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102-2: 두 판 사이의 차이

DoMath
편집 요약 없음
 
(차이 없음)

2007년 10월 15일 (월) 19:32 기준 최신판

권정생은 동화작가로 알려졌다. 나는 권정생 선생님의 글 읽노라면... 가장 낮은 곳에서 온전히 바쳐버리고 나니 맑은 것만 남고 그마저 흙으로 사라지는 사람의 원형을 보는 것 같다. 그는 많이 아팠고 가난했고, 찌들었다. 사람이면 피하고 싶은 그 길을 따라 갔고 그걸 받아들여버린,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 자연과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

우리는 모두 낮은 것을 딪고 산다.


조연현 기자 방문 소감

기사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69)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자가 많은 동화작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오두막으로 그를 찾아오지만 그는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기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인터뷰 같은 것을 한 적도 없다. 어려서부터 앓아온 전신결핵의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홀로 살아가는 그는 “너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 불러도 아예 문조차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장배추 속에 숨은 흰 속살 같은 얼굴을 내보였다. 지난 29일 그의 마을 정자 나무 아래서 한 ‘드림교회’ 예배에서였다. ‘드림교회’란 이현주(62) 목사가 지난 4월부터 주일이면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를 찾아 예배를 드리는 ‘건물’ 없는 교회다. 이 목사는 이 마을에 찻길조차 없던 1970년대 이오덕 선생으로부터 숨은 ‘인간 국보’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다녔던 지기다. 그는 ‘드림교회’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런 이 목사의 청으로 엉겁결에 마을 정자 나무 아래 앉았다. 그를 만나고파 이 전국에서 이날 예배에 온 20여명과 함께였다.

침묵 기도 뒤 사람들은 기도를 나누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저를 왜 이곳에 불렀느냐?’고 물었다”며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응답을 주었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이곳에 온 게 하나님 뜻인가요?”

이 목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권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을 하든 관성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갖다 붙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적인 말’에 대한 일침이었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 많은 고통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요? 인간이 한 것이지요.”

권 선생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낙엽만이 침묵의 공간 속을 뒹굴었다. 마침내 여든여덟살 난 마을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할머니가 네살 때 부모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뒤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못 오셨을까’만 생각한다. 결혼해 자식 손자까지 다 있는데도 할머니는 아직까지 네살짜리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 뜻인가. 하느님이 일제 36년과 6·25의 고통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권 선생은 “아니다”라고 자답했다. 그 고통 역시 “인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얘기 중에도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산과 들과 마을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마을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 마을엔 당집이 있다. 거기엔 할머니신을 포함해 세 분이 모셔져 있다. 한 분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에서 온 장군인데, 죽을 줄 알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살려줬다. 또 한 분은 비구니 스님인데,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 와서 사람들을 살려줬다. 당집에선 한해 동안 싸움 안하고 가장 깨끗하게 산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정월 보름마다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또는 당집 앞을 지날 때마다 스스로 착하게 살려고 자신을 다잡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아간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착하게 살아가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왜 그럴까. 세상에 교회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또 “교회나 절이 없었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자답했다. 그는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라며 다시 낙엽을 바라보았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600만명이나 죽는 고통을 당하고도 왜 그렇게 남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가. 1940년대 유대인들이 처음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올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키부츠 등에 땅도 내주고 함께 살자고 했는데, 이젠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고 들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배경이 된 전쟁은 베트남전이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인들을 노예처럼 끌어다가 칠레 남부의 섬에 가둬 비행장 건설 노역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인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자기들만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섬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베트남 노인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악행만 얘기하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중국도 일본이 난징학살 때 30만명이나 살육한 것을 지금까지 그토록 분개하면서도 티베트인들을 그렇게 죽인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억압만 하고 있다. 미국은 자기는 핵무기를 만 개도 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들만 나쁘다고 한다.”

권 선생은 “모두가 자기는 잘하고 옳은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한다”고 했다. 그것이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 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사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짓’임을 분명히한 권 선생의 말에 자신의 행동도, 세상의 해악도 하느님에게만 돌리던 핑계의 마음은 쓸려가 버렸다. 그러나 권 선생은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며 “그렇기에 홀로 있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착한 일을 했어도 으스댈 수 없다”고 했다.




