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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ha (토론 | 기여)님의 2006년 12월 14일 (목) 09: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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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인권 콘서트와 KTX 여승무원 / 이명원 야!한국사회 한겨레

» 이명원 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아내와 함께 민가협 주최로 열린 인권 콘서트를 다녀왔다. 올해로 18회째라고 한다. 오프닝 무대는 가수 전인권씨가 맡았다. “‘인권’ 콘서트이니까 ‘전인권’씨의 무대도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런 썰렁한 농담도 했는데, 함께 있던 친구들이 자못 허탈하게 웃었다. 많은 가수들의 노래를 들었는데, 특히 크라잉 넛의 무대가 압권이었다. 10대와 20대의 젊은이들이 두 손을 하늘로 찌르며 열광했고, 중년을 넘긴 관객들은 그런 무대를 관조하며 앉아 있었다.

나는 어느 편이었는가.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박수는 엇박자로 크라잉 넛의 빠른 리듬을 자꾸만 빗나갔다. 삼말사초의 어정쩡한 몸의 감각은 그렇게 둔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전인권과 크라잉 넛과 정태춘의 발성법과 무대 매너, 그리고 음악적 차이를 뛰어넘어, 공연장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수들은 소리를 공명시키지만, 그 공명된 소리가 그것을 듣는 관객의 마음을 또한 공명시키고 몸의 리듬을 율동하게 한다. 그런 과정 전체가 소통과 공감의 과정이며, 심미적 성찰의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을 내 몸은 이해하기 전에 느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아름다운 콘서트가 한국 사회의 결여된 인권 상황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통함과 관련되어 있다는 역설 앞에서 마음이 서늘했다.

그날 300일이 넘게 거리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한국고속철도(KTX) 여승무원도 보았다. 그들은 단정한 제복을 입고 서 있었는데, 정작 그 제복을 입고 일해야 할 직장은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대개가 구제금융 세대인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사회화의 과정이 곧 배제의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음은 가감 없는 사실이다. 한때는 ‘철도의 꽃’ 운운하면서 장밋빛 미래를 역설했던 한국철도공사 쪽이, 여승무원들은 단순 접객서비스만을 담당한다며, 외주 위탁을 당연시하고 해고와 손배소를 가하는 적반하장에 아연하다. 특히 나는 경영합리화를 역설하면서 사태의 합리적인 해결 대신 오늘의 현실에서는 일반화된 시장과 경영논리의 폐쇄회로에 갇혀 있는 과거 민주화 운동 출신 경영주의 시각에서 아이러니를 느낀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밝힌 것처럼, 철도공사는 이들을 옛 홍익회인 한국유통에 고용을 아웃소싱함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경영논리로서도 합리적이지 않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비정규직 하청업체의 용역직원으로 전락한 이들 여승무원들 모두가 2004년 취업 당시에는 이러한 근로조건을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케이티엑스 여승무원들의 인권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700여명에 이르는 대학교수들은 이런 상황 자체가 사회적 약자인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량 양산하는 ‘취업사기’라며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여승무원의 업무가 단순 접객서비스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철도 안전업무 전반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이들에 대한 근로교육에서도 이것이 강조되었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사정이 그러니만큼 한국철도공사 쪽이 주장하는 외주 위탁의 논리는 그 근거가 희박하며, 여승무원들의 사회적 호소는 정당하다.

인권 콘서트에 간 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관객이었다. 그러나 이 결여된 인권 상황에서도 나는 관객일 수 있을까. 나는 노래는커녕 박수조차도 아둔한 삼말사초의 엇박자지만, 적어도 진실은 간명하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 여승무원들에게 케이티엑스를 허하라, 이것이 내 연말의 인권희망이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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