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206
30년이 되도록 이뤄지지 않는 꿈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어린 나이에 ‘노동상담’을 시작했다. 20대 후반의 ‘새파랗게 젊은 놈’이 노동법 몇 줄 읽었다고 공단 입구에 상담소를 차리고 앉아, 온갖 풍상을 다 겪고 찾아오는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건방을 떨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직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신기한 듯,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90년대 초, 사상에 대한 믿음이 거의 공황 상태였던 그 어려운 시기에 당신을 지탱한 힘은 무엇이었느냐?”
고백하건데, 나를 지켜준 사람들은 상담소에 찾아오는 노동자들이었다. ‘내가 오늘 이 서류 뭉치를 붙들고 하룻밤을 새면, 해고당하거나 몸 다친 노동자와 가족들이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그 혹독한 시기에 나를 구원했다.
아버님뻘 되는 노동자가 찾아와 “이제 불구자가 됐으니 자식들 볼 면목이 없소. 산에 올라가 목 맬 나뭇가지 찾다가 내려오는 길이오”라고 울음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을 때 ‘새파랗게 젊은 놈’은 차마 할 말이 없어서, 차라리 ‘내가 나이라도 많이 먹었으면 …’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노동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에게는 정신건강 치료가 반드시 의무적으로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을 해온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노동재해 환자 4명 중 3명이 우울증이나 사회적 부적응증을 앓고 있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그 주장이 거의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노동재해는 경미한 부상이더라도 법률적 다툼이 빈번하고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 등이 동반되면서 분노·우울·불안 등 부정적 감정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정신건강 문제뿐이랴. 최근에 벌어진 ‘석면’ 소동도 마찬가지다. 석면은 한번만 노출돼도 치명적이어서 ‘발암성이 의심되는 물질’이 아니라 ‘확실한 발암물질’이다. 폭발물보다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그러한 석면이 지하철에서 다량 검출된다는 사실이 노동·환경·보건운동 분야 활동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벌써 오래 전부터였다. 2001년 4월에도 서울 지하철 역사의 석면 사용과 공기 중 석면 농도가 높다는 사실이 밝혀져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노동부와 서울시는 뒤늦게 개선 조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그 조처들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노동단체 등이 사실을 폭로하면 관계당국이 뒤늦게 수습에 나서고, 언론이 잠잠해지면 유야무야되는 일이 되풀이됐다. 우리 사회에서 기업에 비용을 부담시키면서 올바른 목적을 달성하기란 그렇게 어렵다. 지하철이 건설된 뒤 수십년 동안 노동자와 시민들이 꾸준히 석면을 마시며 살아온, 마치 공포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 버젓이 우리 현실이 됐다.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220만명, 하루 5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노동재해로 희생된다. 그 어떤 전쟁에 의한 희생자보다 많은 수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2500여명, 하루에 7명이 넘는 노동자가 노동재해로 목숨을 잃는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실제 사망자 수는 1만여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국제노동기구의 추산이다. 선진국에서는 노동재해에 따른 사망을 기업이 태만과 부주의로 노동자를 죽인 ‘기업 살인’으로 규정하여 사업주를 엄격히 처벌하고 있다. 그래야 실제로 국민의 귀한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일터를 만드는 일에 사회 전체가 노력을 기울일 때가 됐다. 비록 그것이 기업에 대한 규제와 비용이 늘어나는 일이라 해도 …. 그것이 올바른 경쟁력이다.
"카를롤스 클라이버의 연주를 집에서 차분히 들어보면 잘못되었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지만, 연주회장에서 빠져있는 동안에는 작곡가가 원했던 음악이 바로 저것이 아니었을까 " --- 어느 평론가
함석헌 선생님 말씀
동네 안에 늙은 나무는 왜 서 있습니까? 사람들이 그늘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도 하지만 또 쉬기도 합니다. (...) 현실적으로 살림도 하지만 상상의 세계도 갈구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해묵은 밤나무나 느티나무 가지의 그늘입니다. (...) 젊은이들이 도시의 맘몬[1] 의 졸병으로 끌려가는 이 때에 마을의 느티나무는 찍혀 장작 가지로밖에 될 수 없습니다. 마을의 느티나무가 찍히는 날 앉아서 쉴 그늘을 잃은 마을의 늙은 혼은 두견새가 되어 뒷동산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늙은 나무가 찍히고 거기 깃들였던 혼은 산으로 도망갈 때, 마을에 남는 것은 주고받기와 시비와 깔고앉음과 깔리움 밖에 있을 것이 없습니다.(바보새, 5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