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415
루신의 수필 '가을밤' (허 세욱 역)
우리 집 뒤란, 담 밖으로 두 그루의 나무가 보인다. 한 그루는 대추나무, 또 한 그루도 대추나무다. 그 위의 밤하늘은 무서우리만큼 높다. 나는 평생을 두고 이토록 무서우리만큼 높은 하늘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사람이 아무리 고개를 치켜들어도 보이지 않을 만큼 훌쩍 인간 세상을 떠나버릴 것만 같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저토록 쪽빛 짙은 하늘에 몇십 개의 별, 그 차가운 눈빛이 반짝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무슨 조화라도 부리듯 내 뜰의 들꽃에 무서리를 뿌리고 있다. 나는 그 화초들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 사람들이 무어라 부르는지 도시 모른다. 내 기억에 아주 작고 가는 분홍꽃, 정말 가여우리만큼 가느다른 풀꽃이었다. 지금도 피어 있지만 훨씬 더 작고 가늘다. 쌀쌀한 밤기운에 떨면서 웅크리고 꿈을 꿀지 모른다. 꿈에 봄을 만나고 가을을 만나고, 그리고 헬쑥한 시인이 찾아와서 마지막 꽃잎에 눈물을 비비면서 비록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올지라도 곧이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나비가 너울거리고 벌이 붕붕거리며 봄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올 거라고 일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분홍꽃은 벌겋게 얼어서 움츠리면서도 살짝 웃음을 보일 것이다. 대추나무들은 그 잎을 깡그리 떨구고 말았다. 아까 아이들 한두 놈이 몰려와서 마지막 남은 대추를 땄으니, 지금은 한 개라도 남아 있을 턱이 없다. 잎사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분홍꽃은 가을이 가고 또 봄이 오기를 꿈꾼다. 낙엽의 꿈은 봄이 가고 또 가을이 오는 것이다. 그에게는 앙상한 가지뿐이다. 잎이 깡그리 진 채. 열매와 잎이 무성했던 그리고 활처럼 휘었던 한때를 벗어 던지고 지금은 늘어지게 허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가지 몇 개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대추를 두들기던 장대에 얻어맞은 상처를 어루만지듯. 하지만 가장 곧고 가장 긴 가지 몇 개는 쇠꼬챙이처럼, 무서우리만큼 높은 하늘을 묵묵히 찌르고 있다. 하늘은 끔벅끔벅 눈을 껌벅인다. 가지는 이윽고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달을 정통으로 찌른다. 달은 하얗게 질려 있다. 눈을 껌벅이던 하늘이 갈수록 쪽빛으로 짙어졌다. 불안했다. 마치 동그마니 달만 남겨놓고 인간 세상을 떠나고 대추나무를 피하려는 듯했다. 달조차 살짜꿍 동쪽으로 몸을 숨겼다. 발가벗은 나무 줄기는 묵묵히 쇠꼬챙이처럼 저 무서우리만큼 높은 하늘을 곧바로 찌르고 있었다. 저 하늘이 갖가지 교태로운 눈빛으로 깜박일지라도 끝까지 하늘을 죽음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까악 - . 외마디 소리. 밤에 설치는 흉조 한 마리가 날아갔다 나는 갑자기 한밤에 웃음소리를 들었다. 킥킥, 조심스런 웃음, 잠자는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한 웃음, 하지만 그 웃음은 사방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한밤이라 아무도 없었다. 그 웃음은 웬걸 내 입 속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곧 그 웃음소리에 쫓겨 방으로 돌아왔다. 등잔불 심지도 높게 돋우었다. 뒤창 유리에 작은 벌레들이 부딪느라 톡톡 빗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몇 마리가 들어왔다. 창호지에 뚫인 구멍을 비집고 들어온 게다. 그것들은 들어오자마자 유리 등갓에 톡톡 부딪고 있었다. 성급한 놈은 위를 뚫고 들어가더니 불꽃에 부딪는다. 내 생각에도 그 불길은 진짜처럼 보였다. 두세 놈은 종이 등갓에 붙어 숨을 헐떡이고 있다. 그 등갓은 어제 밤 갓 바른 것, 하얀 종이 위에 물결 무늬 접은 흔적이 역력하고 모서리에는 진홍빛 치자 한 가지가 기운차게 그려 있다. 진홍빛 치자가 꽃 필 때면 대추나무는 또 분홍꽃의 꿈을 꾸면서 무성하게 파란 활 모양으로 휠 것이다. ....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나는 또 한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얼른 생각을 접고 하얀 종이 등갓에 앉아 있는 파란 작은 벌레를 보았다. 그 큰 무리에 짧은 꼬리, 해바라기 씨나 작은 밀알 반쪽 크기의 파란 벌레, 그러면서도 온몸이 귀엽고 애처우리 만큼 파란 비취빛의 그 벌레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하품을 하고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뿜으며 등불을 마주하고서 묵묵히 비취빛 정교한 영웅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했다. 1924년 9 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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