝도 없이 계속할 요량이다. 그들의 자녀 또는 손자손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모두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 있어 한다. 그러나 여러분들을 뒤쫓는 유일한 한 가지 생각은 아니 어떻게 모든 아이들이 서로서로 닮았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말하자면 “이 책을 독자들의 심판에 맡기면서” 아주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그러고 싶었지만 어떻게도 제 3자의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이 될 수 가 없었다. 내 아내인 알라 야르호는 아주 엄격하고 잔소리가 많은 비평가이다. 그러나 매번 이 원고를 손에 들고 다시 읽을 때마다 원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아이러니는 어딘가로 자리를 양보하고 완전히 다른 감정들로 가득 채웠다.

이 책은 우리 아이들에 대한 책이다. 우리에겐 두 아이들이 있는데 아들인 지마와 딸인 줴냐이다. 여기에서는 이 아이들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아이들의 친구들에 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만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남의 아이들이 아닌 자신의 아이들과 관련된 일들에 있어서 더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책의 저자인 나에게는 엄격한 질문이 주어진다: 제 3자인 독자들은 이 책에서 어떤 흥미로운 것들을 찾을 수 있는가? 왜 이 책이 우리 가족에게 뿐 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에게도 역시 흥미로와야만 하는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육아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수학 교실 일기입니다” 라고. 지마가 생후 3년 10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지마의 동네 친구들 중 그와 비슷한 또는 조금 더 나이가 든 또래 아이들 넷을 모아서 이 아이들과 수학 교실을 진행했다. 바로 이러한 아주 특별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 쓰여있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 책을 일종의 취학 전 아이들을 위한 수학 문제집 정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문제 뿐만 아니라 이러한 특성과 함께 여기에는 아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 무엇을 이해하였고 못하였는지, 어떤 어려움들과 오해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역시 쓰여져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장 평범한 기하학 이나 대수학 에 관한 문제집을 썼다면, 그러나 이와 함께 교사와 학생들이 각각의 문제들과 어떻게 ‘씨름하였는지’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썼다면, 그러한 책은 독자로서의 나를 아주 흥미롭게 하였을 것이다. 유아들과의 경험이라면 이 모든 것들은 더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하다. 사고가 발전하는 전반적인 과정, 모든 지적인 움직임은 이러한 경우 더더욱 확연히 보이고 명확하다. 수학교실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일이 얼마나 매력적이며 완전히 나를 사로잡을 것인가에 대해 예견할 수 없었다. 결과는 이러했다. 수 년 동안 나의 독서 범위는 큰 .. 에서 교육학과 심리학에 대한 책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더 멀리, 더 깊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언어학, 정신의학, 동물의 행위, 행위 유전… 나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나는 더 풍성해지고, 바라건대 더 지혜로와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의 아이들 덕분이었다. 비록 그리보예도프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이가 있는 사람에겐 지혜가 부족하다?”.

취학 전 아동을 위한 수학은 순수하게 수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학교 수학보다 훨씬 간단하다. 그래서 전문가들 뿐 만 아니라 어느 독자에게도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의 잠정적인 독자 층을 아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되었다고 본다. 나는 이 책이 나 혼자에게만 흥미로운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지금 나는 순수한 양심으로 이 책을 독자들에게 권할 수 있다. (한편 고백하건대 아직 초고의 형태로 있던 이 일기를 읽었던 많은 내 친구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것을 책으로 만들 것을 권유했었다. 많은 수의 복사본들이 처음에 모스크바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전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이러한 흥미는 이미 20년 동안 식을 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내게 있어 이 책의 유익함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논증이다.)

왜 동아리를 열었는가? 왜 일기가 필요한가?

여타의 체계화된 다른 수업의 형식들처럼 동아리 역시 규칙적인 공부의 한 방법이다. 사실상 아이들과 공부하는 것이라면 굳이 동아리를 만들지 않고도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시간이 되는대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고 과제를 주고 무언가를 함께 토론하면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계획들은 곧 유토피아였음이 밝혀진다. 어제는 시간이 없었고 오늘은 할 기분이 아니거나 피곤하고… 급기야는 “아니 왜 굳이 지금, 이 시간에 해야하지?”라고 반문하게 된다. 아직 시간은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조만간에 어떻게 시간이 되겠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에 당신이 내일 오전 11시에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올 것이고 최소한 30분은 그 아이들과 놀아줘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당신은 홀로 구석자리로 가서 무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혼자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책들을 들추어 보아야 한다. 골똘히 무언가를 놓고 생각한다면 이르던 또는 늦던 간에 어떤 환경의 압박이 없었다면 절대 떠 오르지 않았을 기막힌 생각이 머리에서 번뜩이게 된다.

