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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22일 (토) 12:21 기준 최신판

기사원문 : 한겨레 신문.


"내 아들은 돌아오지 않지만 참회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① 학살에서 화해로 - 르완다

마을법정 통해 고백과 용서…인종청소 아픔 다독여

지난 7월 찾은 르완다의 자바나 마을. ‘천의 언덕 나라’라는 이 나라의 애칭이 무색하지 않게 두 시간 동안 산과 언덕들을 넘자 숲속의 조그마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 키갈리에서 40㎞ 떨어진 이곳의 마을회관에선 르완다 전통 방식의 마을 재판인 ‘가차차 법정’이 열리고 있었다.

여느 법정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판사는 푸른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30대 청년이었다. 검사와 변호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전 10시반께, 분홍색 수의를 입은 피고인 앙투안 루고로로카가 들어섰다. 후투족인 앙투안은 13년 전 같은마을에 살던 12살 투치족 소년 장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장이 없어진 정황과 그날 앙투안의 행적을 잇달아 증언했다.

1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던 장의 어머니, 발레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 아들의 대부였어요. 당신을 좋아하던 그 아이를 왜 죽였나요?”
“나도 그때 무서웠어요. 믿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투치족 아내를 뒀던 저도 위협했어요.” 앙투안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가 부인을 잃고 마음고생이 컸다.” “그는 인종청소 초기부터 마을의 투치족들을 공격했다.” 증언이 엇갈렸다.

1시간 뒤, 판결을 앞두고 발레리가 다시 발언을 요청했다.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저주했어요. 그러다가 깨달았어요. 내 아들은 돌아오지 않지만, 당신은 여기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은 한때 나의 좋은 이웃이었다는 것을. 당신을 용서합니다.”' 발레리의 표정은 담담했다.

1994년 르완다에서는 석 달 동안 97만명이 희생됐다. 아프리카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이 나라에서 학살은 다름아닌 이웃의 손으로 자행됐기에, 나라의 미래는 극도로 암울해 보였다.

하지만 13년이 지난 2007년, 르완다는 아프리카 인종 화합과 번영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2001년 르완다 정부는 당시 사법제도로는 10만명에 이르는 피의자 가운데 3분의 1도 재판을 받지 못한 채 감옥에서 숨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2001년 가차차(잔디가 깔린 마당이라는 뜻)가 부활됐다.

가차차에서 죄를 자백하고,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받은 가해자는 파격적으로 낮은 형량을 선고받는다. 이날 앙투안은 그동안 감옥에서 보낸 12년을 고려해, 6개월 사회봉사형에 처해졌다. 사회봉사형을 받은 이들은 피해자들의 집을 지어주거나 도로를 보수하게 된다. 며칠 동안 인종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캠프에도 참여해야 한다.

가차차의 힘은 지역사회에 있다. 참여자들은 증인, 가해자, 피해자 구분없이 함께 당시 상황을 논의하며 집단적 기억을 유도한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통합화해위원회의 파투마 은당기자 위원장은 “서구식 법정에서는 가해자가 결코 자신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며 “가차차에서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로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용서와 자비를 베풀게 된다”고 말했다.

투치족 정부는 이 밖에도 △후투족의 국방장관 등 주요 관직 기용 △노인과 젊은이에 대한 대대적 사면 △감옥내 외국어 교육 등 다양한 방법으로 후투-투치 화합을 유도하고 있다. 집중적인 역사 토론은 후투족과 투치족 분리정책 자체가 식민지 세력에서 강요한 일이며, 르완다의 전통과 무관하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끌어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르완다의 뿌리깊은 인종 갈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도 귀향을 꺼리는 난민들이 인근 콩고와 부룬디·우간다에 남아 있다. 가차차의 결과를 둘러싼 갈등도 끊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언론인 제임스 무니아네자는 “지난 세기 잔혹한 식민통치를 경험한 아프리카에서 인종 갈등은 대륙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라며 “우리가 그동안 이뤄낸 작은 성과는 아프리카 대륙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키갈리/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핏빛 내전의 땅에 ‘구릿빛’ 재생 숨결 -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③ 거듭나는 자원대국-콩고

