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001-1

DoMath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노자 도덕경 43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혔다.


天下之至柔馳騁天下之至堅 無有 入於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馳 : 달리다. 치
騁 : 달리다. 빙
是 : 이, 바르다, 곧다 (시
希 : 바라다. (희)

끊어읽기와 번역은 장일순 선생님을 따랐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리고 형체가 따로 없는 것이 틈 없는 사이에 들어가니,
나는 이런 까닭에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말하지 않고 가르치는 것과 무위의 유익함은 세상에서 이를 따를만한 것이 없다.


이에 대해 말씀을 나누시는 동안 이런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내 말은 不言之敎나 무위라는게 그저 수양만 좀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야. 한 목숨 몽땅 던져서 결단하지 않으면 이를 수 없는 경지란 말일세.



진리를 위해 한 목숨 몽땅 던져서 결단한다.

이 말은 여태 숱하게 들어왔으나, 오늘처럼 가슴을 크게 때린 적 없다. 그렇다고 생활 한꼬투리 뒤집거나 낚아채 빼내버릴 만큼 큰 것은 아니었다. 이 부분을 읽고는 더 읽기를 멈추었고, 자전거타고 씨네마떼끄에 내려가는 동안 웅웅 빙빙 울렸다고 할까. 영화보는 동안 영화에 푹 빠져 몰아의 지경에 있다가 깜박깜박 빠져나온 것 빼고 돌아오는 동안에도, 밤에 앉아 수학 문제 증명 한두개에 집중하는 동안 말고는 자기 전에도 삐죽삐죽 뻗어나와 찔렀다고나 할까. 그리고 10월 2일 이른 아침인 지금도 사정이 딱히 다르지는 않다. 한 목숨 몽땅 던져서 결단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추론해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나 밖에 없는 것 까지도 끊어버림이 눈이 아른거린다.

왜 붙드는가, 도대체? 로 문제를 바꾸어버리면 이는 知的인 과정으로서는 논리상 합리적이라 할 수 있지만, 實踐... 실제로 '끊어버림'에서는 한발짝 떨어져 나온 것도 같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게 내 사고의 습관인 것을.

어제 날이 맑고 푸르길래 카메라를 들고 나가려다 전용 밧데리 하나를 어디엔가 빠뜨리고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알게 되는' 동안 집안에 있을만한 곳을 샅샅히 뒤졌다. 뒤진 곳을 또 뒤지기도 했다. 아까운 마음도 없다할 수 없으나, 불편할 것이 그려지기도 했고, 다시 사자니 내 형편이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기도 하다는 생각, 그리고 도대체 잃어버릴 수 없는 걸, 집에 두었거나 가지고 나갔더라도 잃어버릴만한 상황이 없었음을 생각하여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억울함이란 나를 용서하기 위해 그 작고 각진 까만 물건을 찾아내어 '거봐 잃어버리지 않았지'라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방 저 방 이 가방 저 가방을 뒤져보고는 마침내 '아 또 잃어버렸군, 어디 다니지 않아도 잃어버리니 어쩌면 그게 나랑 인연이 다되서 사라진 건지도 몰라'라고 콧방귀를 뀌었거나, 잃어버림에 매달리는 나의 모습을 바라다 보았을 것이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른채 밤의 어둠으로 돌고 있었고 바다에선 파도를 일렁일렁 넘어 배들이 달리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눈을 떴다. 같은 동작으로 하는 일-노동-을 제법하였고, 늦게 잤으니 세상과의 기운이나 내 습관에서도 벗어났으니 몸이 착취를 당했을 텐데도 잘 잤는가, 맑게 눈을 떠서 고요한 마음으로 일어난 것이다. 며칠 전의 과음이 나를 깨어나게 하는지도 모르지. 아침 태양이 바다에 쏟아지는 것을 보고 의자에 앉으니 밤새 먼지들이 뽀얗게 앉았구나. 저것들을 그대로 두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덩어리가 되고 물기를 만나면 거기서 생명이 피어나겠지. 내게는 비록 혐오스러울지라도 저 하나로 어여쁜 생명이?

'이 붙듦'은 迷妄으로 비롯되었거나 迷妄의 움직임이며 실체가 아니겠는가.

迷妄은 어디서 비롯되고, 지금 내가 迷妄에 빠져있다면 지금 내가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迷妄은 하늘에서 내가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있었더란 말인가?

태어날 때는 씨앗만 품고 태어났거나, 밭만 품었다가 세상 살아오는 동안 씨앗을 받고 주면서 미망은 싹을 텄으리. 트자마자 쑥쑥 자라 - 그것이 미망의 생명력일 터- 튼튼한 뿌리를 뻣었겠지. 세상에 씨앗이란... 便과 不便. 恐怯과 自慢, 敬愛와 憎惡, 成功과 失敗... 그 마음이 만들어낸 ... 그 마음이...

이 미망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하는 계기가 있다면 그가 바로 스승인 것이지. 길건 짧건 은둔을 한 사람들이었던, 사람들 속에 살아도 마음의 은둔을 한 사람들 중 몇은 그 미망으로부터 벗어나 내가 미망에 빠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울. 하지만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로부터 벗어났더란 말이냐.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 붙들고 있음을 알게 되고 놓아버림으로서 해탈하고 끝내 자유로와져... 그러나 과연 어떻게?

세상에 무엇도 없고 나홀로 있어 어찌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거울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개탄한다.


9월과 10월 쓰다 | Parha로 돌아가기 ParhaDiary로 가기 오늘 쓰다로 가기