아니면, 예를 들어 당신이 새로운 생각을 해 냈다 하더라도 그 생각은 무언가 “물질적인 준비”를 요구할 수도 있다. 무언가를 자르던지, 그리던지, 붙이던지…그러한 “가족을 위한 노동”에 자신을 내 맡기기 위해서는 그저 어떤 멋진 생각을 머리 속에서 그리고 있기 보다는 더욱 강력하고 더 구체적인 원동력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아이들 역시 그들의 행위가 어떤 의식적인 행위와 함께 병행하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 만약 어른들이 아무런 시작의 신호도 없이 아이들로 하여금 무작정 놀이를 멈추고 어떤 과제를 수행하게 한다고 치자. 아이들은 금방 쉽게 분노하고 어서 빨리 이 강압적인 과제로부터 벗어나길 원할 뿐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번 정해진 시간에 모두 함께 모여서 무언가 진지한 것을 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인 “왜 동아리를 열었는가?”에 대한 간단한 답이다.

일기에 관해서 말하자면 사실 처음에는 일기라는 걸 기록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과의 수업에 특별히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독자들이 보게 될 테지만 일기는 스물 한 번째 수업부터 기록하고 있다. 첫 “20 주”는 사실 5개월이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사실상 10개월에 해당한다. 이 기간 동안에 여름 방학이 있었고 다양한 이유로 수업을 빼 먹기도 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수업을 갖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늘 정확하게 이 결정에 따라 수업을 진행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 나중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아이들과의 수업을 시작한지 약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내 친구들 몇 명이 나에게 우리가 수업을 무엇으로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물어온 것이다. 나는 반갑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과 과제들이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것 대신에 그만 입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모두 잊어버린 것이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거의 다 잊어버린 셈이었다. 내가 잘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수업 시간 내내 나와 함께 했었던 어린 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와 열정이었다. 여기에 구체적인 실례가 있는데 Извилин을 이야기 하다가 옆 길로 샌 적이 있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해 주려고 다리를 잃은 장애인들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들에게는 실제로 다리는 없지만 여기에 다리가 있다는 그런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 기억력이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당황했고 실망스러웠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나는 아직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간단하게나마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종의 수업 계획서와 같은 것을 써 보기로 결심했다. 과제 목록만 쓴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토대로 나머지 내용들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수업 계획서를 쓰면서 나는 이미 «나머지 내용»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이미 본능적으로 «과제 목록»만으로는 불충분함을 깨달았던 것 같다.

곧이어 나는 교육학 분야에서 내 생애 첫 «이론적인 발견»을 이루었다. 나는 스스로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깨달았다, 느꼈다?). 진정으로 흥미로운 것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어떤 조건도, 그것의 결과도 아닌 바로 과정,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그 길인 것이다. 여러분들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취학 전 아이들이 풀 수 있는 수학 문제라는 것이 사실상 아주 단순하다는 것을 말이다(그 문제들을 생각해 내는 과정만은 단순하지 않다). 다른 한편 문제를 풀어서 결과를 도출해 내는 데까지 이르는 시간은 충분히 몇 년이고 걸릴 수도 있다. 정말이다. 놀라지 마시라. 몇 년이고 걸린다. 여러분들은 그와 관련된 방대한 예들을 또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시간 동안에 아이의 지성은 잠자지 않는다. 아이의 지성은 내가 내어준 문제들을 포함하여 그의 관심의 범주에 들어온 모든 것들 주위에서 “마치 뜨거운 석탄처럼” 들썩거리고 끓어오른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우리들의 대화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의 “문제 목록”은 더욱더 많은 양의 해설과 이야기, 유머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때때로 수학과 관련된 주제 뿐만 아니라 어떤 보편적인 이야기들과 “이론들” 역시 첨가되면서 점차적으로 이 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접어들었다. 즉 동아리와 일기 사이에 상호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내가 본 것, 생각한 것을 기록하다 보면 자연스레 새로운 생각들, 변경 가능한 내용들이 생각났고 새로운 [문제,과제]들, 수업 내용들이 떠 올랐다. 내 사고는 더욱 깊어져 갔다. 심지어 관찰력 마저 날카로워졌다. 때로는 시끄러운 수업 시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서 바로 기록해 두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릴 법한 일들이 기억나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수업과 일기 사이에} 서로 없으면 안 될 일종의 공생관계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штрих. 시간은 흘렀고 아이들은 자라서 나의 일기를 읽었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이 많은 것을 잘 기억하고 있고 어떤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항상 나와 똑같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심지어 때로는 나와는 정반대로 사건을 인식하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해설을 일기에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하여 전체 프로젝트를 더욱 대화적으로 만든 보완된 차원의 일기가 생겨났다. 내 친구의 표현을 빌자면 이렇게 하여 스테레오 스피커의 효과가 생겨나게 되었다.




p. 8. 일기를 편집하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 {}-역자 첨부 or 원본서 삭제가능한 구절 / ()-본문내용 /[]- 대안(바리안트)