기사원문

지난 7월말 찾은 콩고민주공화국(옛 자이르)의 수도 킨샤사. 공항에서 입국 절차를 밟던 외국인들은 얼굴을 붉혔다. 짐 분실이 잦은데다, 출입국 관리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사자처럼 달려들어 온갖 트집을 잡아 돈을 뜯기 때문이다. 공항을 나서니 황량한 거리가 펼쳐졌다. 도로는 곳곳이 패여 달 표면처럼 울퉁불퉁했다. 도로 옆에는 칠이 벗겨지고 부서진 1~2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800만명이 사는 킨샤사에 대중교통 수단은 거의 없었다. 4인용 승용차에 6~8명씩 타고, 트럭이나 승합차 지붕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치안 불안으로 호텔·외국 공관부잣집은 두꺼운 철제 대문과 3m 높이의 전기철조망을 친 담, 무장한 사설경비원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나라는 가난한데도 물가는 턱없이 비쌌다. 킨샤사 주민인 은쿠무 프레이 룽굴라 박사(47)는 “생필품 값은 유럽이나 미국보다 더 비싸다”며 한숨을 지었다. 지난해 12월 국제연합(UN) 파견 직원이 소비지출을 반영해 작성한 ‘소매물가지수’에는, 콩고가 세계 173개국 가운데 2위로 나타났다. 인구의 71%가 기아로 영양실조 상태다. 킨샤사 주민의 5%만이 규칙적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갖고 있다. 6천만명에 가까운 인구 가운데 3700만명이 하루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30%만 안전한 식수를 구할 수 있다.

콩고를 절대적 가난으로 몰아넣은 게 바로 내전[1]이다. 지난 3월말 총성이 멎기 직전까지 킨샤사에선 대포까지 동원된 무력충돌이 빚어졌다. 그 상흔은 짙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온 평화는 황량한 땅에 재생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미국 등 국제사회의 적극적 개입으로 콩고 정국이 안정을 찾아가자 외국인 투자가 몰리고 시작했다. ‘천연자원의 보고’로 불리는 콩고의 광업은 말 그대로 초호황을 맞고 있다.


8월초 찾아간 콩고 동남쪽 카탕기주 리카시 콜로웨이지 광산에선 활기가 넘쳐났다. 국영광산업체인 제카민 소유인 이 광산은 세계 최대의 구리 매장량으로 유명한 잠비아·콩고 국경의 ‘구리 띠’(커퍼벨트) 가운데 있다. 노천광의 백두산 천지 크기 물웅덩이 주변에 남루한 옷차림의 인부들이 개미처럼 붙어서 곡갱이로 땅을 파고 있었다. 또다른 인부들은 캐낸 구리·코발트 등을 들것으로 나르고 물로 씻느라 분주했다. 탄광의 단순 노무자 월급은 100달러 수준으로, 콩고에서는 꽤 많은 축에 든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 광산업체 케이엔엘(KNL)메탈의 권성기 사장은 “좀 과장하면, 콜로웨이지 지역은 어느 곳을 파더라도 상업적으로 쓸 만한 구리가 나온다”며 “구리·코발트 같은 원자재는 대체 불가능하므로, 자원전쟁 시대에 한국 기업들이 적극적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거대 기업들도 콩고의 정치 상황을 관심있게 지켜보며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의 구리·금업체인 프리포트맥모건이 6억5천만달러를 투자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최대 광산회사 비에이치피(BHP) 빌리턴과 세계 3위 금 채광업체인 남아공의 앵글로골드 아샨티는 투자를 계획 중이다. 콩고 제2의 도시이자 광업중심지인 루붐바시에서 만난 오스트레일리아 광산기술자 마이크는 “미국과 유럽 기술자, 기업인들이 출장을 많이 오는 광산 지역은 1년 전에 호텔 예약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 킨샤사에서 호텔 방 구하기는 서울에서 명절 귀성 열차표 구하기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콩고의 대표적 광물로는 다이아몬드(매장량 세계 3위), 금(10위), 구리(20위), 코발트(5위) 등이 있다. 또 수력발전 잠재력(4위), 산림자원(2위)도 세계적 수준이다. 매듀 야마바 라프파 콩고국립광물검사평가소 국장은 “자원은 콩고의 자존심이자, 발전전략의 원동력”이라며 “콩고는 아프리카 개발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콩고가 발전하면 아프리카 전체로 파급효과가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전이 격화되기 전인 1960년대 남아공 못지 않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콩고가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글 마딤바·킨샤사/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주민-자연 함께 살리는 ‘윤리 여행’- 검은 대륙 희망 찾기 ④ 지속 가능한 관광-탄자니아·케냐

기사 원문

탄자니아 북부 아루샤에서 100㎞ 남짓 떨어진 마을 ‘음토와음보’는 스와힐리말로 ‘모기가 사는 강’이라는 뜻이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달리면 세계 최대 야생동물 서식지인 세렝게티 평원이 펼쳐지고, 동쪽에는 사계절 설경을 자랑하는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가 우뚝 서 있다.

