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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ha (토론 | 기여)님의 2007년 12월 10일 (월) 17: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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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유럽 정상 하노버오페라극장 구자범 수석 지휘자


2년 전 이맘때, 구자범(37)씨가 독일 하노버 국립오페라극장의 수석 상임지휘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우리는 두 번 놀랐다. 처음엔 그의 낯선 이름에, 두 번째는 그의 특이한 이력에. 한국인으로는 정명훈 이후 두 번째로 유럽의 정상급 오페라극장을 지휘하게 된 이가 국내 클래식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뉴페이스였던 것이다.

그의 이름이 생소했던 것은 특이한 이력과 관련이 있다. 연세대 철학과를 나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그는 2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독일 만하임 음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만하임 음대 지휘과 사상 처음으로 전과목 최고성적을 받고 수석 졸업했으며, 하겐 시립오페라극장 상임지휘자, 다름슈타트 국립오페라극장 상임지휘자를 거쳤다. 하노버 수석지휘자로 정식 취임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그가 한국에 왔다. 지난 2일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열린 ‘2007 윤이상 페스티벌 폐막공연’의 지휘를 맡은 것이다.

연주회는 성공적이었다. 그의 지령은 명확했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희고 섬세한 손끝을 따라 화려하게 출렁였다. 클래식 애호가들도 어려워하는 윤이상의 현대음악이 그를 만나자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가지고 놀았어요. 지금도 술 마시면서 피아노 반주하는 걸 제일 좋아해요. 그래서 오페라가 제일 자연스러운 거죠. 그런데 하도 반주만 해서 노래는 별로 못해요.”


학부에서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하지 않고도 세계 최고의 음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은 분명 천부적인 재능 덕분이다. 그러나 절대음감을 지녔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그는 몹시 조심스러워했다. 방위 근무 시절,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을 정한 뒤 여러 지휘자들을 찾아다녔으나, 가르침을 준 이는 전주시향 상임지휘자였던 유봉헌 나사렛대 교수가 유일했다.

“만약 한국에서 음대에 진학했다면 나중에 철학으로 유학 갔을 것 같아요. 순수학문에 대한 갈망이 강했거든요. 저 같은 외고집이 처음부터 음악만 했다면 지금 같은 세계관을 가지지도 못했을 테고 윤이상 선생을 존경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가 윤이상을 존경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1997년 북한의 대기근 당시, 독일에서 활약하는 한국 음악가들을 모아 북녘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을 벌였을 때였다. 공연 프로그램에 윤이상 작품을 넣었더니 “동백림 사건에 얽히게 되면 책임질 거냐”, “빨갱이 곡을 연주하면 나는 빠지겠다”는 등 소동이 생겼다.

“처음엔 윤이상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난리’일까 싶었죠. 나중에 그분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나서는 깜짝 놀랐어요. 음악만이 아니라 그분의 삶을 존경하게 됐어요.”

여러가지 면에서 그는 윤이상과 닮았다. 세속적인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배금주의를 개탄하며, 현실참여를 고민한다. 그런 그에게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정치적 무관심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독일서 깊어진 ‘사회참여 고민’ “윤이상 선생의 삶과 음악 존경 한국 돌아가 열정 바치고 싶다”

“2002년 대선 때였어요. 사회 각계에 ‘노사모’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클래식계는 한명도 없는 거에요. 어떻게 확률적으로 ‘0’이 나올 수 있을지 의아했어요. 차라리 ‘창사랑’이라도 한 명 있기를 바랐죠.”

대학 다닐 때 그는 이른바 운동권이 아니었다. ‘학생회 독재’가 싫었고 개인 우상화가 싫었다. 그는 “독일에 온 이후, 참여하지 않고 나를 합리화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졌다”며 “서른이 넘으면서 (이념적으로) 더 뜨거워졌다”고 말했다. 그의 첫사랑은 열혈 운동권이었다. 그는 지난해 6월 그 첫사랑과 결혼했다.

인터뷰 도중 그는 놀라운 말을 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 싶다”는 것이다. 음악하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출세 코스를 밟고 있는 그가 왜 그럴까?

“독일 사회는 훌륭하게 잘 짜여져 있어요. 극장과 오케스트라의 수준도 높고 돈도 많이 주죠. 그런데 그만큼 타성에 젖기 쉬워요. 완벽을 추구하기보다는 펑크가 나지 않기를 바라죠.”

수석 상임지휘자인 그는 극장의 최고위층이 참석하는 디렉션 회의에 참여한다. 이 회의에서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보통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독일 사회의 속내를 들여다본 셈이다. 완벽에 가까우리만치 잘 짜여져 있는 시스템에서는 창조적인 사람보다 관리형 인물이 더 잘 맞을 수 있다.

그는 “내가 빠져도 독일 사회는 잘 돌아갈 것”이라며 “한국에서 조그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든, 글을 쓰든, 좀 더 의미있는 일에 정열을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제 동생은 항상 저에게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며 “이 인터뷰가 나가도 그럴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도 독일에서는 이주노동자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남아인들을 대하는 걸 보면 같은 민족이라는 게 창피할 정도지요. 세상에서 제일 나쁘다고 생각하는 말이 ‘억울하다’예요. 억울한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맑은 영혼의 소유자 구자범. 인터뷰 내내 그는 “부끄럽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강박증으로 비쳐질 정도로 그의 양심은 날이 서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지휘하고 싶은 것은 강자와 약자 따로 없이 모두 어울려 사는 조화로운 세상이 아닐까.

글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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