일기를 편집하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 당연히 ‘그렇다’고 본다. 고대 작가들은 <<종이에 활자가 찍힐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치 {책이} 인쇄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란 말처럼. 대개는 머리를 굴린 것이었다[대개는 영악한 속셈이었다]- 후손들이 그들의 노고를 알게 되어 흥분하며 고마워할 것이라는 것, 그들의 진실함과 솔직함에(사실 자신만을 위해 쓰여졌음에 도 불구하고!) 전율하게 될 것이라는 것, 그래서 책으로 출판할 것이고, {인쇄된 그의}글들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라는 것을 계산했던 것이다. 그런 작가를 찾아내는 것은 단순한 일보다 더 단순하기도 하다[매우 간단하다]. 항상 그는 ‘이런 것 같다…’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런 설명이 없어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 해설[주석] 은 어쨌든 작가 자신이 아니라 독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만약 실제로 일기를 자신을 위해 썼고, 후에 누군가가 그것을 읽게 된다면, 이상하게 왜곡될 수도 있다[=만약 실제로 일기가 자신을 위해 쓰여졌고, 후에 누군가에 의해 읽히게 된다면, 이상하게 왜곡될 수도 있다] . 그런 상황을 한번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내가 숭배할 정도로 아주 존경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내가 눈먼 장님도[바보도] 아닌데 내가 그의 사소한 결점이나 웃긴 성격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 그렇게 사소하지만은[사소하게 여겨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쓰여진[자신을 위한]>> 일기에서 나는 그 사람을 비웃고 조롱할 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짜증을 쏟아 붓기 까지 할지도 모르겠다. 이때는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진짜 감정을 떠올릴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라, 원래 나는 그를 매우 존경하니까… >>- <<여러분>>은 누구신가?) 만약 다음에 이 본문을 외부 독자가 읽게 된다면[이 본문이 외부 독자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 장면은 완전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될 것이다. –독자는 내가 그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내가 그를 비웃고 빈정거리고 있다고만 알 것이다.

아니면, 우리에게 좀 더 친근한[익숙한]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여기서 나는 아이들에 대해 쓰고 있지 않은가. 뭐 {또}, 완전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서도. 사실 나는 그들 삶의 한 방면[면, 양상,측면]-아이와 수학의 상호관계- 에 대해서만 쓸 뿐이다[에 대한 것 만을 다룰 뿐이다].[2] 아이가 수학에 흥미를 갖게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사실 나도 아이들의 2주간의 생활 중 평균 30분{만}을 평가[기록,묘사 ]한다. 아이에게는 다른 관심거리도, 다른 문제들도, 또 다른 재능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이것에 관해 잊어버리기 일쑤였는데, 이 아이들을 직접 보지 못한 독자들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랴! (여기에[이 문제에] 대해서는 190-199 페이지에 다시 다룰 것이다. 그러나 {그때 조차도} 줴냐라는 아이{의 케이스 [경우]}에 대해서만). {아 }그리고 이 아이들은 벌써 다 자라 이미 만 25-30세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얼마 안있어 그들의 아이들이 <<아빠가 어렸을때 {말이지} …>>라고 하는 자신들의 엄마,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될 것이다.

그 땐 어떤 식으로든[어떻게든 ] 사실적인 기록{물}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마치 다른 어떤 사람들에 대해 쓰여진 것인양, 모든게 점점 더 허구적인 예술작품처럼 되어진다. 나의 이 일기가 명백히 그런 사적인 기록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기술적인 글에 가깝다. 실제로 나는 이 글을 나를 위해 쓰긴 했으나, 결코 비밀에 붙혀두려 하지는 않았고, 누군가 {이 글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런 기술적인 특성[징]으로 인해서도 어떤 문제가 일어나기는 한다. 어쨌든 정말 나는 하노이의 탑 이 무엇인지, 늑대` 산양 그리고 양배추에 관한 과제(문제)가 어떤 것인가 하는 설명을 내 스스로에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원본에서는 반복되는 부분도 있고{자꾸 반복해서 나오는 부분도 있고} , {도대체} 무슨말인지 불분명한{분명하지 않은} 곳도 있고, 메모를 끄적여 놓은 곳도 있다, 이것들에{대해서}는 해설이 필요하다. (그런데 몇 개 반복되는 것, 특히 посылки가 같은데도[동일한 설명?전제? посылки에서{문제의 조건 부분} ]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오는 부분,들은 남겨두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해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때는 윤리적인[감성적인этические] 측면에서[윤리적으로], 또 어떤 때는 기술적인 측면에서[기술적으로] 이해соображение되어지기도 한다.이해의 방향에 따라 내 자료[일기]가 신중히 편집되어져야 했다. 이것이 바로 내 일기를 있는 그대로 펴내기 위해 항상 내가 수많은 제안들을 피했던 이유이다.

그렇다면,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오래토록 일기를 편집하지 않았던가? 뭣하러 수 년을 끌었단 말인가?


p.9.

취학 전{에 배우는, 아동을 위한} 수학에 대한 초심자의 고찰[에 대해 초보자가 생각해야 할 것]

취학전 수학{이라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여러분 모두 이런 장면은 여러 번 보았을 것이다. 엄마가 커튼 뒤에 숨었다가 웃으면서 눈을 빼꼼 내밀고 <<까꿍!>> 하곤 다시 숨어버린다. 그럼 아직 완전 어린[젓먹이인] 애기는 엄마가 나타날 때마다 고사리 같은 손바닥으로 손벽을 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좋아서 까르르 웃는다]. 엄마와 애기 둘 다 너무 행복해한다. 그리고 당연히 자기들이 수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한다.