남한 면적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세렝게티는 계절에 따라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초식동물들로 유명하다. 해마다 전세계에서 수백만명이 사자·코끼리·들소·얼룩말·기린 등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인 ‘지속 가능한 관광[2]을 취재하러 왔지만, 야생동물과 조우할 기대감에 설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 사는 초식동물만 200만마리라니!

탄자니아인 가이드 조나단은 사파리 초보인 우리 일행에게 “치타나 사자는 의외로 순하니 무서워 말라”며 동물들의 습성을 자세히 설명했다. 오히려 위험한 동물은 150~200마리씩 무리지어 다니며 ‘조폭처럼’ 사람을 공격하는 개코원숭이다. 이곳은 워낙 지역이 넓어 한국의 에버랜드같이 동물들을 한꺼번에 보기란 불가능하다.

이웃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버스로 울퉁불퉁한 길을 8시간 이상 달려 겨우 도착한 ‘모기마을’은 특별히 아름답지도, 풍요롭지도 않았다. 개울 곳곳에는 마을 이름에 걸맞게 벌레가 날아다녔고, 주민들 대부분은 흙바닥에서 생활했다. 이 곳에서 오후 내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체험 관광 일정이었다.

“쭉 들이켜요.” 촌로들이 바나나술을 강권했다. 수십번 사양한 끝에 마신 몇잔에 얼굴이 발그레해진 우리 일행은 여러 집을 다녔다. 까만 얼굴에 새하얀 이를 드러낸 어린이들은 ‘음중구’(스와힐리어로 ‘백인’, 아시아인도 백인으로 여긴 것임)를 외치며 따라다녔다. 외국인에게 구걸하지 않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이 지역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우간다 출신 에테시 할머니는 30가지 바나나잎을 엮어 알록달록한 나무 도시락을 만들고 있었다. “취미삼아 만들었는데, 여기 놀러와 이걸 본 미국 여학생이 ‘사파리에서 누구나 도시락을 먹으니 호텔에 납품해보시라’고 권유했다”고 말했다. 도시락이 인기를 끌자, 인근 호텔들은 사파리를 떠나는 손님에게 건네는 도시락을 일회용 종이 도시락에서 ‘할머니표’로 바꿨다.


명승지 관광에 익숙한 여행객들은 낯선 곳에 갈 때마다 ‘일상 체험’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이름 모를 마을의 작은 집을 볼 때면 안방은 어떻게 꾸몄는지, 밥은 뭘 먹는지 등이 항상 궁금하다. 지속가능한 관광이란 이름이 붙은 체험 관광은 이런 갈증을 충족시켜준다. 동시에 마을 주민들의 실질적 소득을 올려주는 효과도 낳는다.

세계 10대 최빈국 가운데 하나인 탄자니아는 온 국토가 관광지나 다름없다. 주로 돈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사파리 관광에는 전문 가이드 겸 운전사, 요리사, 4륜구동 자동차 등이 필수이므로 1인당 평균 여행비용은 비행기 값을 빼고도 1천달러를 훨씬 넘는다. 문제는 그 수입의 대부분이 외국 여행사나 도시 사람들에게 빠져나가고, 현지 주민들은 혜택을 누리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지속가능한 관광이다. 모기마을에는 1998년 체험 관광이 시작된 이후 1만명 이상이 다녀갔다. 이 마을에선 함께 살고 있는 12개 부족의 다양한 문화가 ‘관광자원’이 됐다. 마을길을 안내한 마을 청년 음토이는 “우리도 여행객들이 사자나 치타 등 야생 동물을 보는 데만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7년 동안 번 돈 2억실링(약 1억4600만원)을 학교와 병원, 고아원 등 공동시설에 투자해 살기 좋은 마을이 됐다”고 자랑했다.

