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916
가문과 족보 따지는 걸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의 취미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윤학준의 <양반동네 소동기>(2000)라는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일본 법정대 교수인 저자가 자기 고향의 양반문화를 소개한 책이다. 그는 그 이전에 낸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로 인해 고향에서 왕따를 당하고 절교까지 당하는 수난을 감수해야 했다. 무슨 비리를 들춰낸 것도 아니고, 말로는 누구나 해오던 이야기를 글로 쓴 죄 때문이었다고 한다.
양반문화는 옛날 이야기인가? 아니다. 지금도 가문 좋은 한국 엘리트들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야기다. 가문·족보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겐 싱거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한국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기에 족하다. 이 책엔 한국 문단에서 가문·족보를 비교적 소중히 여기는 걸로 유명한 이문열·이인화 이야기가 등장한다.
윤학준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남인의 후예인 작가의 노론에 대한 한풀이 소설”로 이해한다. 이 소설에 대해 이문열은 윤학준에게 “그 작품이 나오면서부터 노론 쪽의 분노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윤학준의 말이다.
“나는 순간 도깨비한테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남인이니 노론이니 하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그럼 이인화씨는 저 미운 노론에게 일침을 가한 셈이 되는 건가?’라는 나의 말에, 그는 ‘아마 그렇겠죠’라며 껄껄 웃었다.”
실제로 이문열은 <여우사냥>의 머리말에서 “내 역사 인식의 기초에는 남인들의 사관(史觀)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렇다. 사색당쟁은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지금 그걸 강조하려는 건 아니다. ‘보호막’ 이야기를 하려는 거다. 가문이란 무엇인가? 보호막이다. 출세의 필수적인 발판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유효하다.
조선의 부정부패에 관한 학자들의 논쟁에선 이른바 ‘공명첩’(空名帖)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공명첩은 부정부패의 핵심이 아니다. 공명첩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직 임명장으로 어떤 신분이건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면 다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명첩을 산 평민의 자식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기에 실속이 없었다. 그저 벼슬 못하고 양반 못된 것에 한 맺힌 사람들의 일시적인 한풀이 수준이었다.
조선의 진짜 부정부패는 가문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부정부패는 가문이라는 문화적 결속의 장막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밝혀질 수도 없었거니와 심지어는 바람직한 것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정삼품 이상 당상관이 내외 8촌까지 먹여살리는 건 미덕인 동시에 의무였다. 조금 더 높이 올라가면 20촌이 넘는 먼 친척까지 돌봐야 했다.
봉급으로? 어림도 없는 일이다. 신복룡은 고부 봉기를 촉발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물욕에 눈이 뒤집힌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영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를 그곳에 심어준 문족(門族)들에게 상납하기 위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어디 조병갑만 그랬겠는가?
지금 조선을 폄하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가문·족보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게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회를 정확히 이해해보자는 뜻이다. 역사학자들이 사소하게 여겨 언급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의 이면을 파고들면 ‘연고’가 ‘명분’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역사는 명분 위주로 기록되는 게 아니던가.
그런 이면을 밝히는 데 비교적 신경을 쓰는 대표적인 역사학자가 바로 박노자다. 박노자의 최근작인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의 일독을 권한다. 예컨대, 거의 모든 책에 훌륭한 애국지사로만 소개된 남궁억에 대해 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신복룡의 <한국사 새로보기>도 읽을 만하다. 이 책은 그 자체의 가치를 떠나 한국 사회에서 가문을 건드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웅변해준다. 신복룡은 그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관계자의 후손들이 연구실을 점거하는가 하면 직장 책임자를 찾아가 파면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의 고충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문중의 문제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요, 금기의 지대였다. 그럴 때마다 절망하기도 했고,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망연자실한 적도 있지만 그 자리에서 돌아서면 내 생전에 내가 이길 것만 같은 자신감이 나를 다시 부추겨주었다.”
당사자들의 허락을 받지 않아 소개할 수 없어서 그렇지,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필화 사건만 해도 여럿이다. 문중 파워, 정말 무섭다. 나라 망하는 건 팔짱 끼고 구경하다가도 문중을 건드리면 목숨 걸고 총궐기하곤 했다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게 실감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문중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비판을 하긴 매우 쉽다. 아무리 급진적이고 과격한 주장을 펴더라도 괜찮다. 옛날 이야기이니 국가보안법에 걸릴 위험도 없다. 그러나 문중을 건드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30여 년간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만4607명을 추적 연구한 송준호는 “조선시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제나 양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했다. 최근 우리 학계에 “민중이 주역이었지 양반이 뭐가 중요한가” 하는 주장들이 제기됐고, 나아가 양반 연구자들에게 비난과 공격이 쏟아지고 있지만, 양반을 도외시한 조선의 역사는 존립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 되었어야 한다는 ‘당위’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추구하는 ‘실증’ 사이의 충돌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송준호는 연구 파트너인 미국학자 에드워드 와그너와 더불어 “민중의 시대에 양반을 연구하는 보수 반동주의자”라는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비난이다. 혹 진보·보수의 구분보다 더 강하고 원초적인 그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엔 진보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양반 혈통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며 족보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진보파는 절대 가문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가문은 이데올로기의 상위 개념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윤학준의 책에도 나오지만, 이념에 철두철미한 공산주의자마저도 족보 앞에선 흐물흐물해진다.