내가 이런 말을 쓴 것은 독자를 놀래키려 하거나 귀가 쏠깃하는 역설{의 낚시대}로 독자를 낚으려는 것이 아니다. 진지하게 하는 얘기이다. 심리학자들의 글을 읽어보면, 만 1,5세 이전 연령의 아이 앞에 놓여진 지적능력을 요하는 기본 과제들은 객체의 항상성의 법칙을 알게 하기 위한 것들이다[으로 귀결된다]. 다시말해, 우리가 어떤 물체[것, 물건]을 보기를 중단했는데도,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그 자리에 남아 {존재해}있다는 것은 우리없이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엄마와 같은 그런 중요한 대상은, 그것이 커튼 뒤로 사라졌다해도, 어쨌든 여기 어딘가에 계속 존재해있다는 것이고, 곧 그 커튼 뒤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이가 자라고, 세계에 대한 아이의 이해력도 함께 자란다.

아주 작은 소녀가 재미있는 놀이를 하며 논다; 소녀는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퍼즐조각을 하나씩 골라서 아빠에게 건넨다. 그럴 때 마다 아주 당당하게 <<자!>>라고 소리친다. 아빠가 퍼즐조각을 받자 소녀는 깔깔 웃어댄다. 아이는 얼마전에 <<자>>라는 단어를 익혔고, 그 단어를 쓸 수 있을 때 마다 사용한다. 어쩌다가 손놀림이 아직 좋지않은 소녀의 손이 한꺼번에 두개의 퍼즐조각을 집었다. 순간적으로 소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해본다[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 머리를 굴린다]; –아아..알았다!- 그러고는 아빠에게 퍼즐조각을 건네며 소리친다:<<자-자 !>>. 이 상황을 뿌쉬낀의 말을 빌어 써보고 싶어진다 :

아이의 생각을 따라가보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학문이다.

만 2세쯤 되면 이미 아주 많은 것을 습득한 [익힌] 상태다. 생후 2년 몇 개월 된 남자아이가 아침에 아빠에게 묻는다:

- 아빠, 아빠, 자요?
-아니, 안자 –아빠가 눈을 부비며 대답한다. – 아빠, 부엌에서 차 마시고 있어.
아이는 깜짝 놀란다. 이건 이전에 배웠던 모든 것과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이는 혹시나 해서 부엌으로 달려가 확인해본다. 그러고는 부엌에서 당당하게 돌아온다.
-아니잖아..아빠 부엌에 없잖아! 아아,,아빠..아빠 여기있잖아!

다음 번에는 아이를 그런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혹시나 해서 부엌으로 달려가 확인해 본 그 때, 제스스로 알아내려고 한 그 순간을 눈여겨 보고싶다{눈여겨 보자???}. 우리 모두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아동의 특성이라는 것과 그것이 좀 더 오래 유지된다면 더 좋을텐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일본어로 셈을 해보자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이미 확실히 의식적인 <<수학 교육>>을 받게된다. 사실상 이것은 보통 셈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을 의미한다. 셈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우리 성인들에게 이 능력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도 하다.


그럼 아이의 입장이 되어 우리가 직접 산수를 배워보자….그것도 일본어로! 자, 여기에 1부터 숫자 10개가 있다: 이찌, 니, 산, 시, 고, 로꾸, 시찌, 하찌, 큐우, 쥬우. 첫번째 과제는 이 숫자를 차례대로 외우는 것이다. 이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것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다 외우셨으면 두번째 과제로 넘어갈 수 있다; 쥬우부터 이짜까지 거꾸로 숫자 읽는 것을 익히시라. 이것도 다 된다면, 계산을 해보도록 하자. 로꾸에 산을 더하면 얼마인가?

P.10 그럼 시찌에서 고를 빼면? 그럼, 하찌에서 시를 나누면? 그렇다면 이제 문제를 풀어보자. 엄마가 시장에서 사과 꾸우 개를 사서 시 명의 아이들에게 사과 니 개씩을 나누어 주었다. 엄마에게 사과는 몇 개가 남았나? 매우 어렵긴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은 머리 속에서라도 러시아어{한국어}로 옮기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훈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전환은 우리 뇌에서 우리의 의지에 반해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아니면 아예 우리 스스로 전혀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저학년 과정에서 수행하는 그런 지적인 업적을 나는 나중에, 프랑스에 있으면서 제대로 평가하게 되었다. 이미 10년 이상을 여기서 살면서도, 아직도 나는 프랑스 숫자에 있어 문제를 겪곤 한다. 프랑스 인들은 70부터 99 사이의 숫자를 우리처럼 그렇게 셈하지[읽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육십 구 이후부터의 숫자는 육십-십(즉 70), 육십-십일(71), 육십-십이(72)...와 같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결국, 10단위(??) 끝에서는 육십-십구(79)가 된다; 이 이후에는 갑자기 사-이십(80), 사-이십-일(81), 사-이십-이(82),.....사-이십-구(89)가 되었다가, 다시 아까처럼 사-이십-십(90), 사-이십-십일(91), 사-이십-십이(92),...., 사-이십-십구(99)로 읽는다; 이 다음에는 드디어 백. 사람들이 내게 전화번호나 어떤 유명인의 생년월일 혹은 사망년월일을 아주 빨리 얘기하면 필요한 숫자를 항상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나에게 이 숫자들을 다 더해서 계산해보라고 한 경우는 없어서 다행이다.