모기마을처럼 지역 주민들이 직접 관광을 기획하고, 마을 사람들이 그 수익을 나누는 사례는 아직 많지 않다. 그렇지만 가능성은 풍부하다. 동아프리카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수는 해마다 10% 이상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저녁 식사 때 가이드 조나단한테서 이곳 젊은이들의 삶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품격 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그는 가난한 짐꾼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킬리만자로에서 관광객들의 짐을 나르며 영어를 배웠다. 10년 넘게 변변한 등산화조차 없이 산을 타다 최근에야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업가라는 자신의 꿈을 풀어놓는 동안 조나단의 눈빛은 새카만 하늘을 무수히 수놓은 별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일단은 아루샤에 있는 전문대에 갈 겁니다. 그 다음에 나처럼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유치원을 만들 겁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할테니 여행사 일도 열심히 할 겁니다. 당신 같은 여행객들이 소규모 지역 업체들을 얼마나 지원하느냐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음토와음보·아루샤·응고롱고로 / 글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스타벅스? 처음 듣는데…에티오피아선 커피 한잔에 3원- 원두값 쥐락펴락 대기업만 ‘뱃살’

기사원문


“스타벅스? 처음 듣는 이름인데….”

농부 아토모코릴(50)은 호기심에 눈을 깜빡였다. “스타벅스는 가장 유명한 커피 체인점이며, 거기선 커피 한잔을 4~5달러에 판다”고 설명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걸 마시는 사람들이 가엾군. 여기서는 커피 한잔에 3에티오피아 센트(약 3원)면 되는데…”

아토모코릴을 만난 곳은 커피나무가 울창한 에티오피아 지마 지역 야부나 마을의 숲속 과수원이었다. 이곳은 커피의 원산지 에티오피아에서도 ‘커피의 수도’로 꼽힌다. 고급 커피로도 유명한 ‘시다모’와 ‘이르가체페’의 부근이다. 에티오피아인의 커피에 대한 자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토모코릴도 예외는 아니었다. “커피는 우리에게 삶 그 자체다. 우리가 커피를 사랑하는 만큼 커피도 우리를 돌봐준다고 믿는다.” 옆에서는 10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 딸들이 바람에 떨어진 열매를 줍고 있었다. 그는 과수원 가장자리로 가더니 “이 나무는 100살이 넘었지만 매년 열매가 열린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커피가 그의 사랑에 항상 보답한 것은 아니었다. 불과 7~8년전, 이 마을의 나무에는 잘 익은 커피 열매 대신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재앙같은 커피값 폭락 때문이었다. 1㎏에 3비르(약 300원)하던 커피값이 0.5비르(50원)으로 떨어졌다. 한주에도 몇 집씩 야반도주를 했고, 아이들은 학교는커녕 병원도 가보지 못하고 죽었다.


국제 커피값은 1989년 미국이 국제커피조합(ICA)에서 탈퇴한 뒤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으로선, 냉전 붕괴 뒤 가난한 커피 생산국들의 수입을 보장해 이들의 사회주의화를 방지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구호단체 옥스팜은 현재 전세계 커피 수요에 견줘 공급이 8% 정도 웃도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마의 농부들이 목숨을 끊던 그 무렵,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커피산업 담당 공무원 타데세 메스켈라는 국외 커피시장 동향을 살펴보고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커피값은 몇 년째 바닥을 치고 있었지만, 커피를 가공해 내다파는 다국적 기업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 농부의 아들인 그는 이런 부조리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많게는 150번이나 손이 바뀌는 커피의 유통과정과, 그 과정에서 전 세계 커피시장을 장악한 다국적 대기업들이 얻는 이익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메스켈라는 99년 6월, 35개 지역 커피조합을 모아 ‘오로미아 커피농업인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들은 에티오피아 최초로 외국에 커피를 직접 수출하기 시작했다. 또 ‘유기농 재배’와 ‘공정무역’의 국제 인증을 받아 브랜드 파워를 과시했다. 이 조합은 조합원 10만명, 연매출 150억원의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조합원들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가입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이들이 추진해 온 ‘공정무역’은 생산자가 제값을 받는 것 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인간다운 노동조건, 직거래, 민주적이고 투명한 조직 운영 등을 포괄한 개념이다. 아토코모릴이 사는 야부나 마을에선 오로미아 조합 배당금으로 수도펌프를 샀다. 어린이들도 대부분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뿌리 깊은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기는 쉽지 않다. 마을의 원로인 메코넨은 “여전히 커피만으로 먹고살긴 힘들다”며 “커피밭 옆에 유럽 등에서 금지된 마약 성분이 들어 있는 차트나무를 심는 집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커피는 국제 원자재 시장에서 부피 기준으로 석유 다음으로 많이 거래되는 상품이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 서구인들이 재배를 강요한 ‘식민지의 작물’이었던 커피는 현대인들의 노동 생산성을 올리는 데 쓰이는 ‘착취의 열매’이기도 하다. 이런 유래는 공정무역 운동에서 커피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한가지 이유다. 오늘날 주요국에서 커피 없는 하루란 상상하기 어렵다.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라떼 혁명’ 뒤 테이크아웃 커피 시장은 해마다 10% 이상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커피 생산 농민들은 그 혜택에서 소외돼 있다.