마을 뒤편 작은 개울가에 있는 권 선생의 오두막은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 솟구치게 할 만큼 쓸쓸했다. 이끼로 덮인 바위를 지나 들어선 앞마당 잡풀 사이에 권 선생이 불을 때 밥을 한 것으로 보이는 솥이 걸려 있었다. 오두막은 5평 남짓.(사진) 그러나 그도 평생 읽어온 책들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사용하는 공간은 몸을 웅크려야 겨우 누울 수 있는 0.3평이나 될까.

장애와 천대를 안은 채 살아온 가련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몽실 언니〉의 삶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제 때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등을 했고, 전신 결핵을 앓으면서 걸식을 하다 열여덟살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스물두살에 다시 객지로 나가 떠돌던 그는 5년 뒤 이 마을로 돌아왔고, 스물아홉살 때부터 16년 동안 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우리들의 하느님〉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승화한 작품들이었다.

고운사 경내에서 함께 걸으며 그에게 “시골 마을에서도 이제 모두 새집 지어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집도 1983년에 120만원이나 들여서 지은 집”이라며 “그런데 면에서 나온 공시지가를 보니, 89만원밖에 안 한다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그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쓰라고 한다”고 했다. 종지기 때와 다름없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본 할머니들이 너무도 안타까워 하는 소리일 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관찰해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은 끝내 녹아 없어져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는 〈강아지똥〉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조연현 기자

이오덕 선생님과의 교류에 대한 기사

1970년대 초반, 마흔일곱살의 경상북도 산골 학교 교사인 이오덕(사진 왼쪽)씨가 안동에서 혼자 사는 서른다섯살 무명의 아동문학가 권정생(오른쪽)씨를 찾아갔다. 중견 아동문학가였던 이씨는 권씨의 동화 〈강아지똥〉을 읽은 뒤 해맑은 작품세계에 반해 일면식도 없었지만 먼저 권씨의 집을 방문했다. 열두살 차이, 띠동갑인 두 아동문학가는 금세 마음이 통했다. 두 사람은 이후 수백통의 편지를 수십년 동안 주고받으며 평생지기로 우정을 쌓았다. “저의 자취 경력은 이래저래 아마 이십 년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저녁밥을 해 먹고 누우면 글에 대한 생각, 문우들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권 선생님의 작품집이 출판되도록 해야 할 것인데, 하고 며칠 밤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이오덕, 1973년 4월30일)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거짓말 잘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권정생, 1973년 2월8일)

'강아지똥' 읽은 이오덕 무명의 권정생 찾아가 1970년대부터 평생지기 수백통 편지글이 책으로

이씨는 세상의 번잡함을 거부하고 안동땅에 틀어박혀 홀로 어린이문학에만 몰두하는 권씨의 작품을 알려 빛을 보도록 했다. 권씨 역시 문학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이씨와 함께 나눴고, 창작을 마치면 가장 먼저 이씨에게 글을 보내 평을 들었다.

“요즘 저는 아동문학에서 아주 철저하고 과감한 태도로 평을 쓰고 논리를 세워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안일무사주의와 문단출세주의로 흐리멍텅하게 되어 있는 우리 아동문학을 일깨워 전진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이오덕, 1974년 11월23일)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건넛집 살구나무에 꽃이 피었습니다. 며칠 전 창동이네 할머니가 산에서 내려오시는 걸 보니 할미꽃을 따서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으셨더군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권정생, 1985년 4월11일)

이씨는 권씨와 주고받은 편지 하나하나에 직접 제목을 달아 보관해 왔다. 5년 전, 이씨는 출판사에 편지들을 보냈다. 권씨는 사실 책을 내길 원치 않았지만, 결국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지난 8월 이씨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권씨는 이씨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책의 서문으로 썼다.

“선생님 가신 곳은 어떤 곳인지, …〈일하는 아이들〉에 나오는 그런 개구쟁이들과 함께 별빛이 반짝이는 하늘 밑 시골집 마당에 둘러앉아 옥수수 까먹으며 얘기 나누시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이 담에 우리도 때가 되면 차례차례 선생님이 걸어가신 그 산길 모퉁이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뵙겠습니다.”

이씨는 임종 전에 일절 조문객을 받지 말고 부고도 장례 이후에나 알리라고 가족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묻힐 곳 근처에 세울 시비를 지정해 남겼다. 시비 하나에는 권정생씨의 〈밭 한 뙈기〉를 넣고, 다른 하나에 자신의 시 〈새와 산〉을 넣도록 했다. 충주에 있는 이씨의 무덤가에는 지금 고인의 바람대로 두 시비가 마주보고 서 있다.