(안그래도, 이런 것에서 교육학책[교육론 교재]에서 자주 언급되는 프랑스 저학년생의 재미있는 대답이 나온다: <<이십에 사를 곱하면 얼마가 되지?>>라는 질문에 <<사-이십이 되지요, 곱하기는 교환이 되잖아요[곱하기에는 교환법칙이 있잖아요]>>


어쨌든 여러분은 결국 쥬우까지 빨리 셈하기를 다 익히셨으리라. 이것을 익히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가? 일주일? 한달? 이제 여러분은 여기에서 문제가 기계적인 기억{력}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셨을 것이다: 만약 그것만이 문제였다면 이 모든 이 30분이면 다 끝났을 것이다. 그럼 기억력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경험에서, 가지고 있는[던] 순수하게 수학적인 어려움들을 끄집어 낼 수 있겠는가? 셈의 영역에 있으나 우리 실생활 어디에선가 보이지도 않고, 미쳐 느끼지도 못하는 곳에 있는 그런 어려움들 말이다.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그러는 편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초기 교육의 광신자들은 그 즉시, 아이가 아직 이해도 못하는 것을 아이에게 설명하느라 전력을 소모해 버렸을 것이다. 아이의 목덜미[옷깃]를 질질 끌어 좀 더 빨리 다음단계로 넣기를 바라면서.


사실 아이가 스스로 할 수도 있었을 것을...

유치원생을 위한 평면도형 {기하? 평면도형으로 의역하는게 나을지도...?}

그림 1. 왼쪽에는 정사각형이 그려져 있다. 그럼 오른쪽에는?
그림 1. 왼쪽에는 정사각형이 그려져 있다. 그럼 오른쪽에는?
전통적으로 취학 전 수학에 나오는 두번째 주제는 평면도형이다. 아이들에게 평면도형 형태와 관련된 (비교적 단순한) 몇 가지 정보들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삼각형, 정사각형, 원, 각, 직선, 선분이 무엇인지, 또한 그것들을 재어 보는 가장 쉬운 방법을 가르치는 것.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 있다 : 아이가 만약 포크와 숟가락을 쉽게 구별한다면, 삼각형과 사각형을 구별하는게 아이에게 왜 어렵겠는가? 전혀 어렵지 않다! 아이가 실제로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개념들 사이의 논리적인 상호관계를 밝히는 것과, 도형의 형태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활동들을 알아내는데 있다.

아이들은 종종 그게 아니라, 약간 돌려진 정사각형은 그 고유의 상태를 잃어 그냥 사각형이 된다고 생각한다.


P.11 예를 들어, 1학년{첫 해?} 생들 중 많은 아이들이, 정사각형을 비스듬하게 기울여 그린다면, 정사각형은 더 이상 정사각형이 아니라 그냥 사각형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림 1). 그런데, 보통 정사각형이 더 많은가 아니면 사각형이 더 많은가 하는 질문에는 아주 복잡한[여러가지] 논리가 필요하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문제дело를 바라본다면, 삼각형과 정사각형은[도?] 그 순간 장자상속권??을 잃게된다[삼각형이나 정사각형을 가장 기본[근본]적인 형태라고 할 수도 없다.] : 만약 포크와 숟가락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뭔가 생각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덜 수학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 똑 같은 이야기를 좀 다르게 얘기해보자. {초등}학교 수학에서는 숫자와 도형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게 맞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런 대상들에 관해 핵심적인 것들을 가르쳐 주는데 있어 너무 많은 것들을 놓친다. 이런 것 때문에 유`아동들이 수학적으로 전혀 발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유`아동기때 수학적인 발달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할 수도 있다. 교구 [재료, 자료]материал들은 너무 많다 {널려 있다}, 필요한 것은 정확하게 (그리고 주의깊게)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접근법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그 중 몇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기위해 과장을 약간 섞었다).