메스켈라는 ‘착한 커피’ 사업의 중요한 목표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날마다 접하는 음료이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됐고 정당한 대가가 지불된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관심을 갖게 하는 게 우리의 일이다. 그런 관심을 갖는 이가 더 양심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란 점은 자명하다.”

메스켈라 커피 조합 대표 “진보와 연대해 전세계 체인점 만들것”

타데세 메스켈라(사진) 오로미아 커피농업인 협동조합 대표는 에티오피아 커피의 ‘얼굴’이다. 1999년 이후 전세계 20여국을 누비며 공정무역·유기농 커피를 홍보하는 그의 열정에 반한 젊은 영화인들이 다큐멘터리 <블랙골드>를 만들기도 했다. 메스켈라는 “커피는 단순히 하나의 작물이 아니라 공정무역의 희망”이라며 “농민을 죽이는 커피가 아니라 살리는 커피, 제3세계와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커피를 사달라”고 호소했다.

-왜 커피인가?

=다른 게 없다. 커피는 에티오피아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에티오피아는 다른 커피 생산국과 달리 자국 생산 커피의 35%를 국내에서 소비할 정도로 커피가 사회에서 핵심적이다.

-조합 설립 배경은?

=농민들이 죽어가던 1999년에 설립됐다. 90년대 이후 신생 커피 생산국들의 생산량이 폭증하며 국제 커피값이 급락했다. 특히 커피를 생산하는 농민들은 중간 상인과 다국적 기업들에게 이익의 대부분을 빼앗겨 왔다. 다국적 기업들은 커피의 로스팅(커피 콩을 볶는) 과정 등에서도 우리를 철저히 소외시켰다.

-조합은 어떤 일에 주력해 왔나?

=에티오피아 커피는 모두 유기농 커피다. 기계 수확을 위해 숙성제를 치는 일부 나라와 달리 비료나 농약을 쓸 여유조차 없다. 이런 점 때문에 높은 부가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1년 독일에서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최근에는 커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공정무역의 정의는?

=생산자가 적어도 생산원가 이상의 값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취지를 알리기 위해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영국 등 유럽 전역과 일본, 미국 등을 돌아다녔다.

-그동안의 성과는?

=우리의 커피는 공정무역, 유기농 프리미엄으로 다른 커피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린다. 전세계에서 공정무역 인증을 받은 커피 가운데 20%만 공정무역 가격에 팔리고 있다. 수요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커피를 팔고 얻은 조합의 수익은 배당금 형식으로 다시 농민들에게 간다.

-커피 값이 낮아도 이익을 남기는 경쟁자가 있는데.

=커피 값은 내려갔지만, 커피의 소매가는 변동이 없거나 오르지 않았나. 생산국 가운데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은 커피가 주된 수출품이 아니어서 싸게 받아도 생존과는 상관이 없지만 우리는 다르다.

-다국적 기업들을 겨냥하는 이유는?

=이들은 당신이 마시는 커피 값의 가장 많은 부분을 가져간다. 맥스웰을 갖고 있는 크래프트와 폴저스를 갖고 있는 피엔지, 네슬레의 세 회사는 전 세계 커피의 60% 이상을 가공해 팔고 있다. 그 커피의 대부분은 농약을 치고 기계로 수확한 싸구려 커피다. 이들은 한두가지 단순한 조합으로 블렌딩한 뒤 비싼 값에 판매한다.

-앞으로 계획은?