구본준 기자


조은친구 블로그

'조은친구' 블로그 글

지난 일요일(29일) 안동에서 권정생 선생님을 뵙고 온 이후 제 가슴에 남은 짙은 여운이랄까, 따쓰함이랄까, 아픔이랄까 뭐라 뚜렷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떠나지 않고 맴돕니다.

저는 권 선생님을 뵙기 전에 몇 번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자로서도 꼭 뵙고 싶었지만, 개인적으로도 꼭 뵙고 싶었습니 다. 뵙지도 못한 채 그 분이세상을 떠나시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있었지요. 그러던 차에 이번에 드디어 권 선생이 수십 년 지기 인 이현주 목사님의 힘을 빌어서 권 선생을 만나 뵈러 간 것입니다.

제가 권 선생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약속 시간인 낮  12시 보다 10여분 가량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집을 물어 골목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권정생 선생님 집이 가까 워오는데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전 권 선생님 드시라고 홍시를 사갔는데, ‘이렇게 감이 많은데, 다른 걸  사올 걸’하고 생각했지요.

마을 끝까지 가자 권 선생님의 오두막이 나왔습니다. 권 선생님 집엔 감나무가 없다는 안도감보다도  너무도 무성한 풀과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살림살이의 모습과 이젠 빈민촌에서도 보기 어려운 오두막의 모습에 가슴에서 뭔가 울컥 하 고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마당가 바위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고, 풀이 무릎 놀이까지 자란 마당엔 선생님이 불을 때 밥을 했을 솥단지가 걸려 있었습니다. 문 앞엔 책과 신문 같은 것들이 지붕 높이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방문 위엔 그가 써 붙여 놓은 듯 ‘권정생’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 어 있었습니다. 댓돌 위엔권 선생님이 마르고 닳도록 오르고 내렸을 빨래판 같은 게 놓여 있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문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선생님은 없었습니다. 얼마 전엔 모 신문기자가 연락 없이 이곳을 찾았 는데,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전신 결핵을 앓아온 선생님은 몸 상태가 아주 좋을 때가 ‘쌀 두 가마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답니다. 그러니 평소에 얼마나 몸이 무겁고 힘들지헤아리기조차 힘듭니다. 그렇게 아프기에 얼굴 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도 문을 열어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방문을 열었습니다. 권  선생님이 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문을 열었지만,  권선생님이 이 목사님과 함께 나갔을 거라는 것은 상식이었지요. 다만 권 선생님 방을 꼭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방 안의 모습을 본 순간 말이 나오지 않더군요. 방은 약 2평 남짓한 방 두 개 가 나란히 있었는데, 부엌방이기도 한 문간방엔 문 밖과 마찬가지로 온갖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 한 사람이 간신 히 지날 수 있는 길만 나있었습니다. 그 안쪽이 권 선생님 거처였는데, 사방에 누렇게 채색된 책들이 쌓여 있었고, 겨우 몸을 웅크 려서나 누울 수 있을 법한 공간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수십 년을 됐을 법한 조그만 텔레비전 위엔 선생님이 드시는 듯한 약봉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평생 독신으로 살아오신 선생님의 삶이 전율로 다가와 저는 마당에서 한 시간 동안 멍청하게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그의 책 <몽실언니>와 <강아지똥> 들은 수백만명이 읽은 베스트셀러들이기에 최고로 호화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교회 종지기의 삶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한번 선정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수십만부, 많게는 백만부가 팔린다는 MBC의 느낌표 선정조차 단박에 거절한 선생님입니다. 외적인 조건에 상관 없이, 천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절음발이 몽실언니와 외로운 강아지똥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권선생님이었습니다. 

'느낌표' 선정 거부

권정생 선생은 2003년 당시 베스트셀러의 보증 수표처럼 여겨졌던 문화방송(MBC) '느낌표'에 그의 산문을 묶은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펴냄)의 선정을 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느낌표' 측의 권유를 받자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 도서관이나 책방에 가서 혼자 책을 고르는 순간인데, 그걸 왜 방송에서 막느냐"며 거부했다.


ParhaDiary      오늘 쓰다      오늘 그리다       오늘 우리말       오늘 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