11-12 중간


의견들

  1. «오늘날 유치원 졸업생들을 위한 수학 공부에 대한 요구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 휴, 이 «높아져만 가는 요구들»로부터 도망쳐라, 그들로부터 더욱 멀리 도망쳐라!
  2. «아시겠지만 이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어린 아이의 머리를 정수니 적분이니 하는 것과 같이 복잡한 것들로 지나치게 채운다는 것은 말이죠.». – 맙소사! 아니 누가 정수니 적분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던가요?
  3. «당신 상상이나 하시겠습니까? 글쎄 그 사람 집에선 어린 아이들이 확률론을 배운지 뭐예요, 글쎄! 대학을 졸업한 어른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아이들은 너무나 잘 이해한답니다. 내가 항상 말했듯이 우리 뇌의 잠재성은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지요». – 친애하는 열정가인 당신! 실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확율론 를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몇몇 놀라운 현상들을 관찰하긴 하지만 말이지요. (덧붙이자면 버스 정류장에서 어떤 버스가 먼저 올 것인가를 추측해보는 사람 역시 확률과 같은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두뇌의 가장 평범한 어떤 경계도 넘지 않습니다. 밝혀지지 않은 인간 뇌의 잠재성에 대한 문제는 몽상가들에게 남겨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4. «어린 아이들은 보통 기억하는 능력과 새로운 것을 잘 소화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게다가 이 나이 때에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이라면 곧이 듣는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아이들의 머리 속에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넣어 주어야 한다. 나중에 아이들이 비판적이 되고 의미 없다 여기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온다. ' 그럴 때에는 생각할 시간을 더 많이 주고 그들의 학습에 더 많은 동기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 이러한 관점을 나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닌 작가는 신경생리학 분야의 전문가인 교수이다. 그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의견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말하겠다. «이 쓸데없는 말은 설명할 가치조차 없다».
  5. «무엇 때문에 아이들의 머리를 그런 쓸데 없는 것들로 채우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합시다». – 존경하는 토론자님, 당신은 단숨에 한 개가 아닌 두 개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을 하셨습니다. 쓸데없는 것과 정상적인 어린 시절에 관한 문제인데요. 쓸데 없는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결국 개인적인 취향에 관한 문제이니까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우리 수업의 바로 이러한 면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의 글들이 잡지에 실렸을 때 나는 내 스스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정말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조언자의 역할에 처하게 되었다. 여러 아빠와 엄마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그 중 누구보다도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한 사람은 한 엄마였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이라면 치를 떨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수학이 아이의 지적 발달에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어떻게 제 아들과 함께 수학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조언해 주십시오». 다행히도 나는 이 경우에 어떻게 대답해 주어야 할 지를 알았다. 나는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장을 써 주었다. «만약 당신이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당신 아들과 절대 수학 공부를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가장 큰 만족을 줄 수 있는 것만을 아들과 함께 하십시오. 단지 그럴 경우에만 당신의 수업은 당신에게도 아들에게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파이 굽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그렇다면 아들과 함께 파이를 구워 보십시오... ». 단지 염려스러운 것은 혹시라도 이 엄마가 무시당했다고 여기지나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내가 이 엄마는 수학을 하기에는 지적인 소양이 부족해서 이런 편지를 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정상적인 어린 시절»과 관련해서는 몇 마디 하고 싶다. 다음과 같은 장면을 상상해보라. 우리는 강가에 앉아 강 어귀의 진흙에서 글을 파고있는 한 마리 나나니벌을 관찰하고 있다. 나나니벌은 일을 마치고 거기에 자신의 자식들을 위한 충분한 양의 식량을 가져다 놓는다. 예를 들면 마비시킨 거미 같은 것을 말이다. 구덩이에 자신의 알을 낳고 덮어둔다.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동물의 행동에 대해 전문가인 니콜라스 틴베르겐은 나나니벌이 장소를 구별하는 것은 주위에 놓인 물건들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예를 들어 둥지의 한 편에는 어린이 샌들이, 다른 한편에는 조개 껍데기가 놓여 있다고 가정해보자. 나나니벌이 날라가고 난 이후 그것들을 원위치에서 약 1미터 정도 옮겨 놓아보자. 몇 분 후 나나니벌이 돌아왔을 때 나나니벌은 정말 틴베르겐의 가정대로 자신의 둥지 근처가 아니라 그로부터 1 미터 정도 떨어진 샌들과 조개 껍데기 사이의 지점에 앉는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 아이들 뿐만 아니라 우연히 강 가에서 우리와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 역시 크게 열광시킨다. (참,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을 지켜 본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벌을 날려 보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 이제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다. 이 활동이 당신이 정상적인 어린 시절이라고 여기는 것에 들어 맞는가? 바로 이 실험으로 당시 틴베르겐은 노벨 생물학상을 받았다. 이처럼 또한 이런 주제로 노벨상을 받은 실험을 한 영재 아이들에 관한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아이들에게 무언가 가르친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내 친구이자 훌륭한 수학자이며 교사인 안드레이 툼 내게 해준 한 마디를 나는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여기에 인용하고 싶다. 그것은 내 스스로를 자랑함이 아니라 그러기 위해 애쓰는 이상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는 아이들에게 수학이 아닌, 삶의 형상을 가르치고 있네» 라고 말이다.

우리 수업에 대한 짧은 이야기

우연찮게도 우리가 맨 처음 수업한 날의 날짜가 어떤 메모지에 적혀있었다. 1980년 3월 23일. 남자아이들과의 수업은 비록 꼭 정기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4년간 계속되었다. 이 시간 동안 줴냐가 자라났고 줴냐와 줴냐의 여자친구들과 함께 했던 두번째 동아리의 공부가 시작되었다. 이 동아리는 2년 동안 계속 되었다. 다른 아이들과 동아리를 만들어 공부해 보려던 시도가 몇 번 있긴 했으나 그 수업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끝나고 말았다. 사실 이 모든 일들이 주요한 일(내가 '사명'이라고 부르고 싶은)을 하고 난 이후의 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몇 번인가는 심지어 마스터 클래스에서 강의하는 이상한 역할도 맡아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로 진출하게 되었다! 처음엔 지마가 배우던 1학년의 동아리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수업들이 더 있었다. 나중에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길로 접어들었는데 어떤 교육학 실험의 일환으로 모스크바의 한 학교에서 1학년 교사[рядовой учитель 평교사[3]로 한 달을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스스로가 지성인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언제든 학교와 교사들을 비판하고 지혜로운 조언을 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자신을 두고 했던, 힘들었지만 정말이지 매우 유익했던 이 실험 덕분에 관점들을 많이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시간상 너무 앞질러 와 버렸다.