=우리는 커피 산업이 단순히 원두를 생산해 파는 데서 ‘분위기를 파는’ 서비스 산업의 영역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전세계의 진보 세력과 연대해 세계적 규모의 커피 체인점을 만들고 싶다. 일단 2~3년 안에 로스팅부터 직접 시작하겠다는 계획으로 공장을 짓고 있다. 한국에서 가게를 열 사람은 없을까?

여성나무꾼 공동체 극빈층 새삶 ‘출구’로 - 검은 대륙 희망 찾기⑤ 억압의 사슬을 끊고-에티오피아

안개가 자욱한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새벽, 구비구비 이어진 산길로 여성 나무꾼들이 줄을 지어 내려왔다. 커다라 나무 등짐으로 허리가 굽은 그들의 모습은 ‘물음표(?)’를 닮아 보였다.

하루 10시간 산을 오르내리며 나뭇짐을 실어나른 뒤 이들이 손에 쥐는 돈은 고작 4비르(약 415원)다. 2천m가 넘는 고원지대인 아디스아바바의 주민 대부분은 나무를 때 추위를 녹인다. 그렇지만, 땔감 수집은 불법이다. 발각되면 산림감시원에게서 처벌과 구타, 심할 땐 성폭력을 당한다.


에티오피아에서 땔감을 구해오는 것은 물을 긷거나 밥을 하는 것처럼 주로 여성들의 일이다. 이 도시에서만 1만5천여명이 나무꾼으로 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어린 소녀들도 많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최근 보고서에서 “10~15살 나무꾼의 평균 몸무게가 38㎏, 이들이 지는 나뭇짐의 무게는 35㎏”라며 “이들은 여성인권이 세계 최악 수준인 에티오피아에서도 가장 비참하게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시골 출신으로, 아이들을 평균 4~5명 이상의 키우는 이들 여성은 하나같이 자식들이 공무원이나 의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들의 공통된 또다른 소망은 ‘에티오피아 여성나무꾼 출신들의 모임’의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모임은 불법인 땔감 수집에만 기대고 있는 에티오피아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1988년 여성 나무꾼 200명이 모여 만든 단체다. 현재 여성들에게 먹고 살 기술을 가르치고, 안정된 소득을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이 단체는 현재 아디스아바바 시내 4곳에 공장을 두고 스카프와 나무 공예품을 생산해 직영 가게를 통해 판매한다. 모임 회장인 에테네시 아옐레(38) 또한 땔감을 나르던 나무꾼 출신이다. 그는 “땔감을 나른다는 게 부끄러워 이웃의 눈을 피해 새벽에 나무를 하러 가곤 했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단체 설립의 결정적 계기는 여성 나무꾼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온 에티오피아 학자 페케르테 하일레의 보고서였다.


처음부터 모임에 참여했던 나지아 아드시(40)는 “하루 한두개의 목도리를 짜며, 7비르 가량을 번다”며 “힘들게 목도리를 짜는 법을 익혔다”고 말했다. 에티오피아 전통 문양의 목도리는 디자인이 뛰어나고 품질도 좋아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아드시는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존중한다는 것”이라며 “이전에는 나한테 단돈 1비르도 믿고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 나는 어엿한 가장”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아이를 들쳐업은 채 일을 했으며, 나중에는 집에 베틀을 가져가서까지 꾸준히 돈을 벌어 아이들을 대학에 진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이 단체의 운영이 궤도에 오르기까지 위기도 적지 않았다. 1990년대 외부의 지원이 끊긴 뒤 찾아온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이 대표적 사례다. 이들은 품질 개선 노력, 시민단체 등과의 연대를 통한 판로 개척으로 간신히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현재 함께 일하는 여성은 300명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함께 일하고 싶다’며 모임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은 여성들이 5천명을 넘는다. 이 모임이 에티오피아 빈곤 여성들의 대안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 평균 30㎞를 걷는 나무꾼 일은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다. 그래서 10년 이상 하는 사례는 드물다. 상당수 여성 나무꾼들은 성매매로 흘러들어간다. 도시 북쪽 판자촌에서 만난 15살 소녀 아마렛치는 “한달 내내 나뭇일을 해도 음식값은커녕 집세를 댈 수도 없었다. 몸을 파는 일이 너무 싫다. 중동으로 건너가 가정부로 일하고 싶다”며 눈물을 훔쳤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독자적 말과 글, 달력을 쓰는 유일한 나라로, 국민들의 자부심이 높다. 하지만 이 나라의 각종 여성 인권지수는 꼴찌권을 맴돈다. 메다니트 에트웰레 에티오피아 여성 변호사협회 대변인은 “외부의 적들과 싸우며 견고해진 자부심은 도리어 우리 내부의 적들을 돌아보지 못하게 해왔다”며 “나무꾼 출신 모임같은 단체들이 빈곤층 여성들의 가장 큰 희망”이라고 말했다.