어려서부터 자기 집안이 ‘상놈’ 출신인 걸로 알고 자라 ‘상놈’을 적극 옹호했던 김구의 경우도 흥미롭다. 김구는 나중에 자신이 양반, 그것도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라는 걸 알고선 문중에 충실한 태도를 보였다. 해방 뒤 귀국해서 경순왕릉을 참배했고, 이후 자신의 가계와 관련된 모든 기록에서 자신이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가문과 족보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극소수 아닌가? 아니다. 2006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회적 자본 실태 종합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회적 관계망 가입 비율은 동창회가 50.4%로 가장 높고, 종교단체 24.7%, 종친회 22.0%, 향우회 16.8%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공익성이 짙은 단체들의 가입률은 2%대에 머물렀다. 종친회 가입률 22%는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지난 2005년 종친회를 빙자해 5년 동안 7900명에게 싸구려 족자를 비싼 값에 팔아 7억여 원을 뜯어낸 사기 사건은 어떤가. 이 사건에서 놀라운 사실은 그동안 피해 신고가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종친회의 가공할 파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문을 너무 당연시 하는 경향이 있다. 가문이 없거나 약한 사람이 나름의 보호막을 찾으려는 걸 냉소적으로 보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보는 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불공평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튼튼한 가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연한 사람과 그게 없기 때문에 자기 보호막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을 다르게 취급해도 괜찮은 걸까?
개화기 시절 보통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보호막은 바로 외세(外勢)였다. 물론 외세야 상층 엘리트 계급도 보호막으로 삼곤 했지만, 보통 사람들의 외세 이용은 신앙의 형태로 나타났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믿는 것, 그것이 가장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조선 정부가 일본에 휘둘리건 러시아에 휘둘리건 개신교·천주교 교회는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이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드라마틱하게 나타났다. 보호가 너무 잘된 나머지 나중엔 교회를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는 일까지 나타났다.
개화기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사치스럽게 살았다. 당시에도 그런 비판이 제기됐던 모양인데, 실은 사치스럽게 사는 게 선교의 한 방편이었다. 정치적으로건 물질적으로건 선교사들에게 힘이 있다고 보여야 신도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한 선교사는 사치스러운 삶에 대해 “이 모든 것이 우리 종교의 결실이요, 또 그 발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독교의 실제적 가치는 그들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교사들이 때로는 안락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사치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회뿐만 아니라 서양인과 교제를 갖는 것도 보호막이 되었다. 외국인을 보호막으로 삼는 건 이미 1880년대부터 유행했던 현상이다. 1885년에서 1886년까지 2년간 조선에 머물렀던 청나라 상인 허오는 자신이 편찬한 <조선잡술>에서 일반 백성은 관원들을 매우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일단 외국인에게 고용이 되고 나면 매우 우쭐대며 교만해져,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고 주장했다.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어떤 형태로건 외세를 등에 업는 게 보호막이 되는 건 분명했고, 놀랍게도 이런 역사는 1980년대까지 지속됐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가를 위한 보호막이 돼줄 수 있는 건 누구였는가? 물론 그 보호막은 부실했고 때론 기회주의적이긴 했지만, 주로 외세였다. 한국의 선진적인 지식인들이 보편주의에 매료된 주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어떤가? 양상이 좀 바뀌었을 뿐, 보호막 형성을 위한 외부 지향성은 여전하다. ‘유학 열풍’과 ‘영어 열풍’도 그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제도적으로 공정한 보호막 메커니즘을 만드는 데 매우 서투른 나라다. 아예 신경을 안 쓴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거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개화기·일제 시절 한국 지식인을 사로잡았던 사회진화론을 국제관계의 관점에서만 말하지만,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진화론의 내부 작동 방식이다.
사회진화론의 3대 지주라 할 약육강식·우승열패·적자생존은 한국 내부에서 지금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 원리를 예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여기서 그걸 놓고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다. 그걸 예찬하는 사람조차 인정할 수준의 과도함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자. 한국 사회는 그 과도함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없다!
왜 없는가? 사회적 보호막 장치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엘리트 계급이 가문 보호막에 안주해 있어서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문 보호막이 없는 사람들은 종교와 더불어 학벌 보호막을 갖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
한국인 다수에겐 대세에 편승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이 있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거의 본능적으로 보호막을 찾기 위한 몸부림인 셈이다. 각종 ‘신드롬’이 양산되는 이유와 무관치 않다. 이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편승이 잘 이루어지면 우리가 가진 역량 이상의 성취를 이룰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불안정과 피곤함은 피할 길이 없다.
좋은 가문·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기득권 고수를 위해 일로매진할 경우 보호막 쟁취를 위한 대중의 투쟁도 치열해질 것이다. 지금 가장 현저한 투쟁은 ‘기업 보호막’ 쟁취 투쟁이다. 정규직·비정규직 갈등의 본질도 바로 그것이다. 비슷한 조건 아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누구는 과도한 보호를 해주고 누구는 보호를 해주지 않는 방식으론 사회적 안정과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이를 평등주의 논리로 비판하려면 비판자 자신의 보호막부터 검증해볼 일이다.
사회적 불안정과 피곤함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감수해야겠지만, 언론·지식인의 담론 생산 방향만이라도 ‘보호막 사유화’ 체제를 ‘보호막 공영화’ 체제로 나아가는 쪽을 향한다면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보호막 공영화는 복지 예산을 늘리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기회의 단계부터 공정한 게임의 룰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 공명첩’(空名帖) = 현대에는 기부금 입합이나, 헌납 취직으로 변형됨.
- 신드롬, 과도한 유행 = 따라하기 모방의 즐거움. 비교적 안정적이게 확 타올라볼 수 있는. 때가 가면 잊어버리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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