이 역사가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유명한 언어심리학자 레베카 마르코브나 프룸키나덕분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집에서 열리던 세미나를 참석하고 있었는데 내 일기를 읽게 된 그녀는 나를 «아는 것이 힘»이라는 잡지사로 데리고 갔다. 곧이어 이 곳에서 동아리에 대해 쓴 나의 두 논문(1985년 제8호, 1986년 제 2호)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나중에 세 번째 논문도 게재되었지만 그것은 그리 «큰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런데 첫 두 논문들이 기대하지도 않은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훌륭한 아동 시인이자 교육자인 바짐 알렉산드로비치 레빈은 심지어 내게 내 논문들이야 말로 교육학 분야의 고전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이후 이 논문들의 운명은 다음과 같았다. 얼마가 지난 후 논문들은 영어로 번역되어 The Journal of Mathematical Behavior라는 잡지에 실렸다. 나중에는 기억컨대 네 개의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졌다. 그리고 또 이후에는 «취학전 교육»이라는 신문(2000년 5월과 6월 호)에 게재되었는데 이번에는 B.A.레빈의 해설과 함께 실렸다. 나중에 논문들은 레빈의 «부모를 위한 수업»(모스크바: 폴리오, 2001)이라는 책에 또 실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바로 최근인 2005년에 «9월 1일»이라는 출판사에서 «취학전 아동들을 위한 가정 학교»라는 제목의 얇은 책을 내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레빈의 이름은 빠져있다. (



P. 15

감사의 말

우리 독자들이 영민하셔서 이 장에서 내가 무슨 말부터 꺼내려고 하는지 이미 짐작하고 계실 것이다. 먼저 아이들에게 감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께서는 나를 훈계하시면서, <<너도 자식이 생기면 이해하게 될거다>>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그러면 나는 화가나서, 이해하기는 뭘 이해한단 말이야? 그래봤자 애들이잖아. 어딜가나 애들이지. 그래서?? 그건 그렇게 흔치 않은 일이 아니라고. 그 때 나는, 아이가 생기면 세계관이 얼마나 바뀌는지, 사람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바뀌는지 몰랐다. 이제 나는 나보다 상상력이 더 좋아 이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아이가 없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그런 의식전환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그러나, 내 <<개인이라는 {소}우주에서의>> 대폭발은 바로 아이들 덕분에 일어났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고마워하는 것이다.


우리 수학 동아리에 참석한 모든 아이들에게도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아이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는 말로 다 전하기 힘들다. 그러나 한 가지는 꼭 그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아이들 모두에게 똑같은 관심을 기울이려고 전심으로 노력했음은 내 솔직한 심정이나, 항상 그렇게 되지만은 않았던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다. 어떤 아이도 나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들의 마음에 나를 탓할 게 남았다면, 해 줄 말이 하나밖에 없다: <<너희도 자식 생겨봐라, 그럼 이해하게 될 거야.>>


아내 알라 야르호에게도 감사드린다. 먼저, 우리에게 아이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감사히 여긴다- 아내는 이 일에 적극적인 동참자였다. 두번째로, 수학 동아리를 만든 것은 바로 그녀의 생각[아이디어]이었다. 우리 수학교실[동아리]은 내 것인만큼 그녀의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다음 내용만 보아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나는 그 당시 그녀가 정신적으로 나를 지지해 준 것에 감사한다, 뿐만 아니라 그 후 내가 이 일기를 시작해서 마무리 할 때까지 줄곧 정신적으로 채찍질해준 것에도 감사한다. 이 책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아내는 교정을 맡아주었고, 문체를 손봐주었으며, 조언자였던 동시에 순수하게 흥미를 가진 독자이기도 하였다.


레베카 마르코브나 프룸키나는 나를 <<빛으로 이끌어내주었다>>: 정말 가족적인 일이었던 우리 일이 그녀 덕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리타 마르코브나(친구들은 레베카 마르코브나를 그렇게 불렀다)는 흥미있는 많은 프로젝트의 후견인이었다. 나도 {그녀의 후견을 받은} 그들 중 하나이다. 한가지 더, 그녀와 토론하는 가운데 내 생각들이 많이 정리되었음을 밝힌다.