‘여성 성기 절제’ 악습 줄고는 있지만… : 10명중 7명꼴 음핵 잘라…5~10% 치사율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매정한 면도날은 아이의 아랫도리를 향한다.

에티오피아 국립 박물관에는 ‘여성성기절제’(사진)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여성의 성기를 절제하는 행위(Female genital mutilation·FGM)는 남쪽 탄자니아부터 북쪽 이집트에서까지 아프리카 전역에서 자행된다. 그 가운데서도 에티오피아가 자리잡은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가장 심하다.

음핵의 일부 혹은 전부를 제거하는 FGM은 대부분 여아가 4~8살 때 실시된다. 소독약이나 마취제를 쓰지 않은 상태로 수술이 진행되며, 이를 업으로 삼는 마을 여성이 ‘집도’한다. 치사율은 5~10%로 추산된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더라도 여성은 성적 쾌감을 잃고, 성인이 된 뒤 출산 과정에서 아기를 잃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음핵 제거가 정숙함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를 거부하기란 극도로 어렵다.

1990년 90%로 집계된 에티오피아의 FGM 비율은 2005년 74%까지로 내려갔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사면위원회 등이 에티오피아 지역사회에서 캠페인을 꾸준히 벌여온 결과다. 이들은 지역 주민들이 FGM을 전통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계몽보다는 주민들 스스로 토론을 통해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이런 방법은 도시지역에서 특히 효과적이었다. 중국 정부가 전족을 금지한 것처럼, 여성성기절제 역시 강력히 단속해야 근절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실제 처벌은 쉽지 않았다. 대학생 키다니 물게타(20)는 “FGM을 하지 않은 여성은 결혼 지참금을 받지 못하는 등 여성 구실을 못한다고 보기에, 어머니들이 앞장서 딸들을 시골로 보내 수술을 받게 한다”고 말했다.


지마·아디스아바바/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Note

  1. 2차 세계대전뒤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지역 분쟁은 베트남 전쟁이나 한국 전쟁이 아니라 콩고 내전이다. 1998~2003년 내전기간 인종청소, 고문, 학살, 질병 등으로 4백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난민 2500만명이 발생했다. 콩고 내전은 1965년부터 32년 동안 독재정권을 유지해 온 모부투 정권과 이에 대항한 로랑 카빌라 반군 세력의 정권 쟁탈전에서 비롯했다. 카빌라는 1997년 5월 승리한 이후 나라 이름을 자이르에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바꾸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1998년 카빌라 반대 세력이 대통령 축출을 꾀하면서 내전이 본격화했다. 아프리카 8개 나라가 5년 동안 콩고 땅에서 전쟁을 치렀다. 짐바브웨·앙골라·나미비아·수단·잠비아가 정부군, 르완다·우간다·부룬디가 반군 쪽에 섰다. 때문에 콩고 내전은 ‘아프리카판 1차 세계대전’으로 불린다. 내전에는 △종족간 정권 다툼 △금·다이아몬드 등 자원을 둘러싼 외세의 이해관계와 외국 기업의 개입이 뒤엉켜 극렬 양상을 보였다. 2003년 유엔의 중재로 총성이 멎었다.
  2. 지속가능한 관광 영어의 ‘sustainable tourism’을 직역한 말이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방문하는 지역의 문화와 정치를 알고 △현지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며 △문화간 이해와 관용에 기여하고 △지역 토박이 기업들과의 거래로 지역 문화를 보호하고 △지역에 기반을 둔 소상인들과 거래해 지역 경제를 도우며 △친환경적 기업을 이용해 환경 훼손을 최소화하는 여행 태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위 개념으로는 자연에 중점을 두는‘생태관광’(eco tourism),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윤리적 관광’(ethical tourism)이 있다. 세계관광기구는 2005년 지속 가능한 관광으로 빈곤 퇴치를 지원한다는 취지에서 ‘지속 가능한 관광을 통한 빈곤퇴치 재단’(스텝재단)을 설립했다. 본부는 서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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