알렉세이 르보비치 시묘노프는 공식적으로는 인공두뇌학회에서의 내 상관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질문에 대해 지침을 주시는 분이자 내 선배이다 (그가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는 이 작업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흥미로운 일임을 확신했고, 어느정도 나도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하네비치 쉔은 원래는 수기로 쓴 내 일기에 관심을 보인 독자 중 한 사람이자, 한시라도 빨리 이 책을 출판하도록 나를 설득한 분이셨다. 그런데 시간이 소요됨에 따라 결국 내 작업 속도를 견디지 못하시고, 고등 학생과 대학생을 참여시켜 내 책의 초판을 준비하기 위한 컴퓨터 작업을 하게하셨다. 이 일과 관련해서, 블라지미르 루고프낀군이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해주었음을 밝힌다. 이 일이 끝나자 나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편집작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정말 없어서는 안되었을 분인 사샤[알렉산드르][4]로 다시 돌아와서, 그 분이 내 프랑스제 컴퓨에 러시아판 LATEX [5]를 깔아주셨다. 사샤 쉔이 아니었더라면 이 작업이 아마 일년은 더 끌었을 것이다.


내가 감사해야할 분들의 명단이 끝난게 아니다. 사실 아직 시작도 안했다. 그렇지만, 내가 이런 식으로 계속한다면, 독자분들은 어쨌든 이 부분을 읽지도 않고 건너 뛰실게 분명하다. 그래서 짧게 말씀드리겠다: 언젠가 나와함께 <<짧게든 길게든>> 이 작업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던 분들, 관심으로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셨던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내 소중한 친구들이여 : 감사합니다!


  • * *

모스크바의 발쇼이 블라시옙스크의 한 골목길에(아르바트[6]에서 그리 멀지않은) 이미 세계에 명성이 자자해진 연구소: <<모스크바 중단 없는 수학교육 센터>>(MCNMO). 여기서 <<중단없는>>이라는 말은 전 연령대를 의도한 말이다. 센터 소속으로 모스크바 네자비스마야 대학과 그곳의 대학원 과정이 있는데, 갖가지 수학 올림피아드와 고등학생과 중학생을 위한 과외 특별 수업들이 여기에서 많이 조직된다. 취학 전 아동까지도 포함하여, 연령대를 확대시키려는 취지이기도 하다. 내 책이 MCNMO 출판부에서 출판된 것에 참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게다가 그런 데서는 꼭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바짐 올레그비치 부가옌꼬도 그들 중 한명인데, 그가 직접적으로 이 일에 관계되진 않았지만, 이 책의 출판 준비 작업을 그가 계획하였다. 그 분께서 정말 멋진 팀을 결성해주셨다. 그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리는데, 제일 먼저 미하일 빠노프 씨께 감사드린다. 특히, 그분은 그림작업을 모두 다시 해 주셨다. (전문가들은, 학술논문에서 그래프를 그리기 위한 도구로 취급되는 METAPOST 프로그램으로 예술적인 삽화들을 만들어내는 그의 대가다운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이 센터에서 하는 작업은 http://www.mccme.ru/ 라는 싸이트에서 {만나}보실 수 있다.


아마 여러분은 바로 이 싸이트에서 이 책을 읽으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도 이 싸이트에서 찾을 수 있다.


2가지 알아두실 점.


여러분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 드려야겠다.


첫번째는, 이 책에 나와있는 모든 문제들을 내가 생각해 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리학 싸이트에서부터 잘 알려져있는 수학 전집이나 친구들끼리 나눈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처들을 이용했다. 어떤 때는 문제의 조건부분을 그대로 유지시키기도 했으나, 대개 내가 생각하는 식으로 그것들을 바꾸었다. 때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꾸기도 했고, 어떤 때는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가 바꾸기도 했다. 내가 {사용한} 출처들 중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옮겨오는 중{과정}에 잃어버렸고, 지금은 참고문헌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만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조차 나 스스로 잊어버린 문제들도 있을 것이다. 이 빚을 갚기 위해, 나도 여기에 적힌 모든 것들을 원하시는 분들은 그냥 사용하실 수 있도록 허용하고, 누구도 표절시비로 소송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린다. 만약 내가 생각해냈던 이야기들이 수업자료로 쓰인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아니, 자랑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알아두셔야 할 것은, 여기에 나와있는 이야기들이 다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기억에 의존해서 쓰여졌다 : 게다가 아이들 몇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것을 항상 다 알아들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분명 많은 얘기를 놓쳤을 것이고, 적어도 어떤 것들은 잘못 이해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것들은 표시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Note

  1. 문학 장르 중에 다음과 같은 장르가 있다 : 부모 일기. 아이들은 자라고 수많은 일들이 아이들과 함께 일어난다. 한편 부모들은 이 모든 일들을 정성스럽게 공책에 옮겨 적는다. 나중에 세월이 많이 흘러 이 공책들은 그저 읽기만 해도 마음 넉넉해지는 독서를 제공한다. 특별히 부모 자신들에게 있어서 그렇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더없이 귀여운 시절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부모 자신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이기도 하다.
  2. 사실, '아이와 수학의 상호관계'라는 것이라는 삶의 한 측면에 대해서만 다룰 뿐이다
  3. 이 부분 보충설명 필요 ... 나중에 찾아 끼워 놓을께요.
  4. 이 부분은 나중에 각주로 부연설명을 해야겠네요. 러시아에서 애칭의 개념에 대해서...
  5. 이 부분도 나중에 이 프로그램이 무언지 부연 설명하겠습니다.
  6. 이부분도 부연 설명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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